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주일을 돌아보면 이렇다. 월요일은 <논어> 강독 준비로 분주하고, 화요일은 체력단련(등산 혹은 달리기)과 다가올 세미나 책을 읽는다. 수요일은 ‘머리 아픈’ <안티 오이디푸스>와 씨름하고, 목요일은 ‘마이너’한 세계의 역사를 탐구하며, 금요일은 108호걸의 잔혹한(?) 이야기인 <수호전> 읽기에 빠져든다. 토요일 즈음 긴장이 약간 느슨해지고, 오후에 정신을 차려서 다급히 주역 과제를 하고, 일요일에는 주역 수업과 축구 경기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나는 읽고 쓰는 일로 꽉 찬 하루를 살고 있으며, 이 사이클을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금세 1년이 지나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왔다. 매일의 과제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면 번뇌가 없을 것 같지만, 바쁜 와중에도 번뇌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에 자의식이 동하고, 초보 강의자로서 매번의 강의가 긴장되고 두렵다. 옛 고향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에 슬프고 아련한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덧없고 무상하다는 느낌에 무력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번뇌는 생겨났다가, 또 금방 사라진다. 그런데 빈번하게 나를 찾아와서 나의 존재를 휘청거리게 하는 번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불안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겠지만, 내게 있어 불안은 주로 조급한 마음과 함께 자라난다. 이 마음이 생기는 조건을 살펴보면, 올해 규문에 들어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된다. 신입생으로 규문에 들어왔지만, 기존 신입 선생님들과는 달리 나는 ‘중고 신입’ 혹은 ‘경력자’였다. 6년간 다른 공부 공동체에서 읽고 쓰기를 훈련해 왔기 때문이다. 경력이 있다는 건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경력자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모호한 기준이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느끼기에 규문은 텍스트를 좀 더 강도 높게 읽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2030 또래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여기서 오랜 시간 많은 텍스트를 정리하고 공부해왔다. 그들은 철학 개념으로 생각을 더 밀고 나가 보려고 노력했고,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다. 세미나를 함께 하면서 내가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신선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게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말하기는 그들에 비해 비루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침묵하게 될 때는 부끄러웠다. 또 내가 모르는 철학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소외감과 자의식이 생기곤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가?’라며 부족함을 느끼고, 빨리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의지를 불태운다고 하여 사람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는다. 매주 돌아오는 세미나와 과제의 사이클을 통해서 나는 매번 나의 ‘부족함’과 대면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꺾이곤 했다. 열정을 불태우다가, 지쳐버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의구심이 솟아난다. ‘나는 공부를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규문이라는 일상적 조건이 불안을 생산한다면, 사회적 조건도 한몫한다. 작년 나는 30대가 됐다. 30에서 20으로 앞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사회적 시선이 점점 의식되기 시작했다. 20대까지는 ‘평균 20대 남성’들과 달리 특별한 인생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게 은근한 자부심이었다. 돈과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고 내 길을 찾고 있다는 상대적 우월감도 있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사회적 기준이 나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공부의 길을 이탈해본 경험으로 인해 가중된 것이다. 나도 언제든지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자각이 생겼다. 그러한 자각 속에서 ‘30대 평균 직장인’과 나를 거칠게 비교하게 되고, 내가 또다시 공부의 길에서 이탈했을 때 맞이하게 될 상황이 그려지면서 두려웠다. 그때의 두려움을 생각해보면 ‘돈’, ‘안정’, ‘복지’, ‘노후’ 등등에 관한 것보다는 주변 동료들에게 받을 무시 혹은 냉대가 겁이 났다. 서른이 넘어서 기술하나 다룰 줄 모른다며 하찮게 보는 시선이 있을까 무섭다. 스스로가 공부하는 삶에 당당해지고 싶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간간이 고향에 내려가 친구들과 친척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나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을 때.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내 정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 누구도 공감해주지 못할 때. 겉으로는 크게 상관없다며 넘기지만 내면에는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잔여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징표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자가 되고 싶고,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함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공자께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라”(不患人之不己知)고 하셨지만,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싫고, 사회적으로도 성실하게 공부하는 30대로 보여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의 위치에서는 그 욕망이 충족되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진다. 스스로 어딘가가 모자라게만 보이고, 그럴 때마다 존재는 삐걱거리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빠질 때 당장에 성과를 바라게 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 불안이 어떤 성과를 낸다고 하여 사라진다는 확신이 드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내 존재가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할 때, 붙잡을 수 있는 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함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갉아먹는 기분이다. 이 불안함에서 나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2. 격몽(擊蒙), 자기를 위한 공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이상적인 나’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공부하는 배치에 있는 나에게 이상적인 모습은 텍스트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읽고, 예리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솔하게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 속 말하기는 매번 긴장과 떨림 그리고 어색함의 연속이고, 질문은 엉성하고 거칠다. 글쓰기는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으로 가져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좌절한 적이 많지만, 이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았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내 삶을 추동하고 있는 주요한 힘이기 때문이다. 책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도록 하고, 글을 한 번 더 쓰도록 하고, 내 삶에 불을 지피고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겨난다. 나는 남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사는 것인가? 공부하고 있음에도 불안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인정 욕망이 주요한 동력이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자가 되는 것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건 바로 나의 공부가 외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공부란 무엇이고, 내가 공부를 왜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찬찬히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 공부-함은 텍스트를 열심히 읽고 쓰는 활동을 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얻는 보상은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면 <주역>에서는 공부-함의 이미지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산수몽(山水蒙) 괘는 몽매한 사람이 어떻게 배움을 얻게 되는지 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무지(無知)에서 지(知)로 가는 여정을 기본적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지 못한 새로운 앎을 받아들이고 습득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몽 괘는 그러한 우리의 편견을 완전히 깨트린다. 물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공부-함의 한 형태일 수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몽 괘의 상구효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上九는 擊蒙이니 不利爲冦요 利禦冦
上九는 몽매함을 공격함이니, 도적질함은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는 것은 이롭다.
(공영달, <주역정의>, 전통문화연구회, 254쪽)
몽(蒙) 괘에서의 몽매함은 특정한 앎이 부재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몽매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기보다 어리석은 앎으로 꽉 채워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앎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 걸까? 상구효에서는 몽매함으로 계속 나아가게 되면 결국에는 ‘도적’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몽매함을 공격하여(擊蒙)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로운 것이다(利禦冦). 어떤 존재를 도적으로 만드는 앎은 대체 무엇일까?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형성된 나의 ‘옳음’, ‘신념’, ‘당위’ 같은 것이 아닐까? 나 같은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제, 경남 양산, 남자 고등학교, 지방대, 군대, 각종 아르바이트 등등의 조건을 가로지르면서 나도 모르게 형성된 앎의 체계가 있다. 수십 년간 공고하게 형성된 이 습관적 앎은 누군가를 보면 ‘틀렸다’고 판단하게 되고 ‘난폭’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하고, 나 자신을 얽매이게 하고 고통에 빠트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가령, ‘계속해서 더 나아져야 한다’라는 진보적인 관념은 나와 남을 경쟁하도록 만든다. 나는 이 관념 속에서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을 은연중 무시하게 되고,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쪼이고 괴롭히게 된다. 그러한 관념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순간순간에는 느끼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벗어나는 일은 참 어렵다. 내 정신에 너무나 단단히 굳어버린 앎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앎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앎을 꽉꽉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지혜로 변환되지 않는다. 단단하게 굳은 앎은 공격하고 깨트려야(擊蒙) 다른 앎으로 변환할 수 있다. 내 안에 공고히 형성된 앎의 체계 혹은 믿음 체계를 변환시키는 것이 몽(蒙) 괘가 보여주는 공부다. 몽에서의 공부는 철저히 자기 자신과의 전투를 전제로 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의심하고, 질문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는 ‘자기 올바름’을 의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어리석은 앎이라도 나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앎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격몽(擊蒙)의 공부는 일상에서 나를 깨우쳐줄 도반과 스승의 관계와 더불어서만 이루어진다. ‘나’에 대하여 거칠게 파악하고 있는 글을 가져가면, 더 구체적으로 써오라고 지적해주시는 선생님들과의 관계.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괴롭히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면 경계의 말을 해주는 도반들과의 관계.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반응하는 친구들을 관찰하며 내 생각을 의심해보기도 하고, 도반과의 갈등 상황에서는 나의 말과 행동을 깊이 되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주역>에서 보여주는 배움의 과정은 철저히 자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이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자기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새로운 앎과 삶으로 바꾸어가는 공부이며, 그러므로 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한 공부다.
나에게 있어 공부-함은 주로 이전에는 몰랐던 새롭고 독특한 앎을 습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자기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을 변환하는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새로운 정보를 이것저것 주워 담는 게 즐거웠다. 지적인 욕망을 채우는 공부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내 삶에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다. 올해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중국사, 중앙아시아사, 유럽사, 이슬람사 등등 온갖 역사 정보를 받아들이게 됐고, 그로부터 세상을 보는 시야가 확대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제부터는 ‘나’를 좁은 영토에 가두지 않고 광활한 공간과 연관지어 사유하고,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나의 고민을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공부가 지식과 정보에 치우쳤을 때의 한계는 그 공부가 나의 고집스러운 앎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앎을 받아들이면, 기질상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으로 흘러간다. 특별한 정보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나의 인정 욕망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방향으로만 공부를 이어가다 보면 남들보다 더 풍부한 지식과 더 신기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커지게 된다. 내 존재가 불안했던 이유는 공부의 방향이 나를 변환해가는 것으로 중심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외부를 향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다시, 자기를 위한 공부로 중심을 잡아서 나아간다면 존재적인 불안감이 줄어들지 않을까?
3. 기다림(需), 배움을 체화하는 시간
이제까지 나는 세미나 혹은 과제를 준비할 때 ‘다른 사람’보다 꼼꼼하게 읽고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왔다. 산만한 정신력과 물렁한 인내력 때문에 실제로는 제대로 읽어가지 못한 적도 많고, 엉뚱하게 과제를 제출한 적도 많지만 언제나 나를 추동하는 것은 비교심리였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더 잘하려고 하는 것은 내게 오랫동안 굳어진 공부 습관이자 공부 동력이다. 초, 중, 고, 대학교를 중퇴할 때까지, 10년 이상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고, 등급에 따라 삶을 위계 짓는 경쟁 체계를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반복하고 학습했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은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을 누르고 승리하면 쟁취되는 것이라는 앎이 내 몸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다. 그러한 앎은 내게 우월감과 패배감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내 몸에 각인된 이 앎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외부로 향하는 공부 습관을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전환할 수 있는 걸까?
<주역>은 우리가 삶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더라도 그 어리석음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산수몽(山水蒙) 괘 다음에는 수천수(水天需) 괘가 오는데, 여기에는 오묘한 이치가 있다. 수천수(水天需) 괘의 형상을 보면, 수(需)가 인생의 어떤 시점을 말해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상전에서 표현하기를, 수(需) 괘는 비가 내리기 전에 ‘구름이 하늘 위로 뭉게뭉게 모여드는 모습’(雲上於天)이다. 이는 아직 비가 되지 못한 상태, 즉 구름이 모이고 있는 운동에 집중하며 그때를 ‘기다림’이라고 부른다. 기다린다고 할 때 우리는 주로 지금이 아닌 미래에 도래할 성과나 보상 혹은 결과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수(需) 괘의 기다림은 반드시 몽(蒙) 괘와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몽(蒙)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앎을 배우고 전환하려는 노력의 시기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서 형성된 우리의 몽매함이 단번에 깨질 일은 없다. 나 같은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떨치고 싶지만, 떨쳐내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몸에 붙은 관성의 힘이 그만큼 세기 때문이다. <주역>은 단번에 되는 일이 없음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배움을 체화하고, 신체와 정신에 다른 습관이 달라붙을 때까지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배움을 체화하는 기다림은 미래의 성공을 꿈꾸는 기다림과는 다르다. 미래의 성과를 바라는 것은 현재를 결핍의 상태로 만들게 된다면, 배움을 체화하는 기다림은 현행하는 어리석음을 인식하고, 전환하는 활동이 중심이다. 여기서는 현재의 활동에 집중하게 되고 미래는 방향성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구름이 모이다 보면 어느새 비가 되듯이, 반복적으로 배움을 체화하는 활동이 모여서 어느 순간 질적인 도약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需) 괘의 괘덕을 보면, 수(需)는 험난함이 앞에 있는(險在前也) 기다림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험난함에 대한 이미지는 빌헬름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 힘은 물, 더 자세히 말하면, 움직이는 물이다. 그 힘(물)은 하늘을 향해 오르기와 하늘로부터 내려오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물은 밑으로 쏟아져 내려 안개가 되고 또다시 구름이 되었다가 비로 쏟아진다. 이것은 끝도 없는 깊은 곳으로 풍덩 빠지는 심연(구덩이)이다.”(리하르트 빌헬름, <주역강의>, 소나무, 37쪽) 빌헬름은 험난함에 빠지는 것을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이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또다시 안개가 되는 것처럼 무한한 반복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것이 험난함이자 심연(구덩이)이라고 말한다.
배움을 체화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도 이러한 반복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해결됐다 싶다가도,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일상에서 시시때때로 올라와 나를 괴롭힐 것이고, 언제든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번질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강건한 태도(剛健)를 갖추는 것이다. 강건해야 험난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剛健而不陷). 건(健)은 하늘의 역량을 가진 글자다. 하늘이 운행할 때의 핵심은 ‘항상’하다는 것이다. 하늘은 1년 365일 쉬지 않고 움직인다. 날이 덥고, 춥고, 흐리고, 꿉꿉해지는 변화 속에서 무리해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나태해져서 덜 나아가는 것도 없이 365일 내내 하루만큼을 간다. 무한한 변화 속에서 멈추지 않고, 그 변화에 대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 하늘의 강건함이다. 비교하고, 좌절하고,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그 감정에 빠지지 않고, 어리석은 앎을 변환시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더라도 마음을 꺾지 않는 것이 강건한 태도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또다시 생겨난다. 수천수 괘의 강건한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주체가 굳세게 의지를 낸다고 하여 강건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象曰 雲上於天이 需니 君子以飮食宴樂
<象傳>에 말하였다. “구름이 하늘로 올라감이 需卦이니, 君子가 이것을 보고서 음식을 먹고 宴樂을 한다.”
(공영달, <주역정의>, 전통문화연구회, 259쪽)
대상전을 보면, ‘기다림’(需)의 시기를 군자가 어떻게 보냈는지 알려준다. 군자의 강건한 태도는 주체의 비장함과 무거움 속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宴樂),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飮食) 가벼움과 넉넉함, 여유로움에서 나온다. 기다림 앞에서 군자가 가벼울 수 있는 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삶을 내버려 두기 때문도 아니고, 모든 걸 운명과 하늘에 맡기는 결정론적 태도가 있어서도 아니다. 넉넉함과 여유로운 마음은 먹고 마시는 것처럼 배운 것을 지속적으로 익히고 수련하는 항상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데에서 나온다. 당장 존재에 변화가 없다고 느껴지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자는 하루하루 배운 걸 체화하는 리듬 속에 살고 있기에 조급해지지 않는다. 지혜를 향해 한 걸음씩 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서는 항상적인 리듬을 구성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나태하고 게으른 마음, 자극과 유혹 앞에서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를 제어하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도와줄 배치가 필요하다. 내가 나의 삶을 방기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네트워크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늦게 퍼져서 자고 싶을 때 다시 일어나 정신 차릴 수 있도록 해주고, 새벽에 무기력이 급습해도 다음 날 세미나 일정이 있기에 툴툴 털어내게 되고,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여다보기 싫지만,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의 도움 덕분에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욕망과 마음을 조율하도록 도와주는 관계 덕분에 우리는 강건해질 수 있다.
괘사에서 믿음(有孚)이 강조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주역>에서 믿는다는 건 ‘내가’ 맹목적으로 나 자신을 믿는 것도,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도 아니고, 부와 권력을 믿는 것도 아니다. 내가 놓인 배치 속에서 하루, 하루 충실할 때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게 믿음이다. 배움의 배치에서는 세미나가 있으면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어가고, 과제를 성실하게 해 가며,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이 믿음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믿음이 형성되고, 그와 더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커지게 된다. 다시 열심히 읽고 써야 한다는 결론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내세우는 읽고 쓰기와는 다르다. 상대를 앞지르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배움을 체화할 수 있는 배치를 만들기 위하여,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힘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함께 걸어갈 동료들이 필요하다.
당장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과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마다 배움의 배치안에서 자신을 잘 관찰하고 방향을 자기 자신으로 전환하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불안에서 벗어난 해방된 상태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 다르게 해보려고 자꾸만 꿈틀대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자기도 모르게 걷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언어를 익히게 되는 것처럼, 넘어지고 엎어지더라도 강건하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나로부터 멀어지게 되지 않을까?
4. 다시, 초발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나아가기 위해서, 내게 외부를 향하는 공부 동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 동력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마음에서 나는 공부를 시작하고자 한 것일까? 이전에 몸을 담았던 공부 공동체에서 나와서 왜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는지, 그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작년, 6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당장에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다. 공부를 완전히 접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직업을 가진 후 공부를 병행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대학교 중퇴생에다 마땅한 기술도 없었기에, 우선 어디서나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하나 배우려고 했다. 그리하여 목수 학원에서 목공 기술을 익혔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공부 생활이 끝나고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내면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답답함이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기술을 배우는 건 좋았지만, 이를 더 정교하게 단련하고 숙달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현장에서 삶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지만, 나는 목공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마음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고, ‘나’를 둘러싼 이 세계와 다른 인간들에 관해 탐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웅성거렸다. 목공 수업을 수료하고 알바를 병행하며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책을 이것저것 읽었다. 하지만 그 생활 또한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않았다. 혼자서 책을 읽는다고 하여 세상과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생각에 진전이 없었다. 나의 내공으로 ‘혼공’(혼자하는 공부)은 역부족이었다. 혼자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공부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도반과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이후 다시 공부의 길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하여 올해 규문 연구실에 접속하게 됐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도반들과 함께 깊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그 하루, 하루를 바랐다. 그로부터 ‘나’-‘인간’-‘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삶을 구성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연구실 생활이 적응되면서 처음 내가 공부하고자 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다른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도반들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잘하려는 마음이 커지고, 빠르게 실력을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성과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압도하게 된 것이다. ‘나’-‘인간’-‘세상’을 탐구하는 ‘하루’를 살고 싶다는 발심은 어디에 갔는지 없어졌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성과가 있어도 허무할 거 같다는 이 기묘한 느낌은 나를 위해 나아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처음의 마음은 나를 위하는 공부였다. 그로부터 성과물이 있다면 좋은 것이고,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주역>에서 수없이 말하듯이 때(時)는 주체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가까이는 여섯 효의 관계가 있고, 멀리는 우주적인 배치가 동시에 작동한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에서 ‘나’의 의지로 무엇이든 될 것이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되어야 할 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비난하고 부정하게 된다. 때(時)는 내가 의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놓인 배치 위에서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때론 여유롭게, 때론 전투적으로 공부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은 내게 주어진 이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뿐이다.
샘의 공부 여정이 그러했군요. 규문에서 처음 샘을 봤을 때 그 이름이 너무도 '성현'의 냄새가 나서 본명이냐고 어떤 샘께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글을 따라가다보니 역시 만만치 않은 뭔가를 함장하고 계셨던 분이었다고 느꼈던 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보면 뭘해도 어딘가 공허하고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결국 힘든 공부의 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제게는 남들이 누릴 수 없는 복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 나침판이 작동한다는 사실이 감사할 일이죠.
맞아요. 공부가 외부의 뭔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공부, 자기배려로서의 공부가 될 때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뚫고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을 저도 경험합니다. 한 줄도 글이 나아가지 않을 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자기배려의 자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깨나가야하는지를 직시하고 용기를 낼 때 다시 한 발을 내딯는다는 느낌을 우리는 알고 있죠. 공부가 힘들어도 그 맛에 딴 짓을 하다가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아요.
샘의 글에 깊은 응원을 받는 느낌입니다.
박규창
2023-12-27 10:24
오... 공부가 어떤 결과물을 내는 것에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으로 옮겨갔군요. 이 비약이야말로 아직 하루를 온전히 공부하지 못하는 우리가 자주 겪고 경험해야 할 공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언가를 단번에 꿰뚫지 못하는 우리 같은 둔재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나 싶기도 하고요. 마음에 품고 용맹정진합시다!
민호
2023-12-27 10:40
진솔하고 치열한 글쓰기에 쏙 홀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매달리는 일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그렇지', '나는 어떤가'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언제나 '공감'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외부를 향한 공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공부가 언제나 남도 위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기다림, 강건한 기다림,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맺히고 있을 구름을 생각하며 마음이 꺾이게 내버려두지 않기.
조급하기로 어디서 지지 않는 저로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때(時) 안에서 기다림의 기술을 닦는 이의 나아감에 동참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샘의 공부 여정이 그러했군요. 규문에서 처음 샘을 봤을 때 그 이름이 너무도 '성현'의 냄새가 나서 본명이냐고 어떤 샘께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글을 따라가다보니 역시 만만치 않은 뭔가를 함장하고 계셨던 분이었다고 느꼈던 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보면 뭘해도 어딘가 공허하고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결국 힘든 공부의 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제게는 남들이 누릴 수 없는 복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 나침판이 작동한다는 사실이 감사할 일이죠.
맞아요. 공부가 외부의 뭔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공부, 자기배려로서의 공부가 될 때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뚫고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을 저도 경험합니다. 한 줄도 글이 나아가지 않을 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자기배려의 자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깨나가야하는지를 직시하고 용기를 낼 때 다시 한 발을 내딯는다는 느낌을 우리는 알고 있죠. 공부가 힘들어도 그 맛에 딴 짓을 하다가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아요.
샘의 글에 깊은 응원을 받는 느낌입니다.
오... 공부가 어떤 결과물을 내는 것에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으로 옮겨갔군요. 이 비약이야말로 아직 하루를 온전히 공부하지 못하는 우리가 자주 겪고 경험해야 할 공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언가를 단번에 꿰뚫지 못하는 우리 같은 둔재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나 싶기도 하고요. 마음에 품고 용맹정진합시다!
진솔하고 치열한 글쓰기에 쏙 홀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매달리는 일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그렇지', '나는 어떤가'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언제나 '공감'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외부를 향한 공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공부가 언제나 남도 위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기다림, 강건한 기다림,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맺히고 있을 구름을 생각하며 마음이 꺾이게 내버려두지 않기.
조급하기로 어디서 지지 않는 저로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때(時) 안에서 기다림의 기술을 닦는 이의 나아감에 동참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