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들의 독자-되기, 저자-되기’는 책을 읽는 ‘독자’가 되는 동시에 독서를 통해 촉발된 생각을 자기 언어로 풀어 쓰는 ‘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읽고 필사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프로젝트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열심히 읽고 쓰고, 고쳤습니다!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월든》 네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나 아닌 것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각자의 방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했고, 어떤 이야기들을 풀었는지 함께 보시죠!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최영준 옮김, 황금가지
인간은 숲의 신인가
김자비
“당신과 나, 우리는 둘 다 신이다. 당신은 미친 신이고, 내가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다. 지금 우리 사이에 이와 같은 만남은 숲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들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능력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은 나에게 동족을 죽이는 일, 살인이라는 능력을 주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에게 내 민족의 능력, 그러니까 죽이지 않는 능력을 주겠다. 우리는 저마다 서로의 능력이 벅차다는 것을 발견할 것 같군.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홀로 지고 가야 한다.” (어슐러 K. 르 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최영준 옮김, 황금가지, 164쪽)
어슐러 K. 르 귄의 공상과학 소설인 이 책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성간 연결 기술이 정점에 이르고, 인간들은 수많은 행성들과 함께 성간 연맹을 결성했다. 그러던 도중, 인간들은 애스시라고 하는 나무로 뒤덮인 행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의 나무를 얻기 위해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기 시작한다. ‘자발적 노동자’라는 미명 아래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셀버라고 하는 원주민의 아내가 데이비드슨이라는 지휘관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에 셀버는 원주민들을 규합하여 인간 침략자들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에서 인간들은 철저히 패하고 5세대 동안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아간다.
처음에 이 문장을 읽고 조금 놀랐다. 셀버는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한 자에게 신이라고 말했다. 셀버의 자비로움에도 놀랐지만, 그런 건 둘째치고 셀버는 데이비드슨을 왜 신이라고 불렀을까? 우리가 즉흥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데이비드슨이 정말로 막돼먹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셀버는 ‘신’이라는 낱말을 섞어서 데이비드슨을 불렀을까?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적어도 인간보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를테면, 날개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화에서는 세상을 창조한 신화가 다 들어간다. 거기서 신들은 자신의 이상과 권력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자신의 질서 아래 두려고 무진 애를 쓴다. 이건 내 개인적 생각인데, 대표적 예로 구약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조금만 반항하고 밉보여도 불벼락을 내려 창조물들을 숯덩이로 만드는 등 온갖 독재정치를 펼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단적인 생각을 못 하도록 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라고 강제로 요구하는 등 사상 통제도 극악하게 실시한다. 〈민수기〉에는 계명을 어겨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죽은 사람이 수없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어쩌랴. 《성경》에 따르면, 이 세계는 하느님의 세계고 그래서 하느님의 이상형대로 창조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창세기〉에서 자신의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빛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다. 여기에다 상상을 무궁무진하게 썼다는 것까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신의 이상을 세워서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와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애스시인들의 신은 어떤 신일까? 그들의 신은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셀버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한 신이 옵니다. 그는 어떤 일, 아니 행해져야 할 새로운 일을 행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제시합니다. 새로운 방식의 노래하기나 새로운 방식의 죽음을요. 그는 꿈 시간과 세계 시간 사이의 다리를 가로질러 이 방식을 제시해요. 그가 그 일을 끝마치면 일은 이루어진 겁니다.” (어슐러 K. 르 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최영준 옮김, 황금가지, 172쪽)
이렇듯 셀버는 그들의 신이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일을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애스시와 인간의 신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인간과 애스시인들의 신은 무엇인가 새로 현실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을 창조해 나가는 능력이 뭘까? 어떤 것이 우리가 현실을 창조해 나가게 할 수 있게 해줄까? 그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은 모든 행동을 –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 머리로 그려가면서 한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라면 더욱더. 그래서 무엇이든 일을 계획적으로 하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슐러 K. 르 귄이 묘사했던 것처럼 문명의 극치에 올라선 것이다. 이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은 신이 되었고, 그 능력으로 세상이 놀랄 만한 발견들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이 풍족해질수록 점점 더 자연과 그 밖에 것들을 파괴하는 아주 어리석은 자기 파괴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원주민에게 가해진 강간, 고문, 폭행 등이 다른 식민지 행성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현실에서도 우리를 다 날려버릴 핵무기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신이면서도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줄 능력의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옛날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모든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고 자신이 스위치로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산신령을 찾아갔지만 산신령은 그를 스위치당이라고 비웃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가 스위치당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의 상상을 상징하는 애스시인들은 자신들만의 가상현실 세계를 만들고 거기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있으니 완전히 ‘애스시 VR’인 셈이다. 그들은 그래서 상상을 어떻게 잘 구현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셀버가 “당신은 신이다”라고 했던 말들은 우리가 신임을 자각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갈지 진지하게 알라는 것인 것 같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진짜 관계
엄이우
사람들은 여러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도 그랬다. 결국에 잘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꽤나 많은 관계를 맺을 것이고 그건 좋든 나쁘든 간에 어쨌거나 ‘관계’이다. 사람이랑도, 물건이랑도, 그리고 다른 것들과도 말이다. 이렇게 우리 생활에 연관점이 많아서 그런지 수업 중 토론에서도 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책을 읽을 때는 애스시인과 인간이 얼마나 사이가 ‘좋고 나쁜가’에만 집중하였는데 막상 그것도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자 새로웠다. 좋음과 나쁨도 어떻게 보면 관계인데 나는 좋은 것만이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이 소재를 가지고 ‘관계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하고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 너무 추상적으로 글이 써질 것 같았고, 내용도 뭘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 관심을 갖고 영향을 끼치고, 또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관계라 하면 어떻게든 연관 짓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아쌤께서도 토론 때 말씀해주셨는데 관계를 맺음은 좋고 나쁘고의 상관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변할 수 있게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너와 관계 맺을 거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지금 나는 나 자체로도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관계에 집착한다. 없어도 있는 척, 쿨한 척, 집착 안 하는 척, 온갖 짓을 다 하지만 결국에는 집착한다. 나에게는 인간관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 관계가 너무 중요하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조금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인싸’, ‘아싸’와 같은 말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친구들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내가 너무 교우관계에 마음을 쏟아붓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나에게는 친구와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주변에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다. 학원 친구들이 많긴 하지만 내가 예상한 ‘관계’와는 달랐다. 내가 예상한 관계가 무엇이냐 하면 나도 그건 잘 모르겠다. 완전 친한 친구? 아니면 뭐 남자친구라도? 내가 원하는 관계는 더 깊은, 말하자면 ‘soul mate’를 찾는 것이었다. 꼭 소울메이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에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래서 관계가 하나라도 엎어지면 불안함을 느낀다. 그만큼 내게 교우관계는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몰랐다. 대충 지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들과 직접 만나는 것은 괜찮았던 것 같다. 하지만 카톡이나 메시지로만 연락하는 친구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만나는 일도 적어졌다. 처음에는 카톡 친구가 늘어났다고 좋아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내가 느낀 바로는 카톡은 사람의 감정을 잘 전달하지 못했고, 띄엄띄엄 메시지가 보내지다 보니 맥락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오해+오해로 좋지 않게 끝난 친구가 몇 생겼다.
곧 애스시인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애스시인과 인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인간은 지구에서 목재가 사라지자 애스시인들이 사는 행성으로 와, 나무를 베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애스시인들에게 나무와 숲은 곧 세상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나무를 베는 인간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또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누군가는 오해하고, 또 누군가는 하대하며 함부로 대했다. 이런 일들이 속속히 일어나자 그들은 결국 서로를 죽이는 일을 택하게 된다. 나는 비록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뭔가 나도 잘못하면 저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결국 이 책은 마지막에 인간이 5세대 동안 애스시인의 행성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5세대 후에도 모든 인간들이 아니라 소수만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며 말이다. 소설은 좋게 마무리됐지만 결론이 나오기까지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내가 뽑은 인용문은 이 갈등의 끝부분 즈음으로 엄청 멋있는 부분이다.
“당신과 나, 우리는 둘 다 신이다. 당신은 미친 신이고, 내가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다. 지금 우리 사이에 이와 같은 만남은 숲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들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능력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은 나에게 동족을 죽이는 일, 살인이라는 능력을 주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에게 내 민족의 능력, 그러니까 죽이지 않는 능력을 주겠다. 우리는 저마다 서로의 능력이 벅차다는 것을 발견할 것 같군.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홀로 지고 가야 한다.” (어슐러 K. 르 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최영준 옮김, 황금가지, 164쪽)
이 말은 애스시인 중 한 명인 셀버라는 이가 인간 데이비드슨한테 하는 말이다. 살인하는 법을 알려 주었지만 반대로 죽이지 않는 법을 알려 주겠다니 이 얼마나 선한 마음인가! 이 문단을 고른 이유는 내가 데이비드슨과 비슷하다고 느낀 점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슨은 이 행성에서 지휘관으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들보다 나약한 애스시인들에게 온갖 일을 시키며 노예처럼 부린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이 그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비겁하게 살아남으려 한다. 자신이 우위를 점할 때는 온갖 나쁜 짓을 하다가 위험해지니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셀버는 데이비드슨을 죽이지 못한다. 나는 이 부분을 셀버의 선행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내가 왜 데이비드슨과 나를 비슷하게 느꼈냐면,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호의 베풀지 않고 상대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기를 기다린다. 말하자면 지금 내 상황에선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보다는 좋은 친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좋은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좋은 친구’라는 어떤 존재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인지 친구들과 가까워지는 데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나는 친구들과 가까운 관계, 즉 내가 생각하는 ‘너무 너무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게 갑자기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돌변하며 사교적이게 행동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생각해봐라. 매일 조용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던 애가 갑자기 외향적인 성격인 양 막 웃고 떠들며 서로 가까이 지내려고 한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 전에 어쩌다가 학원에서 반을 여러 번 옮기게 되었다. 보통은 1년 동안 같은 반으로 유지되는데 나는 한 학기 동안만 세 번은 이동한 것 같다. 이때 나는 재미 삼아 반을 바꿀 때마다 나름 실험이랍시고 성격을 바꾸어 보았다. 성격을 바꾼다기보다는 내가 처음에는 말 없고 공부하는 컨셉이었다면 그 다음에는 애들이랑 떠드는 데에 중점을 둔 애의 역할도 해 봤다. 역할이나 성격을 바꾸었다고 하니 살짝 이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태도를 바꾸면서 어떻게 하면 더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반에서 나는 그냥 컨셉을 그만뒀다. 생각해보니 밝은 성격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다 버리고 ‘나는 엄이우다’하면서 지내고 있다.
나는 인용문에서 애스시인과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나는 셀버가 데이비드슨에게 하는 행동들을 선행이라고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데이비드슨과 같이 선행을 베풀지 않은 채로 누군가가 행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친구 관계에 대입시켜 보았다. 그래서 나름 착한 일도 해봤는데 결국 내가 선행이랍시고 한 일도 나중에는 꾸민 내 모습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진심으로 한 일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상대가 그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그런 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관계가 많이 발전되었는데 그 사람이 내 성격이 꾸며진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이 생각을 해보니 원래 내가 낫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이런 부분을 읽으며 결국에 애스시인과 인간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도 서로에 대한 이해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중에 5세대 이후에 인간이 다시 행성을 찾았을 때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갖춘 채로! 나처럼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글을 다 적고 나니 정말 애스시인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나쁘기만 하였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는 그냥 알아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부딪치는 과정이 있어야 발전하고, 그래야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관계가 언제까지나 좋게만 유지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좋은 관계, 나쁜 관계도 그냥 내가 정한 기준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애스시인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갈등도 마냥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일어난 갈등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그냥 갈등의 해결 과정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계가 발전하려면 또 그에 맞는 갈등도 있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애스시인과 인간은 서로 갈등을 겪었고, 또 그 과정을 통해 성장했을 터이니 5세대 후에 더 좋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로를 더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탈원전합시다
김경택
“그리고 1954년은 미국에서 ‘노틸러스’라는 원자력 잠수함이 가동된 해로서, 원자로가 동력으로 이용된 최초의 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군사적으로 이용되던 원자로 기술이 실용화단계로 접어든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력에 많은 투자를 한 미국은 어떻게든 상업 이용으로 회수해야 하는 속사정이 있었다. 1954년과 55년 이때 미국이 원자력의 평화 이용을 부르짖게 된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작용했던 게 아닌가 한다.
이것은 단순히 투자를 회수하려는 것 이상의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원자탄 개발과 원자력 잠수함 개발 그리고 원자력 항공모함 등의 형태로 원자력 연구가, 그리고 어쩌면 각종 미사일 기술을 탑재한 핵무기 기술의 형태로 핵무기에 관한 연구가 미 ∙ 소 양국이 핵 개발 경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라 안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군사적 목적만 가지고 개발을 추진한 게 아니라 기술적인 분야를 확장하기 위해 상업 이용까지 포함한 광범한 핵기술의 주변 영역을 개발하는 일종의 기술전략, 다시 말해서 ‘핵기술 입국’적 전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원자력은 무한한 에너지를 낳는다는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나카소네 등에 의해서 고스란히 일본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연구자도 부정적인 데다가 산업계 자체도 달가워하지 않아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원자력 개발이 언제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가가 머리 위에서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개발하는 형태로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
결국 자연스러운 기술도입이 아니어서 나중에 잡음이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이러저러한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카기 진자부로,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60~61쪽)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은 원자력에 대한 신화가 있지만 그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여러 신화들을 보여주며 그 신화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짚는다. 책에서 다카기 진자부로 씨는 원자력 신화로 ‘원자력은 무한한 에너 지원이다’, ‘석유 위기를 극복한다’, ‘원자력의 평화이용’, ‘원자력은 안전하다’, ‘값싼 에너지를 공급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지역발전에 기여한다’, ‘원자력은 깨끗한 에너지다’, ‘핵연료를 리사이클 할 수 있다’, ‘일본의 원자력 기술이 우수하다’라는 것들을 말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 많은 신화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신화들은 왜, 어떻게 생겨난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위 문단이다. 원자력 개발의 시작은 핵무기였다. 1938년에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고 그걸로 무기를 만들고 그 엄청난 힘을 우선 가지고 보자는 생각으로 그것들이 지구환경과 인간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은 거란 말이다. 지금도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이유 중 하나가 원자력 발전에 쓰는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지 않는가. 게다가 미국은 투자를 회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지 않는가. 또 무슨 기술개발을 하기 위해 쓴다고도 한단 말이다. 이런 이유들로 한 나라에서 원자력을 사용하면 또 다른 나라들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전소를 짓고 원자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자력은 안전하지 않다. 잘 알려진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사고도 있었고 이 책을 읽고 내가 새로 알게 된 ‘JCO 사고’도 있다. 찾아보면 정말 끔찍한 사고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매우, 너무나도 끔찍한 사고들이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관해서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방사능이 노출되어 사람이나 동물들이 정상적이지 않게 바뀌었다. 채소가 이상하게 구부러지고 휘어진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JCO 사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글에 찾아보면 정말 똑바로 보기 힘든 사진들이 나온다. 사람이 빨갛게 된, 정말 뭐라 설명하기도 힘든 사진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또 방사능 오염, 핵폐기물 때문에 백혈병과 암이 많이 발생한다. 이런 끔찍한 사고들도 있고, 인간과 자연에도 좋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사실로 알고 있던 신화들도 다 거짓이라면 원자력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원자력 발전소가 돌아가고 있는 이유가 위에서 말한 문제들 때문이다. 그리고 구글에서 꽤 꼼꼼히 찾아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에너지원별 발전 비중에서 원자력이 30%나 된다고 한다(원자력이 중요하다고 세뇌시키려는 커다란 조직의 언론 조작일 수도 있지만). 그러니 탈원전을 하기가 더욱 어렵다고들 하는 것이다. 만약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발전율이 대폭 줄어들 것은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지면 뒤에 있는 도미노도 쓰러지는 것처럼 확실하다. 그렇게 되면 그 때문에 우리 생활에 오는 영향도 무지막지하게 클 거라는 건 보나 마나다. 주변을 둘러보면 전기를 쓰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전등부터 시작해서 냉장고, 에어컨, 난방, 수돗물을 끌어오는 것도 전기를 사용한다. 게다가 전기차, 전기차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차들이 처음에 시동 거는 건 전기로 한다. 또 스마트폰, 노트북 등 전자기기도 전기로 충전을 하는 것이다. 만약 전기가 없다면 우리는 깜깜한 한 밤에 불도 못 켜고, 노트북도 배터리가 나가서 규문 숙제도 못하고, 방에서 부엌으로 가는 데도 앞이 안 보여 문고리에 걸리고 콘센트에 걸려서 한 삼천 번은 넘어지고 부딪칠 모습이 흰 종이 위 검은 먹물 방울처럼 선명하다. 또 자동차를 못 타니 자전거나 말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야 되고 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가 없으니 손에 케이크가 묻어도 손을 씻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자력은 우리 생활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탈원전을 하기 위해선 위의 문제들이 다 해결이 돼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일단 국가에서 원자력을 쓰는 이유가 되는 것들을 해결하는 것부터 힘들다. 다른 국가들은 다 무기를 갖고 있는데 자신들만 무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또 뒤처질 수도 없지 않겠는가. 생각해보자. 어떤 나라도 자신들의 땅에 원자력 폭탄이 쾅쾅 떨어지고 하루만의 수천만 명이 사망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또 어떤 나라가 자신들은 농사를 지어 힘들게 일하며 돈도 쥐꼬리만큼 벌고 있는데, 옆나라는 고층 빌딩을 짓고 첨단 기계로 물건을 만들어서 하루에 수천만 달러를 벌며 날로 발전하는 걸 바라겠는가. 그리고 원자력을 쓰지 않으려면 그만큼 전기를 못 쓰게 될 테니 전기를 절약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원자력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전기를 쓰는 데 익숙해졌다. 원자력을 쓰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을 거란 건 앞에서 보았듯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원전이 가능할까?
독일은 20기의 원전을 순차적으로 폐쇄해 왔으며, 지금도 재생에너지에 투자를 하며 탈원전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도 끔찍한 원전들을 폐쇄해야된다. 그런데 이렇게 원전을 폐쇄하고 얻지 못하는 전기는 어떻게 구할 것인가? 독일처럼 재생에너지를 쓰면 괜찮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써 온 많은 양의 전기를 너무 당연시했다. 원자력을 더 많은 양의 전기를 원자력이 없다고 다른 에너지원으로 채우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그 많은 전기가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렇게 많은 전기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전기를 소비한다. 정말 너무나 많은, 어쩌면 필요 이상의 전기를 말이다. 원자력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석유나 석탄도 언젠가 고갈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더욱 절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탈원전을 위해, 우리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조금 약은 것 같지만 이 두 가지를 통합해 해석을 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비록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채 핵기술 따위를 손에 넣었고 당해낼 수 없는 플루토늄이나 폐기물을 남기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고 싶다. 이쯤에서 핵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현존하는 핵무기나 플루토늄, 방사성폐기물을 지혜를 모아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노력한다면, 그리고 더욱 평화롭고 안전한 방향으로 문명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한다면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이나 기대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는 쓰지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평가를 하고 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제 시간이 남아있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일각이라도 빨리 이러한 전환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이미 시작된 일이지만 일본에서도 그러한 방향으로 더욱 대담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미래를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카기 진자부로,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34~235쪽)
여기서 중요하게 나오는 것이 예지와 희망이다. 예지는 전에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예지 없이 핵을 썼다는 것이고, 희망은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탈원전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희망이란 뭘까? 희망은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힘든 상황에서 희망으로 인해 힘을 얻고 일어났지만 실패하여 그것이 절망으로 바뀌어 좌절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희망이 있음에 안도하다 방심하거나 아무것도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희망은 많은 일과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을 조금 경계할 필요도 있다. 그러면서 그 희망의 힘을 가지고 일을 해내면 될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일을 말이다. 우리도 지금 코로나로 많이 힘들지만 다시 돌아올 일상에 대한 희망으로 버티며 참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것도 희망 덕분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조심스럽게 희망을 갖고 국가들 간에도 여러 의논이 필요할 것이고 국민들도 노력해야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탈원전이 한순간에 완벽히 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탈원전이 한순간에 완벽히 된다면 그 상황이 오히려 더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갖고 탈원전을 천천히 순차적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탈원전이 된 세상은 어떨까? 우선 나라들끼리 핵미사일 때문에 경쟁하고 경계할 필요가 없다. 모든 나라가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갈 때처럼 서로 조금씩이라도 사이가 좋아져 푸르른 지구에 평화가 깃든다. 원전 폭파와 핵폭탄으로 인한 희생자도 더 이상 없고 원전이 있던 곳엔 개나리며 민들레며 은방울꽃이 만발하고 세상에 평화가 무지개처럼 피어난다. 매우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김종철 지음,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
개인주의
백재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동물사료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의 사료로 곡물을 준다는 것도 소의 생리를 무시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사료는 광우병 문제와 관련해서 그 위험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져 가고 있지만, 곡물사료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사실 풀을 씹으면서 하루종일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소의 생리를 고려하면, 옥수수를 원료로 한 곡물사료도 결코 소한테 적합한 먹을거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고기의 육질을 좋게 한다는 이유로 현대식 축산업에서는 대량의 곡물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80퍼센트, 세계 전체 곡물 생산의 3분의 1이 가축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소의 미국식 햄버거 문화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이 경향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 38~39쪽)
나는 이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피곤해서 뒤에는 제대로 집중을 못했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앞에 부분 중에 기억에 남는 부분을 골랐다. 내가 이 부분을 고른 이유를 말해보자면 최근에 미국에 특산품 그러니까 각 지역마다 많이 나오는 자원 등을 배웠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또 예전에 본 책에서 사료는 맛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최소한의 영양분을 위한 것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동물사료와 곡물사료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든 생각이 ‘그러면 소한테 먹일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본 만화에서 소가 곡물사료를 즐겁게 먹고 그걸로 살이 찌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소에게 매일 먹이는 곡물사료는 인간에게는 불량식품과 같은 것 아닌가 싶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말하는 소는 가축이다. 소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일단 이 내용에서는 그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가 불쌍하기는 해도 이 과정에서 인간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래서 소의 입장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온 생각이 태어나자마자 인간이 먹이는 곡물 사료를 먹고 사는 것이다. 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많이 먹으면 질린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그런데 매일 같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삼시세끼 먹이는 건 학대이다. 그래서 해결책은 모르겠지만 순수하게 인간만을 따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참화를 겪은 이후 일본 국가가 지향한 것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경제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우여곡절을 거쳐 표면적으로는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후쿠시마의 원전 재앙은 이 성공이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 369쪽)
누가 보면 위에 쓴 문단과 방금 나온 문단이 무슨 관계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표면적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고 보면 나쁠 게 없는 모습이지만 깊고 자세히 보면 둘 다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을 고른 다른 이유는 바로 비교적 최근에 일본에서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린다는 발표를 했다. 나는 이것이 위에 문단의 설명을 완벽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핵폐기물을 처리한다는 것은 사람이 위험하지 않고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리면 몇 년 안에 바다가 더러워지고 각종 해산물도 바다에서 살기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이미 더러운 바다에 핵폐기물이 들어가면 그냥 거기서는 생물이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폐기물이 일본의 바다 주위에만 있을 리가 없고 점점 퍼져 결국 온 바다가 오염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쿠시마를 치우려 한다 해도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뭔가 겉으로만 보면 깨끗하고 평화로운 나라처럼 보이게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물론 핵폐기물은 큰 문제이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도 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른 두 문단 모두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기들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위에 문단을 보면 소를 위한 생각보다는 인간들이 편하게 키우기 위한 것이니까 인간만을 위한 것이다. 두 번째 문단은 일본인들이 자기들만의 편리를 위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둘 다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그런데 햄버거 좀 줄이고 산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다. 또 겉은 훌륭해도 속이 썩어있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는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에 대한 내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은 때론 큰 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이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간의 이기적인 면들에 의해 생긴 것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글을 읽고 있자니 소개된 세 권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네요. 특히 르귄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좋은 책을 소개받은 느낌이랄까요. 생태, 탈원전, 관계,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간 생각해볼 수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아보니 새롭네요. 모두 자기 캐릭터가 드러나게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꾸준히 글을 써 가는 청소년들의
실력을 알게 되네요..
2탄 프로젝트마침을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