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잡설 : 코끼리 같은 세상에서 코끼리처럼 살아가기
우리 모두, 우리 모두, 우리 모두는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구원하려 애쓰는데,
어떤 길들은 다른 길들보다 더 빙글빙글 돌고
종잡을 수 없다.
- 레이먼드 카버, <스위스에서> 중에서 -
1.
“몸뚱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 같으며, 낙타의 무릎, 범의 발굽을 하였으며, 짧은 털은 회색이었다. 어질어 보이는 모습에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고 눈은 초승달 같았다. 두 어금니는 굵기가 두 줌쯤 되고, 길이는 한 발 남짓 된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고, 굽혔다 펴는 모습이 자벌레와 같으며, 도르르 마는 모습은 굼벵이 같고, 코의 끝은 누에 꽁무니 같은데, 물건을 족집게처럼 집어서 돌돌 말아서는 입에 집어넣는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고’에서 짐작하셨을지 모르나, 막상 그려보면 십중팔구 기괴한 형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동물은? 그렇다, 바로 코끼리.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시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코끼리를 좋아한다.(아, 내 코 때문은 전혀 아니다. 나로 말하면, 코가 길지는 않다. 큰 것과 긴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암만. 별명이 코알라였던 적은 있어도 코끼리였던 적은 없다.) 그 육중함이, 그 용맹함이, 그 인자한 눈매가, 그러면서도 초식동물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뭐든 척척 해내는 그 긴 코가,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나의 ‘동물 삼대장’ 중 고래는 고래대로, 곰은 곰대로 매력이 무지막지하지만, 코끼리의 매력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북경 여행 좀 해본 연암이 알려주는 팁. “괴상스럽고 특별하며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며 거창하고 뛰어난 구경거리를 보려거든” 북경 선무문(宣武門) 안에 가서 상방(象房, 코끼리 우리)을 보라!(<열하일기>, 상기(象記)) 지금 그 자리가 베이징 동물원이 있는 곳이라니,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코끼리도 거기에 있겠지.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미디어가 아니라면 볼 일 없는 코끼리를 그 당시에 몇 명이나 실견했겠는가.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 기묘한 동물 앞에서 당황한다. 그럴수록 자신이 아는 단편적 사실들로 미루어 성급하게 추측하고 판단하려 든다. 코를 주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코를 다리로 보아 다리가 다섯 개라고도 하고, 그 눈이 쥐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긴, 만사가 대개 이런 식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내가 당해봐서 아는데... 아는 걸로 대충 퉁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진리가 되어 버린다. 연암의 말대로, 생각과 상상이 미치는 범위가 기껏해야 소, 말, 닭, 개이고 보니, 용, 봉황, 거북이, 기린, 코끼리 같은 낯선 사물 혹은 사건들을 만나면 ‘다르게’ 생각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생각을 중지하는 쪽을 택하는 것. 하여 세상은 늘 처음 보는 코끼리와 같고, 우리는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 영락없이 눈 뜬 장님 꼴이다. 그럴수록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그러고 보니, 역(易)이 줄기차게 상(象)을 말하는 것도 어쩌면 ‘생각을 좀 하라’는 성현들의 압박은 아닐지. <주역>을 공부하는 벗들은 알겠지만, 이 ‘코끼리(象)’야말로 난공불락의 개념이다. 성인(聖人)은 象을 보고 조짐을 읽는다 하지만, 조짐은커녕 ‘象’이라 쓰인 글자를 놓고 ‘코끼리?’라며 동어반문(同語反問)하기를 반복한 지가 어언... 아무래도 오늘의 이야기 역시 象이 아니라 조잡한 코끼리 얘기에 그칠 듯하다.
2.
하늘을 나는 헐리우드의 스타 ‘아기코끼리 덤보’는 일단 논외로 하자. 그러면 빈도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코끼리가 가장 많이 등장할뿐더러 그 진가가 최고로 발휘되는 것은 역시 불경에서다. 가장 인자한 역할에서 가장 난폭한 역할까지, 캐릭터의 스펙트럼 또한 덩치만큼이나 드넓다. 왜 코끼리인가에 대한 속시원한 설명은 찾을 수 없지만, 불교에서 코끼리가 갖는 상징성이 고따마 붓다의 태몽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일찍이 힌두교의 제우스라 할 수 있는 인드라 신의 ‘마이 카’가 흰 코끼리 아이라바타(Airavata)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붓다의 어머니 마야 부인의 태몽은 잘 알려져 있다. 마하마야 왕비가 잠든 사이, 도솔천(兜率天)에 머물던 보살이 붓다가 되기 위한 삶을 준비하면서 마야 부인을 어머니로 선택하여 태(胎)에 들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본생경>의 묘사는 이렇다.
“그때 보살은 훌륭한 흰 코끼리가 되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금의 산에서 노닐다가 그곳에서 내려와 은산에 올라 북쪽으로부터 와서 은줄과 같은 코로 하얀 연꽃을 집어들고는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황금궁전으로 들어가셨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침대를 세 번 오른쪽으로 돌고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두드리며 태내에 들어 모습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보살은 웃탈라살라 성좌에 만월이 깃든 날에 모태에 깃든 것이다.”
여기 묘사된 코끼리의 행동이 사원 건축양식 및 사원에서 행하는 예와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꽤 설득력이 있다. 여하튼 고따마 붓다는 이생을 간절히 원했고, 마야 부인은 부지런히 쌓은 공덕의 과(果)로 고따마 붓다를 출산했다.(덕분에 우리는 그 어머어마한 말씀들을 따라 드물고도 고귀한 길을 가보겠다고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어떤 본생담에서 전하기로는, 가시국과 비제혜국의 싸움을 중재한 흰 코끼리가 고따마 붓다의 전생이었다고도 한다.(이때 코끼리가 남긴 게송은 “이기게 되면 원수를 더 만들고 / 지게 되면 근심과 괴로움 더하나/ 이기고 지는 것 다투지 않으면 / 그 즐거움은 가장 제일이니라.”였다!)
붓다의 현생에서도 코끼리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멜로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 빠릴레이야까도 그 중 하나. 이 구구절절한 스토리의 시작은 두 수행승의 다툼인데, 다툼의 발단은 참 거시기하게도 화장실 사용 문제였다. 뒷일을 보고 사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를 두고 두 도반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급기야 집단 갈등으로 확대된 것.(세상일이라는 게 참...) 분노에 휩싸인 중생에게 부처님 말씀인들 귀에 들어오겠는가. 실망한(?) 부처님께서는 소란스러운 군중을 떠나 빠릴레이야까에 도착하셨는데, 마침 번다한 코끼리 무리로부터 떠나온 빠릴레이야까가 극진하게 부처님의 시중을 들며 함께 우기를 나게 되었다. 아침이면 부처님께서 세면하실 물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탁발하러 마을을 오가실 때는 발우와 가사를 머리 위에 얹고 다녔고, 쉬실 때는 나뭇가지로 부채질을 하는가 하면, 밤에는 사나운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곤봉을 코에 감고 보초를 섰다고 한다. 그러나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것이 존재의 운명. 법을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마침내 쌀라나무 숲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빠릴레이야까의 가슴은 무너져내린다. 부처님을 모시고 떠나는 일행에게 바나나와 과일을 공양으로 올린 후, 큰 코를 입에 넣었다 빼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을 배웅하는 코끼리. 너는 이생에서 통찰을 얻을 수 없거니와 숲을 벗어나게 되면 위험하니 멈추라는 부처님의 뜻을 어길 수 없었던 빠릴레이야까는 멈춰서서 내내 울다가 부처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상심하여 죽었다는, 애틋하고 절절한 얘기다.(<우다나> 메기야의 품, ‘코끼리의 경’)
죽은 동료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 근처를 맴돌면서 코로 하염없이 시체를 쓰다듬으며 애도하는 것이 코끼리의 타고난 성정이다. 게다가 코끼리는 선배나 부모의 뜻을 잘 따를 뿐 아니라 그들의 지혜를 기억하고 대물림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추측건대, 코끼리의 이러한 생태를 잘 파악했기에 저와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토록 고귀한 코끼리들과는 상반된 캐릭터를 지닌 코끼리들도 여럿 있다. 몸을 받은 짐승인 이상 화와 욕정을 이기지 못하기는 매한가지. 날라기리가 이런 캐릭터를 지닌 대표선수다.
날라기리는 붓다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아자타삿투왕이 키우던 코끼리인데, 이 녀석이 포악하고 조급한 데다 늘 술에 취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성정이 모질고 쾌락에 중독된 이에게 있어 힘은 다른 존재를 해치는 무기가 되고, 그의 지력(知力)은 세상을 파괴하는 독이 되는 법. 아니나 다를까, 붓다를 한없이 모략하고 시기하던 데바닷따가 날라기리의 힘을 이용해 붓다를 죽이려 계획한다. 니체라면, 여기서 반동적 힘의 반동적 사용을 보았으리라. 모든 좋은 것을 파괴하라. 모든 능동적 힘을 분쇄하여 무력하게 만들라. 그것만이 너의 힘을 보존하는 길이다! 상대를 부정하고서야 가까스로 자신에게 이르는, 너덜너덜한 가짜 긍정. 그리하여 마침내, 대중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들어가시는 붓다를 향해 돌진하는 날라기리. 그러나 술에 취해 날뛰는 코끼리를 보고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때, 붓다는 고요히 멈춰 서서 성난 코끼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이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아래의 ‘취상조복상(醉象調伏像)’이다.)
그렇지, 화를 낸다는 건 두렵다는 얘기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겁이 난다는 얘기지, 무력하다는 뜻이고. 붓다는 성난 날라기리의 마음 밑바닥을 꿰뚫어 보신 것. 미움을 이기는 건 더 큰 미움이 아니라 자비심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건 대상 의존적 쾌락이 아니라 마음을 직시하는 용기다. 자비심은 부정적 힘을 긍정적 힘으로, 죽이는 힘을 살리는 힘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니 못 본 체하지도 놀라 도망치지도 말고, 달려오는 코끼리를 자비의 마음으로, 용감하게 마주하라! 바깥에 있든 내 안에 있든 취한 코끼리를 길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화가 나거든 일단 호흡을 고르고, 성난 날라기리를, 그를 쓰다듬던 붓다의 손길을 떠올릴 일이다. 내 마음의 날라기리를 여러 차례 마주한 오늘, 이렇게 또 지지부진한 각성과 함께 자비심을 (쥐어짜듯이) 내어 본다.(언제쯤이나 나의 자비심은 폭포수처럼 콸콸 흐르려나...)
3.
미쳐 날뛰는 코끼리, 하면 떠오르는 얘기 하나가 더 있다. 불경이 아니라 조지 오웰의 이야기다. 오웰이 이튼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영국식민지 인도 제국의 경찰에 지원하여 영국령 버마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의 나이 열아홉에서 스물 네 살(1922~1927) 때다. 패기만만했는지는 모르겠고 전도유망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으나, 그는 젊었고, 최소한 제국주의가 옳지 않다는 정도의 지각은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인생사가 어디 젊음이나 옳음 따위를 가려가며 일어나던가.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더군다나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면,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은 늘 일어나게 마련. 오웰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절 청년 오웰은 ‘유럽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애 최대의 집단적 미움을 감수해야 했다. 억울했을 만도 하지. 제국주의 지배는 사악하고 고로 자신은 버마의 편이라는,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확신을 지닌 터였으니, 적어도 오웰이 생각하기에 자신을 향한 그들의 미움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악의를 쏟아내는 “악귀 같은 황색 인간들”(특히 자신에게 야유를 퍼붓던 불교 승려들)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분노 또한 나날이 부풀었던 모양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피지배민의 의지를 영구히 탄압하는 거역할 수 없는 폭정으로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승려의 창자에 총검을 찔러 넣는 것보다 더 짜릿한 즐거움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난 ‘코끼리 난동 사건’은 그가 비로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정난 코끼리 한 마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으니 조치해달라는 민원이 접수된다. 몇몇 집들은 쑥대밭이 되고, 인도인 하나가 처참하게 밟혀 죽은 마당인지라 민원을 모른 체할 수 없게 된 상황. ‘유럽인 오웰’은 소총을 들고 코끼리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코끼리를 발견! 그런데 웬걸. 그 난리를 쳐놓고 사라진 코끼리가 소보다 더 온순한 모습으로 풀을 뜯고 있는 게 아닌가. 조련사가 와서 데리고 가면 상황은 종료될 터, 코끼리를 쏘아야 할 이유도 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리를 뜨려는데, 세상에나 족히 2천 명은 되어 보이는 ‘노란 얼굴들의 바다’가 그의 뒤를 쫓아와 잔뜩 흥분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
"결국엔 내가 코끼리를 쏠 수밖에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니 그렇게 해야 했다. 나를 앞으로 떠미는 2천 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두 손으로 소총을 들고 서 있던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총을 든 백인인 내가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내가 연극의 주인공이었지만, 실제로는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라는 사실을."(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백인 남성은 원주민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백인의 통치가 가능하려면 백인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감동'을 줘야 하고, 원주민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증오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있다. 저들의 증오를 갚아주려면 저들이 못하는 것을 해내야 한다. 저들의 악의에 찬 기대를 보란 듯이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상황을 지배한 듯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것도 지배하지 못했다. 아니, 지배한다고 믿었던 것이 실은 지배당하고 있었음을 목도했다. 누군가를 지배하려면 스스로가 먼저 지배를 내면화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제국주의를 비롯한 일체의 지배와 압제가 '나쁜' 것은, 이처럼 모두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모두를 성난(=두려움에 압도된) 날라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고? 그는 코끼리를 쏘았다. 그 거구가 꼬꾸라질 때까지,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쏘고 또 쏘았다,고 오웰은 기록한다. 자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태. 지옥 중에서도 최악의 지옥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 앞에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오웰은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하여 그는 누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코끼리를 사살한 ‘용맹한 유럽인’이 되었으나, 종국에 그가 마주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제국주의는 악'이라는 얄팍한 관념을 부여잡은 채 제국주의의 메커니즘을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유럽인’이라는 허상에 마취되고 두려움과 어리석음에 추동되어, 풀을 뜯는 코끼리를 향해 분노와 증오를 쏟아부어야 했던 것. 이 자기기만, 이 수치심을 어쩌란 말이냐. 오웰의 글을 읽고 나는 한동안,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오웰의 마음 언저리를 맴돌았다. 떠나지 않은 질문. 그때 거기, 오웰의 눈 앞에 있던 코끼리는 무엇이었을까. 오웰은 무엇을 쏜 것일까.
4.
오늘 일자 뉴스를 보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오늘로 35일째라고 한다. 사진 속 우크라이나의 하늘은 화염으로 인해 시뻘겋다.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포탄을 쏘아 붓고, 그럴 때마다 시시각각 폐허로 변해버리는 도심의 모습을 드론의 시점으로 생중계하는 뉴스 영상은 처음 본 코끼리보다 기이하고, 그 영상을 보는 체험은 헐리우드 전쟁영화의 ‘리얼리티’ 타령을 단번에 뭉개버릴 정도로 초현실적이다.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화면 속 저 어리디어린 청년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청년 오웰처럼 그들도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을까? 그들도 알까? 자신이 겨누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예나 지금이나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면)“늙은 사람들이 멋대로 시작한 전쟁에서 젊은이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를 파괴하려 할 때 결국 파괴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그들 마음 속의 날라기리는 어디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걸까.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이 민중들의 저항에 못 이겨 무너지려던 찰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무력으로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기어이 친소 정권을 세우던 그때도 그랬다. 그때는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였고, 지금은 '민주적인 종신 집권'을 꿈꾸는 푸틴일 뿐. 청춘들은 영문을 모르는 채 전쟁터로 차출되었고, 10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소련군의 수만 해도 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무자비한 역사의 반복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무자비한 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일 뿐, 시간은 우리에게 매번 또 다른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지 않은가. 분명, 우리가 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지. 역사 역시 코끼리(象)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길이 보이겠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시절이다. 그래도 정신줄을 단단히 부여잡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가 생기기를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코끼리(象)를 붙들고 있다.(규문 주역팀의 극성스러운 팀원들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 믿는다.^^) 코끼리의 뼈만 가지고도 살아 있는 코끼리를 그려내는 성인(聖人)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언정, 코를 다리라 하거나, 일부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전체라 우겨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지. 이 코끼리 같은 세상에서, 안팎으로 취해 날뛰는 코끼리를 조복시켜가며, 코끼리와 같은 힘으로 용맹정진하려면, 뭐, 그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불경의 코끼리를 만나고, 주역의 코끼리(象)를 더듬는다.
“무릇 코끼리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동물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은 터에, 하물며 천하의 사물이란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복잡함에랴. 그러므로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코끼리 象 자를 취해서 괘의 모양이 지닌 의의를 설명하며 ‘상왈(象曰)’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코끼리의 형상을 보고 만물의 변화하는 이치를 연구하라는 뜻이리라.”(상기(象記))
p.s. 1980년대 소련의 록스타 빅토르 초이의 노래 <혈액형>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애도이자 그 지옥 속을 허위허위 걷고 있을 청춘들에게 전하는 담담한 위로다. 앨범을 필청하시길 권유드린다. 이 감성, 너무 좋다. (* 빅토르 초이에 관한 얘기는 따로 킵해둔 것이 있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볼까 합니다~) 빅토르 초이를 들으며, 아무것도 안 하느니 기도라도 하자. 그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따스한 곳에 있어도 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린다
부츠 위엔 별의 먼지가 쌓여 있고
부드러운 의자, 격자무늬 담요,
제때 당기지 못한 방아쇠,
화창한 날은 눈부신 꿈속에나 있네
내 소매에는 혈액형
내 소매에는 군번이
전장에서 나의 행운을 빌어다오, 빌어다오
이 들판에 남겨지지 않기를
이 들판에 남겨지지 않기를
행운을 빌어다오, 행운을 빌어다오
대가야 치를 수 있다지만
그런 승리는 원치 않아
누구의 가슴도 짓밟고 싶지 않아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그저 너와 함께 남기만을 바랬어
그러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오른 별이 나를 길로 부르고 있어
내 소매에는 혈액형
내 소매에는 군번이
전장에서 나의 행운을 빌어다오, 빌어다오
이 들판에 남겨지지 않기를
이 들판에 남겨지지 않기를
행운을 빌어다오, 행운을 빌어다오
부처님의 코끼리 이야기, 주역의 코끼리 이야기, 그리고 조지오웰의 코끼리 야야기(몇년전 공부할때 이 에세이 넘 좋아서 외웠다는 것!) 이런 여러 이야기들이 모여 이렇게 콜라보를 이뤄낼 수 있는게,,, 글쓰기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은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옆구리는 계급의 표시라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조지오웰의 코기리를 쏘다 에세이는 코끼리를 쏘기까지에서부터 코끼리가 쓰러지는 장면까지 아주 세세하게 그렸는데,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에세이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새삼 옛날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그 코끼리를 쏠 수 밖에 없었던 조지 오웰의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위 글에서처럼 조지오웰은 무엇을 쏘았던 것일까? 를 생각해봅니다^^
象이 뭔지.. 가랑이만 찢어지겠습니까? 뇌에 주름이 없어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생각하고 살고 싶지 않다는 뇌피셜입니다) 점점 주름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생각 하지 않는 삶은 결코 편안한 삶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ㅠㅠ 그에 따라오는 수많은 번뇌들..주역 공부하기도 헉헉 되는데 불교까지...그럼에도 스승님이 저리도 열심히 부여잡고 가시는데 제자의 도리로 받아 먹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제대로 받아 먹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極盛스러운 팀원들이 極聖으로 가고자 하려는 애씀을 보실 날이 오겠지요?
코끼리를 실물로 본 게 정말 손에 꼽네요. 나머지는 모두 TV 영상이나 캐릭터 상품 정도... 실제로 보는 코끼리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그만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세상! 복잡다난합니다~~
어쩜 좋아! 코끼리 한마리로 역의세계, 연암, 붓다, 오웰, 우크-러시아 전쟁까지 엮어버리시다니요.
象얘기 나올 땐 낄낄거리며 읽다가 읽어갈수록 숨 죽여가며 읽었네요.
으매 스승님의 잡설같지 않은 잡설 넘흐 흥미진진합니다. 다음편도 얼른얼른 올려주세요!
우왕~ 코끼리 하나로 저리도 넓은 스펙트럼으로 시야가 확장되네요.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을 쿡쿡 찌르네요. 군데 군데 베껴쓰고 싶은 문장들 가득합니다.
"미움을 이기는 건 더 큰 미움이 아니라 자비심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건 대상 의존적 쾌락이 아니라 마음을 직시하는 용기다. 자비심은 부정적 힘을 긍정적 힘으로, 죽이는 힘을 살리는 힘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니 못 본 체하지도 놀라 도망치지도 말고, 달려오는 코끼리를 자비의 마음으로, 용감하게 마주하라! 바깥에 있든 내 안에 있든 취한 코끼리를 길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화가 나거든 일단 호흡을 고르고, 성난 날라기리를, 그를 쓰다듬던 붓다의 손길을 떠올릴 일이다. " 요 경지가 있음을 알고 주역 공부하겠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 경지를 보여주셨네요.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는...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오웰은 '유럽인들이' 제국주의에 취해버린 대가가 무엇인지 처절하리만큼 알아버리고야 말았지만, 그걸 알아버린 대가도 치룬 것 같네요.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면서도 잠들고 싶은 이 미몽을 어이하오리이까~ 스승님, 이 무명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