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쾌락의 활용,
자기 즐거움의 주인 되기
1. 에로스와 로고스 사이에서
푸코의 삶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바로 그가 ‘쾌락의 화신’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결코 경직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10대 시절 그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의 병원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모든 마약을 삼키는” 일을 취미로 삼았고, 젊었을 때에는 “당시 유행에 맞게 남자를 무제한으로 낚는 시기를 거쳤다”(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25쪽)고 한다. 스웨덴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어느 날 베이지색의 멋진 재규어를 타고 나타나 검소한 웁살라 시민들을 당혹케 했다. 푸코의 환락적인 미국 여행은 유명한데, 강연을 하러 미국에 갈 때마다 그는 ‘LSD 여행’(trip)을 즐겼고 샌프란시스코 동성애자 게토에 있는 ‘게이 사우나’에 방문하곤 했다. 한 번은 아편 복용으로 몽롱해진 상태로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적도 있다! 엘리트 지식인이자 고결한 투사였던 푸코에게는 이처럼 락스타스러운 면모 또한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푸코가 무절제하게 쾌락에 탐닉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쾌락주의자이기 이전에 지독한 공부벌레였다. 매일 도서관에 나가서 글을 썼고, 언제나 성실하게 강의했으며, 간혹 떠맡곤 했던 번거로운 행정업무들조차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푸코의 절친인 폴 벤느에 따르면 푸코는 평생 환각제, 마약, LSD에 대한 취향을 간직했으나 “그것은 다만 몇 달에 한번쯤, 적절히 통제된 상황에서나”(위의 책, 226쪽) 있는 일이었다. 하긴, 그가 쓴 책들과 출간된 강의록들이 모든 걸 말해준다. 되는대로 살면서, 재능만 가지고서 그토록 밀도 있는 글을 쓰고 강도 높은 강의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푸코는 어떻게 쾌락과 욕망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더없이 지적이면서도 다분히 쾌락적이었던 그 안에서, 지성과 쾌락은 어떻게 공존하고 있었을까?
지성은 금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여러 층위에서 그렇다. 일정하게 지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몸 상태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고, 잘 자야 하고, 스마트폰을 보느라 눈을 혹사시켜서는 안 되고……. 또한 사유를 위한 조건으로서 정보나 자극에 대한 얼마간의 단절이 요청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때로 글을 쓰다보면 너무 많은 자료가 생각을 가로막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 생각이란 기계적인 정보처리로 격하되고 만다. 사유는 그 본성상 자극과 정보가 통제된 일종의 침묵상태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도 지성은 금욕과 통한다. 니체는 철학자들에게 금욕주의란 “가장 대담한 정신성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 조건”(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66쪽)이라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가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공부하는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절제와 금욕이 억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강렬한 쾌락을 의식적으로 좇는 건 아니지만, 나는 욕망을 조절하고 억제하는 데 능숙치 못한 편이다. 그래서 한 번씩 일탈적으로 터져 나오는 욕망 때문에 공부에 방해를 받곤 한다. 그럴 때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투자해도 내 생각 하나 바꾸기 어려운 판인데 이래도 되나 하는 후회와 가책이 올라온다. 그러나 마음은 늘 이중적이라서, 나 자신을 향하던 비난의 화살은 쉽사리 방향을 바꾼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공부도 결국 즐겁게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좀 더 편하게 공부할 수는 없을까……. 이 헛된 자학과 불평의 악순환을 벗어나자면 쾌락에 대한, 지성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금욕과 절제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또 절제란 무엇인가? 경직되지도, 자학적이지도 않은 금욕과 절제는 불가능할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내 쾌락과 어떻게 능동적으로 관계할 수 있을까? 쾌락적 실천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나 적대감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삶에 고유한 리듬과 스타일을 부여할 줄 알았던 푸코에게서 무언가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2. 흥분 아니면 이완
자, 그런데 쾌락이란 무엇일까? ‘쾌락’이라는 단어는 마치 그것이 지칭하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기라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렇지만 인간의 활동치고서 쾌락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먹고 마시는 것, 섹스하는 것, 자는 것, 머리를 긁적이는 것, 무언가를 만지는 것, 냄새 맡는 것, 골똘히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까지. 이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은 어떤 형태이건, 크건 작건 ‘쾌감’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고대의 현자도 자기 욕구를 의도적으로 굶기는 금욕수행자도, 상상하긴 어렵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기쁨을 느끼고 있지 않을지? 쾌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지극히 유동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쾌락적 경험들 가운데 특정한 몇몇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쾌락의 이미지라고 할 만한 어떤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탈적이고 충동적이며 대체로 분출이나 배설의 형식을 따르는 쾌락의 이미지가 있다. 다른 한편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휴식, 여가, 힐링으로서의 쾌락의 이미지 또한 존재한다. 흥분 혹은 이완. 그런데 이 양 극단 사이 혹은 바깥에도 쾌락적 실천들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성적 욕구의 충족이나 정서적 일치를 지연하고 유예시키는 마조히즘적 섹슈얼리티는 어떠한가? 또 해답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남기는 난해한 책을 읽을 때 생각이 풀어헤쳐지는 감각으로부터 비롯하는 쾌감도 있지 않은지? 계율을 충실히 따르는 수행자가 느낄 어떤 충만함은 단순한 목적 달성의 성취감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푸코의 시선을 경유해보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쾌락의 이미지는 욕망과 쾌락을 실체화하는 근대적 인식의 전제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드러난다. 푸코는 『성의 역사』 시리즈를 쓰면서 일관되게 “욕망과 욕망의 주체를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나남, 22쪽)강고한 전제들을 비판한 바 있다. 억압이나 금기와의 관계 속에서 욕망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부동의 실체로 만들어버리는 비역사적 관점. ‘자연적인’ 욕망이 있고 그것을 배제하거나 길들이는 ‘사회적인’ 억압의 심급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이런 상식적 전제들은 정상인이 되기 위해선 욕망이 적절하게 거세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신분석학에서만이 아니라 억압의 철폐와 욕망의 해방을 노래하는 소위 저항적인 담론들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식으로 욕망이 실체화될 때 주체가 자기 자신의 쾌락과 맺는 관계와 그러한 관계를 구축하고 변형하는 실천들은 우리의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억압 혹은 분출의 대상으로서 쾌락과 욕망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억압과 무절제한 분출. 그 사이에서 우리는 쾌락의 윤리와 기예를 상실한다. 사법체계와 의학담론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아웃라인 안에서 모든 쾌락적 실천들은 ‘취향’에 맡겨지거나 조잡한 ‘자기계발’ 담론에 포획될 뿐이다. 쾌락이 흥분 혹은 이완의 이미지로, 욕망의 충족이나 스트레스의 해소라는 반응적인 형식으로 표상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쾌락에 대한 윤리적이고도 실천적인 질문의 방식이 결여된 시대적 조건의 반영이 아닐까. 우리는 쾌락을 누리거나 욕망을 닦아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러저러한 쾌락의 실천들을 능동적 주체화의 과정 속에 동화시킬 수는 없게 되지 않았는가. 욕구를 분출하고 쾌락을 누리는 ‘나’만이 존재할 뿐 자기 자신의 실존과 분리되지 않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 역시 이러한 시대적 전제들로부터 자유롭지만은 않다. 문득 내가 쾌락이란 것을 굉장히 취약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진지해져서는 안 되고, 남들과 공유하기 힘들고, 윤리의 문제가 개입되는 순간 질식되어버리는 어떤 사적이고 단발적인 욕구의 충족. 시시한 컨텐츠를 소비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에 취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성욕을 해소하고, 예쁜 옷을 사고……. 이런 것들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즐거움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쾌락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를 지나치게 협소한 관점 속에 묶어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럴 때 나는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쾌락에 대해 일말의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쾌락과 욕망에 대해서 이중적인 입장―단념할 수도 없지만 무작정 긍정할 수도 없는―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3. 쾌락의 활용, 억압과 분출을 넘어서
푸코는 쾌락의 문제에 대한 탐험의 길에서 고대를 만나게 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주체화 양식에 대한 연구 끝에 그가 발견해낸 것은 ‘존재의 기술’로서의 ‘쾌락의 활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굉장히 금욕적이었다. 출신이나 학파를 가릴 것 없이 고대의 철학자들과 모럴리스트들, 의사들은 입을 모아 욕구의 무절제함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욕을 법이나 규약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쾌락을 적절히 사회화하는 게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는 쾌락의 스타일을 창안하고 또 체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술통에서 잠을 자고 광장에서 자위를 했던 디오게네스를 보라. 그의 ‘개-되기’는 욕망과 쾌락에 부여된 인간적인 환상들의 해체를 도모하는 고도로 지적인 훈련이자 실험이었다. 그들에게 금욕이란 ‘모범 시민’이나 ‘순결한 신도’가 되기 위한 규범의 내면화가 아니라 외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자율적 존재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훈련이었던 것이다. 자기배려로서의 금욕.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금욕이란 쾌락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변형하고 활용하고 양식화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금욕은 쾌락과 대립되지 않는다. 쾌락 자체의 논리 안에서 절제의 원리를 이끌어낸 에피쿠로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고대인들에게서 ‘쾌락의 활용’이 자기 취향을 계발하고 향유하는 문제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쾌락의 활용은 어디까지나 금욕적인 훈련과 수행의 형식을 띤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쾌락의 문제를 어떤 상태 혹은 순간과 동일시하지 않은 고대인들의 지혜 때문일 것이다. 짜릿한 쾌감을 느끼거나 안락한 쾌의 상태에 머물고자 온갖 기술·상품·서비스에 의존하는 근대인들과 달리, 고대인들은 쾌감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쾌락이 특정한 상태와 동일시되는 한, 그것은 의존과 예속의 재생산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자고 사랑을 나누는 등 일상의 모든 행위들을 신중하게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 자체가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쾌락의 장소가 되게끔 하는 일이다. 에피쿠로스가 고통도 쾌락도 없는 평정상태(아타락시아)를 가장 고귀한 기쁨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푸코는 쾌락의 활용이라는 이 문제화의 방식으로부터 무엇을 이끌어낸 것일까? 푸코는 여기에서 쾌락과 윤리가 더 이상 대립을 이루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더 이상 이성적 주체이자 욕망의 주체로서 분열을 겪지 않아도 되는 어떤 지점 말이다. 고대를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억압하거나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쾌락의 활용법을 창안하는 것, 자기 쾌락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 쾌락의 활용이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더 이상 쾌락은 욕망 충족의 결과도, 추구되어야 할 목적도 아니다. 그것은 신중하게 다듬고 활용해야 할 우리 실존의 한 요소인 것이다.
4. 쾌락의 실험으로서의 사유
푸코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 자신이 사유에 있어서 이론가라기보다는 실험가라고 말했는데, 이는 쾌락과 윤리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대담에서 푸코가 마약에 대해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오르가즘 예찬은 성적인 것에서 쾌감의 가능성들, 예컨대 옐로필(yellowpills)이나 코카인이 우리 몸 전체에 퍼지게 만드는 그런 쾌감을 국지화(局地化)하는 한 방식”(미셸 푸코, 『20년 후』, 티에리 뵐첼과의 대담 中) 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르가즘 예찬은 쾌락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쾌락의 전형적 모델을 정당화하고 강요한다는 말이다. 절정의 순간에 느껴지는 강렬한 희열. 어쩌면 이러한 식상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우리는 도처에서, 그러니까 음식을 먹고 연애를 하고 컨텐츠를 향유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들로부터 ‘오르가즘’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약이 사유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사유가 가능한지 확인”(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25쪽)하고자 했다는 푸코에게 마약의 사용은 쾌락적 실천인 동시에 지적인 모험이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푸코의 모습과 마약이나 SM플레이를 즐기는 모습을 모순이나 분열 이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감탄했을 뿐이다. ‘와 푸코는 체력이 장난 아니었나보다, 공부만 열심히 한 줄 알았더니 놀기도 열심히 놀았구나’하고. 그런데 정말로 사유의 주체로서의 푸코와 쾌락의 주체로서의 푸코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추측건대, 푸코에게 사유는 그 자체로 쾌락적 실천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유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지성의 작용을 고려한다면, 사유의 즐거움이란 곧 존재 역량이 확장되는 느낌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시대적 자명성과, 제도와, 타인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맺고 있던 관계를 변형하고 주어지지 않은 관계맺음의 형식들을 생산해내는 과정에 수반되는 어렵고도 고귀한 기쁨.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기쁨, 자기조형의 쾌락은 또한 쾌락 자체의 실험이라는 문제를 함축한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하여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또한 다르게 욕망하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쾌락을 활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므로. 추측컨대 푸코에게 사유의 실천이란 주어지지 않은 욕망의 투자와 쾌락의 운용을 실험하는 일이었고, 쾌락의 실천이란 완성되지 않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자기 실존을 조형해가는 일이었으리라. 즉 둘은 분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푸코는 쾌락주의자라고도 금욕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되어갔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앞서 절제가 공부하는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공부’ 혹은 ‘글쓰기’ 같은 목적을 위해서 억지로 내 욕구를 억압하고 있는가?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활동을 삶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 살던 대로 살고 욕망하던 방식으로 욕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전과 다른 쾌락의 활용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류적 삶의 방식이나 내 편협한 기질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는 기쁨의 경험들을 조직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힘들게 책을 읽고 문장을 구성하고 생각의 길을 내는 이 지극히 신체적인 실천은, 그리고 이러한 실천을 중심으로 일상과 관계를 조직하는 일은, 그 자체로 덜 의존적이고 보다 충만한 쾌락의 사용법을 훈련하는 일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자기 쾌락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실험으로서의 절제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일 뿐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누리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종종 부대끼지만, 이제는 이 부대낌이 억압이 아니라 실험과 훈련의 한 국면으로 느껴진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푸코에게서 보이는 당혹스러운 정력성(?)에서 "쾌락적 실천인 동시에 지적인 모험"을 발견해내다니.
지성과 쾌락이라는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두 테마 사이를 끈질기게 질문하며 어딘가로 나아간 글에 박수를 보내게 되네요.
어렵고도 다소 체념적일 수 있는 문제가 솔직하고도 세련되게 제기되어서 공감하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건화샘이 낸 글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금욕과 쾌락이라는 이 두 국면을 저도 매번 고민하게 되니까요.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하게 되고, 그 생각들에 도움을 받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흥분' 뿐만 아니라 휴식, 여가, 힐링으로서의 '이완' 이 쾌락의 이미지라니! 그리고 푸코가 마약을 어떻게 활용( 자기의 공부의 기회로서 활용?) 이런 부분들의 해석이 놀랍습니다. 푸코 잘 모르지만, 신체의 '감각'에 대한 문제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암튼 건화 샘 글 잘 읽었습니다^^
와우, 건화 샘 글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필사를 하고 있네요. 지성과 쾌락이 공존하고 있는 푸코의 삶을 건화 샘의 삶과 연관지으며 쭈욱 풀어나간 글이 좋아서 그랬나 봐요. ^^ 글이 갈수록 참 편안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