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五里霧中)의 세상에서 엄지발가락 내밀기
1.‘남의 문제’라는 거리감
지난 3월 말 금요일 아침 등산을 위해 도봉산역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인해 4호선 지하철이 약 30분 정도 연착됐다. 그동안 직장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쟁취한 자리에 앉았다가도 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나갔고 느긋하게 이동해도 되거나 늦은 약속의 핑곗거리를 찾은 사람들만 남았다. 연착된 지 5분 정도 됐을까? 어떤 사람은 상대방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이 30분째 안 움직이고 있어.” 뭔가 이상했다. 어딘가의 4호선에서는 장애인들이 필사적으로 실존을 걸고 투쟁하고 있을 텐데, 내가 있는 지하철 칸에서는 지각을 무마할 ‘뭔지 모르는 일’로 얘기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또 다른 시간, 3호선과 4호선에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이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욕먹을 줄 알면서도 왜 출근 시간에 나와서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넘어간 작은 턱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에게는 넘어갈 수 없는 큰 벽이 된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최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 투쟁이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를 타다 추락사한 이후 21년 동안 지속된 것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양해를 구하고 장애인의 처지와 투쟁의 취지를 알리던 문장들은 사람들의 욕설과 무시, 불평이 잇따름에 따라 “죄송합니다”로 귀결됐다. “아씨, 또 시작이야.” “아니 이걸 대체 언제까지 해.” “저 병신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한도 끝도 없네.”(나경희, 《“이준석 대표님, 너무 겁내지 마십시오”》, 시사IN)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귀찮게 하는 소음 정도로밖에 안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고 나에게 장애인의 투쟁을 변명거리로 이용하거나 혹은 “굳이 다른 사람의 일상에 불편함을 끼치면서까지 해야 되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지적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나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순간 ‘이럴 순 없다,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이 불쑥 솟구친다. 하지만 그 마음은 투쟁하는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금방 휘발된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런 단편적 마음을 실마리 삼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 장애인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상하다’는 느낌조차 사라졌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그때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그들에게 가졌던 마음이 얼마나 싸구려였는지 알게 됐다.
2.본성으로서의 오지랖
《주역(周易)》 하경(下經)의 포문을 여는 택산함괘(澤山咸卦)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과 함께하게 되는 기반은 이해가 아니라 감응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얼마나 불합리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서 어떤 감응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곧 그들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비극이다. 우주와 소통할 능력을 잃어버린 고립된 존재가 됐다는 비극.
감응이란 특정한 느낌(feeling)이 발생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느낌은 주체 혹은 대상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것을 지시할 뿐 주체 혹은 대상이 어떻게 실존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감응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천지 사이의 만물이 어떻게 실재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觀其所感而天地萬物之情 可見矣 - 택산함괘의 단전(彖傳))”. 그러니까 감응이란 ‘나’라는 존재의 실존을 다른 존재들의 실존과의 연관 속에서 정립하는 본능이다. 이는 함괘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함괘는 위에 ‘연못(澤)’을 추상화한 태괘(兌卦)와 아래에 ‘산(山)’을 추상화한 간괘(艮卦)로 이루어졌다. 연못은 위에서 아래로 스며들어 산을 적심으로써 만물을 양육하는 생명수가 되고, 산은 촉촉한 물기를 받아들여서 만물이 의지할 터전이 된다. 인간도 연못처럼 누군가를 적시는 동시에 산처럼 누군가로부터 적셔진다. 괘의 이름인 함(咸)이란 글자는 ‘모두(皆)’를 의미하는데, 각자 상대방과 적시고 적셔지는 관계를 맺으며 ‘우리’라는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하늘과 땅이 감응하는 가운데 발생하고 변화된다는 점에서 거대한 ‘우리’에 속해 있다. ‘나’와 ‘너’의 마음(心)이 모인다(咸)는 점에서 ‘함’은 감(感)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세상과 부단히 감응하기 때문에 실존을 유지할 수 있고, 실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나 아닌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 ‘더불어 살아감(咸)’은 ‘내 마음이 움직임(感)’으로써 증명된다. 요컨대, 어떤 인간도 절대적으로 닫혀 있을 수 없다. 아주 사소하게라도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이 이미 ‘나’를 구성한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자신만의 문제나 내가 신경 쓸 수 없는 타인만의 문제라는 것은 없다. 스스로를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소인배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자기자신만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아무리 유아(唯我)적인 사람도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 있다. 타인의 문제를 자기 일인 마냥 뛰어드는 오지랖은 ‘인간’이란 생물의 본성이다.
감응하는 것은 형통하다. 올바름(貞)을 견지하는 것이 이롭고, 이질적인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 길하다(咸 亨 利貞 取女 吉).
감응은 이질적인 대상과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음(陰)에게 이질적인 것은 양(陽)이고, 양에게 이질적인 것은 음이다. 괘사의 취녀(取女)는 ‘장가들다(娶=取+女)’라는 뜻으로, 남성의 입장에서 이질적인 대상으로서 여성과 만나는 것을 얘기한다. 천지가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생하는 것부터 인간들이 한 사회에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까지 모두 감응(感)에서 비롯된다(天地感而萬物化生 感人心而天下和平). 감응이 형통하다(亨)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아주 미세하고 단순한 사물부터 인간 사회 같이 복잡한 집단까지 어떤 것도 감응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도 없다. 오직 감응만이 우리를 우리로 살아가게끔 만든다. 다르게 말하면, 감응만이 우리를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도록 추동한다.
한 인간을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가도록 추동하는 요인은 함께(咸)하게 된 마음(心)이다. ‘마음을 함께한다’는 명제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이보다 더욱 자명한 것도 없다. 감응에는 상대방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는 위험이 항상 잠재돼 있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상대방과의 관계 맺음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관계 맺음이 지속된다는 것은 관계가 해체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방의 이질성을 긍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감응은 상호 이질성을 긍정하고 기꺼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적 활동이다. 문제는 어떻게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가, 어떤 태도로 감응을 시도하느냐다.
3.“나는 나”라는 불감증
괘사에서 감응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은 정(貞)이다. 《주역》에서 ‘정’은 일차적으로 ‘올바름’으로 해석된다. 함괘에서 그것은 감응을 성공하게 만드는 주요한 골자의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올바름을 견지한다(利貞)”는 문장은 특정한 규준을 답습하거나 맹신하는 수동적 실천이라기보다 자신이 놓인 때(時)를 읽고 그에 호응하려는 능동적 실천에 가깝다. 왜냐하면 ‘정’을 실천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비우는 활동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전에서 말했다. “산 위에 연못이 있는 것이 함괘의 모습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마음을 텅 비워 타인을 받아들인다.”(象曰 山上有澤 咸 君子以 虛受人)
감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직된 규정성을 해체하는 포용력이다. 무언가를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전에 포용했던 것에 집착하지 않는 능력을 전제한다. 대표적으로 땅이 그렇다. 땅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동시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대상전(大象傳)에서 함괘의 형상을 보고 허(虛)를 윤리적 실천으로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허(虛)란 ‘있음(有)’의 결여가 아니라, 땅이 그러하듯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는 여백을 창출하는 운동성이다. 정이천은 ‘허’를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수신(修身)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사람이 마음을 텅 비우면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마음이 꽉 차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 마음이 자기 기질을 주인으로 삼지 않으면 감응하여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정이천, 《역전(易傳)》, 636)
따라서 감응하기 위해서는 특정 정체성에 얽매여선 안 된다. 그런데 이는 곧 상대방과의 관계를 조건 삼아 다른 정체성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정이천은 “올바름을 견지한다(利貞)”는 것을 예(禮)를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예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립하는 것이다(立於禮 - 《논어(論語)》 〈태백(泰伯)〉 7장).” 가령, ‘노인’이란 정체성은 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고, 남편과 아내의 정체성은 부부라는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을 해야 한다’는 당위나 메뉴얼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것들조차도 관계 속에서 상대방과 호응할 수 있는 한에서만 유의미하다. 즉, 핵심은 정체성 자체가 아니라 정체성이 형성되고 지속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관계다. 그리고 타자의 이질성이 소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관계에는 항상 다른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여백이 항존한다.
‘나’는 내가 아닌 온갖 것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나는 나”라는 얄팍한 자아 정체성이 유지되도록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나는 나”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힘으로 표현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고, 주위에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의 한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내가 갑자기 장애인의 문제에 반응하게 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러한 감응의 순간이야말로 ‘나’라는 존재의 역동적 힘이 표출되는 지점들이다. 감응을 위해 요청되는 올바름(貞)이란 타자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되는 자기 변형의 힘이다.
4.엄지발가락만큼의 감응력
초육은 엄지발가락에서 느낀다(初六 咸其拇).
상전에서 말했다. “‘엄지발가락에서 느낀다’는 것은 뜻이 밖에 있는 것이다.”(象曰 咸其拇 志在外也)
무(拇)는 ‘엄지발가락’을 의미한다. 초효에서 상효에 이르기까지 여섯 개의 효사는 점점 더 크게 감응하는 신체 부위와 연관된다. 그 중에서 초효-엄지발가락은 감응 수준이 가장 낮은 것이다. 적극적으로 감응하려는 욕망이 아직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따르기 매우 쉬운 자리다. 상전에서 “뜻이 밖에 있다(志在外也)”고 한 것도 반응적으로 감응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초효-엄지발가락은 이제 막 대상과 감응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분명 초육효는 다른 자리들보다 감응하는 힘이 강하지 않지만, 그 와중에 감응을 시도할 수 있다. 엄지발가락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욕조의 물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를 확인할 때 우리는 발끝을 찔러보고, 상대방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해서 조심스러울 때는 발끝이라도 그를 향한다. 발끝의 느낌을 출발점 삼아 우리는 욕조에 머리끝까지 밀어 넣고, 상대방과의 뜨거운 연애에 도달한다. 왕부지에 따르면, 함괘에서 말하는 감응의 수준은 어떤 것과 이제 막 접속함에 따라 발생한 것이지 깊고 단단한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꼭 굳게 맺어진 정(情)이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다.(《주역내전(周易內傳)》, 793)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엄지발가락만큼의 감응력을 발휘한다. 다른 문제에 관심이 간다는 것은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 역량이 낮은 사람일수록 외부에서 주어진 뜻에 인도되기 쉽지만, 그러한 인도를 계기로 감응 역량의 증대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응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 자신의 실존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들에서도 그렇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일방적 비난도 그 경우 중 하나다. 한 번 생각해보자.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정말 장애인들만을 위한 이기적 요구라 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삶의 형태와 다양한 속도가 존중되고, 그것을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는 공적 영역(公)을 열어놓은 사회다. 도로도 일종의 사회다. 건강한 도로는 다양한 신체와 다양한 속도를 허용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도로다. 그런 의미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도 안전하게 지하철을 이용하게 해달라는 전장연의 투쟁은 건강한 도로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불감증은 자신에 대한 불감증으로 귀결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철저하게 선을 긋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애초에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연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특정한 정체성에 집착해서 이쪽과 저쪽을 구별할수록 감응 능력은 쇠퇴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쇠퇴한 감응능력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방치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돌아온다. 타인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도 이해할 수 없다.
5.회심의 꼼지락거리기
글을 쓰면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관련된 글들을 읽었다. 뜨거워졌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던 공간에서 저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정의감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들의 문제에 감응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처지가 불행하다고 대상화하는 만큼이 아니라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만큼이다. 섣불리 반응하는 순간 감응은 실패하고 나에게 익숙한 정념적 표상들이 작동하게 된다. 그때 나는 또다시 그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나의 실존도 놓치게 된다.
스피노자는 갓난아기를 가장 수동적인 존재로 얘기한 적 있는데, 외부 자극에 대해 가장 단순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기타 등등 신체적 이상이 일어날 때는 즉각적으로 울고, 엄마를 보거나 재밌는 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웃는 식으로만 반응한다. 엄지발가락 수준의 감응력조차 발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갓난아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장애인을 ‘피해를 끼치는 존재’로 규정하는 사람들과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표현은 다를지언정 수동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아직 나는 엄지발가락 꼼지락거리는 수준으로 세상을 더듬는다. 그에 비해 세상은 항상 나의 경험을 초과한다.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열심히 해봤자 엄지발가락 꼼지락대는 수준이지만, 나는 그 수준만큼 타자들과, 세상과 감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감응하는 노력을 꾸준히 지속할수록 점점 더 이 불명확한 세상에 덜 휩쓸릴 것이다.
다행히 이 글을 쓰는 동안 장애인의 실존이 나의 실존과 분리되지 않는 지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부하며 살아가는 ‘나’는 사회적으로 장애인 못지않게 ‘비정상인’이다. 나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나의 시간을 저당 잡히길 원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표상되는 좋은 삶이란 관념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은 내가 정확히 뭘 하면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공부하는 삶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장애인들이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실존은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라는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로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둘러싼 반응은 그 자체로 뜨겁다. 우리는 어떤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장애인의 삶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지 않도록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뜨거운 반응을 앞으로 우리가 타자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하나의 신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구에는 더 많은 장애인-타자들이 그 이질성조차 표백된 채로 떠돌고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타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소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각자의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 할 때다.
"‘나’는 내가 아닌 온갖 것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나는 나”라는 얄팍한 자아 정체성이 유지되도록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나는 나”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힘으로 표현된다."에 밑줄 쫘악 그었습니다~ 한자에 대한 울렁증을 가진 저로서는 주역은 그냥 너무나 먼 그대인데 지금 같이 겪는 사건을 통해 풀어주시니 왠지 주역이 지상으로 내려온 듯 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제 엄지발가락도 감응하는지 꿈틀거리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함기무(咸其拇)’라는 3000년 전의 점사 하나가 시위 현장 한복판으로 날아와 꽂혀, 갈길 바쁜 우리의 지하철을 막아서고 있네요^^. 주역의 전언을 이 시대의 삶과 이어붙이기가 쉽지 않던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계시는 규창님께 박수를~~!!! 어쨌든 우리의 무딘 발가락을 계속 꼼지락대야, 감지-락(感知樂)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해요!!!
꼼지락에서 감지-락(感知樂)으로 재밌습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질적인 타자들과 감응할 수 있다면...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ㅋㅋ 그러면 관심을 가져야 할테고 .. 관심은 어디까지 가져야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초효라서 할 수 있는것! 적극적으로!! 황리샘 말씀대로 이 시대의 삶과 연결하는 어려운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규창샘 응원합니다.!!
" 타자들과 감응하려는 노력을 할수록 이 세상이 덜 휩쓸릴 것이다. " 규창샘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이 읽혀집니다. 장애인 문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냥 늘 할일이 많다고 하면서 타자들과 어쩌면 감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부끄러워집니다. 엄지발가락부터라도 꼼지락 거려야 겠습니다^^
"내가 그들의 문제에 감응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처지가 불행하다고 대상화하는 만큼이 아니라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만큼이다." 이런 신중함이 어째서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심과 연대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는지 글을 통해 납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공부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려 하는 우리의 자리와 비난과 무관심에도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장애인들의 자리를 연결시키는 것이 와 닿네요. 그런데, 그런데... 주역 풀이가 까막눈인 저에겐 너무 어렵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