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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mun Tal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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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지음, <낭송 연암집>, 길진숙 풀어 읽음, 북드라망
열녀를 보는 박지원과 나의 다른 시선
이혜린
“심지어 농가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와 같은 경우는 친정 부모가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리 못한 채 개가하라고 핍박하지도 않고, 자손이 정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니건만, 과부로 개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절개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하여, 왕왕 한낮의 촛불처럼 무의미한 목숨을 스스로 끝내버리고 남편의 무덤에서 따라 죽기를 빈다. 그리하여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을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는가?” (박지원 지음 <낭송 연암집> 길진숙 풀어 읽음, 127페이지, 북드라망)
이 문단을 처음 선택했을 때, 나는 박지원이 그 시대 사람들의 고정관념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따라 죽는 것이 명예롭고 좋은 것이다- 을 깨고 현대적인 생각을 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와 박지원은 역시 뭔가 달랐어, 열녀가 되려고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다고 생각하잖아.’ 하며 기분 좋게 읽었고 골랐다. 그런데 왜 박지원은 이렇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엔 온통 아들뿐인 박지원이 딸을 원했고, 그래서 젊은 여자들이 가여웠던 것 같다.
나는 평소에 역사를 배울 때에 열녀문화에 대해 맘에 들지 않고 여성들이 가엾다고 생각했기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다른 생각이 하나 드는 게 있는데, 바로 ‘박지원은 분명 동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긴 했으나, 죽는 당사자들인 여성들의 입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라는 생각이다. 박지원의 한계가 무엇이냐 하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딸을 키워 보지 않아서일 것 같다. 그러니 딸을 키워 보았으면 얼마나 딸들을 사회에서 압박 하는지 알았을 테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 역시 다른 그 시대 아버지 같았을 수도 있다.
계속 몇 번씩 읽어 보니, 박지원의 글은 마치 여성들이 죽기를 영광스러워하고 즐겁게 죽는다는 내용으로 다가왔다. 나는 과연 그 누가 즐겁게 죽을 수가 있을까 너무너무 궁금하고 의문스러웠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 여성분들의 집안이나 가족분들께서 무언의 압박을 했을 것 같았다. 왜냐면 그때는 정말로 열녀라는 게 영광스러운 칭호였고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내 생각일 뿐이어서 나름 역사를 잘 아시고 열심히 하시는 우리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아빠, 조선 시대 여자들이 정말 즐겁게 죽었을까?” 그랬더니 아빠는 누가 과연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아마도 어느어느 집안에 열녀가 나왔다, 하면 나라에서 기특히 여겨 열녀문을 하사해주고, 그 열녀문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해서일 것이다 라고 얘기하셨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물론 정말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했거나 스스로 영광스러운 길이라고 여겨 죽는 여성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은 죽는 것이 너무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대대로 가문을 빛내고 영화롭게 하려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 남편이 죽은 뒤로 매일매일이 부담스럽고 가족들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한 여성의 남편이 죽으면 집안에서 억지로 그 여성을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나에게도 한계란 있다.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압박이 가해졌는지, 어느 신분에선 괜찮았는지 등을 정확히 체감할 수 없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가장 큰 한꼐인 것 같다.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하듯이 쓰면서도 정말 이게 맞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 공감 능력과 역사 지식을 동원했으니 막 틀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보니 참 옛날이야기들도 무섭지 않은 게 하나 없는 것 같다. 난 어릴 때 전래 동화 속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장면, 예를 들면 “그 청년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자신도 따라 죽었다. 청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매일 기리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런 대목이 한 번씩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넘겼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일들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게 굉장히 섬뜩한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가 과연 아버지를 정말 사랑해서 죽은 것일까 아니면 영광이라고 생각해서 죽은 것일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나 집안의 압력에 죽은 것일까 그 이유도 궁금해진다.
박지원은 아마도 한 쪽의 시선에서 보느라고 다른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여성들이 자꾸만 그런 이유로 죽어나가니까 당연히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열녀가 되기 위해 여성들이 원해서 스스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시절의 여성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순전히 지금의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먼저는 얼굴도 한 번 못 본 남성에게 시집가서 마음에 안 들어도 참고 살다가 남편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순식간에 가족들은 나에게 남편이 죽었는데 뭐하냐 가서 매일 곡하고 머리를 푸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그럴 것이다. 그러다가는 점점 열녀를 들먹이며 먼저 그렇게 죽은 주변 여성들과 비교해 “옆집 순이는 남편이 죽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흘만에 죽었단다... 어찌 남편을 따랐으면... 근데 니는 죽어도 모자랄 텐데 울지도 않으니... 쯧쯧” 이런 식으로 압박 했으리라고 일단 나는 상상해본다. 그러면 점점 정말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게 무서울 것 같고 결국에는 슬픔과 공포 등에 벌벌 떨면서 어쩔 수 없는 부담감에 나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 같다. 박지원의 시선은 분명 열녀문화? 가 너무 지나치다라는 점에선 좋았다. 그렇지만 그 지나침을 오직 이미 죽거나 죽으려 하는 여성들 탓으로만 돌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관점이 다를 뿐 박지원의 생각 역시 나처럼 그 열녀문화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맞는 것 같다.
헤르만 헤세 지음, <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나를 이긴다는 것
백재윤
이번에 읽은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소설이었다. 데미안의 줄거리를 아주 짧게 요약해 보자면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소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사람을 만나며 선과 악을 배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나름 재밌게 읽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집안에서자란 싱클레어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는 면도 그랬고 또 카인과 아벨 이야기로 성경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면들이 재미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122p)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9p)
내가 뽑은 이 문단은 워낙 유명한 문단이라 이미 읽기 전에도 아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이 문단들을고른 것은 이 부분이 유명한 문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 문단이 유명해진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가 유명해서 고른 건 아니다. 그럼 내가 이 문단을 고른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 보겠다. 먼저 나는 저걸 보면서 든 생각이 저기서 새는 사람이고, 사람의 길을 막는 것은 알, 알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막는 “무언가” 라고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보자면 나는 그 “무언가”가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운동을 매우매우 못하는데 그러면 내 친구들은 와서 “괜찮아! 재윤아! 넌 할 수 있어!” 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그게 나를막는 느낌이었다. 물론 친구들은 나에게 좋은 의미로 말해주는 거지만 나는 그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열등감 넘치는 나는 의미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혼자 꼬아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알은 결국 친구가 아니라 열등감인 것 같다. 그러면 나에게 알은 열등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알이 나에게만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뭔지 모르겠지만 막히는 것 없이 다 잘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첫번째 문단의 해석을 ‘누구에게나 막히는 것은 있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되려면 그 막는 것을 이겨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열등감이라는 얘기를 하면 든 생각이 있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한 존재들은 대부분 내 또래였다. 그럼 왜 그런 걸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랑 비슷한 나이에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질투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나이에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열등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들도 당연히 있다. 그건 그냥 압도적인 천재들이다. 내가 뭔 짓을 해도 못 넘을 게 뻔해서인지 열등감이 안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게 바로 내 친구들이다. 당연하지만 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친구들한테 열등감이 넘치는 성격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내 소중한 친구한테 질투가 난다는 사실에 화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열등감이 그 친구와 나 사이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그 열등감으로 인해 친구와 사이가 벌어지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늘 들기 때문이다. 또 그것으로 친구와의 사이가 벌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 된다. 열등감을 느낀 것도 나고, 그걸로 친구를 멀리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일 수도 있다. 친구한테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 말고 나의 실수로 인해 친구와의 우정이 깨지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한 얘기로 보면 결국은 친구랑 계속 잘 지내고 싶기에 내가 친구한테 가지는 열등감을 숨기고 그런 감정을 안 느끼려 노력하는 것 같다.
다음 문단 역시 막힌 것에 대한 생각을 하며 골랐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첫번째 문단과 달리 두번째 문단은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 의해서 막힌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첫번째 문단에서의 결론은 결국은 나였지만 첫번째는 나에 의해서든 타인의 의해서든 둘 다 어울리는 느낌인 반면 두번째 문단은 나에게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막히는느낌을 받을 때는 나의 한계라고 느낄 때였다. 그림을 그릴 때도 뭔 짓을 해도 내 맘에 안 그려질 때가 있다. 구도를바꾸고 색을 바꾸고 선을 바꿔도 맘에 안 든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려준 선 하나에 내가 막힌 부분에 길이 생긴다. 여기서 나의 한계라는 걸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안된다고 모든 사람이 안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막힌 건 다른 사람이 가능한 게 네가 불가능해서 아냐?”라고 말이다. 그렇지만나는 다른 사람이 가능한 걸 보고 스스로에게 한계를 느끼는 나라는 존재에 막히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다 막히면서 연습하고, 다른 사람이 잘하는 걸 보면 ‘그래도 나는 어떤 부분을 잘하니까 다른 부분은 조금씩 성장시키면 되는거야!’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막히면 “나는 안돼 노력해도 의미 없어 재능은 타고나는 거야” 라며 도망간다. 나는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노력으로는 재능을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면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 의미가 없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력으로 천재가 되지는 못하지만 노력을 하면 천재를 닮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막히는 것에서 아주살짝만 방향을 틀면 그게 오히려 성장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천재들은 타고났지만 그렇다고 맨날 놀고먹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들도 노력이 있었을거다.
이 두 문단으로 열심히 생각해보며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 있다. 두 문단 모두 나는 막히는 것으로 썼다. 그런데 읽어보면 사실 나를 막는 것은 “나”이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고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나”가 되려면 가장 먼저 이해하고 이겨야 하는 것은 자기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의 공존
엄이우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무슨 사이일까?’ 처음에 책에서 데미안이 등장했을 때는 나중에 싱클레어에게 선생님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여러 대화에서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향한 태도가 선생님이 어린 아이 대하듯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부분을 읽을수록 정말 그저 사제지간 사이라고 하기에는 좀 핑크빛 기류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내용이 좀 미묘해지더니 급기야 뒤에서는 키스까지 하기 때문이다. 에바부인의 키스를 대신 전해준 것이라고, 그리고 서양에서는 흔한 문화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문화’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다른 뜻이 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키스하는 문화는 입에 하는 게 아니라 볼에 하는 거 아니던가?
그리고 또 뭔가 있어!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나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 달라고. 나에게 보낸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내 입술에는 계속해서 조금씩 피가 흐르고 있었고, 피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p.218)
<데미안> 안에서 분명히 좋은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꼭 이 문단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가 애매모호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감정은 우정과 사랑이다. ‘키스’라는 단어 하나로 둘의 사이에 사랑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키스도 뭔가 분위기를 좀 유도한 것(???) 같기는 하다. 내가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힘들 때 찾는다’거나, ‘서로 간의 이해가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내 스타일로 말하자면 꽁냥꽁냥이라고 할 수 있다. 없으면 너무 슬플 것 같은 존재, 그런 느낌이 사랑인 것 같다. (사실 난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고 사전적 정의만^^) 우정은 ‘서로 신뢰가 있어서 함께 있으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데미안>을 읽으며 사랑이라는 게 꼭 사랑하는 존재가 없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 또는 꽁냥꽁냥과 같은 행동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보여준 것은 그런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는 드라마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운명처럼 맞이하는 행복한 사랑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지적인 교류(?)를 한다기보다는 애정을 드러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고, 더욱이 그런 드라마와 같은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서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친구간의 존중에 약간의 장난이 있다면, 이들은 서로 아주 깊은 뭔가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궁금한 것이 있다. 사랑과 우정의 감정은 같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둘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말로만 정의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감정 하나만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친구와 같은 모습도 보여주니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친구 같은 연애’라는 말을 쓰곤 한다. 그 말을 들으면 우정과 사랑이 공존한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친구이기도 하면서, 더 발전하여 연인이 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정작 드라마 같은 데에서는 ‘너 나랑 친구야, 사랑하는 사이야? 둘 중에 하나만 말해봐.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뭐 이런 막장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우정과 사랑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둘 사이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감정이 함께 있으면 어느 한 감정에도 진심을 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결국 이건 각자 생각의 차이겠지만, 나는 이 둘 중에서 사랑과 우정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비록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둘이 섞이면 오히려 더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랑만 하다 보면 너무 그 한 가지 감정에만 치우쳐 다른 친구랑 놀면 ‘너 나만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걔랑 놀아?’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우정을 더한다고 하면, 친구 사이도 함께 유지되니 연인과의 다툼이 좀 덜하지 않을까? 더 많은 것들도 공유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사이가 그랬다. 둘은 사랑하면서 또 우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미묘한 감정들을 다 모아다가 믹서기에 갈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어디선가 ‘사랑은 함께 저금통을 채워나가는 것이고, 우정은 내가 채운 저금통을 비워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이 문구에서 또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함께 저금통을 채우고, 나눠주고, 또 아예 통째로 깨부수며 두 감정 사이에만 갇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것도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존중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서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면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인연이 끊어질듯 하다가도 골목길에서 만나는 등 절대로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골목길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데미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잊지 않았으니 가능한 것이었을 거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즐겁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해보자면 둘 사이에는 확실히 사랑도 있고 우정도 있고 스승과 제자의 느낌도, 그리고 다른 여러 감정들도 있다. <데미안>에서는 확실히 ‘나 지금 이런 감정을 느껴’라는 묘사는 없다. 다만 그냥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서로에게 하는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키스했으니까 사랑 맞고(드라마에서처럼 술김에 한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았으니),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느끼는 감정 묘사를 보아도 사랑이 맞다. 그리고 둘이 티키타카 하며 잘 맞는 것을 봐서 우정도 맞다. 그것도 서로 배울 것도 많은, 아주 잘 맞는 친구 사이인 것 같다. 또 싱클레어가 어려움을 겪거나 어두운 세계로 빠질 때마다 구원해준다는 면에서 구원자나 스승이라는 표현도 맞는 듯하다.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길을 알려주기도 하니 말이다. 또 카인이 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싱클레어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 유혹하려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무척 다양한 감정들이 있지만 나는 이중에서도 모두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의 관계 중에는 서로를 미워한다거나, 아니면 불신해서 싸우는 일은 없다. 연인, 친구, 스승과 제자, 모두 서로 존중하고 믿음이 있는 관계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관계를 여기저기 많이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던 것은 계속해서 이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존중하는 관계는 여기저기에 많지만,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는 힘들다. 사건 하나만 터져도 ‘다시는 저 사람하고 말 안 할거야’ 이런 상황이 되고야 만다. 처음에 아주 깊은 관계로 시작해서 이 사람과는 정말 오래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도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처음부터 너무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진득한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끊어지지 않고 관계가 잔잔하게 쭉 이어진다. 나는 이 점이 정말로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정작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냥 어느 정도 연락하고, 안부 정도만 물으면 될 것 같은데 잘 되지가 않는다. 이 이유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에 있는 것 같다. 서로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가까운 사이라 생각해도 면종후언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사이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인 구달 지음, <제인 구달-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인생>, 박순양 옮김, 사이언스북스
다른 존재와의 우정
김자비
물론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외라고 묻는다면? 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일까? 그들은 우리와 같은 종류이고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같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우리는 그들이 슬픔, 공포, 절망, 외로움, 지겨움 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다. 그런데 침팬지들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개, 고양이, 돼지와 기타 수많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우리가 왜 동물의 고통에 마음 써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인 구달,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일생>, 박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내가 이 문단을 고른 이유는, 어찌 보면 나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집에는 리버라는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개의 주인이면서 녀석에게 썩 잘 대해주지 않았다. 걸핏하면 발로 차기도 하고 코를 치는 등, 이런 행동이 일상적으로 나를 통해 자행되었다. 그나마 이정도는 약과였고, 더 심한 행동도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겠다. 그때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난 녀석이 으르렁거리는 것,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장난쯤으로 보였던 것 같다. 세세하게 관찰을 해 보지도 않았고, 녀석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생각도 안 해봤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제인 구달의 다른 존재도 우리와 같다고 소리치는 이 문구는, 리버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주먹이나 발로, 그리고 그밖에 흉기로 맞으면 누구나 아파한다. 그런데 나는 우정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이런 당연한 이치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심히 반성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우정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의 기분이나 느낌을 함께 공유하고 이해하는 것인데 그걸 깡그리 무시한 샘이니 말이다.
나는 아직 인간 친구도 한 명도 사귀지 못했다. 굳이 이걸 위험한 발언이라고 하는 분이 있어서 그런데, 내가 ‘인간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는 몇 명을 뺀 다수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그리고 (이젠 사라졌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지속된 나의 홈스쿨링 동기들 중 몇 명이 나를 일종에 나를 거만한 지식인쯤으로 중상모략한 것에 대한 일종의 비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수 차례 왕따도 당하고 심지어는 거의 배신자나 소위 나라를 배신한 사람이란 뜻의 ‘국가보안법 위반자’ 와 거의 같은 급으로 몰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내가 (어른들의 평가에 의하면) 그 나이 또래의 애들에 비해 ‘유식’ 했다. 애들한테도 그런 이미지가 들어왔을 것이 틀림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긴, 그 나이에(초 4,5학년에)투쟁, 정의 등등에 대하여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 에들 한태는 매우 낯설고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자기내들이 ‘열등’ 하다는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고 틀림없이 질투와 중오의 감정이 반지성주의와 결합한, 그래서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들을 배격하는 공동체를 키웠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 까지는 좋았다.
누구나 누구를 질투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투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세뇌해서 한 인간을 굴복시켜 존재 그 이하로 만든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자신이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양심도 없는 가해자에 노예가 되고 싶은가? 실제로 우리 반은 나에 대한, 그리고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한 소위 그들이 찍은 ‘불온’ 한 아이들에 대한 고발로 쉴 날이 없었다. 더욱 위험했고 신기한 일은 선생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마치 충신 믿듯 믿었으며 매일 그런 아이들을 불러서 우리반 전채 앞에서 그 아이의 ‘불온함’을 질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우리 교실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혼내는 소리에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고는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정신 세뇌 당한 사람처럼 자기 비하와 증오를 되뇌면서 자유인이 아닌 교실 선생님과 그 앞잡이들에 의해 개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들 그 아이들이 거짓말을 안 했다고 하고 그 아이의 혼날 때의 마음과 나같이 유식한 말들을 한 사람들을 맹목적인 증오심 때문에 이해도 안 하고 사람을 파멸시키고 노리개로 쓰기 위한 왕따와 중상모략 같은 짓을 얼굴 한번 안 붉히고 그대로 저지르는 거였다. 물론 나는 굴복하지 않고 답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자유를 찾으라는 주장을 끝없이 했지만 무쇠귀에 경읽기였다. 이런 이해심에 대한 결여는 작게는 리버를 패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순진한 아이들을 맹목적인 증오심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정신세뇌를 당하는 끔찍한 일을 초례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애들이 사회에 나가 맹목적인 증오심으로 일을 휘두르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나라는 정령 1984의 빅 브라더를 섬겨야 하는가. 그리고 요새 애들은 자기가 학폭을 하면서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니까 그 짓이 어떤 건지를 모른다. 이해심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그런데 이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해도 있으니, 이를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친구를 안 사귀었다는 의미는 앞서 말한 의미도 있고 이해심 없이 사는 사람과 사귀느니 차라리 안 사귀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나의 학교 친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인데 학교 나오는 걸 범죄처럼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어 서다. 나는 남의 개가 되 느니 이해심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나온 것이다.
친구들. 그들은 참 사이 좋게 보인다. 그렇다. 그리고 굉장히 동물 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소위 ‘잘해준다는 사람들’ 이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누가 내놓고 간 건지 모르겠지만) 고양이 한 마리가 요즘 집과 함께 길가에서 살고 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 고양이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만지러 오는 아이들 수십 명은 물론이고 먹이를 얼마나 많이 주는지 밥통은 차고 넘칠 정도였다. 마침내는 고양이가 뚱뚱해서 자기 몸도 못 가누고 잠만 자고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데도 손길과 먹이는 계속해서 왔다. 고양이를 만지지 말라는 표지가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간단히 무시했다. 그들에게 있는 이유란 고양이가 예뻐서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그것을 정말로 좋아할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않을까? 나도 녀석이 그것을 좋아하는지는 당연히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피하는 태도와 가여울 정도로 살 찐 몸 등등을 종합해서 나름의 식견으로 분석해 봤을 땐, 녀석이 그런 ‘잘해주는’ 것과 ‘친절함’으로 적지 않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받았음은 분명해 보였다. 이 사건에서 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가 그렇게 타격을 받았는데도 사람들은 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만지는 인원 상당수가 친구를 사귄 학생들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질문 거리였다. 친구를 사귀었다는 건 관찰력과 이해력이 뛰어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무리를 만든다는 것도 의미가 된다. 다른 사람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무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고양이를 무리에 끼워주었다는 것이 된다. 보통 인간들은 친구 만들려고 하면 서로 다 챙겨주고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고 서는 친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은 공감하면서 어째서 고양이와는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으론 귀 따갑게 길고양이 보호를 외치면서도 왜, 아니 어떤 이유로 고양이의 건강, 스트레스 등등을 다 무시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고양이의 자유와 권리를 억눌렀을까? 그들도 자기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행동한다는 걸 알고 있고 고양이를 그 그룹에 끼웠으니 책임을 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고양이의 자유와 행복을 ‘보호’ 와 ‘자선’ 이라는 이름하에 빼앗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또 다른 형태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생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생명과의 관계와 진짜로 우리가 인간처럼 맺는 관계가 무엇이 다를까? 최종적으로, 다른 존재와의 관계맺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친한 사람이나 친구 하면 이해심 넓은, 나의 욕구를 받아주면서 나와 통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거나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이해를 잘 한다고 한다. 서로의 비밀스러운 점까지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그 이해심으로서, 공감으로서, 관계를 맺어 나간다. 일상생활이나 역사에서도 당신은 다른 사람이 반응을 보이면 공감하고 호응해 주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이 왜 길고양이 같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게는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때로는 보호라는 명분으로, 때론 더럽다 거나 뭐 그런 류의 명분을 구실 삼아서 그들을 내팽겨 치는가? 인간들과는 공감을 잘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짐승들과 그 밖에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이렇듯 무심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이것은 소통의 문제인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인다고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 끼리끼리 모이고, 그럼으로써 내가 안전하다는, 보호받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거나 우리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할 때 무조건 적 아니면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그런 이상한 ‘끼리끼리 주의’ 아니면 나아가 자신이 살고 싶다는 지나친 열망이 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즉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존재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맹목적인 무관심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서로에게 순전히 공감하는 것은 나 하나쯤 주의 등등에서 나온 보호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열망이다. 학교의 예도 사실은 보호받고 있다는 열망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소통이 안 된 집단들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된 것이다. (대중, 즉 국민들은 이렇게 무지하다).다른 생명체들이나 존재들도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기적인 생존 본능으로 까맣게 있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체로. 나도 외국에 가면 무의식적으로 말이 안 통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혹시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진짜 공감과 이해는 서로의 생존 본능이 아니라 마음으로의 이해에 있는 것 같다. 나도 진짜 이해와 공감이 주는 진짜 의미는 알다 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인 구달처럼 다른 생명체나 존재들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침팬지들을 구했다는 것도. 그녀는 결국 언어의 장벽이 아니라 공감으로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한 것이다. 아마 그녀 같은 사람들은 결국은 온갖 것들과 친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제인 구달에게서의 친구란,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곳 그들이었고, 그들은 곳 그녀였다. 실재로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을 자식처럼 대해주었지 않은가. 나는 굉장히 놀란 사실이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세하게 침팬지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지 정말 이런 애정이 있을까 하고 궁금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는데, 정말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면 더 좋고 말이다. 제인 구달도 침팬지에게 신뢰를 주어 결국 서로의 불신이 눈 녹듯 사라졌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들은 너무나 실재로 행동으로 안 하는 것들이 많고 말로 서로에게 위장을 하다 보니 불신을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된 것 같다. 생존을 위해서 언어를 이용한 인간은 자신의 생존이란 함정에 빠졌다. 사람들은 서로 말이 안 통하면 친구도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서로를 잘 믿지 않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결국 살아남기만 집착해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의 의사소통을 넘어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언어로 감정을 전하듯 다른 존재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존재와의 관계는 이처럼 소통을 너머서는 공감의 소통으로 들어설 때 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리버를 이해하고 있다 손 치더라도 언어의 소통과 공감과 이해의 경계에서 무엇을 택할까?
키케로 지음,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우정은 그 자체로 이익이 될 수 있다.
허도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우정을 그 어떤 인간사보다 우선시 하라고 권하는 것뿐이네. 우정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없으며.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우정만큼 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114p)
키케로의 말처럼, 생각해보면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정말 대체 불가한, 소중한 것인 것 같다. 우정에는 여러 가지 성향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친구와 친구 사이에 맺는 끈끈한 관계를 우정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 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살면서 사람도 만나고 교류하고 상호작용을 해야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이때 새로 만난 사람들과는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다가가게 된다.
흔히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우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으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친구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뭐 첫눈에 반하고 그런 경우를 뺀다면 ㅎㅎ;;)
이처럼 우정은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첫 번째, 시작점인 것 같다.
우정이 이익 때문에 조작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내가 보기에 우정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을 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네. 우리가 친구에게서 즐기는 것은 그에게서 얻는 이익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 그 자체일세. 그리고 친구로부터 얻는 것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즐거운 법이네. (중략)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네. 예컨대 스키피오에게 평화시에나 전시에 내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내가 그에게 성의를 보일 수 있었겠나? 그러니까 먼저 이익이 있고 우정이 그 뒤를 따른 것이 아니라, 먼저 우정이 있고 이익이 그 뒤를 따른 것이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142p)
키케로는 우정이 이익 때문에 있는 게 아닌, 이익이 우정을 따라온다고 말한다. 친구를 사귈 때 그 사람의 물질적인 것을 보고 다가가지 말고, 그 사람 자체를 보고 다가가라는 말이다. 누군가의 제물이나 제산 등 외적인 것만 보고 좋지 않은 마음으로 접근하게 된다면 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는 물론 결국 끝이 좋지 못할 것이다.
키케로가 말하길 우정이 있어야 이익이 있고 이익은 자연스럽게 우정을 뒤따른다고 한다. 세상 어느 관계에서도 이익이 없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어떤 형태의 이익이든 간에, 이익은 무조건 따라오게 되어있으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내다 보면 그 안에서도 정말 많은 이익이 발생할 것이다. 그것이 꼭 물질적인 이익이 아니더라도, 감정으로, 또는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익은, 그 사람과 나 자신의 관계 자체이다. 계속적이고 신뢰적인 관계는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이익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즉 우정이 있다면 이익이 따라오기도 하고, 그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키케로의 말 중에서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그는 분명 우정이 있으면 이익이 따라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에서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네.” 라고 키케로는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친구들과 우정을 맺었지만, 그에 따른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 약간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와 좋은 관계를 쌓고 잘 지내고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겐 이익이 될 수 있는데 키케로는 왜 이익이 없다고 말한 것일까? 이 말은 이익을 쫓는 우정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친구들에게서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 친구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에게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익을 바라고 사귄 친구가 아닐까?
나도 친구를 사귈 때 이익을 보고 사귀었던 적이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의외로 없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뭔가 얻길 바라고 다가간다면 나중에 자신이 얻는 이익이 없다면 실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둘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그저 아무것도, 이도 저도 아닌 사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둘은 진정한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친구와 우정에 관한 나의 생각
김석주
이번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이 책은 2개의 책을 엮어놨기도 했고 『우정의 관하여』를 읽을 땐 정말 겪은 일이 나와 있기도 했고 우정을 정말 잘 풀이한 것 같았다.
스키피오가 또 말하기를,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하도록, 이를테면 방탕의 대행자나 불의의 하수인이 되도록 요구할 때 우정에는 심각한 파탄이 생기는데 그런 파탄 대부분의 경우 당연하다고 했네. 그런 요구를 거절하는 쪽은, 설사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어도, 거절당한 쪽으로부터 우정의 규칙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 그리고 친구에게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요구하는 자들은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자기들이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징표가 아니겠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암시한다는 걸세. 이들의 끊임없는 불평은 흔히 오래된 우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반목을 낳는다는 것이었네. (키케로지음,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나무도서출판 숲, 130P)
이 글을 보면서 초딩 시절이 떠올랐다. 나한텐 단짝 한명이 있었다. 그 애랑은 처음엔 잘 맞았다. 하지만 내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1~2년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계속 싸우다 화해를 반복했지만 남는 건 원한이었고 증오였다. 일단 난 그 애가 항상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 애는 위에 나온 것처럼 나한테 이상한 걸 같이 하자고 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화를 내거나 내가 하지 말라는 걸 자꾸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엔 욕도 하며 싸우기도 했다. 정작 전학가기 싫다고 한 나였지만 전학 후엔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지금에 와있다.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다. 난 그애가 볼 때 나한테 화가 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3학년에는 내가 그애가 하는 행동 중 옳지 않다고 여긴 행동이 눈에 띄면 ‘단짝 안 한다’라고 많이 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애는 진짜 나와 친한 단짝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밀을 교환 한다던가 할 때 내가 마음을 닫으면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잘할 걸’ 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애가 나빴다’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난 너무 빨리 다가온 그 애한테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은 울적하다. 나랑 맞지 않기도 했지만 지금은 ‘더 잘 지낼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 그러니 친구를 대할 땐 요구하지 않고 불의에 하수인이 되도록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것 같다. 우정이라는 건 이렇게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고 때론 기쁘게도 해준다.
더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그냥 천국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여름엔 같이 잠자리를 잡고 학교에선 즐겁게 놀고 배우며 같이 그림을 그렸다. 이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울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처럼 친구를 사귀어보고 싶다. 그런데 나는 내가 은찬이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물론 은찬이가 친해지고 싶은 의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선을 넘은 거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애가 그렇게 자란 건 걔도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거란걸. 이쯤 되어서 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공교육 탓이라는걸 어느 정도 말해두고 싶다. 하지만 이젠 줄여서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발도르프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난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이 생활에 만족한다.
그래서 이 ‘우정에 관하여’를 교과서로 삼고 친구들한테 좀 더 잘하고자 한다. 지금은 친구들과 별 문제가 없지만 여기서 더 깊은 관계로까지 나아가고 싶다. 선생님 표현대로 나도 ‘티키타카’가 되게 다시 한 번 이번엔 서로를 좀 더 이해하며 ‘우정’이란 걸 더 잘 이해할 때까지 가보자.
자,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친구들과 친해질까? 관계유지와 평화를 지키려면 내가 고른 씨앗글 155쪽에 나오는 문단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쓸데없는 걸 요구하지 말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똑같이 명망이 높아지고 뻐기지 않고 이해하며 사는 관계. 이런 것이 정말 좋은 친구를 만드는 방법 같다. 그리고 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나도 친구를 대할 때 조심스럽게 경고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서로 어울리는 친구들을 몇 명 더 만들어 보고 싶다. 같이 놀고 대화도 나눠보고. 진짜 그런 찐~한 관계가 생기면 어떨까? 정말 기분이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노년이 되어서도 즐거운 것일까? 그래도 우정이란 단어만 들어도 어렵다. 지금 내가 이렇듯 염두에 두는 건 안으로는 지금 있는 친구들과 관계를 깊게 유지하는 것과 밖으로는 친구만들기다. 더 많은 친구를 만나면 좋겠다.
그런데 친한 친구는 어디서 나오는가?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방법.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복잡해진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부모님들끼리의 친분으로 시작되거나 아니면 그냥 서로 말을 거는 것부터 시작이다. 이쯤 되면 내가 우정이 뭐기에 이렇게 고민을 하냔 말이다. 그냥 우정은 학교에서 놀고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때로는 사고도 치고 장난도 함께하는 것이었다. 커서도 똑 같다. 그렇게 시작하는 우정은 어떻게 끝날까? 우정이 끝난다는 건 이렇게 막판에 싸우기도 하고 헤어져 말도 안 섞고 만나지도 않으면 끝난 것인가?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어른이 되어 만나면 이어 갈 수 있다. 내 생각엔, 우정은 더 나눌 수는 없어도 그 친구와의 우정은 남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정이라는 게 ‘끝난다’라기보다 거기서 그만 받는 것 아닐까? 그래도 남는 소중한 우정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우정은 끊긴 거라도 다른 이한테서 우정은 계속 들어온다. 그러므로 우정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또 인물이 아닌 친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나랑 안 맞으면? 아니면 그저 한심한 행동을 하면? 그것을 내가 생각하더라도 그 사람만의 세계가 깊기 때문에 건드릴 수 없는 문제다. 난 이 모든 것들을 반영해서 총 결론을 내리겠다. 지금까지 <연암집>, <데미안>,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일생>,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를 보면서 계속 우정이 들어갔다. 그래서 우정이 뭐냐? 그저 간단하게 하면 “우정은 사람들과 동물 등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로 정리할 수 있다. 나눈다? 서로 나눈다는 뜻이다 그럼 나도 받는다. 사람, 동물, 식물 등한테서 받는다!
그러므로 난 우정이란 참 폭이 넓은 것이 그저 기쁜 것이다. 그럼 한편으로 폭이 작아지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적거나 다른 것들하고 ‘통’하지 못할 땐? 그땐 그 안에서 더 많이 받으면 된다. 이쯤에서 우정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 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겠다. 이 방법대로 나와 맞는 친구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노력을 하면서 방법을 잘 지키고 우정을 키우기를 노력하겠다!
어느새 청소년 팀이 중학생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글쓰기가 이렇게 달라진 건 더욱 놀랍습니다.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가운데 비슷한 지점도 있어서 '청소년 팀'이란 색깔도 느껴지고요. 거친 부분마저도 매력 포인트로 만드는 글들 잘 읽었습니다!
우정이란 뭘까요? 사람간의 우정뿐만이 아니라 침팬지라는 낯선 존재와 우정 나누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소통과 공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우정에 대해 이렇게나 다양한 책들을 읽고(무려 몇 달만에!) 이렇게 산틋한 글들을 써낸 친구들을 진심으로 응원축하칭찬하고 싶어요 ㅎㅎ
다만 여기 실린 글들이 아니라, 매주 문장을 뽑고 글을 쓰고 고치고 해온 과정이 있다는 것도 잘 알구요!
쑥쑥 빨아들여서 멋지게 커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