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마블을 묻다
1. 지구의 날에 묻는 ‘우리의 지구’
대체 지구가 뭐야!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이자, 45억 살이 넘었고, 반지름 6300km에, 지각·맨틀·외핵·내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만! 이렇게 위키백과에 적힌 정보들을 옮겨서는 내게 별 도움도 안 되고 글도 안 된다. 지구의 역사를 배웠으니, 지구를 주제로 글을 써보려는데 영 쉽지가 않았다. ‘너는 지구냐, 지구가 아니냐?’, ‘태산은 하늘에 가깝냐, 땅에 가깝냐?’ 채운샘은 선문답 같은 물음만을 던지셨고, 날 좋은 방학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보내고 있던 중에 ‘지구의 날’이 지나갔다. 응? 지구의 날? 지구?
컨텐츠가 꽤 빵빵했다. 카페에서는 텀블러를 할인하고, 지자체에서는 지구 풍선을 만들고 포스터를 그리고, 정치인들은 뭐라뭐라 선언들을 했다. 메인 이벤트는 저녁 8시에 남산타워를 비롯한 큰 건물들을 잠시 소등하는 ‘지구를 위한 10분’ 행사였다. 각종 포스터 속 지구는 웃고 있기도 하고 간혹 마스크도 끼고 있었지만, 어쨌든 푸른 행성이었다. 파란 바다에 초록 대륙이 있는, 유치원생도 노인도 다 아는 그 지구. 우주 밖 어느 시점에선가 바라본 그 푸른 행성의 이미지는 1972년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호에서 뒤돌아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유래했다. 그 이름은 ‘The Blue Marble’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퍼진 사진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인간은 새로운 ‘이미지의 마법’에 걸렸다고, 볼프강 작스(볼프강 작스 외, <반자본 발전사전>, 73쪽)는 말했다. 지구를 한눈에 들어오는 대상으로 볼 수 있고 떠올릴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에 ‘인간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아름답고 소중한, 그러나 데워지고 오염되고 있어 보호를 필요로 하는 하나뿐인 우리 별. 자, 오늘 하루만큼은 그 지구를 그려보고, 기억하고, 작은 실천을 해봅시다! 일동 소등! 천진하다고 해야 할까, 교묘하다고 해야 할까. 이 쾌적하고 태평한 실천에 약간 당황했다. 저 10분으로 지킬 수 있다고?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사진인 'The Blue Marble'(1972)
‘지구의 날’의 유래는 이렇다. 1969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해상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났고, 원유 10만 배럴이 퍼져나갔다. 하버드생 하나가 기름에 덮인 바다 사진을 올리자 충격을 받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장대한 시위의 행렬을 이뤘고, 한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세계 지구의 날’이 생겨났다. 다른 때 같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최근 어떤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10만 배럴? 물론 가늠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이다. 태안 사고가 8만 배럴이라 했으니까. 그런데 좀 의아하지 않은가? 바로 다음 해인 1970년, 그러니까 ‘세계인’들이 의기투합하고 국회에서는 환경법안들이 통과되던 그해, 나이지리아 남부 에자마-에부부 마을에서는 200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었다. 해상이 아니라 지상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들이 검게 물들었다. 어떠한 보도도 보상도 없었다. 30년이 지나서야 소송이 이뤄졌지만 사고를 일으킨 기업 셸은 불복했고, 그로부터 20년이 더 흐른 후 형식적 보상금이 합의되었다. 하지만 기름얼룩은 훨씬 더 멀리까지, 훨씬 더 깊이까지 퍼져 있었다.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에 달하는, 삼각주 전체가 검게 보일 정도로.
요란했던 캘리포니아와 소름끼치게 조용했던 나이지리아. 곧바로 푸르름을 되찾은 산타바바라와 지금까지도 녹슨 파이프가 꽂히고 있는 에자마-에부부. 대지의 청지기들의 행렬과 외쳐도 들리지 않는 비명들. 무엇이 지구인가? ‘세계 지구의 날’ 52주년이 되도록 줄기차게 기념되고 있는 것은 저 10만 배럴과 산타바바라, 그리고 보람찬 선언들이다. ‘지구의 날’의 지구는 누구의 지구인가?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는 요구에 밀려 산타바바라에서 퇴출된 석유기업은 어디로 갔을까?
1969년 산타바바라 원유 유출 사고와 현대의 나이저 강 삼각주의 한 마을
블루마블이 생략하고 있는 것은 검은 삼각주나, 밤을 앗아간 가스 불기둥, 폭발, 그칠 줄 모르는 내전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거긴 인간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모순, 인간의 욕망, 인간의 질문이 없는 ‘순수한’ 자연이다. 지구의 날을 태동시킨 한 장의 사진을 보자. 검은 기름띠가 산타바바라의 푸른 바다를 덮었고, 그 모습이 동정심과 보호본능을 끌어올린다. 저 ‘지구’를 위해 우리 ‘인간’이 팔을 걷어붙이자! 반면 나이저 삼각주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은 어떤가. 거기엔 인간이 있다. 타르를 뒤집어쓰고서, 자기 신체와 후손과 삶터 전체를 망가뜨린 그 연료를 계속 캐내야 하는, 그러나 전기도 연료도 없는 인간이 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뒤로 총을 든 정부, 돈을 쥔 기업들, 바다 건너의 자동차와 비행기와 쇼핑몰이 주욱 연결되어 있음을 모를 수 없다. 이 사진 앞에서 팔을 걷어붙이기는 어렵다. 머리가 띵해진다. 기름으로 얼룩진 건 과연 저 신체들뿐인가? 어쩌면, 이 묵직한 질문이 무서워 우리는 자꾸만 어여쁜 블루마블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나는 이 블루마블로서의 지구, 인적 없이 매끈한 푸른 행성이라는 표상에 대해 묻고 싶어졌다. 기름 유출, 시민의식, 우주여행, 매스미디어 등의 사건 및 사물들과 더불어 생겨나서 우리 머리에 자리 잡은 그 선명한 이미지가 드리우는 그늘은 무엇이며, 무엇이 거기에 빛을 비추는지, 그 빛은 어디서 나오는지. ‘이미지의 마법’ 저편이 궁금하다.
2. 블루마블의 동력원
비록 내가 축구를 사랑하긴 하지만 이번 카타르 월드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경기가 열리는 축구장 8곳 모두에 첨단 에어컨이 완비되었고, 오히려 추울 수도 있다는 기사는 좀 당혹스러웠다. 그나마 겨울(평균기온 30도)에 개최하고 태양광 에너지를 활용한다 하더라도, 경기장을 거대한 돔으로 만들면서까지 사막에서 시원한 월드컵을 개최한다니. 하긴, 올해 초 중국은 100% 인공 눈으로 동계올림픽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두바이에 초대형 스키장이 생긴 게 17년이 넘었다고 하니 이상할 것도 없다.
기묘한 시대를 사는 기묘한 생물종이다. 모든 종은 위도와 환경과 계절에 따라 신체의 구조도, 먹이도, 생활방식도 바뀐다. 당연히, 맞지 않는 조건에는 서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적도에서 극지방까지 거의 모든 위도와 고도에 퍼져 살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사막이든 극지방이든, 겨울이든 여름이든, 비슷한 온도를 만들고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비슷한 컨텐츠를 즐긴다. 물론 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에스키모인들이나 베두인들, 열대부족이나 정주민들은 각각의 장소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거주해왔고 대지의 다른 존재들과 섞여가면서 관계 맺어왔다. 그러나 21세기, 땅 위에 살면서도 땅과 상관없이 사는 이런 ‘초현실’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일까?
에너지다. 작은 횃불이나 마소의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 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띄우고 빌딩을 데울 수 있는 외부동력. 즉 화석연료다. 화석연료 덕분에 인간은 지구에서 분리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기후와 지리의 한계에서 벗어나 우주선을 탄 듯 붕 떠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아스팔트(석유 찌꺼기) 위로만 다닌다는 점, 차의 바퀴는 지면과 극히 적은 면적(이론상으로는 선분)만 접촉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땅으로부터의 이런 분리야말로 블루마블의 이미지, 즉 멀리서 내려다보이는 대상화된 지구 관념을 탄생시킨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분리를 가능케 한 동력원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다. 종종 푸른 지구를 괴롭히는 장본인으로 등장하는 이 연료 없이 인간은 지면 위에 떠 있을 수 없다. 결국 블루마블은 인간이 기어코 치우고 가리려고 했던 검은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표상인 것.
그렇다면 대체 화석연료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땅과의 관계,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확 바꿔놓은 이 검은 물질은 뭘까? 희한한 점은, 지구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과 동일하게도 여기서 ‘과학적’ 설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구성성분이 어떠하고, 열효율은 얼마며, 매장량이나 가격 등의 정보는 듣기 전과 듣고 난 후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팩트들이다. 물론 거기서 환경의 파괴, 탄소의 발생과 온난화, 지권과 생물권의 탄소 순환 정도는 유추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원을 둘러싼 수많은 수탈의 이야기, 향락과 중독의 이야기, 무엇보다도 분리를 조장하는 사고방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석탄을 학술적으로 정의하면 주로 식물의 유해로 이루어진 퇴적암의 한 종류로, 암석에서 식물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게 50퍼센트 이상, 부피 70퍼센트 이상인 암석이다. 그래서 석탄을 학술적으로 번역하면 ‘옛날의 울창한 수풀’이다.”(최덕근, <지구의 일생>, 267쪽)
일반적 정의로부터 우리는 석탄이 식물체의 비중이 큰, 생물권의 흔적이 짙게 남은 지권의 물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 눈에 들어온 단어는 ‘번역’이다. 암석을 옛날의 울창한 수풀이라고 볼 수 있다니, 새롭지 않은가? 그런데 왠지 그 앞에 붙은 ‘학술적으로’라는 말 때문에 번역의 범위가 한정되는 것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 석탄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아니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및 감수성의 차원에서 번역해본다면 어떨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역사 속에서 석탄의 사용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석탄이 증기기관을 움직이고 산업혁명을 낳았다는 교과서적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석탄과 더불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든 우리가 알맞은 기계를 발명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일에든 사용할 수 있다”(<사피엔스>, 478쪽)는 관념의 탄생일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자연은 채굴되길 기다리는 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에너지만 있다면, 우리는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인식에서의 이런 변화는 계절의 주기성 속에서 유지되어온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바꿨고, 기술과 부의 무한한 발전이라는 환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석유문화는 무한해 보이는 지질학적 관대함이 무한해 보이는 미래의 부를 제공해준다는 가정을 토대로 한다.”(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144쪽) 빽빽한 빌딩들, 자동차들, 옷과 핸드폰과 음식들. 이제 우리는 화석연료라는 신비한 동력원 없이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세계 속에 산다.
석탄이 ‘옛날의 울창한 수풀’이라는 번역은 신선했다. 우리가 한때 지면을 덮었던 생명들의 힘으로 사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지권에서 생물권으로 다시 끌어올린 에너지. 이 과학적 번역에서 화석연료는 지금의 생물권을 번영케 해주기 위해 과거에서 온 축복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거기에 드리워져 있는 여러 겹의 죽음은 주목되지 않는다. 사실 석유든 석탄이든 더 정확히 말하면 ‘울창했던 생물들의 급작스런 떼죽음’의 흔적 아니던가. 이 부분이 사유되어야 한다.
“화석 연료는 수천 년에 걸쳐 압축된 중층화한 죽음을 암시한다. 오늘의 기술이 그 죽음을 일시적이고 국내적인 우리 시대의 연소(燃燒)문명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되살려놓은 것이다. (...) 확실한 것은, 우리가 지구 행성의 압착된 탄화수소 유물을 추출해 소비하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인간(그리고 다른 무수한 생명체)이 맞이할 ‘형성 중인 화석’으로서 집단적 미래의 단축 가능성도 덩달아 커진다는 사실이다.”(롭 닉슨,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124쪽)
이것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고갈이니 온난화니 대멸종이니 하는 상식적 우려와는 다르다. 그런 우려는 이미 무한한 발전을 전제하고 있다. ‘중층화된 죽음’으로서의 화석연료라는 이해는, 어떤 번영도 쇠퇴를 포함하고, 어떤 팽창도 수축을 포함한다는 이치에 대한 통찰로부터 나오는 번역이다. 이것은 창작이 아니라 ‘한때 울창했던 수풀’만큼이나 정확한 팩트다. 다만 같은 것의 다른 국면을 드러냄으로써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형성 중인 화석’으로 사유할 수 있을 때 갖게 되는 윤리 및 감수성은 상당히 다른 결을 띌 것이다. 적어도 석유를 ‘지하자원’ 혹은 ‘자연이 준 선물’로 표현할 때 부추겨지는 직선적 발전과 부의 열망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식적 용어들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한다. 자원이라면, 누구의 자원인가? 선물이라면, 선물이 매장된 땅 위에는 왜 그렇게 죽음이 만연한가? 왜 그 자원과 선물은 인간 외 거의 모든 동식물의 감소와 멸종으로 귀결되는가?
3.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찾아드는 의문이 있다. 과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과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지구든 석유든,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우리의 관념이나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생생한 갈등과 소란 없이, 인간에 대한 질문 없이 학술적으로 알려진 정보를 나열한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알겠다. 과학은 어떤 맥락도 없고 어떠한 효과도 갖지 않는 중립적 사실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왜 종종 그렇게 여겨지는가이다. 과학의 언어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어떤 정치적 소요도 일으키지 않는 용어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약속인 것만 같다. 하지만 지극히 정보적으로 기술될 때조차 그 언어는 사물의 어떤 면을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혹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잘 모르겠다. 과학을 이제 막 공부하는 초짜이면서, 과학이 어쩌네 저쩌네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과학이 객관적이고 비정치적인지, 여전히 정치적 담론이나 경제적 현실에 속박되어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과생으로 살아온 입장으로서 한 가지 답답함을 생각해보고 싶다. 말하자면, ‘과학적 사실’ 뒤에 숨어서 취하게 되는 무지에의 관대함이다. 몇 가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수치적 정보들은 빈약하지만 꽤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왔다. 이과는 그런 거 몰라, 몰라도 돼, 우리는 책임이 없어. 우스운 말들이지만, 이런 태도가 실제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에게도 유지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조금 무서워지기도 한다.
내가 (짧게)전공했던 환경공학 분야에서는 주로 제품이나 사업이 물, 대기, 토양에 미치는 영향이 기준치 이상인지 이하인지를 평가하는 일을 하는데, 표준적 수치가 어떤지만 확인하면 그것이 불러올 수많은 영향들에 대해서는 손을 뗄 수 있다. 그 제품의 소재들이 되는 광물은 어디서 오는지, 현지의 광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버려진 제품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나아가 가장 중요하게는 그 도구들이 우리 마음의 풍경과 인간관계, 신체를 어떻게 바꾸는지 등의 문제는 질문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검사하는지 몰라도 된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탄소 발생률이 적다. 전기를 공급하는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방사능폐기물이 감손우라늄탄이 되어 중동에 쏟아진들, 리튬배터리의 필수 소재인 코발트 채굴로 인해 콩고에서 노예노동이나 내전이 발생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4대강 산업은 몇몇 수질 측정치를 만족시켰다. 그 거대 토목공사가 강바닥의 미생물종을 다 죽이고 몇 년 후 수질을 전보다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뭐가 어떻다는 건가? 우리는 기준치를 맞춤으로서 충분히 ‘환경’을 지켰다. 산타바바라는 깨끗하고, 지구를 위한 10분은 보람차다. 이 기만이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반다나 시바 Vandana Shiva
내가 고민하는 것은 하나다. 과학 공부를 시작하는 자로서, 그 언어들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과학에서 배우는 정보들을 단순한 팩트로 놓고 사유를 유보하는 게 아니라 내 문제들을 확장하고 나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가는 힘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지구다’라는 통찰에 어렴풋하게나마 다가갈 수 있다면! 다행히도 선례가 있다. 반다나 시바가 양자역학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양자역학 연구는 이론연구자의 길 뿐 아니라 양자 컴퓨터, 양자 현미경, 보안 장치, 핵융합로 등 수많은 혁신 기술의 개발로도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반다나 시바에게 그것은 그녀가 평생 펼쳐온 생태운동의 철학적 근간이 되었다.
“양자 이론을 통해서는 네 가지 원칙을 배웠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원칙이 내 생각과 내 평생 작업의 바탕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된다. 모든 것은 잠재력을 지닌다. 모든 것은 확정적이지 않다. 배중률[형식논리학에서 사유 법칙의 하나]은 없다. 즉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다. (...) 자연과 인간의 분리라는 기계론적 이상과는 반대로 관찰자는 관찰한 것을 ‘창조’한다. 상호작용하는 세계, 서로 연관된 세계가 가능해진다.”(반다나 시바,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 45쪽)
반다나 시바는 우주를 서로 연결된 존재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양자 패러다임이 생태 패러다임과 공명함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 이론에서 상호의존성의 원리를 번역해냈고, 그 이치로부터 농민과 여성에게 가해져온 약탈과 그것이 전제한 분리의 사고방식에 맞설 힘을 얻었다. 양자 이론을 읽어가는 그녀의 마음에는 인도의 현실, 종자와 지식의 독점, 다국적 기업의 사고관, 저항의 문제 등이 함께 일렁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 문제들 앞에서 양자 이론이 다시 떠올랐을 수도 있다. 이런 ‘번역’ 기술은, 도나 해러웨이가 발생생물학을 읽어내는 방식, 펠릭스 가타리가 생태학을 읽어내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례는 많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운동가나 철학자도 아닌 일개 백수다. 그리고 저 선례가 된 분들처럼 뜨거운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도 없고 그들처럼 공부에 진지하지도 못하다. 그렇지만 지금 과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에게는 몇 가지 과학 상식에 의존해서 생각을 방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그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그리고 나는 상식이 가리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말하고 싶음을 이제 막 확인했다. 지구를 지각·맨틀·핵이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는 한 우리는 블루마블 위를 떠다니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땐 물론 ‘자연의 에너지’가 필요할 테고. 고로, 답을 구하지 못해도 계속 물어야 한다. 지구는 무엇인가? 석유는 무엇인가? 내가 아는 그것일까? 어떤 이야기들이 더 있을까? ‘나는 지구인가?’ 과학적 기술에 던져지는 이 물음표들만이 과학의 문을 노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도 반다나 시바처럼, 롭 닉슨처럼 읽어내고 번역해내고 싶다는 열망이 마구 솟아오르네요!
옛날의 울창한 수풀, 형성 중인 화석, 양자 이론의 생태적 번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저도 과학의 문을 살짝 노크해볼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중층화된 죽음’으로서의 화석연료라는 이해는, 어떤 번영도 쇠퇴를 포함하고, 어떤 팽창도 수축을 포함한다는 이치에 대한 통찰로부터 나오는 번역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 화려함이 사실은 '울창했던 생물들의 급작스런 떼죽음’에 기반한 것이고, 게다가 나이지리아, 콩고 등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노동하는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우린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아요. 보이는 것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의 공부가 이것들을 가능하게 만들겠죠? 생태에 대한 깊은 고민과 과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담긴 글 감사해요.^^
제목만 보고 게임 얘기인 줄 알았더니... 우주에서 찍은 지구사진을 말하는 거 였군요. 이런 무식함이 ㅋㅋ
학교에서 지구의 날을 맞아 '에너지 절약 실천 방안'을 학급별로 작성해서 제출하라 하기에 ,이런 형식적인 일을 또 시킨다며 툴툴대고 말았는데 민호샘 글을 읽으니 지구의 날의 유래가 석유 유출 사고와 관계된 거 였군요.
나이지리아의 석유로 인한 하천 오염과 콩고의 코발트, 콜탄 채굴로 인한 내전은 교과서에서 '자원의 저주'라고 나옵니다. 강대국들이 자원이 많아 그 지역에 들어가 자기들 입맛대로 짓밟으면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제 공부와 수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내년에 지구의 날이 되면 민호샘 글을 학생들에게 소개해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과학이 은근히 싫었던 이유는 바로 아무런 정치적 소음 없는, 중립적인 척하지만 결국 뒤에서 일은 제대로 저지르면서 표백된 언어를 쓰며 세상 무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인상때문이었구나, 이 글을 읽으며 알게 되었어요. 과학도 시대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 그것은 적극적인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영역이라는 것. 인간적 진실, 마음의 풍경에 거의 불구인 일군의 과학에게 기 죽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민호샘이 가르쳐주네요. 감사 감사~~~ 과학을 나의 진실로 다가가보자. 그게 뭔지!!
‘형성 중인 화석’ 이 말이 몹시 편하고 마음에 드네요. 화석 보살들을 그만큼 쓰며 살았으니 나도 화석으로 보답해야겠지.
지구를 위한 10분에서 산타바바라로, 또 나이지리아로, 카타르로, 화석연료로, '중층화된 죽음'으로, 과학 담론이 작동시키는 권력효과로, 반다나 시바와 양자역학으로 '질문'을 나침반 삼아 나아가는 힘이 느껴지는 글이라 정말 좋네요. 일단 재밌고 ㅎ '과학 노크'를 통해 기후 위기 시대와 석유문화에 대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