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욕구, 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광화문 광장에 모여 있는 태극기 부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무엇이 그들을 결집시키는가? 이념? 대의? 이해관계? 글쎄.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유튜브의 가짜뉴스? 반공 이데올로기? 과거에 대한 향수?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을 추동한 근원적 원동력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정치적 욕구다. 자기 언어로 현실을 포착하고, 그러한 언어를 통해 타인들과 연결되고 또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구. 쉽게 말해 그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낌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행위를 조직하는 일이 주는 활력을 매개로 뭉쳐 있는 것일 테다.
말하고, 듣고, 개입하고, 참여함으로써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개체적 생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태극기 부대가 광화문에 모이는 것도, 택시기사들이 승객들과 정치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도, 젊은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댓글을 다는 것도 정치적 욕구를 실현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까?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이야기하는 능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수다, 뒷담화, 신화. 이것이 인간 사회의 기초적 토대다. 그렇다면 수다, 뒷담화, 신화야말로 정치의 가장 원초적인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정치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연구실 안에서 실현하고 있다. 공부의 비전에 대해, 생활에 대해, 살림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또 이런저런 공동의 실천들을 도모하면서 규문이라는 공간의 형성에 참여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서 살아갈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일들로 갈등이 점화되기도 하고, 혼자서는 공상에 불과했을 일들이 현실화되기도 한다. 지난하지만 대체로 기쁨을 수반하는 활동이다. 나 자신의 구체적인 발화와 행위 속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타인들과 결합되는 일은 충만함을 가져다준다. 이는 가족, 학교, 직장 같은 관습과 제도의 힘이 지배적인 조직 속에서는 체험하기 어려운 종류의 기쁨이다.
그러나 나의 정치적 욕구는 만족을 모른다! 연구실이 내 현실의 전부는 아니니까. 나는 규문의 학인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5년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암담해져버리는 한국 청년이고, 푸틴의 정복전쟁에 분노하는 아시아인이며, 기후위기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는 산업사회의 일원이다. 나는 연구실 안에서의 정치실천을 다른 현실들에게까지 확장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막막함도 느낀다. 시민단체나 정당 같은 조직들이 표상하는 ‘정치적 실천’에 가담하는 일은 영 와 닿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정치적 실천의 이미지는 나의 목소리를 전문가에게 위임하고 나의 활동을 제도에 위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그런가 하면 아직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내 생각 하나 돌리는 것이 가장 정치적인 일이다’ 같은 말은 추상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어떻게 해야 나의 느낌, 나의 목소리, 나의 역량으로부터 나의 삶을 이루는 복잡다단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적절한 통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2. 중심과 주변을 넘어서
미셸 푸코는 매우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푸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사실만큼은 그를 아는 모든 이가 인정할 것이다. 셀 수 없는 성명서와 선언문들, 논평들을 직접 썼으며 수많은 정치운동들에 적극 참여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연설을 하고, 시위에 가담하는가 하면 한 번은 폴란드 반정부운동과 연대하기 위해 재정담당으로 일한 적도 있다. 전방위적인 정치투쟁에 정력적으로 참여하면서 대체 언제 연구를 하고 책을 쓰고 강의 준비를 한 건지 비결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런데 푸코의 정치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전격적으로 정치적 실천들을 전개했으면서도 특정한 분파, 정당, 이념, 노선 같은 것에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푸코를 ‘회색분자’로 규정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째서 당신은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과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가? 온갖 국지적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면서 어째서 정작 어떻게 사회를 변혁해야 할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귀신같이 나타나는 푸코의 정치적 성실성을 인정하는 한편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를 미심쩍어 했던 것이다. 너무나 성실하게 무책임했던 푸코씨?
그러나 푸코가 정말로 미온적인 인간이었다면 이토록 헌신적일 수 있었을까? 그가 고고한 지식인의 지위를 고수하고자 했던 거라면 번거롭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현장에 달려가고, 지겨운 업무들을 떠안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푸코가 전통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배반한 것은 미온적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입장 표명이었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경계한 것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혁명적 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그 나름의 기여였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나는 법칙들을 만드는 것을 삼가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나는 아주 복잡한 작업틀 속에서 문제들을 결정짓고, 이것들을 밝히고 풀어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위에서 말하는 예언가와 입법자들이 침묵하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문제의 복잡성이 사람들의 삶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공통의 계획이 가진 정당성이 구체적인 문제들, 어려운 사건들, 혁명적 운동들, 성찰들 그리고 증거들을 통해 뚜렷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미셸 푸코, 『푸코의 맑스』, 갈무리, 152쪽)
법칙을 멀리할 것, 대변인들과의 관계를 끊을 것. 이것이 푸코의 정치적 방법론이다. 푸코는 우리 각자의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억압과 예속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최종적 심급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운 길을 가야 했다. 우리의 삶은 ‘자본’이나 ‘국가’ 같은 추상적인 실체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모든 이들이 자본이나 제도와의 특정한 억압적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관계의 형식들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적 문제들은 그 개개의 구체성만큼이나 수많은 복잡성을 함축한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앞에 놓인 복잡한 현실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도의 개혁이 우리의 자유와 해방을 보장할 수 없고, 우리의 정치적 실천들이 단일한 중심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푸코가 다른 사람들을 위에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려는 자들을 입 닥치게 하려는 이유다.
푸코가 ‘문제의 복잡성’이라고 말한 것을 나도 내 나름의 수준에서 경험하고 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내가 느꼈던 억압은 학교나 직장에 나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내다 팔지 않고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이렇게 매일 스스로를 죽이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노동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을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었고, 현재 나는 여전히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삶의 방식을 실험해나가는 중이다. 나는 이것이 각자의 조건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용되어 노동하는 삶’에 대해 막막함과 슬픔, 참을 수 없음을 느끼는 무수히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는 정치인들이나 n포세대를 연민하는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다.
푸코에 따르면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유 그 자체뿐이다. 자유란 지금 여기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속에 맞서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의 조건에 아주 구체적인 변환을 가할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주체성을 변형하기 위한 실험들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유의 실천이 어떠한 국면에서 정책 입안이나 제도 개혁을 수반하거나 요청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그것들로 환원될 수는 없다. 푸코는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당에 가입하거나 기존의 정치진영에 소속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허물어뜨린다. 그런 강박관념이야말로 정치적 상상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므로.
우리는 좋든 싫든 이미 현실에 ‘참여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場)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 정치가 다뤄야 할 문제와 의학이 다뤄야 할 문제, 국지적인 문제와 일반적인 문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유치원에서의 아이들의 저항이 경청된다면, 혹은 그들의 문제제기가 주목받기만 해도, 전체 교육 체계를 붕괴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맞는 말 아닌가?
‘중심적’이고 ‘일반적’인 문제, 정치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국지적’이라는 규정 역시 버려야 할 것이다. 어떤 문제도 국지적이지 않다. 우리 모두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적이나 단일한 노선을 중심으로 동일화하는 것만이 연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식은 아니다. 개인들이 자신의 복잡한 현실로부터 제기하는 절실한 문제는 다른 이들의 문제와 공명할 수 있다. 나의 절실한 질문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신중을 기한다면, 단숨에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려는 조급한 이상주의를 물리친다면, 구체적인 사안들 안에서 공동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다.
3. 실존의 정치성을 연마하기
그러나 모든 개인적인 문제들에 정치성이 잠재되어 있고, 모든 국지적 문제들에 일반성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가 푸코처럼 정치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당장 나 자신만 하더라도 그렇다. 여전히 고민이다. 대의나 이념, 진영이 주는 정치적 흥분을 거부하면서도 나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따로 없다면 어떻게 나는 나의 현실을 정치화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으로 막막해하던 중 푸코 삶의 두 장면이 떠올랐다.
1975년 가을, 푸코는 클로드 모리악, 이브 몽탕 등과 함께 11명의 투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프랑코 독재정부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마드리드로 향했다. 선언문 작성이나 서명운동으로는 불충분하며, 직접적인 행동으로 저항과 연대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푸코의 주장이 관철된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그를 비롯한 일행들을 억압하려는 스페인 경찰에 맞서 ‘육체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다. 경찰관이 다짜고짜 시위자들에게 ‘앉으라’는 지시를 내리자 푸코가 이에 강력하게 저항하여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후에 푸코는 이렇게 술회한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물론 경찰관의 일이다. 그러나 경찰과 맞서는 사람은 자신의 폭력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복종해야만 하는 질서유지 행위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위선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푸코, 「마드리드로 가자」 『리베라시옹』 1975)
이 일화가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푸코의 정치성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가 굳이 스페인 경찰에 저항할 이유가 있었을까? 지식인으로서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마드리드에 가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푸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음에 맞서는 일, 억압에 저항하는 일을 푸코는 잠시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자유는 경찰이 행한 부당한 억압이 제도적으로 조정되거나 법적으로 제재되고 난 뒤에야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의존적이어서는 자유가 아니다. 푸코는 자유가 보장되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자신의 사유와 발언과 행동들 속에서 그 자신의 자유를 구축해갔다. 우리가 종종 사소하게 여기는 사건들에 이처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관성에 타협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질문하고 저항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푸코가 ‘혁명적인’ 분파에 속하지 않고도 ‘혁명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푸코는 공적인 영역에 나서서 정치적인 발언들을 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장면. 푸코는 1978년 푸코는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의뢰로 혁명이 진행 중이던 이란에 두 차례 방문한다. 여기서 푸코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끊임없이 발로 뛰었다. 그는 테헤란을 부지런히 누비며 민중들, 민주투사들, 반체제 군인들, 종교지도자들을 인터뷰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서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리포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념들은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이고 강하며 저항적이고 열정적이다. 이념이 생겨나는 곳, 그것들이 폭발하는 현장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하는 책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힘이 표출되는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그 이념들의 주변에서, 그것들에 찬성하며 또는 반대하며 펼쳐지는 투쟁들 속에서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미셸 푸코, 「사상의 르포르타주」, 『코리에레 델라 세라』, 1978년 11월)
푸코가 어떠한 ‘중심’을 매개하지 않고서도 다른 이들의 문제와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다른 이들과의 연결지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들었다.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튀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이란인들의 이야기를. 자기 시대의 전제가 통하지 않는 과거의 문헌들을 읽어내는 그의 역사연구 또한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끈질긴 시도였을 것이다. 푸코는 ‘정치적 문제’에 참여하기 이전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들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참여적인’ 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일화하는 논리에 스스로를 내어주지 않고서도 푸코가 고립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서부터 나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푸코가 그랬듯 나에게도 어떤 계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윤석열 당선이 앞으로 내게 크고 작은 정치화의 계기들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된다^^;). 분명한 것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건 실존의 정치성을 연마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는 ‘듣기’를 시도해볼 것이다. 얼마 전 푸코 세미나의 선생님들과 푸코 평전을 읽고 토론을 하던 중 각자가 느끼는 ‘참을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때 나는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느꼈다. 그것은 푸코를 통해 소환된 서로의 생생한 목소리로부터 예측하지 못했던 연결의 지점들과 각자의 지평을 넓혀주는 생각거리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하여 나의 ‘현실’을 확장하는 것. 나는 이것을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만들고 나의 정치적 욕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
태극기 집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인간본성에 새겨진 정치적 욕구,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낌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행위를 조직하는 일이 주는 활력을 매개로 뭉쳐 있고자 하는" 욕망을 읽어낸 건화샘도 제가 보기엔 푸코만큼 대단해 보여요.
푸코가 가진 정치적 성실성,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는 푸코의 여정이 잘 다가옵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건화샘의 성실성이 느껴지네요.
건화샘의 새로운 정치 여정이, 어쨌든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려는 건화샘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집니다^^ 화이링~~~
박규창
2022-04-06 16:17
"참을 수 없음에 맞서는 일, 억압에 저항하는 일을 푸코는 잠시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오호. 멋있지만, 막중한 문장이네요. 가랑이 제법 찢어지겠어요? ㅋㅋㅋ 실존 자체가 정치적이게 된다는 건 자유를 실행함에 있어서 조금의 간극도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도 드네요. <주역> 중천건괘에서 자강불식이 왜 자유로운 삶 그 자체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요.
현실을 확장한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지요. 한정된 현실에 몸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한 번 해봅시다. ㅋ
민호
2022-04-07 10:18
"나의 절실한 질문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신중을 기한다면, 단숨에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려는 조급한 이상주의를 물리친다면, 구체적인 사안들 안에서 공동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다."
이 말 또한 멋지고 또 막중하네요.
글을 읽고 있자니, 함께 하던 세미나에서, 식사자리에서, 공차러가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것들을 글쓰기의 문제의식과 힌트들로 녹여 낸 게 대단하네요.
정치적인 것, 목소리가 작아지는 부분이지만 들려오는 소리들에 촉각을 세우는 데서 시작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사람들이(그것도 글자 읽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는 힘나는 목소리들이 많으니까요.
김훈
2022-04-07 14:13
'듣기'을 시도해보는 것, 그것을 자신의 가까운 곳에서 부터 실천하려는 건화샘의 마지막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태극기 집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인간본성에 새겨진 정치적 욕구,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낌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행위를 조직하는 일이 주는 활력을 매개로 뭉쳐 있고자 하는" 욕망을 읽어낸 건화샘도 제가 보기엔 푸코만큼 대단해 보여요.
푸코가 가진 정치적 성실성,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는 푸코의 여정이 잘 다가옵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건화샘의 성실성이 느껴지네요.
건화샘의 새로운 정치 여정이, 어쨌든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보려는 건화샘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집니다^^ 화이링~~~
"참을 수 없음에 맞서는 일, 억압에 저항하는 일을 푸코는 잠시도 뒤로 미루지 않았다." 오호. 멋있지만, 막중한 문장이네요. 가랑이 제법 찢어지겠어요? ㅋㅋㅋ 실존 자체가 정치적이게 된다는 건 자유를 실행함에 있어서 조금의 간극도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도 드네요. <주역> 중천건괘에서 자강불식이 왜 자유로운 삶 그 자체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요.
현실을 확장한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지요. 한정된 현실에 몸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한 번 해봅시다. ㅋ
"나의 절실한 질문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신중을 기한다면, 단숨에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려는 조급한 이상주의를 물리친다면, 구체적인 사안들 안에서 공동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다."
이 말 또한 멋지고 또 막중하네요.
글을 읽고 있자니, 함께 하던 세미나에서, 식사자리에서, 공차러가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것들을 글쓰기의 문제의식과 힌트들로 녹여 낸 게 대단하네요.
정치적인 것, 목소리가 작아지는 부분이지만 들려오는 소리들에 촉각을 세우는 데서 시작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사람들이(그것도 글자 읽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는 힘나는 목소리들이 많으니까요.
'듣기'을 시도해보는 것, 그것을 자신의 가까운 곳에서 부터 실천하려는 건화샘의 마지막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