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시습(時習)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1장
나는 한자만 봐도 머리에 쥐가 나는 사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는 한자가 없었다. 그런데 <논어(論語)>라니, 논어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한자마다 음과 뜻을 미리 달아놓아도 구절들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곤욕스러웠는지 모른다. 한자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해석이 되는지 알쏭달쏭한 것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듣기만은 하자라는 생각으로, 아침 7시에 시작하는 논어 강의를 꾸역꾸역 쫓아갔다. 그런데 논어 강의가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이제는 논어를 연재하라니 이것이 청천벽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여하튼 제일 만만하다고 생각한 <논어>의 첫 구절 “자왈 학이시습지 부역열호”로 글을 쓰게 됐다. 이 구절을 고른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일단 한자가 쉬웠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작년보다 공부하는 데 자신감이 붙고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위 구절을 곱씹다보니, 뭐랄까. 나는 작년부터 연구실에 매일 나오면서 ‘공부하다’라고만 생각했지, ‘배우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學)에 어떤 뜻이 있는지 사전을 찾아봤다. 첫째는 ‘배우다’고 둘째는 ‘공부하다’였다. 즉 학(學)을 ‘공부하다’라고 해석해도 맞는 말이었다. ‘공부하다’를 속으로 읊조리다보면 혼자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정적이고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배우다’는 배울 상대라든가 배움으로 삼을 만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공부하다’와 다르게 ‘배우다’는 외부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는 행위다. 단순히 공부하다를 배우다라고 바꿔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언행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구실에 매일 나와 공부하고 있다’가 아니라 ‘연구실에 매일 나와 배우고 있다’라고 생각을 바꿔봤다. 그랬더니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닌, 내가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모든 것이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확장이 되었다.
작년에 연구실에 매일 나오기 시작했을 때, 채운샘께서 주방매니저를 시키고, 선물목록을 쓰게 하고, 학인들의 이름과 각 요일별로 어떤 세미나가 있는지 외우게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 전까지 줄곧 혼자서 도서관이나 커피숍에서 공부했던 나는 자신에게만 골몰하던 습이 강했고 다른 사람이나 내가 살아가는 주변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경향이 강했다. 연구실에서 공부하기 전과 후를 돌아보면, 나에게 연구실 생활은 자신에게만 골몰하는 삶에서 벗어나 타인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또한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기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등, 다른 방식의 삶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다. 학(學),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태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 배우고 익히려는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렇게 배우고 익히려는 마음을 지속가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배우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열(說), 기쁨이 아닐까, 이것은 내가 책에서 몰랐던 것을 깨치게 되거나 평소에 생각했던 바가 확장되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일까. 분명 책을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언행에서, 혹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한순간 나타났다가 흩어지기 쉽고 휘발성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배운 것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시습(時習)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습은 수시로 익히는 과정 속에서 수시로 깨치는 기쁨을 준다. 이렇게 수시로 깨치는 동안 느껴지는 열(說)이야말로 공부를 지속시켜주는 동력이 아닐까.
정자의 주석에는 “습(習)은 거듭함이니, 때로 다시 생각하고 연역(演繹)해서 가슴속에 무젖게 하며 기뻐지는 것이다.”라고 나온다. 나는 자신을 시험하듯이, 최근 감응했던 문장을 필사해서 주머니에 넣고 반복해 외워봤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내가 평소 생각해왔던 바를 확인시켜주는 기쁨이 있었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몇을 빼고 사회구조 속에서 낱낱의 개인은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어요. 실존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약한 존재고요. 약한 사람들은 세상살이를 하면서 무력감이나 억울함을 느껴요. 그걸 표출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많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어요. 나라는 약한 존재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 들 때 내가 역사의 현장에 있다고 느껴져요. 그 순간에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회사에서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는 실존적 연약함을 이겨내는 강한 동력이 생겨요. 그렇게 모든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걸 아는 사람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 <한겨레21> 김진해 작가 인터뷰 中
그간의 공부를 통해 자신에게만 골몰했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와 개인이 어떤 연관 관계 속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어떤 문제를 공적으로 발언하고 싶을 때,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 문장들을 암송할수록 이런 물음과 그에 대한 생각들이 깊어졌다. 정자의 말처럼 문장들을 거듭 생각하게 되고 연역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거다’라는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 개인은 사회 구조 속에서 약한 존재지만 누군가와 이어져있다는 감각, 즉 연대를 통해 실존적 연약함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됐다. 위 구절을 거듭 암송하는 과정은, 기존의 생각을 더 확장시켜주고 나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요즘 나는 나의 공부가 지지부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작년에 그렇게 많은 것들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한데 모이지 않고 흩어져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공부한 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 고민이 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공부한 것을 한데 모으지 못한 이유는 내 공부에 대한 향방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훈제 논어를 통해 비록 몇 문장을 암송했을 뿐이었지만, 시습(時習)은 배운 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고를 확장시켜 공부의 향방을 정하는 일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부가 한데 모이지 않고 흩어지는 것도 시습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등한시했던 암송과 필사 같은 공부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이제부터 배운 것들을 어떤 시습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갈까라는 고민이 남았다. 그리고 그런 고민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기쁨을 느껴보려고 한다. ^^
글 : 김훈
제게 배움이라고 하면, 우선 몇 년 전 규문에서 니체팀과 함께 읽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의 대사가 떠올라요. 그의 회고 대사 중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바보였습니다마는, 오늘은 좀 나아졌습니다" 이 말이 그때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니체를 읽을 때마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바보라고 자책하는 동시에 그래도 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으로 위안 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공부한 것을 이해하고 알게 된 똑똑이가 된 게 아니라, 알고자 하지 않은 것이 바보이고, 알고자 하는 마음과 공부를 놓지 않고 있는 습관이 배움의 전부라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들인 시간과 노력이 수량적으로 드러나거나 누군가의 칭찬으로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붙들리면, 지금까지의 공부가 다 허사가 되겠죠. 저 같은 경우는 부모님 건강 문제로 하고 있던 몇 개의 공부를 다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상의 사건으로 마음이 흔들려 하고 있던 공부를 그만두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훈샘이 인용하신 공자님 말씀을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과정도 일상의 사건도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을 기쁨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배움이란 그것을 온전히 겪는 과정과 함께 공부는 중에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요. 막연한 기쁨이라는 이미지 하나를 벗어나려면,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거기서부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참 어렵지만 절실하기도 합니다. 훈샘의 고민처럼 짧은 구절 하나에도 헤아리기 힘든 깊은 뜻이 담겨 있어 '왜 공부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바보가 아니라, 지금 자기 자리에서 알고자 하는 자가 되는 배움의 기쁨을 훈샘의 연재를 통해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새 연재, 첫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써 주세요. 저도 저의 자리에서 공부를 놓지 않고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훈샘, 파이팅!
學의 의미를 ‘공부하다’에서 ‘배우다’로 바꿔서 실천하고, 習을 거듭함의 실행으로 문장 암송을 하면서 세상과 다른 관계를 맺어 나가셨다는 훈샘! 멋집니다^^ 훈샘의 時習을 격하게 응원하며 이렇게 또 한번 생각의 길을 내 주심에 고마움을 여기에 남깁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태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 익히는 마음이라는 것! 배운 것들을 어떤 시습을 통해 자기것으로 만들어 나갈까에 대한 고민..그 고민 중 축구를 함께해 나가는 과정에 시습할게 있을거 같은데요? ㅋㅋ 함께 고민해보죠~ 부실한 40대끼리..현재는 3명이지만 더 늘어 나겠죠!!!
저 역시 한자 무식이입니다만, 어느새 한자 매력에 빠져버렸죠. ㅋ 훈샘도 이번 훈제 논어를 통해 사고를 푹~ 익히시고, 그러면서 한자 매력에 푹~ 빠지셨음 합니다. ㅎㅎ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한 달을 넘게 쓰고 또 쓴 성실함이 만든 솔직하고 담백한 논어네요.
훈샘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논어 , 기대하고 있을께요~~~
훈샘 글을 읽으면서 제게도 시습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본인만의 공부의 길을 찾아가고 계신 모습 멋집니다잉~~
저도 한때는 공부가 늘지 않는 이유가 '망각' 때문이라 생각했었거든요.... '공부에 대한 향방을 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훈샘의 발심에 저도 기쁘게 동참해요. 세상 아름다운 풍경 중에 함께 배우고 깨우치는 풍경만한 게 있을까요. 복 많은 사람이 학이시습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