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로카리스의 유쾌한 고독
1. 기묘한 새우의 백년의 고독
"마침내 모든 조각이 모였다. (...) 라그가니아는 압착되고 변형된 몸체의 일부였다. 페이토이아는 갈고리 형태의 돌기가 달린 일련의 엽상체가 아니라 이가 돋은 판이 고리 형태로 둘러싼 입이었다. 아노말로카리스는 하나의 종(Anomalocaris canadensis)의 섭식기관이었다. (...) 가장 오래된 명칭을 존중한다는 절대적인 학명 명명규칙에 따르기 위해서 속명은 휘티브스가 1892년에 명명한 아노말로카리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 <원더풀 라이프>, 궁리, 302쪽)
‘아노말로칼리스’의 본모습이 발표된 것은, 머리 없는 ‘기묘한 새우’ 화석이 처음 발견된 1886년으로부터 딱 백 년이 되던 해인 1985년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뿔뿔이 흩어진 채 오해되어 왔으니. 말 그대로 백 년의 고독이다.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눈, 몸통, 입, 부속지(몸통에 붙은 다리나 촉수 같은 기관) 화석들 각각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팠던가. 코끼리를 더듬던 장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코끼리는 살아있기라도 하지, 화석은 그저 납작하게 굳어져 침묵할 뿐이다. 그것도 산산히 부서지고 뒤섞인 채로. 수억 년의 시간을 품고. 하지만 이제 기뻐하라! 드디어 이 녀석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이야말로 고생물학의 쾌거다.
그래서 아노말로카리스가 뭐냐고? 사실 ‘뭐다’라고 답하기가 어렵다. 단지 5억 년 전 생물을 아는 데 정보적 한계가 있어서만은 아니다(검색하면 잘 나온다). 다만 한 세기 내내 그 이름을 차지했던 옛 주인을 무시하고 젊은 새 주인을 논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노말로칼리스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그것은 무엇인가’보다도 ‘그것은 무엇이어 왔는가’를 묻는 일이 더 중요할(혹은 재밌을)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1886년, 캐나다의 한 화석 노다지. 바위 속에서 한 쌍의 생물 흔적을 발견한 고생물학자 휘티브스가 ‘왠지 새우를 닮았는 걸’하고 생각한 이래로, 아노말로카리스는 계속 새우였다. 비록 머리는 없었지만, 그 점이 그가 새우를 떠올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어쩌면 최근에 그렇게 구워먹었을지도). 휘티브스는 눈앞의 ‘굽고 마디졌으며 안쪽에 뾰족뾰족한 돌기들이 달린 화석’에서 곧바로 그가 잘 아는 관념을 연상했고 내친김에 학명을 그렇게 붙여서 발표해버렸다. 아노말로카리스는 ‘이상한’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anomalos와 ‘새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karis의 조합이다.
처음 발견 당시 '아노말로카리스'의 화석. 새우를 떠올리지 않을 방도가 있을까.
이 커다란 두절 새우의 주변에서는 파인애플 슬라이스 같은 녀석과 판때기 같은 녀석들이 함께 발견되곤 했는데, 각각은 페이토이아(
Peytoia)와 라그가니아(
Laggania)라는 이름이 붙었다. 페이토이아의 경우, 비록 가운데에 구멍이 있기는 해도 해파리의 일종일 것으로 추정되어 연구되었고, 판때기는 아예 이들과는 다른 해면 동물문(門)의 영역으로 쫓겨났다. 캄브리아기는 생물다양성이 폭발한 시기로, 사실 뭐가 나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그들은 분류학상으로 완전히 다른 위치를 차지하며 각자의 이름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1979년 학술지에조차 페이토아는 수중을 떠다니는 해파리로 그려졌다. 새우만큼이나 기묘한.
하지만 의문들은 계속 이어졌다. 왜 파인애플-해파리는 자주 판때기-해면과 포개져 있는가? 새우의 잘린 머리 부분엔 뭔가 붙어 있지 않았을까? 발견된 화석 각각은 정말 모두 완전한 개체일까? 이 수수께끼 같은 조각들 앞에서, 고생물학자들은 스스로도 미심쩍은 가설들을 계속 던졌다. 단정했던 것을 의심해보고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남겨놓으면서, 다시 돌을 깨고 그 뒤엉킨 문양들을 노려보았다. 자료의 양이 늘고 추론이 지속되자 앞선 분류 체계는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새우 발견 백 년째 되던 해, 마침내 각기 다른 생물종으로 떠돌던 녀석들이 한 배에 올라 세상에 나오는 명예회복의 날이 왔다! 이름의 영광은 전통에 따라 새우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판때기 모양의 몸체, 파인애플 같은 입, 새우 같은 부속지를 가진, 캄브리아기에서 가장 웅장한 동물 ‘아노말로카리스’가 탄생했다.
제 위치를 찾아간 아노말로카리스, 페이토이아, 라가니아
2. 표상의 감옥에 갇히다
고독을 깨고 등장한 아노말로카리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생명체와도 닮지 않은 이 고대종은 학계에서 환영받았을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나 만화, 게임에서 속속들이 등장했다. 왜? 커다란 사이즈와 기괴한 형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최상위 포식자’로 여겨졌다는 데 있다.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바다를 재패했던 무적의 사냥꾼! 삼엽충 화석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상처를 만든 범인! 그 강렬한 인상은 <쥐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를 방불케 했다. 한때 새우였던 것은 사냥감을 움켜쥐는 무시무시한 집게발로 그려졌고, 한때 해파리였던 것은 껍질을 부수고 씹어먹는 방사형 이빨이 되었다. 적어도 삼십 년 간 이런 괴물-포식자의 이미지는 지속되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날렵하게 다른 동물들을 채어가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째 이 한결같은 묘사 방식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낯설고 무섭게 보이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반드시 폭군이어야만 하는가?
사실 나도 처음엔 책이나 다큐가 그려내는 방식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의문이 시작된 것은 한 장의 그림을 보고 나서부터다. 거기엔 수북한 수염을 드리운 얼룩얼룩한 아노말로카리스가 유유히 유영하고 있었다. 부속지는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해초 같은 수염을 늘어뜨린 지느러미 같은 기관이었다. 존 메사로스(John Meszaros)라는 팔레오아트 작가의 상상도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아노말로카리스를 생각했던 것이다. 더 정적이고 여유로운, 마치 수염고래처럼 대인배적 이미지 말이다. 순간 ‘띵~!’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렇다. 오히려 몸집이 크기 때문에라도 더 작고 풍부한 생물들을 수염으로 여과해서 취했을지도 모른다. 부속지의 돌기는 가시가 아니라 새의 깃털 촉 같은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이 들자, 최강 포식자 묘사가 기이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아노말로카리스가 먹이사슬 꼭대기의 존재여야 한다고 여겼을까? 생태계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하니까?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는 세상’이지 않은가? 또 어떻게 삼엽충의 상처는 곧바로 ‘집게발의 습격’으로 이어졌을까? 아노말로카리스에게 덧입혀진 이 모든 이미지들과 전제들은, 휘티브스가 ‘기묘한 새우’를 연상한 것과 얼마나 다를까?
아노말로카리스의 다양한 복원도. 무시무시한 모습과 귀여운 모습들.
최근에 알려진 몇 가지 자료는 이 의문들을 가중시킨다. 메사로스의 그림처럼 부속지에 얇은 빗 같은 수염이 달린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아노말로카리스의 친척인 타미시오카리스의 것인데 이는 아마도 이 부속지에 화석화되지 않는 잔털 혹은 수염이 무성히 달렸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늘 열려 있는 아노말로칼리스의 이빨은 고체를 씹기에 부적절하며 작고 부드러운 것만을 흡입할 수 있다는 컴퓨터 모델링 결과가 나왔다. 즉 삼엽충의 단단한 외골격을 해칠 방도는 없다! 심지어 아노말로카리스는 날쌔지조차 않은데, 사실 처음부터 이 동물이 “빠른 속도를 낸 것이 아니라 몸통 엽상체를 순차적으로 마치 파도치듯 움직여서 몸을 추진했을 것”(굴드, 307쪽)임이 추측되었었다. 이 모든 것이 포식자 가설에 반한다.
극적인 통합 이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전형적인 난폭함의 표상이었다. 그 이미지 위에서 그것의 생태나 사냥 방식, 섭식 방식 등이 추정되었고, 그 추정들에 의해 또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나는 여기서 아노말로카리스의 두 번째 고독을 본다. 어쩌면 이것은 첫 번째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어려운 문제 아닐까. 아무리 자료가 쌓이고 기술이 발달해도 화석은 말이 없으니까. 그 생생함을 그려내는 방식은 우리 소관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상상, 치우쳐있는 상상이 개입된다. 복원된 화석 위에 끈끈하게 덧입혀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표상들과 스테레오타입들. 수억 년 전 과거로까지 소급해가는 현재의 짧은 지식들. 막강하고 기이한 존재에 대한 열광. 아노말로카리스는 그 안에 갇혀 있다.
이런 덧입히기는 부당하다! 라고 말하려다 보니, 뭔가 턱 막힌다. 그런데, 이것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연상, 추정, 덧붙임, 의심, 비교, 재확인, 정정 그리고 또 다시 연상하는 과정 없이 한 발을 뗀 과학이 있기는 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지난한 과정들과 동떨어진 ‘진짜’ 아노말로카리스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할 수 있던가?
3. "나 잡아 봐라~"
‘과학노크’ 1화를 아노말로카리스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첫째로 너무너무 재미있어서다. 올 겨울 과학특강에서 들었던 기묘한 새우의 기묘한 해프닝을 어딘가에 말하고 싶었다. 이 고대 생물 자체도 흥미롭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발굴하고 추론하고 상상하는 우리의 생각 방식의 기묘함이 엿보이지 않던가! 일차적이고 엉성한 추론들이 우습고 정겹다가도, 또 끈질긴 질문과 엄격한 검토가 결국 앞의 가설들을 뒤집어 내는 대목은 참 놀라웠다. 신중함에서 나오는 과감함, 보이는 부분들에서 보이지 않는 전체를 엮어내는 마법! 또한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엉뚱함에 주목하면, 과학이란 게 막 그렇게 무겁지는 않다는 사실을 써 가려 했다.
그런데 글을 풀어가다 보니 이상하게도 ‘고독’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아마 아노말로카리스가 처음에 그저 새우였다는 점, 오래도록 사지가 나뉘어 각각 다른 생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다보니 그리 된 것 같다(어쩌면 ‘백년의 고독’이라는 표현에 꽤 흡족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으로 가다 보니, 대통합 이후에 부여되어온 일률적인 이미지 또한 하나의 고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말할 것 없이 포식자라고? 이건 당사자 말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노말로카리스는 말이 없다. 화석은 원래 말이 없다. 이 말인즉슨, 과거의 그 어떤 것도 고독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거다. 왜곡과 굴절을 포함하지 않은 해석이 있을 수 있던가? 오래될수록, 종잡을 수 없을수록 오해의 여지가 크다. 그런데 그 오해는 오류인가? 설령 새우처럼 우스운 연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틀린 복원인가? 돌 위의 그 문양은 그때 그렇게 읽히고 그려짐으로써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난 것 아닐까? 5억 년의 세월 건너편에 있는 한 인간을 경유해서 유일무이한 형상으로 출현한 사건이 아닌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잘려진 머리로부터, ‘기묘한’이라는 형용사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음표가 마주치는 사람들 한명 한명을 통해 되살아난다.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과 함께 뭔가가 엮이고 무언가가 풀어지며, ‘위잉-’하고 머리의 속도감이 달라지고, 상상이 멀리까지 달려 나간다. 화석은 말이 없다. 그리고 말이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말을 시작하게 한다.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 남을 때조차 수많은 물음과 답들을 생산한다. 이런 왁자지껄함을 품고 있다면 고독이라 해도 뭐가 문제인가?
아노말로카리스의 고독을 말하면서 나는, 언젠가 바다를 헤엄쳐 다녔을 ‘진짜 아노말로카리스’를 전제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흩어져 있어서, 합쳐진 후에는 그릇된 표상이 부여되어서, 화석의 본래 주인이 오해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는 그 어떤 실체는 우리의 상상, 관념, 이야기, 그림, 가치평가 바깥에 존재하는가? 만약 그것을 알 수도 닿을 수도 없지만 존재하는 시공간 너머의 실체적인 무언가로 간주한다고 해보자. 그럴 때 아노말로카리스는 영원히 갇혀 있고 잘못 묘사될 수밖에 없다. 오해와 잘못만이 넘쳐날 것이다. 그러면 그 첫 발견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놀라움과 호기심, 막막함과 환호, 느낌표와 물음표는 모두 외면될 것이다. 그 역동적이고 소란스러운 과정들은 폄하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반한 것은 이 굴곡들과 우여곡절들 아니었던가? 새우로부터 완전체가 되고, 사냥꾼이었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고 있는, 가면을 바꿔 쓰고 있는 아노말로카리스에 끌렸던 것 아닌가?
화석의 불변하는 진짜 주인을 찾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자. 화석은 ‘빨리 날 꺼내줘’ 또는 ‘내 진짜 모습을 알아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는 뭘까~?’ 또는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질문으로만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고 매혹되게 만든다. 여기 뼈가 있다. 그 뼈와 우리 사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이 놓여 있고, 그곳의 무언가를 우리가 우리의 방식으로 되살려낸다는 일이 주는 설렘이 있다. 완전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발견자를 더 신나게 한다. 틀리면 어떤가? 맞는 건 있는가? 누군가는 그 일에 최고의 신중함으로 임한다. 누군가는 긴장을 풀고 붓을 들어 색을 칠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복원해도 미지의 길들은 열려 있다. 닳지 않는 기묘함. 그게 화석의 보물 같은 매력이다. 그래서 아노말로카리스의 본모습을 최초로 발표한 휘팅턴과 브릭스의 1985년 논문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이 동물을 절지동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시점에서는 미지의 동물문의 대표라고 생각한다.”(<원더풀 라이프>, 308쪽에서 재인용)
발견되지 않은, 아직 발견될 것이 많은 상태란 얼마나 유쾌한 상태인가? 무엇보다 아노말로카리스는 자신은, 자신이 사실 그대로(그런 게 있다면) 복원되기를 바랄까? 어쩌면 더 멋지게, 때론 더 자극적이고 다이나믹하게 그려지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더 신나게 가지고 놀길 바라지 않을까? 5억 살 된 대인배라면 그래야 마땅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기도 하고. 화석 속 선조들에게 배울 게 있다면, 부분부분 나누어진 모습으로 알려지고 여기저기 멋대로 그려지더라도 말없이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그 넉넉함과 우직함이 아닐까.
축! 새 과학 연재가 문을 두드렸네요. 반갑습니다. 전체와 부분을 횡단하는 아노말로카리스의 유쾌한 이야기 재밌게 읽었어요. 과학이란 정답을 찾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상상력이 필요한 질문을 배운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는 연재인 것 같아요. 부분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으로 사물을 우리의 질문으로 다시 이어가는 게 중요하겠네요. 다음 이야기도 엄청나게 기대되는군요. 이제 문을 두드렸으니 활짝 열어 열심히 써 주세요!!! 새 독자들은 설레는 맘으로 재미나게 읽겠습니다. 왠지 글에서 '신남!'이 느껴져 무거웠던 제 맘까지 가벼워졌어요. 이것이 새 연재의 매력 포인트! (그런데 민호샘 옷 구매 선정 기준은 좀 진지한 것 같아요. 구매 클릭 전에 주변인들에게 좀 물어봐 줬음... 그 갈색 카디건은 좀 아쉽네요... 앞부분 어디가 괜찮다고 했는데, 거기가 젤 이상해... 미안...)
역시 이과생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정직한 선생님도 아노말로칼리스의 변천사를 신이 나면서 설명하시더니, 이 글의 필자도 신이 나면서 글을 썼을 것 같네요. 이과생이 되려면 뭔가 덕후의 기질이 있어야 하는 것 같고요. 아마추어주의가 아니라 오타쿠주의? 어쨌든 고생물학이든 인류학이든 한문이든 모든 학문에는 나름의 해석의 여정을 즐기는 포인트들이 있는 것 같군요. 한문을 읽을 때도 큰 의미를 바꾸지 않아도 다르게 문장을 해석하는 게 참 설명하기 즐거움인데 말입니다. 덕후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세요! 보고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멸종된 동물의 화석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요. 화석이 그 자리에 예쁘게 놓여 있을 리는 없으니 찾고 난 다음에는 조각들을 짜맞추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게 재밌어요. 과학은 이미 있는 법칙에 따르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야 하는 신나고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화석은 원래 말이 없다~ 푸코의 '침묵의 고고학'이 떠오르는군뇨.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면 곧잘 이미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으로 낯섦을 대체해버리곤 하지만 또 우리가 지닌 호기심과 상상력은 그것만으론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새우'인 화석으로부터 또 다른 것을 상상해내고, '아무래도 포식자'인 모습으로부터 또 다른 존재양태를 추측해내는 것이 인간이 지닌 상상력의 놀라운 점이 아닐까 싶네요.
화석의 침묵, 고독이 실은 우리를 말하게 하고 궁금하게 만든 "왁자지껄함을 품고 있는 고독"이라는 민호샘 표현이 너무 좋네요~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고민의 깊이까지 느껴지는 글이어서 저도 신나게 읽었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붕'이니 '곤'이니 하는 기묘한 괴생명체가 짐작할 수 없는 형체를 하고 내 몸을 관통해 어딘가로 '고독'하게 날아가고 헤엄쳐가는 듯한 '호랑'한 환상에 잠시 빠져들었더랍니다. 맞아요. 그것들은 자신이 사실 그대로 복원되기를 바랄 거 같지 않아요. 더 자극적이고 다니나믹하게 그려지길, 자기를 갖고 신나게 놀수 있길 바라지 않을까 싶어요 ㅎ. 이런 글, 완전 재밌어요. 언젠가 민호님과 함께 과학 공부도 함께 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