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역공'은 역사를 공부하는 두 청년(문빈과 규창)의 글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청년의 기운으로 밝고, 유쾌하게 고리타분한 역사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려 보겠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로지르며 역사를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게(玩) 저희의 목표입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청년 역공' 1화
역사, ‘인간들’을 이해하고 ‘나 자신’에 이르는 공부
글 : 문빈
1. 역사 공부의 매력에 빠지다
“노예들은 밤새도록 소란을 피웠다”고 한 선원은 일기에 적었다. “그들은 배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보다 더 지독한 울부짖음은 결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베들램(Bedlam) 정신병원의 가엾은 미친 영혼 같다고나 할까. 노예들이 차고 있던 족쇄를 흔들어대서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이산, p.244)
작년,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충격받은 장면이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활발했던 시기, 아프리카 노예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했는지 잘 보여준다. 좁고 어두운 선박 안에서 족쇄에 묶인 채 울부짖는 삶, 아프리카 노예들의 울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섭고,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노예화하고 이토록 잔인하게 대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내게 역사 공부는 매번 이러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인간관을 깨주고, 지금과는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아간 인간의 면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노예의 삶뿐만이 아니다. 백인 이주민의 삶, 다이아몬드 채굴자의 삶, 무역상의 삶 등등. 역사에는 온갖 종류의 인간, 온갖 형태의 삶이 존재했다. 나는 그 무수한 인간과 삶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라고.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출발한 건 아니다. 인간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답답함과 그래서 정말로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일상적으로 가족, 연인, 친구들을 만나지만, 그들이 왜, 저기, 저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들 속의 나는 또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내 시선 안에서 좋은 사람/나쁜 사람, 나와 맞는 사람/맞지 않는 사람을 나누고 평가할 뿐이다. 이런 방식의 구분은 관계 맺음에 취약하게 드러났다.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참거나, 참지 못해 피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밖엔 없다. 나와 다르다고, 나와 맞지 않는다고 매번 참거나 피하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다른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2. 인간의 살냄새가 나는 역사
실제로 위대한 선배인 미슐레와 쿨랑주 같은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즉 역사학의 대상은 본래 인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추상화에 적합한 단수형보다는 상대성의 문법적 형태인 복수형이 다양한 것을 탐구하는 학문에는 더 적합할 것이다. 눈으로 금방 느낄 수 있는 풍경이나 연장, 기계 너머로, 겉으로 보기에는 차디차게 보이는 문서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제도 너머로, 역사학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역사가는 기껏해야 잡다한 지식을 다루는 엉터리 학자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훌륭한 역사가는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와 흡사하다. 역사가는 인간의 살냄새를 맡게 되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사냥감이 있음을 안다.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사, p.56)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학자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라면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탐구하고, 그래서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을 것 같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블로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인간들에 대한 그의 넘치는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조국인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친 ‘전투적’ 역사가였다. 자신의 시대와 그곳에서 함께 살아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위태로운 상황에는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적극적으로 저항 운동을 펼친 것이다. 역사학의 대상이 “인간들”이라는 그의 말에는 바로 그의 삶이 녹아있다. 그에게 역사는 인간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도구이며,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 위한 바탕이었다. 그는 역사가 우리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만들어주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역사가 ‘인간들’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텍스트는 사마천의 <사기>다. <사기>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마천이 그 인물들을 이해하는 방식이 대단히 흥미롭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인물들을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漢) 제국을 세운 고조 유방(劉邦)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하가 어지럽고 전쟁이 끊이지 않을 때는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는 유능한 왕이었지만, 전쟁을 끝내고 천하를 평정했을 때는 신하들을 견제하고 의심하는 무능한 왕으로 변한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신하 장량(張良)과의 관계에서는 그의 말을 경청하지만, 신하 유경(劉敬)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유방(劉邦)의 모습 중에 진짜 유방(劉邦)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사마천은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즉, 조건과 맥락을 제거한 “추상화”된 인간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시간, 공간, 관계인지에 따라 다른 성질을 띠는 게 바로 인간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한 인간을 절대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힘들의 상호작용을 읽어내는 것과 늘 함께 간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이 든다.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도 인간들은 서로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가? 이것은 인간이 특정한 상황 속에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모두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나이인데도 행동 양식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사마천도 이러한 점을 포착했다. 전란의 시대를 호령한 걸출한 두 인물,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을 보자. 두 인물은 모두 세상의 혼란을 잠재우고 통합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두 인물은 시간 속에서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유방(劉邦)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천하를 통일하지만, 항우(項羽)는 홀로 쓸쓸하게 죽는다. 같은 시대에, 같은 뜻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는다. 왜일까?
사마천은 두 인물의 기질을 대비시킨다. 항우(項羽)가 적극적이고 양강한 캐릭터라면, 유방(劉邦)은 수동적이고 유순한 캐릭터다. 이 두 사람의 기질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항우는 전쟁터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영웅이지만, 신하들과 논의할 때는 자기주장이 강한 고집불통이다. 반면에 유방(劉邦)은 전투적인 능력은 크지 않지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귀담아듣는 겸손함이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항우(項羽)는 주변 사람의 신망을 잃고 자신의 목숨도 잃는다. 반면에 유방(劉邦)은 좋은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얻게 된다. 항우(項羽)의 기질은 치열한 전장에서는 장점으로 발휘됐지만, 사람을 다룰 때는 단점으로 드러났다. 유방(劉邦)의 기질은 전투에서는 빛나지 못했지만, 실력 있는 신하를 끌어모으는 데에서는 빛이 났다. 사마천은 이처럼 인간을 변하지 않는 하나의 고유한 특징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기질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 펼쳐지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기>의 인간들은 입체적이고, 사건은 복합적이며, 텍스트는 독자가 가진 현재적 문제의식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블로크가 ‘인간’이라는 “단수형”을 거부하고 “인간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도 인간이 하나의 본질로 규정될 수 없는 다층적, 다면적 존재임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왜 인간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느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인간을 단 하나의 모습으로 포착하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A는 이런 유형의 인간이다!’라고. 그러나 인간은 그리 단순치 않았다.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때마다 빗겨나가는 부분이 항상 존재했다. 한 사람에게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면들을 발견할 때마다 당황했지만,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시간, 공간, 관계, 욕망, 기질, 습관, 관점에 따라 무한하게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게 인간이다. 나 자신을 떠올려봐도 세미나 때는 세상 진지하다가도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깃털처럼 가벼워지지 않는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나, 너, 조건을 흐름 속에서 매번 새롭게 마주해야 한다. 이해는 상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식인귀와 같은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식인귀’에 비유한다. 역사가는 마치 ‘식인귀’처럼 과거의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자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 것으로 소화해내고,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식인귀’로서의 역사가는 과거의 문서를 죽어있는 화석처럼 보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자고, 그것을 먹고, 자기 몸속에 넣어, 이해하고,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다.
역사가는 인간의 ‘살냄새’를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살냄새’를 맡는다는 건 과거의 인간들을 입체적으로 읽어내고, 그 속에서 현재의 인간들을 발견하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문제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겪는 시대의 사건과 문제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과거를 읽고 있지만, 실은 현재를 읽어내는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새롭게 감각하는 것, 그것이 ‘살냄새’나는 역사가 아닐까.
역사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경험을 종종 한다. 아프리카 역사책 속에 등장하는 흑인 노예의 삶을 보면서, 그러한 삶의 형태가 과거에만 존재했던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노예화’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불법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이카>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삶에 내몰리게 되는지 아주 냉정하게 보여준다. 불법 이주민이기에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빚은 산더미고, 애써 구한 일의 강도는 너무 세고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주인공 아이카는 거기에 출산과 산후통을 겪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노동 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녀의 삶을 떠올리면 먹먹해진다. 노예화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공장식 축산은 규격화된 공간에 빽빽하게 동물을 가두고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길러낸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 동물은 그냥 살처분해버린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역사책에 등장하는 노예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다루지만, 동시에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을 다시 보게 하고, 나아가 미래를 어떤 식으로 상상해야 할지 고민하도록 이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역동하는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에 살아간 무수한 인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 현재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존재들을 새롭게 보고 싶다. 경험은 너무 한정적이고, 그 한정적 경험에 근거해 습관적으로 사람을 보게 되는 데서 나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 역사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법을 공부하면 인간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 역사 속에는 다양한 시대와 공간, 그리고 시공간의 분류로 범주화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이 있다. 그들은 모두 나와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속하지만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들이 현재 내 옆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새롭게 만나게 해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인간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키야~ 훌륭한 역사가는 식인귀와 같다니! 이런 표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식인귀는 또 아무나 먹는 게 아니라던대요? '식인'이란 인육을 좋아하는 야만적 습성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한 맞수를 자기 것으로 취한다는 일종의 연결이라고 하는데요. 그렇게도 생각을 해보면 뛰어난 역사가가 왜 식인귀일 수밖에 없는지도 알 것 같네요. 과거의 인간들을 통해 현재 인간들을 새롭게 만나는 것! 식인귀로서의 본능에 얼마나 충실할지 기대가 되는군요. 저도 그렇게 공부해보고 싶군요. 킁카킁카
인간의 살냄새를 어떻게 킁킁거리실지 기대~~
근데 문란드님이 세미나 때 세상 진지해진다는 것은 고증이 된 부분인가요?
저에게 역사는 박제된 사건의 단편적이고 지루한 내용의 나열이란 생각이 강했는데요. 역사공부를 통해 사람들을 좀더 진하고 입체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빈샘의 진심이 전해져 저도 역사공부를 하고 싶단 생각이 훅! 들어왔네요. 잘 읽었습니다!
빈샘의 역사 공부 동기의 절실함과 절박감이 느껴지네요. "인간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답답함과 그래서 정말로 인간을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 그리고 인간들이라는 해석이 참 돋보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란 의미와 더불어 한 인간 내에 있는 다양한 면들이라고 읽혀지는 글이네요. 유방과 같이. 저에게도 그런 면이 당연히 무수할텐데 그냥 퉁치고 사는 느낌입니다. 무한 응원하며 그치지 않고 식인귀가 되어 또 다른 양털과 양유를 생산하시기를^^
시공을 횡단하며 만나는 타자들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나를 통해 타자에 이르게 되는 생생한 변형과정으로서의 공부! 나에게 이르기 위한 역사 공부 멋집니다~
빈쌤의 역사 공부! 빈쌤의 인간미가 흘러넘치네요~ 🤗
빈샘! 부디 식인귀가 되어 주세요. 소녀는 흡협귀가 되어 빈샘의 피를 쭉쭉 빨아 먹으렵니다. ㅋㅋ
ㅋㅋㅋㅋㅋ아니 은주샘 '읽는건 선택 댓글은 필수'라고 정랑이천샘께서 공지하셨지만 넘 전설의 고향스런 댓글 무엇? 은주흡혈소녀(?)님 덕에 이젠 아무말이라도 달아도 문제 없을 듯하니 음지에 계신 댓글부대원님들 어서 나오셔서 빈님 데뷔글에 축하메시지 쭉쭉! 달아주세요!
역사가를 '식인귀'에 비유한 것이 흥미롭네요. 또 역사를 통해서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에서 바로 우리의 모습을 엿보기도 하고, 인간의 복수젝인 면을 보기도 하지요. 그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가 타자와 어떻게 관계맺음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객을 하게 해줍니다!
식인귀라는 말이 소문대로 와닿네요ㅎㅎ 인간을 삼켜버flsms 역사가! 인간의 살냄새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일단 코부터 들이대고 보는 식인귀의 여정! 응원합니다 ㅋㅋㅋㅋㅋㅋ
구체적 시공간 속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들을 탐구하는 것이 역사군요. "이해는 상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근데 차이를 발견한다는 건 또 뭘까 싶기도 하고요. 앞으로의 글에서 보여주겠져? ㅎ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나와 남을 알고 우리의 현재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인 것 같군요. 나의 틀 속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연습이기도 하구요. 빈샘의 역사를 통한 성장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