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기
민호
집, 원하시죠?
지난 9월, 국민의 힘 경선에서 윤석열이 유승민의 공약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내용은 군 복무자에게 ‘청약가산점’을 주자는 것. 누가 원조냐며 아옹다옹하는 모습이나 군복무를 둘러싼 징징거림은 별로 관심이 안 갔다. 그보다 의문스러웠던 점은 그런 발상에서 공인되고 있는 한 가지 단단한 전제, 즉 주택청약 점수를 더 받는 것이 보편적인 보상이거나 혜택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산점 제도가 유효하려면, 우선 사람들이 그 점수가 가져다 줄 것을 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취업가산점이 전제하는 바는 모두가 취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청약가산점이 논의에 부쳐졌다는 것도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이제는 누구라도 주택청약을 신청한다는 사실. 마치 취직을 원하듯 당연히 아파트를 분양받기를 원한다는 사실. ‘집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마치 화폐처럼 통용되는 가치가 되었다는 사실.
참 의아한 시대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집값은 치솟고, 초등학생 장래희망 1순위가 임대업자(건물주)이며, 저출산과 상관없이 아파트는 끝도 없이 올라간다. 학생도 노인도, 주부도 정치인도, 직장인도 백수도 모두 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최근 연애를 계기로 집을 둘러싼 강박의 뜨거운 맛을 보게 되었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런데도 그놈의 ‘서울의 집’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조건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 조건에서 거리가 멀고 가까워질 가망도 없는 내가 어떤 이들에겐 반목을 야기할 크나큰 스트레스 요인이라는 것을 전해 듣자 슬퍼졌다. 반발심과 열등감과 뒤섞인 채 집을 원해보기도 하고 집을 원해야 하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지금에야 이 사태의 이면에 대해 다시 질문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우리는 집을 원하면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럴 때 어떤 마음의 풍경이 펼쳐질까? 집-재산의 마련이 지상과제가 된 시대, 불교는 그 불타는 마음을 돌아보는 데 어떻게 힘이 될 수 있을까?
‘거위’의 꿈
요즘 무슨 고민을 하며 사느냐고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내집마련과 그것을 위한 투자였다. 역시 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한편, 정말 그렇다니 하며 조금 놀라기도 했다. 대안학교에서 나름 특별한 경험을 함께 해왔던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졸업 후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했다면, 그래서 자취, 연애, 취미 등에서 돈의 필요성을 실감하기 시작했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흐른다. 집. 집을 마련하자. 자기가 살 집이든 남이 살게 할 집이든 일단 있었으면 좋겠다. 대출을 끼더라도 좋다. 집은 하나의 자본이고 값이 오르면 차액이 남을 테니. 게다가 대출 없이는 집을 살 수가 없다. 그러려면 불혹이 넘어야 한다. 커다란 투자대상이자 투자수단으로서의 집. 집은 돈벌이의 핵심 목표이자 주요한 수단이다.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투자들은 용인된다. 가상화폐도 영혼을 끌어오는 것도 우리에겐 문제가 안 된다.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집을 원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볼 수 있을까? 젊은이들의 고민이 온통 집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췄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물론 나 역시 젊은이이고, 이 시대말고 다른 시대를 산 적은 없지만, 그래서 이놈의 집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보고 싶어진다. 대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조건들과 더불어 집을 원하게 된 걸까?
우리의 위치를 한번 점해보자. 우리 MZ세대는 배고파본 적도, 추워본 적도, 앓아본 적도 없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음식과 서비스가 넘치고, 히터와 에어컨이 빵빵하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간다. 부조리와 폭력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신고하면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리 이전과 그 이전 세대의 노력의 결과다.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산업화에 힘썼고 아버지 세대는 국가의 억압과 싸우고 민주화에 힘을 썼다고 말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시대가 이뤄놓은 그 풍요 위에 올려진 세대다. 살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어볼 일이 없는, 잘 가꿔진 정원에 자라난 풀들 같다. 국가든 가족이든 신념이든 어떤 ‘의미’에 자신을 걸어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자기 안위 외에 무언가에 책임이라는 중력을 느껴본 적이 없는 존재들. 우리는 꼰대도 싫고 불평등도 싫고 노동도 싫다. 돌봄이나 부양 같은 일체의 수고로움도 견디고 싶지 않다. 어떤 면에선 스펙 쌓기도 질린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포기한다. N포. 기성세대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이건 그렇게 무모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그냥, 싫은 것은 안 한다는 우리의 감각에서 나오는 반응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젊은이들의 부동산 열망이 의아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달리 원할 게 없다. 달리 꿈꿀 게 없다. 지금 이 안락과 편의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필요할 뿐. 그게 집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바라는 내집마련은 다른 결을 띤다. 부모세대 혹은 그 위의 세대의 내집마련의 논리는,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의 소유보다도 스스로의 손으로 뭔가를 일구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은 보금자리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추구되는 것은 나와 가족이 안전하고 따뜻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처에 거주하는 경험이다. 집은 구체적인 활동으로 채워졌다. 반면 우리가 갈망하는 집은 모호하다. 우리는 ‘하우스’를 원하지 그 안에서 꾸려질 고유한 생활이나 이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집의 위치며 크기며 안전 등을 아무리 디테일하게 따져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산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르고 내리는 시세로 환원되는 추상적인 집, 즉 건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교환가치다. 그러니 거기 사는 사람의 수에 상관없이 큰 집을 원하고 거기서 보내는 시간과 상관없이 쾌적한 집을 원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내 집을 갖는 것과 건물주가 되는 것은 동일한 일로 여겨진다.
집, 집 거리면서 우리가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린 그 집에서 무엇을 할지도 머릿속에 없다. 비싼 아파트를 얻어도 주말이면 캠핑가고 절기별로 해외여행을 가며 평일에도 밤늦게 들어가 잠만 잔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가격이 오르고 있는 집, 나아가서는 세를 놓는 집이다. 주택을 구매한 청년들 중에서 실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뭘까? 우리는 차액을 남기고 싶다. 집을 원하면서 우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원한다. 황금까진 아니어도 계속 뭔가를 낳는 거위 하나는 있어야 인생이 안정된 것처럼 느낀다는 것.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오는지는 모르겠고, 그저 수고로움 없이 내 쾌적함을 지속할 수 있는 소득을 최고로 치는 것. 이것이 안정의 이름으로든 투자의 이름으로든 집을 원하는 우리에게 깔려있는 공통적인 감각인 것 같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집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배움을 목표로 함께 모여 살며 우정을 쌓는 청년들도 있고, 청약이나 집값 같은 건 남 일처럼 여기며 하루하루 결여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도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럼 그들처럼 혹은 그때처럼 살아가면 되지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홀로 살지 않기 때문이고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집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라고 마음먹는다고 곧바로 신경 쓰지 않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올 봄까지 아무데나 몸 누일 곳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집이라는 문제가 덜컥 다가왔다. 이것은 여자친구의 탓도 아니고, 집에 대한 집착이 원래 내 안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마주침을 통해 생겨난다. 내 마음에서 불거졌던 낯선 욕구도 특정한 마주침, 지금까지의 내 생활 반경에선 드물었으나 이미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해있는 열망과의 마주침에서 생겨난 것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 애착을 따라 이러한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모든 교제를 다 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 될 일인가? 그게 윤리인가? 아니다. 그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핵심은 “애착에서 생기는 위험을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무소의 뿔의 경’)는 말에 있다. 윤리는, 생겨난 집착을 벌주고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그것들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차분히 ‘살피는 일’에 있다. 그렇게 손때 묻혀 짚어보지 않고서는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다.
‘거위’는 정말 우리를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거위 같은 집을 꿈꾸고 그것을 얻어 그 안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웃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까? 혹시 우리의 표정이 굳어지거나 호흡이 거칠어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게 사실인 것 같다. 경험 혹은 관찰에 의하면, 집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도 포기하는 사람도 이미 얻은 사람도 마음이 고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거위가 없다고 혹은 옆집에 비해 알을 잘 못 낳는다고 시끄러우면 시끄러웠지 편안해보이진 않았다. 왜 그럴까? 왜 우리의 거위를 향한 꿈은 이렇게 늘 마음의 짐이나 불만족으로 귀결되는 걸까?
평안에 머무십니까?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옷, 음식, 처소, 필수의약품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과 병고로 인해 수행은커녕 남을 해치기 쉬워지고 살아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언제나 제자들을 만나면, 견딜 만한지, 잘 지내는지, 탁발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으셨다고 한다. 또 피로와 배고픔에 지쳐서 설법을 들으러 온 목동에게 우선 음식을 주고 쉬게 하셨다. 배고픔을 달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법을 설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가장 심각한 질병”(<법구경>, ‘안락의 품’)이라는 말로부터 물질적인 조건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배움과 가르침이 이뤄지는 토대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생존의 필수적 토대들이 동시에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갈애가 일어나게 되는, 이와 같은 네 가지 갈애의 발생원인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의복을 원인으로 수행승들에게 갈애가 일어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탁발음식을 원인으로 수행승들에게 갈애가 일어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처소를 원인으로 수행승들에게 갈애가 일어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좋거나 나은 것을 원인으로 수행승들에게 갈애가 일어나게 된다.”(<이띠붓따까>, ‘갈애의 발생원인의 경’)
갈애란, “물 없는 사막에 신기루에 의해서 물이 있는 것처럼 갈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윤회의 세계에서 뭇삶을 지칠 줄 모르고 방황하게 한다.”(같은 책, 주석 467번)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갈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갈애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즉 굶주림이나 질병, 추위나 더위 등을 달래주었던 의식주라고 말씀하신다.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 도리어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어낸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지막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갈애의 성격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 음식을 원하는 것이나 추위나 위험을 피해 잠들 곳을 찾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보다 맛있는 음식, 보다 부드럽고 예쁜 옷, 보다 안락하고 넓은 집을 원하게 되는 욕망이다. 배가 차거나 편히 머물 수 있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 이전 것 혹은 다른 사람 것과의 비교 속에서 생겨나는 갈증이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갖지 못했을 때나 가지고 있을 때나, 어디에 있든 사라지지 않는 갈망. 그 이름은 탐욕이다. 우리가 거위로서의 집을 원하는 방식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이러한 탐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탐욕으로서의 갈애는 생명의 윤회하게 할 뿐 아니라 매 순간마다의 한숨과 괴로움을 되풀이하는 윤회로 이어진다.
겨우 탐욕을 지적하다니, 너무 솜방망이 같은 진단 아닌가? 우리 시대에 탐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사실 보다 나은 것을 쫓는 노력이 없었으면 이 모든 편리한 기술들과 화려한 문화들과 풍성한 음식들을 누릴 수 있겠는가? 도덕 교과서도 아닌데, 새삼스레 탐욕을 말해서 뭘 하려고? 맞다. 탐욕이 잘못되었다거나 우리 세대가 너무 탐욕스럽다고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이 시대 속에서 다를 바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생겨나는 질문이 있다. 왜 우리는 탐욕을 그와는 정반대되는 것들과 더불어 생각할까? 즉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은 것,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마치 그런 열망이 안정이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생각한다. 좋은 집이 있으면 더욱 충만하고 행복할 것처럼.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집이 생겨도 집값이 떨어지면 화가 나고 올라가면 들뜬다. 옆의 집들이나 지인들의 집들은 어떤지도 눈여겨보게 된다. 우쭐해졌다가 배아팠다가. 이게 이익인가?
“탐욕은 불익을 낳고, 탐욕은 마음을 교란시킨다. 그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두려움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같은 책, ‘내적인 티끌의 경’)
불교에서 말하는 이익과 불익이란 정말 실제적인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현행적인 것, 즉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에 관련된 것이지 나중에 이뤄질 일이거나 통장잔고나 남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잉여적 갈애가 주는 불이익, 그걸 직시해야 한다. “탐욕에 정복되고, 마음이 사로잡히면, 스스로를 해치는 사유를 하고, 남을 해치는 사유를 하고, 양자를 해치는 사유를 하고, 마음으로 괴로움과 근심을 경험합니다.”(같은 책) 집이 없는 나는 열등해, 집이 있는 나는 쟤들 보다 우월해, 저 사람들은 부러워, 세상은 불공평해, 어떻게든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아야지 등의 생각을 품고 앉아 있는 것. 이게 불이익이다. 마음에서 이런 생각이 반복 재생되느라 마음에 감사도 자비도 다른 어떤 명랑한 생각들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게 손해가 아니라면 무엇이 손해일까? 손익 따지길 좋아하는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게 아니라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상담 받고 힐링하고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정과 행복의 이름으로 투자하고 적금하고 분양정보를 모으지만 그것이 오히려 불안과 불행을 낳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빚을 내든 신세를 지든 해서 내 이름으로 도장 찍은 집이 딱 생기면 이제 정말로 마음이 안정될 것인지도 잘 관찰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만약 대답이 ‘아니다’라면 행복에 접근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아무것도 없는 자 참으로 행복하다. 최상의 지혜를 지닌 자 아무것도 없는 님이니, 무엇인가 소유한 자들의 고통을 보라. 사람이 실로 사람들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우다나>, ‘임신한 여인의 경’)
참된 행복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에서 온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이 시구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서 동일하게 설해졌다. 매번 할 일이 너무 바빠 오랫동안 세존을 친견하러 오지 못한 재가신자 잉차낭갈라까. 출산하려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려 관에서 나눠주는 기름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 고통 속에 뒹구는 유행자. 이 둘이 그 주인공들이다. 아마 그들은 조금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잉차낭갈라까는 너무 급한 일들이 겹쳤거나 동업자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던 입장이었을 것이다. 재산과 명예가 걸려 있어서 일이 바쁜데 어떻게 설법을 듣겠는가? 그리고 유행자 역시 남편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고, 워낙 급박한 상황에서 무모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행복을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복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재물을 경유해서 얻어지는 행복이라는 데에 있지 않을까? 즉 다른 사람이 만족하거나 재물이 지켜져야만 획득되는 조건부 행복이라는 것.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가르침도 마다하고, 자기 몸도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 행복. 이것은 행복일까? 이런 점에서, 소유에서 촉발되는 행복은 언제나 반쪽짜리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나머지 반쪽도 ‘이건 내 것이다’라는 집착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곧 도래할 고통을 잠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소유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유 없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우선 우리는 최상의 지혜를 지닌 자가 아니다. 혹 수행자가 된다 해도 저 말씀이 설해진 시대 배경처럼 보시가 일반적이거나 처소를 나무 아래에 둘 수도 없다. 사회의 법이 그렇다. 하지만 부처님은 재산이든 집이든 없는 것이 대수가 아니며 그것들을 버려야만 행복이 찾아온다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핵심은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 우리를 집착과 성냄으로 이끌고 마음에 비린내를 나게 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이해한 만큼 거기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행복과 평안의 이미지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어딘가에 물러야 하고 어딘가에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집과의 관계를 어떻게 다르게 가져갈 수 있을까? 어떻게 그곳을 집-재산이 아니라 집-처소로 만들 수 있을까?
거위가 되기
<앙굿따라니까야>에는 부처님께서 아나타삔띠까에게 설하신 ‘재가자가 얻어야 할 네 가지 행복’이 나온다. 소유하는 행복, 재물을 누리는 행복, 빚 없는 행복,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이 그것이다. 오잉? 위에서는 소유가 없음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행복의 첫 번째가 소유라니? 모순될 뿐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도 너무 안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선 여기서 초점이 ‘재가자’에게 맞춰 있음을 이해해야 하다. 재가자란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서 생계를 꾸리면서 법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그들의 윤리를 살피는 것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소유하고 재물을 누린다는 건 앞에서 말한 탐욕을 부추기는 일이 아닐까? 그 뒤의 설명을 살펴보자.
“그릇된 생계 다섯 가지 거래에 의존하지 않고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팔의 힘으로 땀으로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이 있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이것을 소유하는 행복이라고 이른다. (...) ‘나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로 재물을 누리고 공덕을 짓는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이를 재물을 누리는 행복이라 이른다.”(삐얏다시 테라, <붓다의 옛길>, 277쪽)
내게는 이 구절이 무척 인상 깊게 읽혔다. 깊은 만족감과 충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숫타니파타>의 ‘다니야의 경’에서 묘사되는 다니야의 모습과도 닮았다. 자신의 손과 발로 한 생 동안 살림을 잘 돌보고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은 자의 떳떳함 같은 것 말이다. 다섯 가지 그릇된 생계 수단, 즉 살생, 도둑질, 속임수, 부정직, 기만이 없는 밥벌이었으니 여기에는 미련도 후회도 켕기는 구석도 없다. 즉 집착이 덜하다. 그러니 다니야는 말한 것이다. “저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 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 바른 길로 잘 가신 님 곁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으니 태어남과 죽음의 피안에 이르러 저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숫타니파타>, ‘다니야의 경’) 재가자의 청정한 행복은 이러한 당당함에 있는 것 같다. 땀 흘려 만든 소유. 그 소유가 다음 소유를 부르는 게 아니라 공덕을 짓는 일로서 매듭지어지고, 그런 감사함으로 충분히 누려지는 모습.
팔의 힘으로 모으고 땀으로 획득하고 법에 따라서 재물을 얻기. 어쩌면 이 방법으로는 집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고사하고 지상에 원룸 하나를 얻기 위해서도 매달 100만원씩 20년을 모아야 한다. 유산을 받는 게 아니라면, 불혹이 되기 전에는 내집은 없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팔의 힘도 땀도 믿지 않는다. 집을 사려면 법답지 않아야 한다. 살생까진 아니어도 누군가를 속여야만 하고, 한 다리만 건너면 동물실험이나 군수산업, 마약거래, 노동착취 등으로 이어지는 기업들에 투자를 해야 하다. 물론 말끔한 이미지와 숫자로 가려진 모습이겠지만.
이런 게 현실이라면, 팔의 힘으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집을 소유해야 할 것의 목록에서 빼버리면 어떨까? 정확히는 ‘자가’가 아닌 방식의 다른 소유를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자기도 모르게 업을 짓고 그러는 내내 마음을 신열과 조바심으로 물들여야 한다면 말이다. 내내 불행해야 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처소의 다른 이미지를 생각해야 한다. 처소는 법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부동산이 아니라 우리가 머무는 자리다. 그날 밤을 나의 온기와 에너지로 채울 수 있는 이부자리다. 당당하게 벌어 모든 돈으로도 월세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여건에 맞춰 기준을 낮추거나 누군가와 함께 살 수도 있다. 집-처소를 마련하는 일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일이지 그 반대의 것들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순진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집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과열된 거위의 꿈이 좀 식는다면, 치솟은 집값도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이 해내고 있는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능력.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도 우리에게 시급하고 우리가 정말 피땀 흘려 가꿔야 할 것은 바로 이 재산이 아닐까. “재가자나 출가자나 자신이 소유한 것에 흡족해 하면, 그것이 만족이다. 만족은 다른 재보보다 높은 것이다.”(<법구경>, ‘안락의 품’) 만족이라는 기술과 함께 우리는 어디에 머물든 스스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갈 것이다.
집 얘기는 또 못 참죠! 어떤 식의 해결법이 있을지 궁금했는데, 역시 해결법은 없군요. ㅋㅋ 다만 집에 대한 탐욕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집을 소유하더라도 이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수행을 지속하기 위해 옷, 음식, 처소, 필수의약품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인상적이지만, 부처님께서 언제나 제자들의 수행을 물으셨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그게 단순히 오지랖이 아니라 제자들과의 수행하는 일상이 집-처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찌 보면 집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협소한 '자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주역 산뢰이괘에서도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음식과 말이 드나드는지를 관찰하는 데서부터 나 자신을 養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 왠지 통하는 것 같네요. 평소 불교가 '마음'으로 모든 문제를 추상적으로 만드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의심이 사라지는 글이네요~
거위거사님~. 당장 무슨 수를 써서든 집을 구할 수 있다면 이후에 어떤 더한 갈망이나 불안이 생겨날지라도 그건 두렵지 않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친구녀석이 벼락부자가 돼 그걸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저를 동정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 참을 수가 없을 뿐이옵니다. 한 때 저도 윤** 처럼 청약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 1도 없이, 다만 light-east villle 하나 있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지금은 그렇게 되질 않사옵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새록새록 비교의 마음이 떠오르며 편해지지가 않으니 어찌하여야 좋을지요.ㅜㅜ 언제 한번 뵙고 인사드릴 터이니 부디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