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생인 미셸 푸코는 2차 세계대전(1939~1945) 종전(終戰) 직후 스무살이 되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대부분을 전쟁의 언저리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2차 대전이라는 사건의 영향은 압도적인 것이었을 테다. “전쟁의 위협은 우리들의 지평이었고 우리들의 실존의 테두리”였으며 “우리 세대의 기억의 실체는 가정생활보다는 세계적 관점의 사건들이었다”(1)고 푸코는 증언한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경험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6년 여 동안 대략 5,000~7,0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푸코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독일의 프랑스 침공만 해도 수십만의 사망자를 냈고, 독일의 포로로 잡혀간 150만 프랑스인들 가운데에는 푸코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던 두 명의 철학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2022년 현재까지 대략 6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사망자 숫자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바이러스가 600만 명을 죽여도 세상이 뒤집히는데 그 열배에 달하는 숫자가 같은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당사자들에게 그 사건의 무게가 어떻게 와 닿았을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푸코와 그의 세대가 전쟁을 경험한 방식은 또 달랐을 것이다. 10대 시절에 전쟁을 겪은 그들로서는 영문도 모른 채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가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현실로 내팽개쳐진 셈이니. 어쩌면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 사건을 다시 체험하고 새롭게 감당해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태풍의 뒤처리를 하는 것은 어쨌든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기존의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고 인간과 인간이 만든 문명에 대한 확신이 뿌리부터 뒤흔들리는 가운데, 제로에서부터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평가하고 또 그로부터 어떻게든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각자가 그것을 경험해내는 방식과 그 강도에는 차이가 있었겠지만, 당대의 유럽 청년들에게 2차 세계대전이란 일상으로부터 뿌리 뽑히는 경험이었으리라.
2. 회의주의자 푸코의 탄생
물론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삶이 완전히 멈춰선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이 된 푸코의 학급에는 부모가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여학생도 있었고, 해방 당시 아버지가 총살당한 남학생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교실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 얼음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푸코와 급우들은 수업을 듣고, 바칼로레아를 치고, 또 대학에 입학했다. 어쩌면 이러한 안온한 일상이야말로 진정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해방 이후의 들뜬 분위기가 전쟁 영웅 드골의 집권으로, 편협한 민족주의로, 그리고 속물적인 경제지상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을 때 푸코를 비롯한 프랑스의 청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많은 이들이, 미래에 교수, 기자, 작가 등등의 ‘부르주아적’ 직업을 가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의 경험 그 자체는, 나치즘을 허용하고 나치즘 앞에서 몸을 팔았으며 결국 드골과의 연합으로 나아간, 그 전에 우리가 살아왔던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창조해야 할 긴급성과 필요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의 많은 젊은이들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전면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지요. 우리는 다른 세계와 다른 사회를 원할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나아가, 스스로를 변환하기를 그리고 관계들을 변혁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미셸 푸코, 『푸코의 맑스』, 갈무리, 51쪽)
전면적 거부. 그것이 전후세대 청년들의 반응이었다. 나치즘을 허용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에 책임이 있는 체제에 그대로 순응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부르주아적 직업을 가지고서 기존 질서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어 알량한 평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그래서 그들은 공산당을 선택했다. 파리 해방 후 실시된 선거 결과 프랑스 공산당은 원내 1당에 올라섰고, 푸코가 다니고 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 학생들 네 명 가운데 한 명 정도가 공산당원이었다. 그런데 푸코는 이것이 딱히 공산당의 이념에 깊이 감화된 결과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단순히 말해서 유럽의 청년들은 그저 나치즘이라는 괴물을 낳은 현실에 스스로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전면적인 회의(懷疑)로부터 비롯된 단절과 변혁에의 열망이 거기에 있었고, 그것이 공산주의에서 하나의 출로를 발견한 것이다.
푸코 역시 1950년에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의 짧은 정치적 모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의 공산당 활동 이력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투쟁에 직접 가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당의 교의를 설파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도 아니다. 푸코의 공산당 가입은 분명 진지한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작은 공산주의 서클의 중심인물이기도 했고, 그 당시 그가 쓴 글들에서는 맑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푸코는 결코 공산주의에 자기 자신을 투신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기록에서는 어떤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결국 1953년 즈음부터 그는 동성애를 배척하는 억압적인 문화와 ‘화이트 칼라 사건’에서 드러난 소비에트의 권위주의에 질려 공산당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푸코는 끝내 공산주의를 자신의 출구로 삼을 수 없었다.
대신에 푸코는 회의주의자로 남았다. 공산당을 탈당한 이후 난데없이 스웨덴의 웁살라로 떠난 푸코는 『광기의 역사』 집필에 착수한다. 본격적으로 그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방황의 시기 이후부터 시작된 사유의 여정은 일관된 회의의 실천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광기, 성, 범죄, 질병 등에 대한 학문적 담론들을 회의했고, 역사에서의 특정 가능한 인과관계를 회의했으며, 모든 종류의 본질주의적 확신들을 회의했다.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나아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생각조차 회의했으니, 회의주의는 푸코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에게 회의란 무엇이었을까? 청년 푸코는 어째서 맑스주의자가 아니라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3.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회의(懷疑)
푸코는 공산당에서의 좌절에 낙담해 마음을 닫아버린 것일까?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 것인가? 아니면 부르주아적 삶의 관성으로 되돌아간 걸까? 그 이후 푸코의 삶을 보건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전체성에 회의적이기 때문에 전체적 회의주의를 갖고 있지 않다.”(2) 푸코의 회의주의는 경직된 확신들과 싸우기 위한 수단이었지, 총체적인 회의라는 또 다른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다. 그의 회의주의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다. 푸코의 글쓰기가 주어지지 않은 정치적 투쟁의 영역을 열어놓기도 했고(『광기의 역사』와 반反정신의학 운동의 경우), 역으로 정치적 실천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사유가 나아갈 길을 발견해내기도 했다(감옥정보그룹 활동과 『감시와 처벌』의 경우). 그렇다. 푸코는 회의주의적인 투사였던 것이다!
푸코에게 회의란 곧 변환이다. 진리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릇된 이데올로기일 뿐임을 폭로하는 것은 충분한 회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회의는 여전히 진리의 권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의는 그릇된 신념들을 처단하면서 참된 신념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이는 언제든 새로운 확신에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의란 대개 이렇다. 그 결과는 뻔하다. 새로운 확신에 붙들리거나 허무주의로 가라앉거나. 반면 푸코적인 의미의 회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이르는 도정(道程)이다. 이것은 공공연한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러한 주장과 반박이 성립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는 무의식적인 전제를 추적하고 조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그러한 무의식적 확신과 맺고 있던 관계에 변환을 도입한다. 또한 다른 이들이 그것과 맺고 있던 관계에도 변혁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자기 시대의 무의식적 전제들을 공격하는 것. 그리하여 생각의 회로를 교란하고 새로운 질문들과 담론들을 분기시키는 것. 이것이 푸코식의 회의인데, 아마도 이는 푸코가 출구 없는 시대를 건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치즘도 세계대전도 결국은 인간의 무지와 자발적인 예속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가 아닌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라!). 인간 스스로가 변하지 않고서는 힘들여 풍요롭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 봐야 자유와 해방은 요원할 뿐이다. 애초에 인간의 탐욕은 그런 착하고 건강한 유토피아를 원하지도 않을 테고. 그런데 인간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훌륭한 교육으로도 선한 의지로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질문하는 만큼, 시대적 전제가 규정하는 바로부터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기를 시도하는 만큼 인간은 바뀔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고 푸코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도한 플라톤이 그랬듯 푸코도 일련의 정치적 좌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철학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푸코에게서 이러한 이행은 철학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정치적 변혁을 달성하겠다는 현명한 결단 같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푸코에게 철학이란 자기 식의 정치를 발명하고 또 지속해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4. 불온해질지어다!
우리 시대도 출구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사실 암담하지 않았던 시대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회의주의적인 인간이다. 나로 말하자면 웬만한 낙관적 믿음에 대해서는 일단 철벽을 치고 보는 편이다. 떨쳐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좋은 세상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적 아젠다들 가운데서 나의 감각에 맞는 것을 찾지도 못했다. 86세대의 진보정치는 나의 현실, 나의 경험과 동떨어진 느낌이었고, 우리 세대의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운동들은 지나치게 나이브해보였다. 어디에서도 나를 위한 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이 세계를 좀 더 이해해보자는 마음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20대가 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런데 기존의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었다고 해서 내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 또한 푸코 세대의 청년들처럼 한 마디로 요약하기 힘든 참을 수 없음을 느꼈다. 기후위기를 낳은 자본이 규정하는 더 많이 노동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삶의 방식에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더욱 정보가 많아지고 콘텐츠가 풍요로워질수록 사유는 빈곤해지는(그러니까 점점 더 멍청해지는!)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고 또 스스로 경험하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감각을 가졌다. 특정한 이상이나 교의에 헌신하지 않고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었던 푸코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나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나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생각의 회로가 바뀌는 한계 지점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는 집요함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러므로 불온해질지어다, 보다 깊이 회의함으로써.
(1) 미셸 푸코, 「스티븐 리긴스와의 인터뷰」, 『에토스』 1983년 가을 (2) 존 라이크먼,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 그린비, 9쪽
막연한 거부감, 옳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느끼는 동떨어짐과 나이브함, 이건 아니다라는 감각.
이 회의적 느낌들이 반응적 '투정'이 아니고 창조적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불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질문에의 집요함'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고 갑니다.
그 집요함의 구체적인 면면들은 이제 등장하겠죠?
푸코로부터 용기를 얻은 건화형님께 용기를 얻습니다.
난희
2022-03-04 23:28
"푸코에게 회의란 곧 변환이다. 진리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릇된 이데올로기일 뿐임을 폭로하는 것은 충분한 회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회의는 여전히 진리의 권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의는 그릇된 신념들을 처단하면서 참된 신념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이는 언제든 새로운 확신에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의란 대개 이렇다. 그 결과는 뻔하다. 새로운 확신에 붙들리거나 허무주의로 가라앉거나. 반면 푸코적인 의미의 회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이르는 도정(道程)이다. 이것은 공공연한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러한 주장과 반박이 성립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는 무의식적인 전제를 추적하고 조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그러한 무의식적 확신과 맺고 있던 관계에 변환을 도입한다. 또한 다른 이들이 그것과 맺고 있던 관계에도 변혁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부분!!! 이 부분만 기지고도 강물처럼 흘러간 건화샘의 20대는 충분히 빛난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스크랩해두고 달달 외우고 싶은 문장입니다.
건화
2022-03-06 20:20
헉쓰 이런 과분한 댓글을~!~! 이렇게 훌륭한 도반의 응원을 받고 있는 걸 보니 제 20대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나봅니다 헤헤. 감사해요 샘! 더욱 분발하지 아니할 수 없겠군뇨
곧 30
2022-03-05 13:57
얼마 남지 않은 20대, 곧 접어들 30을 눈앞에 두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한 사람으로서 지난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네요. 무언가를 한 것 같지도 않고, 이룬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질문하면서 산 것 같지도 않고 ㅋㅋㅋ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30에라도 20대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경아
2022-03-06 11:23
"그렇게 20대가 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 이 한마디에 샘의 현재 포지셔닝이 확 들어옵니다~ 우리가 공부를 통해 만나는 스승들은 결국 '당연함'에 딴지를 거는 거네요... 그게 계보학이란 이름이든, 회의란 이름이든, 비판이란 이름이든, 연기란 이름이든 말이죠.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그 당연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회로가 바뀌는 한계 지점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는 집요함"! 그 한계를 직접, 스스로, 확인했을 때 비로소 다른 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푸코와 샘 글을 통해 다시 확인하고 갑니다~
김훈
2022-03-07 11:22
저 스스로에게 '회의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푸코의 철학과 삶에 영향을 받았을 건화샘을 떠올리며, 나또한 몇 년씩 어느 작가나 , 철학가가 좋아서 그에 대해 공부하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해보네요. ^^
황리
2022-03-18 09:55
앞선 긴 댓글들에 절절히 공감하면서, 저의 게으른 삶과 공부를 뼈아프게 돌아보게 됩니다! 푸코식 회의주의와 질문을 통해 스스로 변환하는 삶의 길, 저도 건화 샘과 함께 걸어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지
2022-03-19 11:21
"질문하는 만큼, 시대적 전제가 규정하는 바로부터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기를 시도하는 만큼 인간은 바뀔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동감합니다. 저 자신에겐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은 채 회의나 냉소로 퉁쳐버리는 건 게으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더 깊이 회의하고 집요하게 질문하는 불온한 건화샘, 응원합니다.
막연한 거부감, 옳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느끼는 동떨어짐과 나이브함, 이건 아니다라는 감각.
이 회의적 느낌들이 반응적 '투정'이 아니고 창조적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불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질문에의 집요함'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고 갑니다.
그 집요함의 구체적인 면면들은 이제 등장하겠죠?
푸코로부터 용기를 얻은 건화형님께 용기를 얻습니다.
"푸코에게 회의란 곧 변환이다. 진리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릇된 이데올로기일 뿐임을 폭로하는 것은 충분한 회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회의는 여전히 진리의 권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의는 그릇된 신념들을 처단하면서 참된 신념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이는 언제든 새로운 확신에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의란 대개 이렇다. 그 결과는 뻔하다. 새로운 확신에 붙들리거나 허무주의로 가라앉거나. 반면 푸코적인 의미의 회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이르는 도정(道程)이다. 이것은 공공연한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러한 주장과 반박이 성립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는 무의식적인 전제를 추적하고 조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그러한 무의식적 확신과 맺고 있던 관계에 변환을 도입한다. 또한 다른 이들이 그것과 맺고 있던 관계에도 변혁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부분!!! 이 부분만 기지고도 강물처럼 흘러간 건화샘의 20대는 충분히 빛난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스크랩해두고 달달 외우고 싶은 문장입니다.
헉쓰 이런 과분한 댓글을~!~! 이렇게 훌륭한 도반의 응원을 받고 있는 걸 보니 제 20대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나봅니다 헤헤. 감사해요 샘! 더욱 분발하지 아니할 수 없겠군뇨
얼마 남지 않은 20대, 곧 접어들 30을 눈앞에 두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한 사람으로서 지난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네요. 무언가를 한 것 같지도 않고, 이룬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질문하면서 산 것 같지도 않고 ㅋㅋㅋ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30에라도 20대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렇게 20대가 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 이 한마디에 샘의 현재 포지셔닝이 확 들어옵니다~ 우리가 공부를 통해 만나는 스승들은 결국 '당연함'에 딴지를 거는 거네요... 그게 계보학이란 이름이든, 회의란 이름이든, 비판이란 이름이든, 연기란 이름이든 말이죠.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그 당연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회로가 바뀌는 한계 지점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는 집요함"! 그 한계를 직접, 스스로, 확인했을 때 비로소 다른 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푸코와 샘 글을 통해 다시 확인하고 갑니다~
저 스스로에게 '회의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푸코의 철학과 삶에 영향을 받았을 건화샘을 떠올리며, 나또한 몇 년씩 어느 작가나 , 철학가가 좋아서 그에 대해 공부하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해보네요. ^^
앞선 긴 댓글들에 절절히 공감하면서, 저의 게으른 삶과 공부를 뼈아프게 돌아보게 됩니다! 푸코식 회의주의와 질문을 통해 스스로 변환하는 삶의 길, 저도 건화 샘과 함께 걸어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하는 만큼, 시대적 전제가 규정하는 바로부터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기를 시도하는 만큼 인간은 바뀔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동감합니다. 저 자신에겐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은 채 회의나 냉소로 퉁쳐버리는 건 게으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더 깊이 회의하고 집요하게 질문하는 불온한 건화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