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지]는 "주역(周易)을 만나는 지금"의 줄임말입니다. 2023년, 어느덧 30살이 된 지금 새로운 마음으로 주역을 읽어보려 합니다. 이번에는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걸 목표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험난해서 살았다
글 : 규창
1.이번 생은 망했다!?
‘만약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현대사회에서는 참 많은 일이 일어나서 딱 1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처럼 10년 동안 자신이 기억하는 굵직한 사건들만 잘 활용해도, 개인적으로는 흑역사를 지울 수도 있고, 잘만 하면 의인(義人)이 될 수도,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
최근 소설부터 만화, 드라마 심지어 영화까지 이른바 회귀‧빙의‧환생 플롯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내가 읽었던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살아가는 것. 이는 이야기의 단골소재가 된지 오래지만, 최근 이런 플롯이 유행에서는 이번 생을 헤쳐나갈 힘이 없다는 무기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현실은 막막하고, 나의 힘은 막막한 현실을 헤쳐나가기에 역부족이고, 고로 내 인생은 실패했다는 좌절감. 한마디로, 이번 생은 망했다! 빚투와 영끌에 크게 실패한 사람들일수록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당장 짓누르는 현실적 압박에서 벗어날 유일한 해결책이란? 회귀, 빙의, 환생... 즉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가능하고 말고를 떠나, 그런데 대체 어떤 다른 세계? 어떤 다른 삶?
회귀‧빙의‧환생의 핵심은 예측 불가능성의 소거,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당장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 아예 불안이 제거된 세계/삶으로 떠나기를 꿈꾸는 것. 다시 말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겠다는 것이다. 원인이야 많고도 많다.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돈이 없어서, 학벌이 좋지 못해서, 세상이 나에게 상냥하지 않아서 등등 조건의 불우함이 그것. 그러니 아예 초기조건 자체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도피는 현실에서 나의 무능함만을 강화, 재생산할 뿐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가 몸담은 현실은 언제나 지옥일 수밖에 없다.
2.삶의 스승으로서의 험난함(險)
성공과 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는 넘어서야 할 무능함, 겪지 말아야 할 예외로 취급된다. 때문에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불안감이 항상적이고, 언제까지나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을 맛본 인간일수록 무기력해지고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역(周易)》에서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좌절과 시련, 고초 등은 삶에서 추방해야 할 악이 아니라 삶의 필연적 조건이다. 《주역》에서 어려움, 곤란함을 나타내는 괘들로 수산건괘(水山蹇卦), 택수곤괘(澤水困卦), 수뢰둔괘(水雷屯卦) 등이 있는데, 이 괘들은 그런 상황을 새로운 역량을 발명할 기회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모두 공통된다. 중수감괘(重水坎卦)도 그 중 하나다. 감괘(坎卦)는 도(道)가 작동하는 여덟 가지 형식인 팔괘(八卦) 중 하나로 ‘물(水)’의 운동을 추상화한 괘다. 중수감괘는 감괘가 중복된 모습으로 ‘물’에 대한 고대인들의 사유가 담겨 있다. 괘의 이름으로 규정된 감(坎)의 뜻은 ‘험난하다(險)’, ‘구덩이에 빠지다(陷)’인데, 감괘는 이를 감괘의 덕(역량)으로 변환시킨다.
물을 생각해 보자.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모양에 맞게 채워진다. 구덩이를 다 채우지 않고서 물은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것이 물의 본성이다. 감의 뜻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험난하다’ ‘빠지다’로 얘기되는 건 구덩이는 물이 그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구덩이를 피해가지 않고 그 구덩이에 계속해서 빠지고, 구덩이를 채우고서야 구덩이에서 나와 그 다음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물에게 험난함과 빠짐은 방해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와중에 겪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흐를 수 없는 구덩이조차 흐르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물의 위대함은 이처럼 끊임없이 어떤 험난한 곳에 빠지고 다시 나아감으로써 모든 곳에도 흐를 수 있다는 데 있다. 덕분에 만물은 흐르는 물에 힘입어 살아간다. 이것이 물의 위대함이다.
인간에게도 물은 험난함이다. 구제(救濟)라는 단어의 ‘제(濟)’가 ‘강을 건너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와준다’를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은 저편으로 건너가는 걸 방해한다. 뗏목을 이용하거나 신체를 변환하여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물은 나아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지만 기존의 습관과 행위 양식을 의문시해야 하는 일종의 문제이기도 하다. 강을 건너려면 물에 빠져서 몸이 적셔지는 경험을 충분히 해야 하고, 그리하여 물과 다른 관계를 맺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헤엄쳐본 적 없던 사람이 헤엄칠 수 있는 신체를 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물-험난함은 인간을 단련시키는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주역》의 모든 괘가 그러하듯, 이처럼 감괘는 자연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부터 인생사에 관한 통찰을 유추해낸다. 인간도 물처럼 주위 환경에 맞게 변모한다. 성격도 바뀌고, 발현하는 재능도 달라지고, 주변과 관계 맺는 양상도 변형된다.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본성을 충실히 따르는 물과 달리, 인간은 상황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한다. 젊음과 늙음,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 이기적인 모습과 이타적인 모습, 돈을 버는 데 유용한 재능과 쓸데없는 삽질 등등 삶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새로운 곳으로 밀어 넣는데, 우리는 특정한 가치만을 취사 선택한다. 매번 달라지는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본성을 지키는 물과 달리, 인간은 부정적으로 가치 평가한 것들을 소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험난함을 그저 삶의 장애물로만 받아들이는 인간은 평생 험난한 삶에서 다른 향기를 맡을 수 없다.
하늘은 험난하니 넘어설 수 없고, 땅은 험난하니 산과 강, 언덕, 구릉이 있다. 왕과 제후는 험난함을 진설하여 나라를 지킨다. 험난함을 사용하는 때와 작용이 크구나!
天險不可升也 地險山川丘陵也 王公設險以守其國 險之時用大矣哉
- 중수감괘 단전(重水坎卦 彖傳)
감괘를 상세하게 풀이한 단전에 따르면, 험난함은 우리 삶의 조건이다. 가장 높은 하늘과 가장 낮은 땅,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겪고 마주치는 모든 것 중에서 험난하지 않은 것은 없다. 세상은 인간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에게 그 변화는 때때로 행운으로 오기도 하지만, 불행으로 오기도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험난함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제약이다. 그러나 문명을 비롯해서 인간이 발명한 모든 위대한 것은 이러한 험난함으로부터 생산된 것이다. 산과 강, 언덕, 구릉은 걸어 다니기에 편안한 평지가 아니다.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근대인에게 그것들은 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지형은 다채로운 빛깔을 품고, 인간만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는 터전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존재들로부터의 증여 속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단전에서 말하듯, 뛰어난 통치자일수록 험난한 환경을 유익하게 조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산은 그 자체로 오르기 힘들고, 강은 이편과 저편을 가를 뿐만 아니라 자주 넘쳐 흐른다. 그러나 험준한 산은 외부의 어려움을 막는 성벽으로, 범람하는 강은 작물을 기르는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문명이 강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인들은 현대인들보다 훨씬 지혜롭다. 삶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기술은 지금이 과거보다 뛰어나지만, 나를 둘러싼 험난함에 순응하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기예는 과거가 지금보다 탁월하다. 효율을 추구하는 현대에서는 모든 가능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존을 도모하는 고대인에게 ‘험난함’은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험난함이란 유한한 존재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지만, 그 한계를 조건 삼아 주변 사물과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을 실험할 수 있다. 그럴 때 인간도 물처럼 위대해질 수 있다!
성공과 실패라는 인간적 가치 평가를 걷어내면,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은 끊임없이 흐르는 와중에 잠깐 구덩이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다. 성공조차 그렇다. 한 번 성공의 맛을 본 사람은 더 큰 성공에 집착하게 된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실패에 대한 기피와 무시로 이어진다.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실패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공을 자기 능력의 결과로 해석하고 자만하는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돌파되지 않는 상황 앞에서 크게 좌절한다. 이럴 때도 성공이 그의 족쇄가 된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탄탄대로, 꽃길과 같은 이미지로 생각하지만, 성공 역시 실패와 동일하게 구덩이에 빠져 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거꾸로, 실패는 감괘에 바탕하면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점이요, 배우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다.
따라서 지금 나의 실패가 ‘이번 생의 망함’일 수 없다. 생(生)은 언제나 ‘나’를 넘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생은 망했다”는 절규는 끊임없이 흐르는 생에 대한 모독이고, ‘성공’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유아적 투정이며, 성공조차 구덩이에 부과함을 모르는 무지다. 이런 인간은 무엇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자기 운명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물이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어떤 구덩이에도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는 것처럼, 삶의 모든 순간은 다가올 순간에 밀려날 것이다.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과 실패도 동일한 흐름의 일시적 국면일 뿐인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성공하지 못함이 아니라 ‘성공’이라 믿는 상태에 머무르려는 고집에 있다. 인간이 ‘벗어나야 하는’ 험난함이란 이런 어리석음뿐이다.
내 공부를 예로 들면, 텍스트 읽기는 끊임없는 험난함을 경험하는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나의 해석은 텍스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앎 중에서 일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해석이 더 뛰어난지 확정할 수도 없다. 해석들은 텍스트가 고정된 앎이 아니라 읽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는 하나의 흐름임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해석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빈 구덩이를 채우고 다음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삶 전반에 취해야 할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험난함은 성공과 실패라는 단편적 관점에서 평가돼야 할 게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험난함을 겪지 않는 삶에 대한 상상적 도피가 아니라 험난함을 잘 겪어내는 기예다.
3.계속되는 고난을 넘어가는 힘, 믿음(有孚)
습감(習坎)이니 진실한 믿음이 있다. 오직 마음으로 형통하니, 나아간다. 가상함이 있다.
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
- 중수감괘 괘사(重水坎卦 卦辭)
습감(習坎)이란 끊임없이 험난함을 겪고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을 가리킨다(習坎 重險也). 한 고비를 넘으면 다음 고비가 닥칠 것이고, 아무리 달콤한 결실을 맺어도 그 이상으로 씁쓸한 실패를 맛볼 수 있다. 우리의 상황은 한곳에 머묾이 없으며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역》이 제시하는 삶의 지혜는 유부(有孚), 진실한 믿음이다. 유부란 아무리 험난함이 계속되더라도 그 가운데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태도다.
‘유부’를 직역하면, ‘믿음이 있다’가 된다. 그런데 이때의 믿음은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부(孚)는 ‘발톱’을 뜻하는 조(爪=爫)와 ‘자식’을 뜻하는 자(子)가 합쳐진 글자다. 알이 부화하기 위해서는 어미가 몇 날 며칠을 품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부화하기 위해 껍질을 쪼는 새끼에 호응해서 같은 곳을 같은 순간 쪼아야 한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것을 믿으며 어미는 알을 품는다. 새끼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세상에 살게 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삶에 대한 믿음으로 껍질을 쫀다. 부화는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려는 두 생명체의 노력이 교차한 경이로운 사건이다.
‘유부’에서는 삶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눈물겨운 상호성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인생은 앞으로도 언제나 험난할 테고, 그 끝에 죽음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이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그럼에도 무력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험난함을 겪는 동안 부정적 사고에 갇히지 않도록 함께 고민하고 공유하는(‘쪼아주는’) 친구들을 믿기 때문이다.
대상전에서 말했다. 물이 거듭해서 이르는 것이 습감의 모습이다. 군자는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 덕행을 일정하게 지속하고, 가르치는 일을 반복해서 익힌다.
象曰 水洊至 習坎 君子以 常德行 習敎事
- 중수감괘 대상전(重水坎卦 大象傳)
《주역》은 자연의 운행을 본받아 인간 삶의 지혜로 전환하는데, 그것이 〈대상전(大象傳)〉에 집약되어 있다. 모든 거대한 바다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흐르는 아주 작은 개울이다. 다르게 말하면, 끊임없이 ‘흐르는 덕’이 있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 거대한 바다가 될 수 있다. 군자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모습을 본받아 일생동안 지속할 역량과 관계를 고민한다. 이는 서둘러 험난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결책과 노하우에 목을 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대조적이다. 대체로 우리는 어떤 수단이 효과적인지 비교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분별한다. 그리하여 변덕스럽게 실천과 관계가 바뀌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도 못하고 끈끈한 정서적 연결망을 형성하지도 못한다. 당장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타자들은 시선에서 제외되어 버린다.
하지만 군자는 험난함에 직면하여 그동안 자신이 지속해온 활동을 점검하고 교정한다. 공자를 보자. 주나라의 문화를 회복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공자는 인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고, 모든 조건 속에서 삶을 조형할 수 있는 보편적 실천으로서 배움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역량은 자기 삶을 다르게 조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람들로 흘러든다. 실제로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와 같은 삶에 매료되어 스스로 찾아왔다. 공자는 그런 이들과 배우고 가르치는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했고, 그 관계에 힘입어 공부를 더욱 항상되게 지속했다.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공부를 나누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자는 천하를 14년 동안 주유하고 끊임없이 고초를 겪었어도 피폐한 삶을 살지 않았다. 외부적 평가에 따르면 공자의 삶은 성공과 전혀 무관하지만, 그의 삶은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과 무관하게 이미 충만하다.
이러한 지혜는 ‘각자도생’이 진리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낯설다. 우리에게 지혜는 능력/권력이고, 이는 자신이 쌓아 놓은 커리어나 업적, 재산 같이 눈에 보이는 지표들과 비례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으로 지혜롭다는 건 소유욕이 강렬하다는 것이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더 많이 소유할수록 좋다’는 믿음, ‘미래는 나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믿음이 전제된다. 《주역》이 말하는 지혜도 진실한 믿음(有孚)이지만, 자본주의적 믿음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무엇보다 ‘삶은 끊임없는 험난함이다’라는 믿음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모든 험난함을 경이로운 마주침으로 전환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믿음, ‘그들에 의해 여태껏 맛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나’에 대한 믿음이다. 이 세 가지 믿음은 서로를 강화시키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처럼 아무리 험난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겪어도, 그 과정에서 삶을 찬란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유부를 체험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나는 끊임없이 구덩이에 빠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가 어떤 험난함에 빠져 있는지, 또한 내가 이 구덩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조금씩 알아차리게 된다. 글을 쓰는 동안 이것저것을 뒤적인다. 칼럼도 읽고, 뉴스도 보고, 지나다 어쩌다 본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생각하기도 한다. 글로 다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경유하는 동안 내가 정말 다양한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다. 덕분에 신기하게도 나는 어제와 거의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는데, 글을 씀으로써 그 이전과 아주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된다.
4.험난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시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멀티유니버스를 소재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한마디로 이렇다.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모든 우주를 경험하고, 그리하여 모든 우주에서의 성공을 맛본 조이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슈퍼맨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조부 투파키가 됐다. 모든 것을 이룬 ‘전지전능한’ 존재는 결국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음을, 하여 오로지 무와 죽음과 파괴를 욕망할 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런 조부 투파키를 구원하는 건 역설적으로 모든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최악의 에블린이다. 알파 웨이몬드는 모든 우주에서 가장 실패한 에블린에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도박성 멘트가 아니다. 가장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을 건네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고 이를 기꺼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다는 의미다. 감괘의 대상전에서 전하는 지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 무한히 계속될 험난함을 겪어낼 수 없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지더라도 빠짐 자체를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타자와의 사소한 주고받음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연결망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 다른 삶으로 회귀‧빙의‧환생을 꿈꾸지 않아도, 이들은 이미 험난함 속에서 경이로움을 직조해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시이며, 이는 기꺼이 구덩이에 빠진 상황을 감내할 수 있는 힘, 구덩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힘, 그 힘으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뜻한다. 험난함 속에서 우리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타자들과 우정을 나누며, 이제껏 맛보지 못한 풍요로움이 삶에 잠재해 있음을 배운다.
2023년, 계란 한 판을 가득 채운 나이가 됐으니 하는 말인데, 사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뭔가를 알아서가 아니라 웬만한 사람들 모두 어렵게 사는 걸 그만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도, 외모가 출중해도, 명예와 권력, 인기가 있어도 쉽게 사는 걸 보질 못했다. 아무리 강력한 멘탈의 소유자라도 갑자기 휘청할 때가 있고, 아무리 운이 좋아 보여도 우연한 사건에 치명적 상해를 당할 수도 있다. 덕분에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살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공부를 하고 있지만 성공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고, 인문학도이긴 하지만 ‘나’를 증명할 인문학적 결과물도 없다. 몸은 편안하지만, 종종 이렇게 공부하고 있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살짝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주역》 읽기도 고민이다. 여전히 《주역》을 어떻게 읽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익숙해지긴 했으나, 괘 하나를 얘기할 때 턱턱 걸리는 게 너무나도 많고 근거 없이 상상력만으로 읽어버릴 때도 많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고 내가 꿈꿨던 시민운동가가 되었다고 해도 특별히 다른 삶을 살았을까? 아마도 나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많은 시민들을 고민하며 머리를 싸맸을 것 같다. 기술자가 되어 적당히 돈을 벌면서 조금씩 부를 쌓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더 많이 소비하고픈 갈증에 자괴감을 느꼈을 것 같다. 어떤 삶을 살든 나는 어김없이 이러저러한 험난함을 만나 허우적거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뭘 하며 살든, 이후의 생은 적어도 감괘를 배운 이후다. 어떤 삶을 살든 험난함을 다르게 겪도록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여, 나는 어떤 험난함을 겪어도 생은 망하지 않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 속에서 펼쳐지는 나의 삶 또한 꽤나 근사하고 멋질 것임을 믿는다.
"기꺼이 구덩이에 빠진 상황을 감내할 수 있는 힘, 구덩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힘"
감괘의 가르침은 무척 단단하군요! 고민이 공감됩니다!
어떤 삶도 쉽지 않다는 깨달음,험난함을 긍정할 줄 알게 되는 한 스텝이 무척 소중해 보입니다요~ 주만지 짱짱!!
험난하고, 험난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 이 험난함을 넘어가는 지혜로 '유부' 개념이 참 멋있네요! 개인의 능력이 아닌 상호성에 대한 믿음 갖기! 이제, 험난함이 삶을 덮칠 때마다 '유부'로 대응해야 겠네요^^ 좋은 도구 획득! 앞으로 30대 백수 아찌로 겪게 될 잠재적(?) 험난함들을 응원하며, 겪게 된다면 연대하며 넘어가봅시다-! 주.만.지 뽜이링!
서른 즈음이 되니 규창님의 같은 문제들도 공부하며 고민하며 허우적거렸던 세월만큼 톤도 깊어진 느낌입니다. 주역 참 재밌는데 어떻게 지금 문제들과 붙여 얘기할까 엄두가 안나는데 규님 글 읽으며 용기 얻습니다. 애독자 예약할테니 쭉쭉쭉 진도 나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