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철학하기>는 이번 달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코너입니다. 크크랩, 일리리 등등 규문 세미나의 막강 에이스로 활약 중이신 난희샘께서 필자로 등판하십니다. 난희샘께서 '늙음'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주실지 기대됩니다.^^ 모두 즐겁게 읽어주시고, 열렬하게 반응해주세요~
돈 룩 업? 룩 업 에이징!
1.늙음에 대한 반항과 무지
복지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지공선사’ 즉 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나의 삶 속 ‘늙은 한 사람’은 물음표의 세계다.
나에게 늙음의 이미지는 냄새 같은 것이다. 늙은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늙은 사람의 방에 들어서면 이상한 그을음 냄새가 난다. 단순히 청소상태가 불량해서 나는 냄새라기보다는 늙은 몸이 풍기는 독특한 냄새. 늙은 몸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 윤활유가 부족해 사물들끼리 갈리는 소리 같은 것이 뼈마디에서 새어 나온다. 밥을 먹고 나면 창자가 꿈틀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꾸르 꾸르륵, 민망하게 옆 사람한테까지 들린다. 늙은 사람이 가까이서 말할 때 구취가 난다. 아마도 완전연소되지 않은 음식물이 부패하면서 뿜어대는 냄새가 아닐까.
늙은이의 화제는 진부하다. 했던 소리를 또 한다. 특히 늙은 남자들은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젊은것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못 심각하게 진단한다. 피땀 흘려 건설한 나라를 젊은것들이 망쳐놓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늙은 사람은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할 때 팔짱을 끼고 듣다가 점잖게 몇 마디 한다. 왜 쉬운 걸 괜히 어렵게 이야기하느냐고. 늙은 사람은 몇 가지 안 되는 언어를 코에 걸면 코걸이로 귀에 걸면 귀걸이로 사용한다. 누가 그 말을 반박하면 그게 그 말 아니냐고 화를 낸다. 늙은 사람이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젊은것들’은 ‘덕담 들어주기’ 봉사할 각오로 무릎을 꿇는다. 늙은이는 답을 알고 있다. 지난했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어렵사리 도출해 낸 ‘인생의 지혜’를 누구에게라도 전수해주고 싶지만, 문제는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인이 젊은이들의 수다판에 슬며시 끼려 하면 젊은이들은 하던 말을 멈추고 노인이 가기를 기다린다. 딱히 노인을 소외시키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노인에 대한 배려라면서.
늙은이는 다른 세계에 산다. 늙은이의 심리적 공간은 어두컴컴한, 공기도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뒷방’이다. 치워버려도 아무도 애석해하지 않을 후미진 공간에서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늙은이가 사는 의미라고는 없어 보인다. 환한 빛 속에 넘실대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낯선 공간, 거기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찍힌 낙인은 임무 해제, 더 이상 쓸모없음. 그의 신체는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 끝에 입꼬리 눈꼬리가 쳐지고 팔자주름은 팔자(八子)로 미간의 주름은 내천(川)자로 깊게 파이고 턱살이 늘어지고 목은 점점 어깨를 파고들고 D라인 몸통에 가는 팔다리. 그는 외계인이다. 어느 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편이 하는 말, “당신은 늙어갈수록 장모님을 빼다 박네.” 내색은 안 했지만 진심 충격이었다. ‘그러는 지는...시아버님 빼박이구만.’ 속말로 복수했지만 시원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늙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마치 늙음은 저 미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고, 언젠가 지금과 같지 않게 될 그날은 따로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만은 청춘’, 이런 말도 듣기 싫었다. 몸이 늙는데 어찌 마음만은 청춘인가. 헛소리다. 남들이 늙어가는 육신에 가하는 그토록 눈물 나는 노력들이라니, 얼마나 하찮은가! 나이 들면 자연히 늙는데 뭐하러 그렇게 저항하나?
애초에 파토스를 동반하지 않는 질문은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그 반항기 어린 심사를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무엇인가에 반항심이 든다는 것은 일단 그것과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 전제된다.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니? 나에 대해 ‘너’를 대상화한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실체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 반감은 세상을 재단하는 나만의 고유한 방식을 일러주는 소중한 신호가 아닐까.
늙는다는 것에 초연한 척 무심한 척하는 이 심리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뭘까? 노화에 무심한 척하든 그 노화에 칼을 대든, 노화를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결국 같은 지점을 맴도는 게 아닌가. 나는 늙는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의심하지 않은 채, 우리 시대의 신앙, 즉 ‘뭐니뭐니해도 젊음이 좋다’는 신앙에 동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젊은 것은 이런 것이고 늙은 것은 이런 것이야,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젊음과 늙음을 나누고 늙음을 혐오해,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늙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데, 그게 안티 에이징 풍조지. 그게 문제야. 그런데 따져보면 이건 ‘내 문제’라기보다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듬성듬성 수렵 채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문제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글이 이렇게 죽도록 쓰기 싫은 것만 봐도 너는 그 문제가 절실하지 않잖아. 그럼 뭐가 문제지? 현상적인 문제를 뚫고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대체 늙는다는 게 뭔가?
2. ‘돈 룩 업(Don’t look up)’, 두려움의 주문
늙는다는 것이 재난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전세계가 늙음을 대놓고 혐오하고, 동안(童顔)에 미친 것 같다. 듣도 보도 못한 다종다양한 노화 방지 노하우들이 삶의 현명함으로 둔갑하는 시대, ‘에이징’에 ‘안티’한다며 떠들어댄다. 얼굴에 손을 댄다는 건 불경(不敬)스런 일이고, 마흔 이후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자신의 삶의 이력이 묻어나는 얼굴은 ‘얼꼴’이라고 배웠던 나는 ‘안티 에이징’ 시대의 풍경이 낯설다. 눈을 감았다 떠보니 아주 이상한 세상에 도착해 있는 것 같은 느낌. 보톡스, 필러, 들어도 기억 못할 이상한 시술들이 판을 치고 영향력깨나 있는 이들이 자신의 미적 취향을, 그것도 아주 조야한 취향을 언론에 뿌려대고 얼마 후 그 취향이 내 이웃에 와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와 함께 늙어가던 연예인이 어느 날 띵띵 부어서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어색한 얼굴로 화면에 나올 때, 뭔지 모를 배신감과 서글픔이 느껴진다. 죽으면 썩어질 몸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 죽으면 썩어질 몸이니까 저렇게까지 하는 건가. 떠들썩하고 낯선 이 상황이 니체가 말했던 ‘이민자를 실은 배가 출항하기 전의 마지막 순간’과 겹쳐진다
골목길들, 욕구들, 목소리들이 빚어내는 이 혼란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내게 우울한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있다. 얼마나 많은 향락과 초조와 갈망이, 얼마나 많은 목마른 삶과 인생의 도취가 매 순간 생겨나고 있는가! 하지만 이 모든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삶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이제 곧 정적이 찾아올 것이다. 각자의 뒤에는 그의 그림자, 그의 어두운 동반자가 서 있다! 언제나 그것은 이민자를 실은 배가 출항하기 전의 마지막 순간과도 같다. 사람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할 말이 많은데, 시간은 급박하게 다가오고, 대양과 그의 침묵이 참을성 없이 이 모든 소란의 뒤편에서 자신의 먹이를 그리도 탐욕스럽고, 그리도 확고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극히 사소한 것이며, 가까운 미래가 전부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이 성급함, 이 비명, 이 마비 상태, 이 자기기만이 생겨난다! - 니체, “죽음에 대한 생각”, <즐거운 학문> 278
재난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대부분 외부로부터 조달받은 것이다. 전쟁, 기아, 자연재해 같은. 그런데 우리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재난만 재난일까? 생각해보면 신체의 차원에서는 뭔가가 계속 진행 중이다. 밖으로 드러난 재난들은 일상 속의 무의식적 습관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가 잠재적인 재난 상황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여지없이 아저씨가 되어버린, 그러나 한때는 꽃미남이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돈 룩 업’이라는 영화를 봤다. 지구를 향해 큰 혜성이 날아오고 있고 그것과 충돌하는 순간 지구는 멸망한다. 6개월 후, 과학적 관측 결과에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고지하는 과학자들은 바보가 되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숨기지 못해 안달이다. 다 죽게 생겼는데, 왜?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멸망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고 왜곡하고 숨기다가 급기야 쇼를 벌인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라, 돈 룩 업!
비밀이 잉태되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 처음부터 존재하고 잃어버린 적도 없는데, 그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것. 숨겨진 비밀은 찾으면 그만이지만, 드러나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밀 중 가장 큰 비밀이 아닐까. 비밀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비밀로 만드는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다. 비밀의 비밀스러움은 누구도 그 비밀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으므로 비밀이 된다는 데서 기인한다. 다 안다는 믿음 속에 고의적으로 은폐되는 사실, 그것도 집단적인 무지를 서로서로 조장하면서 진실 말하기가 오히려 희화화되는 사태.
니체는 “이 모든 소란의 뒤편”에 “그리도 탐욕스럽게, 확고하게 먹이를 노리는”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밤에도 불을 켜고 살다 보니 그림자를 잃어버린 걸까. ‘안티 에이징’의 신화는 마치 그림자 없는 신체가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흥분시킨다. 불교의 한 우화가 떠오른다. 무상(無常)이라는 코끼리가 달려오는 벌판에서 죽어라 쫓기다 기어들어간 우물, 흰쥐와 검은 쥐가 칡넝쿨을 갉고 있고, 떨어지면 바닥에 도사린 독룡에 잡아먹힐 처지에도 다섯 방울의 벌꿀에 탐닉해 있는 사람의 모습. 싯달타의 출가를 두려워했던 정반왕이 여름 궁전, 겨울 궁전을 지어 놓고 싯달타를 생로병사를 겪는 현실로부터 유폐시켰듯이, 우리는 ‘안티 에이징’의 신화 속에서 삶을, 죽음을, 늙음을 소거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다채로운 것들이 우글거리는 이 표면이야말로 삶이라고 했다. 노화하는 몸에서 느껴지는 전과 같지 않은 이 차이들은 삶의 맨살이 건네는 말이다. 젊은 시절 혈기방장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던 몸이 노화로 인해 비로소 내 앞에 실재하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은 갱년기를 기점으로 몸이 말을 건다고 하면서 젊은 시절 등한했던 몸을 챙겨야 한다며, 말끝마다 ‘건강 최고’를 들먹인다. 홍삼을 먹어야 한다느니, 석류가 여성호르몬에 좋다느니, 화제거리 중 단연 으뜸은 ‘몸 생각’이다. 나도 생리가 끊어지려던 즈음부터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등줄기에 땀이 났다가 금방 으슬으슬해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다. 조금만 오래 걸어도 무릎 관절이 부어올라서 아침마다 하던 산책도 접어야 했다. 사레가 자주 들리고 그때마다 오줌이 찔끔찔끔 흘러나온다.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끼고 조금만 오래 책을 봐도 눈이 아프다. 밤샘? 과식?반드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리듬이 엉망이 되고 회복에 며칠이 걸린다.
몸이 실재하기 시작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는 주변 친구들의 ‘건강염려’와는 약간 결이 다르다. 건강을 염려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니체가 ‘신체는 큰 이성’이라 했을 때의 그 몸에 눈을 떴다는 의미가 정확할 것이다. 몸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몸은 조각만 한 내 의식의 통제를 받기 이전에 펼쳐진 알 수 없는 지대요, 수많은 낯선 힘들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우리에게 삶은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시간으로 표상된다. 그리고 우리는 ‘나’라고 하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관장한다고 생각한다. 즉 내 소유물인 몸을 사용하면서 변함없이 상존하는 주인공 ‘나’가 그 일생의 서사를 써가는 저자라고 믿는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조금 늙어 장년이 되어 더 늙으면 노인이 되고 노인이 더 늙으면 죽는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관장하는 그 연령별 존재를 총괄 감독하는 ‘나’. 노화를 혐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그 ‘나’가 아닐까. ‘나’라는 독립적인 실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굳은 상식은 세상의 중심에 자기를 놓는다. 노화의 슬픔, 노화의 불안은 우리 자신이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굳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꿈속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삶의 맨살을 마주할 용기, 배우기 그리고 감탄하기
삶, 그것은 죽음에의 의지를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내치는 것을 의미한다. 삶,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약하고 노쇠한 모든 것에 대해 잔혹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 결국 그것은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것, 노쇠한 것에 대한 경건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살인자가 아닐까? 하지만 늙은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니체, "삶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학문> 26
니체의 언어는 역설로 가득하다. 심장 약한 사람, 소화력이 약한 사람의 신체를 들쑤신다. 니체도 자신의 책을 다이너마이트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 문장만 해도 우리의 삶에 대한 관념을 박살 내는 것 같지 않은가? 문장을 읽자마자 드는 반감, 삶이 살인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삶이 사이코패스 같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삶은 살인이 아니라 활인(活人)이어야 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삶은 얼마나 소중하게 보존해야만 하는 것인가. 더 따스한 휴머니스트가 되라는 말은 하지 못할지언정, 살인이라니. 이쯤 되면 니체고 뭐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사상, 위안의 ‘한 말씀’이다. 늙은 현자의 경험적 지혜, 멘토들의 팁, 우리 시대 ‘어른’들의 말씀을 우리는 소비하고 싶다. 들었다고 해서 꼭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 오죽하면, 힘들겠구나’ 토닥여주는, 설탕물 같은 위로를 받고 싶다. 그런데 니체는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인간성’을 박살 내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보이네. 니체, 굿바이?
그런데 생각해보자. 철학이 필요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럴 리가 없는’ 삶과 마주치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어떤 신호다. 세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보게 될 때가 우리가 철학을 시작하는 지점이 아닐까. 그런 순간들과 마주친다 해도 대부분 번다한 일상의 중력에 끌려가 살던 대로 살면서 비슷한 패턴의 고민을 반복한다. 이때 철학의 언어는 일상의 중력을 벗어나 다른 길을 상상해볼 수 있는 힘을 준다.
니체는 저 강력한 언어로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삶이 살인자라고 할 때, 그 살인은 누구를 죽인다는 의미일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것, 노쇠한 것을 죽이는 살인자라는 말의 의미를, 늙은 모세의 ‘살인하지 마라’는 지평에 놓고 해석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하고 고통받는 것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고 노쇠한 것을 위한 경로잔치를 매일 열어도 부족할 판이 아닌가.
삶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니체는 삶을 관조하는 자를 비판한다. 저 문장 속의 ‘살인’이란 죽음에 대한, 삶에 대한, 늙음에 대한, 그 모든 대상화로부터 달아나자는 니체의 강력한 청유라고 나는 해석한다. 니체는 “우리 안에 있는 약하고 노쇠한 모든 것에 대해 잔혹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는 해석으로서의 세계만 존재하며,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해석된 세계다. 나에게 보이는 세상은 내가 보고 싶었던 세상이다.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것, 노쇠한 것’이 선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약하고 노쇠한 모든 것’이 그런 것을 출현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내 눈으로 봤던 ‘냄새나는 노인’의 이미지, 청바지에 티만 걸쳐도 아우라가 도는 젊음의 이미지 역시 허상이 아니었을까? 내가 뭘 본 거지?
니체에게 세계는 산 것과 죽은 것, 고통 없는 것과 고통받는 것, 젊은 것과 늙은 것이 미리 나뉘어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삶은 부단한 이행과정에 있지만 국면에 따라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의식에 떠오른 것만을 삶으로 인정하면서, 거기에는 소멸도 동반된다는 것을 간과한다.
우리가 항상 ‘삶에 목마른 것’처럼 느끼는 것은 삶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해석 역량의 부족함으로 인한 것이다. 삶으로 떠오르고 싶어 하는 무수한 힘들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가르는 해석의 역량만큼 우리는 삶을 향유한다. 그러니 어느 지점부터 노화가 시작된다고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따져보면 우리는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점진적인 노화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모세의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률은 우리 안의 ‘약하고 노쇠한 것’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아닐까. 선과 악을 친절히 분리해 규정해놓은 도덕률은 우리의 실존적 상황을 ‘돈 룩 업!’ 하라는 명령으로 작동한다. 노인에 덧씌워진 온갖 명령들, 이를테면 점잖은 노인, 달관한 노인, 초연한 노인...과 함께 부과되는 좋은 엄마, 현명한 아내, 효심 깊은 딸 그 와중에 교양까지 갖추고 나이에 비해 젊은... 괴물! 나는 그 명령을 새롭게, 발칙하게, 약간은 똘끼있게 해석해내는 것이 늙어가는 와중에도 고유한 젊음을 발명하는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나에게 준 용기 있는 말, “잔혹하고 냉정하게” 직시하라! 삶의 맨살을 마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는 죽기도 전에 미리 얌전히 관 속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 나는 잘 익어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 뜨겁게 살고 싶다.
와아 ! ㅋㅋㄹ 에이스 난희샘께서 소리없이 니체와 물밑 작업 벌이신 과정이 이제 이렇게 멋지게 펼쳐지는군요 샘!! 응원드리며, 난희표 룩업 에이징의 시크릿 다음 화도 매우 기대 되옵니다 ^^
주영
2023-06-07 13:59
난희샘 작년에 뿌린 씨앗을 이렇게 거두셨네요.👍 니체 글쓰기 할때 가져왔던 문제가 잘 숙성되어 한편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글이 되었습니다. 계속 청년일 것만 같았는데, 저도 이제는 어느덧 과거에 제가 욕하던 상사의 자리에 있고, 믿고 싶지 않지만 꼰대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 같아요.ㅋㅋ 이제 곧 다가올(이미 다가왔나요? 제 친구들이 이미 안티에이징 늪에 빠진 것 보니 맞군요. ㅎㅎ) 노년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사유를 나눠보고 싶고요. 난희샘이 앞으로 계속 펼칠 <노년의 철학하기> 매우 기대됩니다.
젊은이
2023-06-07 14:10
저한테 니체란 사유는 무엇보다 청년, 젊음, 활력이란 키워드로 다가왔는데, 오... 글을 읽으면서 주름진 니체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안티 에이징에서 예스 에이징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이지선다의 대답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삶을 시작할 용기 속에서 일어난다는 걸 배웁니다..! 아직 노력만 한다면 신체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 저로서는 그 용기가 어떤 건지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알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하고 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조금 짐작이 가네요. 늙음에 대한 사유를 마구마구 퍼뜨려주세요!
영아
2023-06-07 14:47
어머나! 난희쌤!! 거듭하시는 도전에 존경의 마음 보냅니디!❤️
인영
2023-06-07 15:08
난희샘, 첫 연재 잘 읽었습니다. 댓글의 샘들 말처럼 그동안 공부하신 씨앗을 틔우게 되어 함께 기쁘고 또 응원드립니다\( ̄︶ ̄*\))
니체에 대한 난희샘의 독해로, 또 난희샘의 질문으로, 우리 삶의 과정에서 늙음을 마주하는 법이란 왠지 힘이 넘칩니다.
이렇게 생기발랄하면서도 즐겁게 읽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정말 난희샘 글의 매력 포인트!!!!
우리의 늙음이라는 것이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삶의 문제이기도 한데, 매우 단편적으로 반응하죠. 미디어 광고나 주변 관계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늙음에 대한 질문을 자기 신체에 대한 이해, 자기 삶의 태도로 출발하자는 의미로
'직시하자' 라는 샘의 말씀이 샘의 표현처럼 매우 뜨겁게~ 읽히고 또 함께 용기를 얻어 갑니다. ƪ(˘⌣˘)ʃ
이렇게 뜨겁게 질문 던지는 가운데, 우리의 문제를 함께 돌아보면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노년의 철학하기]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배움이네요.
앞으로도 즐겁게 신나게 써 주세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난희샘 파이팅!!!o(* ̄▽ ̄*)ブ
수니
2023-06-07 15:45
우리에게 노화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싫은 까닭이겠지요. 죽음에 대한 냉정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 자체를 상상하는 것에서 불안이 더 클거라 생각이드네요. 죽은 이후에, 죽음이라는 현재는 우리에게는 없을테니까요. 베르그손이 노년이란 태어나서부터 점차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직전, 죽음앞에서도 친구들과 평소에 하던대로 철학적 질문을 이어가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죽음 앞에 그런 여유가 있다는게.... 노년의 삶을 뜨겁게 살고 싶다!! 는 난희샘을 응원합니다^^
휵
2023-06-07 16:28
잔혹하게! 냉정하게! 내 죽음을, 우리 모두의 죽음을 직시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나이드는 게 왜 우울하고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건지 그런 생각의 배후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는지 파헤치고 싶네요..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추하다면 거기에 경계선은 어디일지, 어떤게 젊고 어떤게 늙은 건지... (시골동네가면 예순넘으신 분들도 젊은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명명하고 정의내리는 지에 따라 세상이 헷까닥 바뀌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 화를 기대해 봐도 될까요? 유훗~~
최지은
2023-06-07 16:54
전혀 노년으로 안 보이시는 난희쌤!!
니체를 이렇게 풀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되었을까요. 난희쌤 덕분에 슬기롭게 받아들일수 있도록 쭈~욱 글 연재 부탁드립니다.
승연
2023-06-07 16:58
난희샘 글 잘 읽었어요. 저에게도 난희샘의 뜨거움이 느껴져오네요. 잘 익어가는 법을 배우면서 뜨겁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하겠지요. 그렇게 살고 계신, 그리고 살기 위해 정진하고 계신 난희샘을 응원하며 담회도 기대할께요~~
마담
2023-06-08 00:35
나의 친애하고 존경하는 난희샘~~~!! 일단 축하부터 드리고요. 첫 문장부터 재미있어 깜짝 놀랐어요. 예스에이징 세미나의 열정을 이렇게 풀어놓으시는군요.
'신체는 큰 이성'이라는 말에 눈을 떴다고 하는 선생님의 개안에 리스펙합니다.!! 스피노자도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 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전 아직 나의 신체가 낯설단 말이죠.
한 땀 한 땀 샘의 지혜를 얻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열에서 선생님의 다음 글을 기다릴께용~~
정아
2023-06-08 11:36
난희샘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니체도 반갑고, 니체를 통해 난희샘이 펼쳐주신 '늙음'의 이야기 1화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삶으로 떠오르고 싶어하는 무수한 힘들'에 대한 해석 역량의 부족함...'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가르는 해석의 역량만큼 우리는 삶을 향유한다'는 말씀이 다시 마음에 남네요.
앞으로 계속될 난희샘의 '새롭고, 발칙하고, 똘끼있는 해석'을 응원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
2023-06-09 09:11
이 글을 써내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가
눈에 선하넹ㅎㅎㅎ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이미지를
매번 깨부숴주는 신기한 엄마
"선생님도 부모에요?"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을 수 있기를!!
주역팀
2023-06-09 18:35
글이 살아서 튀어 오르는 것 같아요. 정말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노년에 대한 이런 사유를 펼칠 수 있음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니체의 말에서, 그리고 나이듦 속에서 팔딱거리는 도전적인 글에서 주역적 사유가 팍 다가오네요^^
젊은이2
2023-06-18 15:49
왜 이렇게 재밌죠...? 가둬놓고 계-속 글 쓰시게 하고 싶네요!
깨달은 척 하지 않는 노년, 잔혹하고 냉정하게 삶의 맨살을 마주하는 노년!
본 받고 싶습니다. 'look up to'라고 하면 '존경하다'라는 뜻도 되던데... 룩 업 투 난희샘입니다~
와아 ! ㅋㅋㄹ 에이스 난희샘께서 소리없이 니체와 물밑 작업 벌이신 과정이 이제 이렇게 멋지게 펼쳐지는군요 샘!! 응원드리며, 난희표 룩업 에이징의 시크릿 다음 화도 매우 기대 되옵니다 ^^
난희샘 작년에 뿌린 씨앗을 이렇게 거두셨네요.👍 니체 글쓰기 할때 가져왔던 문제가 잘 숙성되어 한편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글이 되었습니다. 계속 청년일 것만 같았는데, 저도 이제는 어느덧 과거에 제가 욕하던 상사의 자리에 있고, 믿고 싶지 않지만 꼰대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 같아요.ㅋㅋ 이제 곧 다가올(이미 다가왔나요? 제 친구들이 이미 안티에이징 늪에 빠진 것 보니 맞군요. ㅎㅎ) 노년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사유를 나눠보고 싶고요. 난희샘이 앞으로 계속 펼칠 <노년의 철학하기> 매우 기대됩니다.
저한테 니체란 사유는 무엇보다 청년, 젊음, 활력이란 키워드로 다가왔는데, 오... 글을 읽으면서 주름진 니체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안티 에이징에서 예스 에이징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이지선다의 대답이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삶을 시작할 용기 속에서 일어난다는 걸 배웁니다..! 아직 노력만 한다면 신체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 저로서는 그 용기가 어떤 건지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알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하고 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조금 짐작이 가네요. 늙음에 대한 사유를 마구마구 퍼뜨려주세요!
어머나! 난희쌤!! 거듭하시는 도전에 존경의 마음 보냅니디!❤️
난희샘, 첫 연재 잘 읽었습니다. 댓글의 샘들 말처럼 그동안 공부하신 씨앗을 틔우게 되어 함께 기쁘고 또 응원드립니다\( ̄︶ ̄*\))
니체에 대한 난희샘의 독해로, 또 난희샘의 질문으로, 우리 삶의 과정에서 늙음을 마주하는 법이란 왠지 힘이 넘칩니다.
이렇게 생기발랄하면서도 즐겁게 읽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정말 난희샘 글의 매력 포인트!!!!
우리의 늙음이라는 것이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삶의 문제이기도 한데, 매우 단편적으로 반응하죠. 미디어 광고나 주변 관계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늙음에 대한 질문을 자기 신체에 대한 이해, 자기 삶의 태도로 출발하자는 의미로
'직시하자' 라는 샘의 말씀이 샘의 표현처럼 매우 뜨겁게~ 읽히고 또 함께 용기를 얻어 갑니다. ƪ(˘⌣˘)ʃ
이렇게 뜨겁게 질문 던지는 가운데, 우리의 문제를 함께 돌아보면서 가벼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노년의 철학하기]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배움이네요.
앞으로도 즐겁게 신나게 써 주세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난희샘 파이팅!!!o(* ̄▽ ̄*)ブ
우리에게 노화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싫은 까닭이겠지요. 죽음에 대한 냉정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 자체를 상상하는 것에서 불안이 더 클거라 생각이드네요. 죽은 이후에, 죽음이라는 현재는 우리에게는 없을테니까요. 베르그손이 노년이란 태어나서부터 점차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직전, 죽음앞에서도 친구들과 평소에 하던대로 철학적 질문을 이어가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죽음 앞에 그런 여유가 있다는게.... 노년의 삶을 뜨겁게 살고 싶다!! 는 난희샘을 응원합니다^^
잔혹하게! 냉정하게! 내 죽음을, 우리 모두의 죽음을 직시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나이드는 게 왜 우울하고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건지 그런 생각의 배후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는지 파헤치고 싶네요.. 젊음은 아름답고 늙음은 추하다면 거기에 경계선은 어디일지, 어떤게 젊고 어떤게 늙은 건지... (시골동네가면 예순넘으신 분들도 젊은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명명하고 정의내리는 지에 따라 세상이 헷까닥 바뀌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 화를 기대해 봐도 될까요? 유훗~~
전혀 노년으로 안 보이시는 난희쌤!!
니체를 이렇게 풀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되었을까요. 난희쌤 덕분에 슬기롭게 받아들일수 있도록 쭈~욱 글 연재 부탁드립니다.
난희샘 글 잘 읽었어요. 저에게도 난희샘의 뜨거움이 느껴져오네요. 잘 익어가는 법을 배우면서 뜨겁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하겠지요. 그렇게 살고 계신, 그리고 살기 위해 정진하고 계신 난희샘을 응원하며 담회도 기대할께요~~
나의 친애하고 존경하는 난희샘~~~!! 일단 축하부터 드리고요. 첫 문장부터 재미있어 깜짝 놀랐어요. 예스에이징 세미나의 열정을 이렇게 풀어놓으시는군요.
'신체는 큰 이성'이라는 말에 눈을 떴다고 하는 선생님의 개안에 리스펙합니다.!! 스피노자도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 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전 아직 나의 신체가 낯설단 말이죠.
한 땀 한 땀 샘의 지혜를 얻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열에서 선생님의 다음 글을 기다릴께용~~
난희샘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니체도 반갑고, 니체를 통해 난희샘이 펼쳐주신 '늙음'의 이야기 1화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삶으로 떠오르고 싶어하는 무수한 힘들'에 대한 해석 역량의 부족함...'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가르는 해석의 역량만큼 우리는 삶을 향유한다'는 말씀이 다시 마음에 남네요.
앞으로 계속될 난희샘의 '새롭고, 발칙하고, 똘끼있는 해석'을 응원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글을 써내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가
눈에 선하넹ㅎㅎㅎ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이미지를
매번 깨부숴주는 신기한 엄마
"선생님도 부모에요?"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을 수 있기를!!
글이 살아서 튀어 오르는 것 같아요. 정말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노년에 대한 이런 사유를 펼칠 수 있음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니체의 말에서, 그리고 나이듦 속에서 팔딱거리는 도전적인 글에서 주역적 사유가 팍 다가오네요^^
왜 이렇게 재밌죠...? 가둬놓고 계-속 글 쓰시게 하고 싶네요!
깨달은 척 하지 않는 노년, 잔혹하고 냉정하게 삶의 맨살을 마주하는 노년!
본 받고 싶습니다. 'look up to'라고 하면 '존경하다'라는 뜻도 되던데... 룩 업 투 난희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