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한 곡의 노래는, 불리거나 연주될 때 하나의 몸을 얻는다. 실재하는 몸을 취하여 그 몸을 순간적으로나마 소유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블베이스의 몸체는 줄이 튕겨지는 동안 꼿꼿이 서 있고, 두 손에 쥐어진 하모니카의 몸체는 한 마리 새처럼 연주자의 입 앞에서 맴돌거나 그 입에 가서 닿는다. 드럼을 치는 드러머의 상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노래는 반복해서 가수의 몸을 취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들의 몸은, 그 노래를 듣고 몸짓으로 따르는 동안 무언가를 기억하고 예측한다. (...)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끈질긴 희망이 없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노래는 앞으로 나아간다.
- 존 버거, ‘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2000년대 초반이던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문화일보에서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 대선 후보들을 비롯해 유명인사를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중 하나가 조용필 인터뷰였다. 콘서트 중에는 목을 아껴야 해서 외부인사를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도올 선생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천하의 도올”의 청만큼은 거절할 수 없어 자택에서 나눈 짧은 인터뷰였다. 아 머야~, 도올 선생 특유의 거들먹거림(?)이 묻어나는 인터뷰를 보면서 쳇쳇거리던 마음은... 실은, 깊은 부러움이었다. 말하기 살짝 부끄럽지만, 조용필 인터뷰는 내 오랜 꿈이다.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는 두 대화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치로 보여주었다고 평가되는, 영화계의 고전이다. 당시(1962) 누벨바그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프랑수아 트뤼포(당시 30세)가 알프레드 히치콕(당시 63세)에게 인터뷰를 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히치콕의 오케이 대답을 들은 후 미국으로 날아간 트뤼포는 무려 일주일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는데... 읽어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지만, 영화에 대한 두 사람의 애정과 히치콕에 대한 트뤼포의 팬심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친다. 이 인터뷰는 여러 감독들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는데(<히치콕/트뤼포>,2015), 포스터를 보시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애정, 우정, 흠모, 존경, 추앙 등등이 모두 담긴, 저토록 유머러스한 제스처와 표정이라니!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저런 (경지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내 팬심을 원동력 삼아 무지막지하게 그의 음악을 공부한 다음에 조용필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게 내 꿈이란 얘기다.
그런데 가만, 꿈을 이루려면 뭘 해야 하나... 배는 고픈데 쌀이 없는 형국이랄지. 막막하니까 우선, 하던 걸 더 성실하게 하고, 글도 부지런히 써야지. 그래서 거북이의 속도로라도 조금씩 천천히 유명해지자!(말도 안 되는 얘기란 걸 알지만, 일단 모르는 척하고) 문제는, 그때(?)까지 조용필이 현역으로 뛰어줄 것인가 하는 건데,(현장을 떠난 자의 회고 인터뷰는 해서 무엇하겠는가) 여기서부터는 믿음의 영역이다. 그를 믿고, 조금 더 꿈을 간직하기로 한다. 최근 발매된 EP앨범과 지난 11월 말 콘서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아직 10년은 더 노래할 수 있겠구나 싶었으니까. 콘서트를 다녀온 후 며칠간, 잠시 옆으로 제쳐둔 꿈이 꿈틀거리는 통에 마음이 좀 펄럭거렸다. 후후후.
* 혹여, 제 꿈의 실현불가능성을 확신하시며 안타까워하실 독자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드림 플랜b도 있으니 부디 그 안타까움 내려놓으시라.^^ 팬심을 가득 담아 ‘조용필론’을 쓰는 것이 그것. 모델은 우치다 타츠루가 ‘팬심을 담아 썼다’고 공언한 책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깨지니까 꿈이지만, 꿈 자체의 행복함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인연의 힘을 믿고서(=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내심 요랑요랑하게 꿈을 즐기는 중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1집(1980), 4집(1982), 7집(1985))
조용필의 시대, 나의 십대
조용필은 나의 10대였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한 부잣집 친구의 거실을 꿰차고 앉아 떼창을 하며 듣던 이문세가 있었고, 한두 명하고만 은밀히 공유하던 어떤날이, 동물원이, 유재하가, 들국화가, (좀 더 옛날 그룹인) 산울림이, 조용필과는 느낌이 극과 극인 동시대 가객(歌客) 송창식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용필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중학교 시절, 음악 좀 듣는다는 아이들은 모두 팝pop순이였다. 언니나 오빠를 통해 일찍부터 팝송에 익숙했던 아이들이 듀란듀란이냐 왬이냐를 놓고 싸울 때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출처를 알 길 없는 온갖 정보를 들이대며 마돈나가 더 미친년인지 신디 로퍼가 더 미친년인지를 두고 언쟁을 할 때도, 그 팝순이들이 가요 듣는 애들을 은근히 ‘애’ 취급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나, 난 그들의 논쟁(?)에 귀기울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니들이 조용필을 어찌 알겠니’ 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가요파’ 애들 중 일부가 82년에 잠깐 반짝했던 이용에 환호할 때도(나:저게 가수왕이라니... 말세야!), 또 다른 일부가 밤을 새워 학 따위나 접으면서 전용록 오빠를 부르짖을 때도(나:쯧쯧 그래봐야 조용필한테는 안 되지.), 그래도 나는 일편단심 조용필이었다. 누가 최고냐를 놓고 싸우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었으므로, 역시 속으로만 ‘니들이 뭘 알겠니’ 했다. 1985년, 점심시간 교내방송에서 당시 막 발표된 7집 수록곡인 <어제, 오늘, 그리고>가 흘러나오던 그 순간을 지금도 나는 슬로우모션으로 기억한다. 바야흐로 나른한 봄날이었고, 우리는 ‘중단없이 먹기’와 ‘쉼없이 재잘거리기’의 동시성을 입증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반 DJ의 멘트에 이어 흘러나온 전주를 듣자마자 나는 그만 숟가락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아, 다행히 저는 아직 숟가락을 놓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만)
때는 바야흐로 5공 시절, 숨통을 조여오던 독재의 칼바람... 같은 건 안중에 없던 소녀였다. 감수성 어린 똘끼로 충만했던 나의 십대는 ‘단발머리’(1980.1집 수록곡)에서 시작해 ‘Q’(1989.10집 수록곡)로 끝났다. 희노애락이 뒤얽힌 내 10대의 OST는 그의 노래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소녀는 장차 주먹을 휘두르며 운동가요를 불러댈 것이고, 머지않아 서태지를 듣고는 ‘이건 뭐지?!’ 하는 표정을 짓게 될 것이며, 너바나를 듣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오아시스를 만나 브리티시록에 빠지는 20대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21세기 이후로는 가요계를 떠나게 되리라.
그러나, 그래도, 조용필만은 버리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오빠’를 외친 적도 없고, 팬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조차 해본 적 없지만, 그의 모든 앨범을 (저절로 외워질 때까지) 듣고 또 들으면서, 언젠가 조용필을 인터뷰하리라는 꿈만은 놓지 않았다. 보통의 소녀팬들처럼 ‘사귀고 싶다’ 혹은 ‘매니저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싶다’였다! 그러니까 내게 조용필은 처음부터 ‘스타’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슈퍼)스타’라는 말은 너무 초라해 보였고, ‘가왕(歌王)’이니 ‘가황(歌皇)’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그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말 그대로 뮤지션(음악‘하는’ 자)이었다. 방송국 출연을 모두 고사하고, 일체의 트로피와 타이틀을 사양한 다음,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80년대를 빠져나가면서 조용필은 두르고 있던 모든 액세서리를 벗어던진다. 비난과 칭송이 뒤섞인 시끄러운 소음들을 뒤로 한 채 떠난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밴드가 해체되고, 해체된 밴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음악을 부지런히 듣고 또 만들고,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쉼 없이 공연을 하고... 그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오빠’는 70대가 되었고, ‘소녀’는 50대가 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50주년이니 몇 주년이니 하는 세레모니를 그는 무척 껄끄러워한다고. 그냥 음악이 좋아 음악을 했을 뿐인데 ‘몇 주년’이라는 게 뭐 축하할 일이냐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참고로, 이런 세레모니는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생각해 보니 밥딜런 음악인생 ‘**주년 콘서트’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좋아서 했다면,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일은 좋든 나쁘든 모두 덤이다. 좋아서 했다면 그저 하면 되는 것이지, 생색은 구차하다. "저는 정상이 뭔지 기록이 뭔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죠. 무엇을 위해서 제가 음악을 했고 그런 거는 전혀 없어요. 그냥 음악이 좋아서,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음악으로 감동받고 그래서 한 겁니다."
그렇게 조용필은 어제도 음악을 했고, 오늘도 음악을 하고 있으며, 내일도 음악을 할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이런 믿음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무언가를 하고 있음, 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함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해와도 같고 달과도 같은 존재들. 하여 나, 조용필을 추앙한다!
“제가 그만뒀을 때 팬분들이 ‘평생을 저 사람 노래 들으면서 살아왔는데, 저 사람이 그만두면 난 뭐야, 난 뭐가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실까봐 이게 가장 두렵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좋아해준 분들이 실망하는 게 두렵고, 그래서 허락되는 날까지 노래를 할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 새롭다는 것, 새롭게 늙는다는 것
조용필은 1950년생이다. 올해로 73세. 지금으로선 가늠이 잘 안 된다. 나의 73세는 어떤 정동들로 채워지게 될는지. 사지 멀쩡히 살아 있기만 한다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 인간이 늙는다고 크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생각하기를 그만두지 않고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만에 하나, 옛날의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어 원망이나 후회, 그리움 같은 것들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소스라치게 두렵다.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런 노인네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노년을 보면 그의 삶 전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어떤 인물에게 끌리는 것도 그들의 노년 때문인 경우가 많다. 혜성처럼 등장한 모든 것은, 혜성이 그러하듯 갑자기 나타나 반짝 빛을 내다가 쉽게 사라진다. 오랜 격언도 있지 않은가,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는. 한 예술가를 평가하려면 대중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최전성기가 아니라 대중에게 거의 잊혀진 후의 노년을 봐야 한다는 것이 내 나름의 지론이다.
(피카소가 말년(1971)에 그린 두 점의 자화상. 전혀 다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닿아 있는.)
‘천재’라는 말 자체를 의미했던 피카소조차 말년에는 “무시무시한 명성의 결과로 생겨난 고립”(존 버거) 상태를 피할 수 없었다는데, 내 생각에 이 에너제틱한 노인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건 발기불능(=impotence. 말 그대로, 힘potence을 상실한 무력한 상태) 진단 후의 마지막 10년이다.(참고로 피카소는 1881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이 그간 해온 것들에 대한 회고나 향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탐구의 결과들. 이제야 그림에 대해서 뭘 좀 알 것 같다는 듯이, 혹은 정반대로, 여기에 이르고서도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이, 그는 앞 시대의 대가(大家)들을 자기식으로 모사하고 흠모하고 질투하고 욕한다. 이제 막 배움을 시작한 아이처럼. 예상치 못한 ‘노년의 품격’이다. 노회한 늙은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늙기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수록 절감한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이룬 것과 못 이룬 것들을 ‘죽어도 못 보내고’ 연연하는 대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활동에 일치시킬 수 있었던 인물들을 나는 일단 존경하고 본다.
행운이라 생각하는 건, 적어도 내 앞세대 중에는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대중문화 쪽만 보더라도) 예컨대 1941년생인 밥 딜런과 1942년생인 폴 매카트니. 80이 넘도록 그들은 ‘여전히’ 곡을 만들고 앨범을 발표하고 공연을 다닌다.(게다가 ‘여전히’ 한 방이 있다!) 또 있다. 1930년생 동갑내기인 장 뤽 고다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고다르는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작 <이미지 북>(2018)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칠 줄 모르는 탐색의 산물이었고, 작년까지도 두 편의 작업을 계획 중이었다고 한다. 이스트우드 역시 못지않다.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손자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하는 할아버지처럼 때가 되면 어김없이 관객의 마음을 노크한다. 얘들아, 내가 또 영화를 만들었는데, 보고 싶지 않니? 할배들뿐인가. 할머니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고다르와 함께 누벨바그의 기수 중 한 사람이었던 아녜스 바르다(1928~2019). 이 귀엽기 짝이 없는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던 그 해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고, 조용한데 도발적인 영화들로 우리를 찾아왔던 제인 캠피온(1954년생) 감독은 서부의 마초적 서사를 내밀하게 비튼 <파워 오브 도그>(2019)로 ‘할머니의 힘’을 보여주었다. 범위를 넓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감사할 일이다. 그런 윗세대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시에 걱정이다. 우리 세대도 뒷세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할 텐데...
나는 지금, 그들은 ‘늙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난 참, 무례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나이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가. 나이가 들면 몸이 아프고, 생각이 굳고, 행동이 굼떠진다. 당연히 젊은 시절과 같을 수 없다. 앞서 나열한 이들이 존경스러운 건, 늙었지만 건재해서가 아니라 늙어가는 중인 현재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도하기 때문이다.(“내 나이에는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덕분에 아직도 이렇게 일하고 있을 뿐이다. 가끔 이 나이에 왜 다른 노인들처럼 집에 있지 않고 아직도 일하느냐고 자문할 때도 있으나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클린트 이스트우드)
늙어가는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종종 양가적이다. (당신이 더 할 수 있는 게 남았을까, 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새로운 걸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한편, (존경심을 가장한 동정심으로) ‘나이에 걸맞는’ 걸 하라고 훈계한다. 새로움과 원숙함을 동시에 원하는 것. 나이든 아티스트가 이런 대중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다 보면 두 가지 함정을 피할 도리가 없다. 헛된 욕심 아니면 자기복제. 무모하거나 진부하거나. 나이를 먹어서도 창작활동을 지속한다는 건 그래서 어려운 거다.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뛰어넘어야 하고, 자기세계에 머무르려는 완고함을 극복해야 하니까. 그러나 예술에서 ‘새로움’이란 강박관념이요, ‘원숙함’이란 환상이다. 도대체 뭐가 새로운 것인가? 지금까지 누구도 한 적 없는 것을 하는 것? 최신의 트렌드를 따르는 것? 원숙함은 또 뭔가? 하던 걸 쭉 하는 것, 아니면 하던 걸 더 잘 하는 것?.... 모르겠다.
“내 소리에서 어느 부분이 취약한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중저음의 힘이 떨어진다. 그래서 사무실 위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중저음 곡을 골라서 중저음만 집중적으로 연습한다... <그 나이 되면 인생에 관한 음악을 발표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고 내게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웃기고 있네’ 한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건 시인들이 하는 거고, 노래는 노래일 뿐이다.”
솔직히 조용필이 이번에 발표한 두 곡(<찰나>, <세렝게티처럼>)은 전혀 새롭지 않다.(물론 직접 쓴 곡은 아니다. 그러나 자작곡이든 남의 곡이든, 그의 프로듀싱을 거치지 않은 곡은 없다고 보면 된다.) 새롭기로 치면야 젊은 뮤지션들의 감각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오래전 <단발머리>가 준 충격에 비하면 임팩트도 크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새롭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놀라울 정도로 완벽히 보존하고 있다. 19집 발표 당시의 인터뷰에 따르면, 소식(小食)과 금주(禁酒), 무엇보다 부단한 연습의 결과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로 <찰나>의 코러스를 빼곡히, 더없이 성실하게 채워 넣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더이상 표현할 수 없는 음역대가 있고, 시도할 수 없는 두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겸허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오프닝곡 <꿈>에서 (앵콜곡을 제외한) 엔딩곡 <모나리자>까지, 이번 콘서트의 레퍼토리를 밴드음악으로 꽉 채운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의 악기가 되기, 밴드의 연주와 조응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잘 연주하기. ‘나는 조용필이다’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기. “조용필은 흔히 가창력 좋은 가수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목소리를 밴드의 연주보다 돋보이게 하려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다루려고 한다.”, “그는 연습은 대충하고 실전에서 모든 걸 쏟아붓는 그런 뮤지션이 아니다.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싶을 정도로, 그는 실전에서와 똑같이 연습에 임한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이태윤의 말이다.
피카소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라파엘로처럼 그린다고 새로워지는 게 아니다. ‘새로움’을 굳이 정의한다면, 나이듦의 매순간에 대한 긍정 자체가 아닐지. 모든 것이 변하고야 마는 세계 안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진솔하게 대면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것. 무언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조건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 할 수 없는 채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꽃이 피는 것이 새로움이라면 꽃이 지는 것 또한 새로움이다. 꽃이 피면 핀 대로 지면 진 대로 모든 꽃나무는 충만하고 새롭다.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서의 새로움. 우주적 새로움. 그가 노래하는 걸 보면, 그의 음악을 들으면 알 수 있다. 그는 늘 음악을 하는 중에 있고, 음악이 있는 지금 이 세계에서, 음악을 ‘하는’ 지금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걸. 그런 자에게 새로움과 낡음의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나는 음악이 좋을 뿐이다. 음악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음악은 나의 삶 그 자체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왜’라는 구차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청년 조용필 & 노년 조용필. '화이트 휭거스' 시절과 2022년의 기타리스트 조용필.)
연습(鍊習), 그 지긋지긋하고도 거룩한 길(道)
“나는 록이 좋아서 목소리를 바꾼 사람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60년대말의 내 목소리는 단순한 미성에 불과했다. 오늘 위대한 탄생과 연습하는데 록의 탁성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내년이면 30년, 이제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97년, 강헌과의 인터뷰에서 조용필이 한 말이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는 트로트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개중에는 신경질까지 내는 이도 있었다”고. 록이 좋아서 음악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밴드 음악을 해온 기타리스트였으며, 30년쯤 지나고 나니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고 말한 그다. 그런 그가 이제 와 ‘더이상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쩌나’라는 두려움에 자신을 내어줄 리 없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60년대에 밴드라면 불량배나 양아치를 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밴드를 통해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조건 연습을 많이 했다. 매일을 거르지 않고. 밴드는 끝없는 훈련이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돈을 벌면 몽땅 악기와 밴드에 재투자했다. 밴드를 하면서 많이 벌겠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돈은 나중에 버는 것이다.”
그를 아는 모두가 하는 얘기.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왜 그렇게까지? 더 잘 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럴지도. 그러나 그의 온갖 인터뷰와 관련자료를 찾아 읽고 나서 내가 얻은 답 : 오버하지 않으려고! 말하자면, 中의 미학. 연주도 노래도, 조용필은 과시하는 법이 없다. 듣기에 화려한 기타 플레이조차 대단히 절제되어 있고, 그의 노래에는 ∽↗˜∽↘˘같이 꾸미거나 꺾거나 끄는 음정이 없다. ‘밴드야 나는 내 길을 간다’, 홀연히 고(告)한 후 자신의 가창력을 자주적으로 뽐내는 ‘잘난 체’가 일체 없다. 연습 덕분이다. 연습의 결과는 현란한 테크닉이 아니라 절제다. 한 콘서트에서 무려 스물 몇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부를 수 있는 비결이다.(오버(過)는 기본기가 충분치 않은 자들이 흔히 휘두르는 무기다. 히트곡 하나를 주구장창 부르면서 매번 과장된 창법으로 자신의 식상함을 은폐하려는 가수들의 노래는, 정말이지 듣는 게 고역이다.) 나아가 모든 악기는 그 자체로 메시지를 지닌다는, 지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지미 헨드릭스는 말할 것도 없고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나 비틀즈의 조지 헤리슨의 기타는 노래 이상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준다. 그도 아니면 에릭 칼멘의 〈All by myself〉의 기타라도 한번 유심히 들어보라. 기타가 시간 때우기나 기술 자랑이 된다면 그건 아마추어다... 음악은 수학이다. 대책 없이 하는 연주를 나는 가장 싫어한다.”
그의 독특한 보컬 역시 마찬가지다. 조용필은 배움과 모방의 대가다. 슈프림스, 윌슨 피켓, 몽키스, 스티비 원더, 로드 스튜어드, 비지스 등등 흑인과 백인의 창법을 열심히 흉내내면서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나간 결과가 바로 온갖 ‘짝퉁 조용필(주용필 외 00명)’을 탄생시킨 ‘조용필 창법’이다. 떠도는 야사(野史)에 따르면, 대마초 사범으로 들어간 옥사에서 김지하를 만나 판소리의 세계를 깨쳤다고도 하고, 폭포수 아래서 득음을 했다는 ‘썰’도 있지만, 후자는 거짓이라고 증언한 바 있고, 전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얘기 같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훨씬 뒤 내가 활동을 금지당했던 시절에 만났다.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 흥보전의 구걸하는 장면 정도인데, 악보로 옮기며 공부하다가 그 창법의 고-중-저 바이브레이션에 깜짝 놀랐다. 보컬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는 흑인 음악도 대개 선율위에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의 판소리는 팝 음악하고는 갈래가 다른 리듬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배운 창법과 꽹과리의 리듬감을 실현해 본 노래가 82년 4집에 수록된 〈자존심〉이다.”
‘마~알을 할까 돌아서보면 당신은 즈어~~~~~~만큼 있고’로 시작하는 <자존심>은 콘서트 레파토리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잠깐! 어쩌다 대마초를? 어쩌다 감옥에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은 전혀 모르시겠기에 잠깐 알려드리자면, ‘대마초 파동’은 유신 말기에 있었던 ‘만만한 연예인들부터 때려잡기’ 정책의 일환이었다. 조용필은 그 때 막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밴드 편집 버전으로 공전의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행운은 불행의 씨앗.
“그 히트는 나에게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 이듬해 대마초 사범으로 걸린 것이다. 너무 약이 올라서 한이 맺혔다. 자기 아들이 대마초를 했다고 그렇게 엄청나게 문화를 탄압한 독재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그때도 음악을 천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다. 당시 흔하게 유통되었던 대마초는 불법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그 사건이 있기 몇 년 전에 업소에서 한 번 접했다가 얼굴에 심한 알러지가 일어서 기겁을 하고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선 아무런 참작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 50명씩 불어야 했으니까. 주전자 고문도 치가 떨리지만 붙들려 가자마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틈 사이로 밀어 넣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대는데....거기엔 인간이 없었다. 그렇게 당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고 이 땅을 뜬 사람도 적지 않은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퍼스타’ 조용필이 되기 전의 일이다. 모든 성공에는 그만큼의 고난이 따르게 마련이고, 모든 영광은 비참과 함께 주어지는 것. 3집(1981)에 실린 <고추잠자리>를 만들 당시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겪을 만큼 겪은 서른 한 살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는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 그렇더라도 때는 80년대. 모든 게 녹록지 않은 시대에 ‘천하의 조용필’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슈퍼스타 조용필이라고 어찌 꽃길만 걸었을까. 망한 음반, 자본의 시스템에 떠밀려 억지로 낸 음반, 단어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지는 검열환경... 악천후 속에서 쌓아 올려진 그의 디스코그래피 역시 영광과 오욕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환원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조용필의 역사가 한국대중음악사 자체인 이유다.
이번 콘서트를 앞두고 준비운동 삼아 全 앨범을 다시 들었다. 낯설었다. (이번에 발표된 EP앨범은 제외하고) 지금까지 발표된 19집 전체가, 그리고 80년대에 발표한 앨범 한 장 한 장이 불균질한 생명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아니라 ‘비균질성’과 ‘기형성’. 나로서는 새로운 발견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음악은 자기 시대의 결을 기록한다. 흡사 LP에 새겨진 홈처럼. 어쩌면 노래는 그 홈을 따라 진동하는 바늘(뮤지션)의 탄식인지도. “지니고 갈 다른 것이 없는 자들은 언제나 / 노래를 지니고 갔지 / 바빌론으로 / 미시시피로....”(모야 캐넌Moya Cannon)
록을 기반으로 동요, 민요, 트로트, 재즈, 블루스, 오페라, 일렉트로닉, 라틴음악, 랩 등등을 전방위적으로 접목한 음악적 시도는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에피소드 하나. 2001년, 故 신해철이 진행하던 전설적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도시>에서 조용필의 앨범을 통째로 들으면서 조용필과 대화를 나누는 ‘조용필 특집’을 진행한 적이 있다.(어찌나~ 부럽던지요;;) 신해철의 급질문. “막히거나 곡이 오래동안 안 나올 경우엔 어떻게 하세요?” 조용필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 일단 스톱한다 -> 며칠 있다가 (주로) 미국으로 날아간다 -> 미국 레코드샵에 간다 -> 옛날 음반부터 최신 음반까지 최소 30장 최대 100장 정도를 마구 산다 -> 호텔로 가서 듣기 시작한다 -> 들으면서 추린다 -> 추린 것들을 다시 들으면서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좋다고 느끼지?’라고 자문한다 -> 사운드의 톤, 칼라, 코드진행 등을 따져본다 -> 기타로 쳐가면서 ‘E에서 A로 가는 게 좋으냐 C로 가는 게 좋으냐 D플랫 메이저세븐으로 가는 게 좋으냐’ 등 여러 경우로 진행하면서 테잎에 녹음한다.
공부하는 데 빗대어 말하면, ‘공부가 안 될 때는 공부를 한다’는 얘기다.@.@ 신해철이 “학자풍의 방황”이라고 놀리면서 그런 작업을 20년 넘게 하다 보면 지겹지 않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 : “난 지겹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어요. 단... 내가 한계가 오는 건 아닌가? 이런 걸 많이 느꼈죠.” 이러니이러니 어찌 내가 조용필을 추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는 스타가 아니다. 가왕도 가황도 아니다. 그가 바로 종일건건(終日乾乾)하고 문질빈빈(文質彬彬)한 군자시다!^^ “저는 계속 배우고 있고, 죽을 때까지 배우다가 끝날 것 같습니다.” 배우는 자도 늙는다. 그러나 그는 늙을수록 젊어진다. 혹은 공자님처럼, 늙어가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조용필의 ‘中의 미학’을 흠모하는 내가 그만 과(過)에 과(過)를 거듭하고 말았군. 오늘의 ‘조용필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조용필이 생각하는 메이저와 마이너, 메인스트림이 아닌 적이 없었던 조용필과 언더그라운드의 관계, 그의 친구들과 라이벌들, 그의 주옥같은 곡들에 대한 이야기, 학인이자 수행자로서의 면모들, 그가 좋아하는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고도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각설하고, 4년만에 열린 그의 콘서트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내년 하반기에는 그의 20집이 발표된다고 한다. 나도 분발해야지, 거북이 걸음으로!
에필로그
11월 26일. 평소 아이브와 뉴진스를 추앙하는 규문의 청년들 및 규문의 조용필 팬클럽(회원 2명) 회장님과 단체로 콘서트를 즐기고 돌아오는 전철 안. 채 감흥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주로 내가) 주절주절 떠들었으리라는 건 명약관화. 동대문역인가에서 규문의 5인이 모두 내리고 나 홀로 남았는데, 옆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냉큼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조용필 콘서트 다녀오셨죠?”
“아...네.^^;;”
“말씀나누시는 거 다 들었어요. 내일도 오세요?”
“(부끄... 어라? 오늘 보고 가는 건데 이건 무슨 소리?) 네?... 저는 오늘 왔으니까... 그럼 내일도 또 오시는 거예요?”
“네. 저는 네 번 다요. 후훗”
이것이 팬클럽의 위용인가! 살짝 당황하는 사이에, “그런데... 저 청년들하고는 어떤 관계세요?”
“아... 네... 같이 모임을 하고 있어요;;”
“그러시구나~ 청년들이 이런 데를 따라오고, 정말 훌륭하네요!”
규문의 청년들은 그저, 우울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두 중년 여성에게 호응 한번 해줄까,라는 거만한 태도로 따라가 즐겼을 뿐인데, 졸지에 훌륭해지고 만 것이다! 하나 더. 그 고귀하고도 스펙터클한 콘서트 체험 이후로, 규문의 청년들은 뉴진스와 아이브를 듣는 식사준비 타임 짬짬이 조용필 옹의 노래를 청해 듣게 되었다는 알흠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용필의 음악을 들어봐야겠네요~ ❤️
음악이 너무 좋아서 그게 곧 삶이요, 이에 대한 꾸준한 배움과 연습이 즐거울 뿐인 조용필에 대해 일단 경외감이 밀려오네요~~ (동시대 이모씨, 전모씨랑 다 비슷한 급인줄 알았...)
동시에 조용필처럼 늙어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당장 닥친 글쓰기 수정도 하기 싫은 소인에게는 험난한 길, 가시밭 길로 보인다는.ㅋㅋ
언젠가 배우는 걸 좋아하는 군자 뮤지션 조용필에 대한 채운샘의 발랄한 인터뷰가 성사되기를 바래봅니다.😉
우선 기원문 올리기!!!
성공한 덕후, 일명 ‘성덕’이 되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꿈이 깨진다는 것과 동시에… 여튼 어디 한번 되려나… 오래 살아 봅시다!!!)
초6 이후, 가수 조용필님에 이리 열광하는 이를 오랜만에 마주하여… 추억 돋게 봤슴돠!!!
선생님의 넘치는 설렘설렘에 덩달아 들썩이며 읽었음요. 재미지네요~~ ㅋㅋㅋ🎶
개인적으로 음악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지만… 이 표현이 참으로 무색한 것이, 내 인생과 함께한 음악 이야기를 풀어보라고 하면… 좀 부끄하네요.
왜냐하면 여전히 새로운 음악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건 쉽게 빠지고 즐기고 곧 질리는 무한반복을 하고 있음의 증거는 아닐까. 한 뮤지션의 생에 걸친 작업 전체를 듣고 공부한다는 것, 누군가는 음악을 꼭 그렇게 들어야 해?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어쩌면 그런 배움으로써 태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배움과 지혜를 갈구하는 손은 우리 늙음을 새로움으로 살아가게 하겠구나… 이번 숏컷에서는 ‘새롭다’의 새로운 용법을 배운 것 같아요^^
아직 멀었네요. 본격적인 썰을 풀려면. 이건 뭐 팬심만 확인한 정도. ㅎㅎ. 조용필 음악 들으면서 읽었는데, 음악과 글의 화학작용 속에서 저의 젊은 시절도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그 시절의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는게 아니라,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희열과 놀라움, 즐거움 등이 환기되었습니다. 정서의 기억이라고나 할까. 그시절 스타의 건재함이 주는 감동이란 기량의 출중함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꼿꼿하게, 담백하게 가는 자세와 거기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즐거움의 기운에 내 몸이 반응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조용필! 제 인생에서 딱 한 번 가본 콘서트가 조용필 콘서트였어요. 무쟈게 비가 쏟아지던 날 천안까지 가면서 콘서트가 혹시 취소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죠...우비를 입은 채 내내 서서 색조등을 흔들어대며 신나게 리듬을 탔죠! 이제 그 조용필도, 나도, 늙어가는 중이네요. 이 늙어가는 현재 속에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하며 살아야 할까... 다시 물어봅니다. 샘이 던져주신 계묘년의 화두네요.... 조용필팬으로서 부디 죽기 전에 샘의 멋진 인터뷰를 만날 수 있기를!!^^
..... 그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늙어간다는 건, 현재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도하기... 자신의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가를 알아 집중적으로 연습하기... 샘, 잘 읽었습니다......
펜이 된다는 게 이러거군요!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고 듣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자신의 음악을 위해 노력하고 훈련하는 그 기본기가 있는지를 봄으로... 펜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걸... 그리고 그런 예술가를 알아보는 능력까지 있어야 한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