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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mun Tal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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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빈
1. 유일한 원인에 대한 믿음사춘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많이 괴롭히는 아들이었다. 당시의 나는 불만과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차서 화나고 짜증이 날 때면 언제나 아버지를 탓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직장을 그만두셨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빚만 떠안고 말았다. 어린 시절 내게 집은 어두운 공간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같이 싸우셨고, 떼인 돈을 받으려는 낯선 사람들이 오갔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입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식품 공장과 이마트 노동자, 그리고 노동상담소를 전전했고, 그것으로 우리 가족은 근근이 먹고살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다른 집 친구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옷, 신발, 사는 곳, 자동차 등등 남보다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집에 대한 불만은 조금씩 커져갔다. 그럴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우선은 부모님의 갈등이 문제였고, 그 원인은 생계의 어려움이었으며, 결국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직장이 없는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를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환원했고, 집에서 마주할 때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표출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삶을 집어삼킬 때면 습관적으로 그 원인을 따져 묻는다. 현재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유를 찾아내려고 할수록 그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보다 오히려 강화되고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미워할 때도 그랬다.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나를 더욱 옭아매기만 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이런 식으로 원인을 찾는 방식은 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는 걸까?
사실, 인과를 설정하는 문제는 개인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바라볼 때도 우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따져간다. 예를 들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할 때도 그랬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지가 중국 우한임이 밝혀지자,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원인은 중국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고는 중국인을 혐오하고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처럼 인과를 만드는 방식은 너무 단순하고 일차원적이지 않은가. 결국 누군가를 낙인찍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굳이 인과를 따질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래서는 어떤 사건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또 역사에서 어떤 사건을 이해한다는 건 뭐고 그 사건의 원인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 걸까?
마르크 블로크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문제를 재미난 예시로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알프스산 속의 오솔길을 걷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발을 헛디뎌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은 그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그것이 그 사건에서 가장 가깝고, 예외적이고, 독특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발을 헛디뎠다’는 그 사실을 그 사건을 일으킨 ‘유일한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그럴 경우 이는 ‘사고사’가 되고, 잘못은 그에게 있게 된다.
그런데 한번 그 믿음에 물음표를 던져보자. 정말 그것이 진정한 원인일까? 블로크는 하나의 사건은 수없이 많은 요소에 의해 일어남을 보여준다. 누군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한 것은 발을 헛디뎠다는 원인뿐 아니라 중력의 법칙, 오랜 지질학상의 변천에 따른 토지의 기복, 마을과 방목장을 연결하는 길 등등이 원인으로 함께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천체역학이 다르게 작용하고, 지질학적 변화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면, 그 시점에 그 장소에서 어떠한 사람이 절벽에서 추락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오늘 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러 원인 중에서 어떤 원인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요소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사건은 애초에 벌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블로크는 원인과 원인 사이에는 위계나 등급 같은 게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원인은 함께 작동함으로써 사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의 원인을 지정하기를 바라는 걸까? 블로크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지닌 정신적 편의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확실하고, 명확하고, 분명한, 즉 정답처럼 보이는 것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럴듯한 원인’을 발견하면, 그것이 ‘유일한 원인’인 양 덥석 믿어버리는 것이다. 10대 시절 내내 아버지를 미워했던 감정이 꺼지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 믿음 때문이었다.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탐구할 때, 원인과 결과를 단선적이고 단편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을 재고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일은 이성을 지닌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다. 우리는 맞닥뜨리는 사건 앞에서 항상 “왜”와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역사가는 이 지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자칫 역사적인 사건을 심판하고, 판결하는 재판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유일한 원인이 있다는 미신은 때때로 책임자를 밝혀내는 일, 따라서 가치판단의 교활한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재판관들은 어느 편에 잘못이 있는가를 묻는다. 반면 학자들은 “왜?”를 묻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대답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상식의 편견, 논리학자의 가설 또는 예심판사의 버릇 등과 같이 원인이 하나라는 생각은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하나의 방해물이 될 뿐이다. 역사는 원인이라는 물결의 행렬을 탐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 – 인생 자체가 그러한 원인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사, p.218)
역사에서 ‘유일한 원인’이 있다는 건 미신이다. 하나의 사건은 무수한 원인을 통해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건을 일으킨 ‘유일한 원인’을 찾아내서 단죄하고 싶어 한다. 블로크의 표현대로 ‘재판관’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재판관이란 어떤 사건에 대해 유죄/무죄를 밝히고 판결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개인의 역사나 전체의 역사를 바라볼 때 어떤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안이하게 책임소재를 따지는 재판관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주디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9.11 테러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9.11 테러 사건을 재판관의 태도로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9.11 사건은 알카에다 테러 세력에 의해 미국 국경이 뚫리고, 수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살상된 사건이다. 2001년 당시를 기억하기엔 어렸지만, 이후 학교나 매체에서 9.11 테러 사건의 심각성을 반복해서 듣고 배운 기억이 있다. ‘9.11 테러’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로부터 일방적인 폭력을 당한 사건이고,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은 알카에다 테러 세력과 그 조직의 리더 오사마 빈 라덴이며, 빈 라덴은 결국 처형되었다. 이것이 9.11에 대한 나의 이해였다. 당연히 피해를 받은 미국은 아무런 죄가 없고, 테러 집단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를 받은 미국은 선, 테러를 일으킨 집단은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심판’하는 순간 이 사건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은 사라진다. 블로크가 “원인이 하나라는 생각은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하나의 방해물이 될 뿐”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과 역사적 사건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하나의 사건은 아주 가까운 원인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원인까지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라면 역사 속에서 “원인이라는 물결의 행렬을 탐구”해야 한다. 한 사건은 단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고체가 아니다. 물결처럼 이어지는 원인의 연쇄 속에 사건이 있는 것이다. 9.11에 대해, 주디스 버틀러는 먼저,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테러의 원인을 오로지 그들 개인의 자생적 의지로, 그들 개인의 악의의 산물로 환원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원인을 개인화, 파편화하고서 더 나아가 이해하기를 멈추게 되면, 도대체 어떤 세상이기에 그러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되는지, 그 조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그러한 개인을 “생겨나게 한” 사회적 조건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원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슬람교 지역의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생활하는 지역은 끝없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고, 그래서 마땅히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범죄자가 되거나 준군사집단에 합류해야 한다. 또한 그런 지역에서는 연말이면 6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인다고 한다. 이러한 조건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따져보면 미국의 정책과 언론 보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의 정책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되어 이슬람교도 지역을 전쟁과 기아의 장으로 형성하고, 그렇게 형성된 지역적 조건으로 인해 테러 집단이 만들어지고, 테러 집단이 원인이 되어 9.11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9.11 테러는 또 다른 원인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다. 원인은 어떤 원인으로부터 흘러왔으며, 그 원인은 또 다른 원인으로 유동한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을 원인의 물결 속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심판관의 위치에 설 수 없게 된다. 무언가를 특정하여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9.11 테러를 일으킨 원인에는 테러 집단도 있고, 더 멀리 가보면 미국의 정책도 있다. 단지 테러 집단만을 원인으로 삼았을 때는 그 집단을 벌하면 끝나는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이 될 뿐이다. 미국의 정책과 언론 보도는 이슬람교도 지역에 테러 집단을 계속해서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다중적 인과성을, 인과의 연쇄들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때만 실천이 달라질 수 있다. 가시적 원인만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건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여러 원인을 이해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조정해나갈 때 비로소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
10대 시절에는 아버지의 무능을 탓하며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철없는 분노를 묵묵히 받아내고 감내해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버지의 무능 때문에 나의 10대가 어두웠다는 건 짧고도 얄팍한 인과 연관의 산물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그 당시 한국 사회가 조성하고 있던 환경과 무관할 수 없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IT 벤처기업 육성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 당시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에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느껴지셨던 것 같다. 그래서 무리하게 빚을 내어 벤처기업에 투자했지만 모두 잃게 되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 때, 당시 아버지 주변에는 건설 사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 길이 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셨으리라. 그 사람들이 원인이 되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드신 것이다. 원인은 다른 원인을 낳고, 그 원인을 더 멀리 좇아가다 보면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라는 원인도 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은 단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의 흐름 속에서 온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버지의 기질과 운 때도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나 자신이 너무 어려서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도 내 ‘불행’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내 유년기의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라야, 비로소 나를 사로잡았던 부정적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블로크에 따르면 “‘이해하다’(comprendre)라는 말은 (...)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지만 반면 희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 말 속에는 무엇보다도 ‘친밀함’이 깃들어 있다.” (<역사를 위한 변명>, 171쪽) 이해한다는 것은 더 가까워지고자 하고, 더 알고자 하는 것이다. 반대로 심판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알기를 포기하고, 멀리 떨어져서 규정하는 것이다. 심판하는 자일 때는 원인과 결과가 고체화되고, 거기에 엉겨 붙은 감정에 매이게 된다. 이해하려는 노력만이 굳어버린 관념을 유연하게 만들고, 원한 감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실천적 차원에서도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깊은 차원에서 영향을 주는 원인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르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도록 한다. 타자의 삶과 인간이 겪는 사건들을 더 ‘친밀하게’ 바라보기. 나에게 역사 공부의 효용을 묻는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 공부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더 깊고 넓은 차원에서 고민하고,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한다.
"‘그럴듯한 원인’을 발견하면, 그것이 ‘유일한 원인’인 양 덥석 믿어버리는" 우리의 뿌리 깊은 습관이 얼마나 많은 오해와 번뇌로 몰아가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번뇌도 깨달음도 인과를 이해하는 층위와 시야에 달렸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유의 문제도 그렇고요!!
원인들의 물결에서 더 멀리까지 서핑할 수 있기 위해 저희는 공부하고 경험하고 단련해간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이해의 문제가 선악과 시비의 판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친밀함을 형성하는 문제로 전유되는군요! 블로크에게는 중세가 바로 친밀한 시간대였다고 하는데, 문빈은 지금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친밀함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네요. 재밌군요!
쉬우면서도 재밌는 글이네요. 등산에서의 실족사, 9.11 사건을 예를 들어 말해주니 유일한 원인으로 인한 결과라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금방 이해가 됩니다.
유일한 원인이 미신이라는 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재판관으로서의 판단이 아니라 이해하라는 것. 그것이 나를 더 풍요로운 삶으로 안내해 주는 길이 되는 거네요.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애써 볼게요.
급역사공부가 하고싶에지네요. 이해는 부정적인 감정에 옭죄인 나를 해방시켜주죠.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ᆢ 함께 공부할 수있어 감사합니다.글 참 재미있네요^^
'역사는 원인이라는 물결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글귀에 잠시 멈춰서게 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무수한 원인이 개입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선적으로 생각해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주역 관괘의 동관과 규관의 시점에 갇혀있는 형국이라 할수 있겠지요. 어떻게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생각 하나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부를 할수록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하는 판단이나 견해 혹은 확신들이 얼마나 내 위주로 치우쳐 단순하게 해온 것인지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을 긍정하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다중적 인과성' '인과의 연쇄들'을 자꾸 작동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쉽고 담백하게 말씀해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글 벌써 기대한다면 부담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