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는 무엇으로 사는가 : 빅토르 초이, 아민, 그리고 나
내가 똑똑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누가
날 속이려 하는지 그런 것쯤은 알 수 있지
전쟁이 터지고 사방이 죽음이라 해도
지하로 들기 전에, 이 땅 위에서 죽게 해주오
걷다 죽게 해주오
저 땅속에 들기 전에
세상엔 늘 두려움을 퍼뜨리려는 자들이 있지
오랜 세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온 자들
그들의 성명서를 전부 읽어보았지만 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네
그러니 주님, 가련한 제 목소리 세상에 들리게 해주소서
걷다 죽게 해주오
저 땅속에 들기 전에
-밥 딜런, <걷다 죽게 해주오Let Me Die in My Footsteps> 중에서
1.
소련이 무너진 거지 사회주의가 무너진 건 아니야. 눈을 덮은 덮수룩한 곱슬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교정을 오가던 한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지가 레닌이야 뭐야... 그 선배에 대한 신뢰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 말만은 믿고 싶었다. 그런가... 그럴 수도... 그랬으면. 왜냐고? 글쎄, 그렇게 물으면 난감해진다. 가진 건 없어도 뜻은 높았던 스물 몇 살이었다고만 해두자. 연애는 (그닥 소질도 없었지만) 비루하기 짝이 없었고, 허세는 가득했으며, 일상의 기예라고는 전무했던 그때, 마침 거기에 ‘이념’이 있었다. 혁명이라니, 짜릿하지 않은가. 세상은 참을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고, 우린 젊었다. 적어도 비겁하게 살진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젊었으니까. 일상도 허술하고 행실도 갈팡질팡이었지만 뜻만은 높은 청춘이었으니까. 세계는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이념은 변혁의 무기였다. 우리에겐 이념이 아편이요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7” 이후였다. 바야흐로 전노협, 전대협, 전교조 등 87민주화투쟁의 산물인 각종 조직들이 출범하기 시작했고, 5공화국의 연장이었던 노태우 정권하에서 투쟁은 일상어가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당도하는 죽음의 傳言. 번번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또 그 두려움과 싸우면서, 전략이니 전술이니 당이니 조직이니... 우리는 러시아혁명기의 전위 지식인들이라도 된 양 가슴 한가득 혁명의 꿈을 품었으며, 우리의 투쟁이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그 다음날로 모든 소비에트 연방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한마디로, 소련이 망했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소련은 그냥 소련이 아니라 혁명의 기억을 간직한 기념비였고, 이념의 현실태였다.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읽으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웠고, 소련의 미학 교과서를 읽고서 문학과 예술을 논했는데, 그랬는데, 소련이 망하다니.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그런데 누가 누구를?)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회주의가 무너진 게 아니라 소련이 무너진 것일 뿐’이라는 말을 붙들고 싶었던 건.
그러나 세상은, 또한 마음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랐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흩뿌려진 후 세상은 갑자기 고요해진 것 같았다. 바로 그 타이밍에 서태지가 짠 하고 나타나 폐부를 찌른다.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고.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고,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고.(
<환상 속의 그대>,1992) 이런 젠장, 들켰다!
과연, 우리는 마음만 대단했다. 우리 세대는 특히 그랬다. 전투적 선배들처럼 공장으로 가거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지도 못했고(그러기엔 너무 나약했다), ‘문민정부’ 이후 입학한 후배들처럼 상큼발랄하지도 못했다(그러기엔 너무 무거웠다). 이념도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도 내려놓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태지의 조언을 믿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무력감. 가속화된 세상의 변화는 한없이 낯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치열하게 살자’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 삶의 기예라고는 전무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졸업이 코앞이었다. 뭘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와중에 서태지는 1년만에 쇼킹한 2집 앨범을 들고 컴백해서는 가요계를 평정했다.
술집에서는 <환상속의 그대>를 듣고 학교에서는 (터무니없이) 비장하게 인터내셔널가와 노동의 새벽을 부르던 그 무렵,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도착한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빅토르 초이Victor Tsoi(1962-1990)가 있던 밴드 <키노>다. 그 시절, 죽음을 통해 처음 이름을 알게 된 많은 이들 가운데 그 사람, 빅토르 초이도 있었다. 운동가요도 아니고 대중가요도 아닌, 망해버린 소련의 록이라니! 새로웠지만 낯설지만도 않은, 읊조리는 듯 담백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저음질의 해적판 테잎으로 듣는 그의 노래는 말할 수 없이 뭉클했다. 살아 있었다면 환갑이 지났겠지만, 30년도 채 못 살고 세상을 떠난 그는 내게 영원히 ‘청년 빅토르 초이’다. 우주의 시공간 어딘가에 떠도는 별이 되었을 것만 같은 ‘청년 빅토르 초이’ 옆에 나의 20대도 먼지처럼 떠돌고 있을 것이다. 빅토르 초이를 쓰려다 보니 대학시절이 떠올랐고, 여간해서는 떠올릴 일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소식이 두절된 친구들이며 선배들이며, 급기야 서태지까지 줄줄이 소세지처럼 떠오른 것. 베르그손 말이 맞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에 떠오르지 않을 뿐.
그나저나 빅토르 초이는 갑자기 왜? (오래전 일이지만;;) <숏컷> 2화 말미에서 빅토르 초이에 관한 얘기는 기회가 되면 풀어놓겠노라 했었는데, 마침 3화에서 그 얘기를 써야겠다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근에 <나의 집은 어디인가>(
2021. 원제는 <도망Flee>. 감독 요나스 푸헤르 라스무센)를 보고 나서 빅토르 초이가(정확하게 말하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레토>(2018)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바로 오늘(2022.6.21)로부터 꼭 60년 전 오늘(1962.6.21.)이 빅토르 초이의 생일이다. 이럴 수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언젠가 운명처럼 현실이 되어 떠오르는 인연의 섬들. 하, 인연이란 참. (
*네, 그렇습니다. 3화를 쓴 게 이 날이었습니다만... 어째서 오늘이 8월 11일인 걸까요? 쿨럭쿨럭. 빅토르 초이의 기일이 8월 15일이니까... 여기에 맞추려고 그랬다 치고, 올립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붕괴해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빅토르 초이, 그리고 빅토르 초이가 막 세상을 떠난 그때 소련에 도착한 소년 아민에 대한 것이다. 그 둘 사이에 나의 20대도 부유하고 있었으니,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려나.
2.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의 분단상황이 종식된 그해, 소련의 공화국들이 우르르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소비에트 연합국이 해체 일로를 걷고 있었던 그해, 1990년 8월 15일. 소련의 록스타 빅토르 초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을 두고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고, 충격을 받은 많은 팬들이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러시아행을 코앞에 둔 규문의 소생 프로젝트 2탄이 코로나로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모스크바에 있다는 추모벽 앞에 꽃 한 송이라도 놓고 올 생각이었는데.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로 이민한 고려인 3세대다. 빅토르 초이의 조부는 구한말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스탈린 시대에는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으며, 그의 부모는 직장을 구해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미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했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음악이었다. 10대에는 친구와 2인조 밴드를 결성했고(체홉의 소설에서 이름을 딴 ‘제6병동’), 20대 초에는 ‘비트니끼’(비트족)라 자칭하던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멤버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때는 80년대 초 소련. 그 당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전에 당국으로부터 가사를 승인받아야 했고,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불러서도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되고 그저 제자리에 앉아 경청(!)해야만 했다. 바른 자세로 착석해서 묵묵히 경청해야 하는 록공연이라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공공장소에서 록공연을 허용한 자체가 그나마 큰 변화였달까. 사회주의 이념을 먹고 자란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젊은 뮤지션들은 ‘신성한 노동’을 경시하고 비좁은 아파트에 모여 퇴폐적인 부르주아 음악(비틀즈, 티렉스, 이기 팝, 루 리드, 데이빗 보위...)이나 흉내내는 ‘소비에트의 기생충’들일 뿐이었다. 실제로 당시 사회연구자들은 “부르주아적 세계의 악덕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린” 서구의 팝음악을 마약, 수면제, 속임수로 규정하고, 록음악의 “저주파, 시끄러운 음향, 왜곡된 소리, 발작적 리듬”이 어떻게 심신의 균형을 파괴하는지를 진지하게 분석하기도 했다고.(
알렉세이 유르착,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문학과 지성사)에 당시의 정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일명 “침체기의 아이들”은 당의 이념으로 무장한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레토Лето,summer>(2018)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레닌그라드 록씬의 형성기를 그리고 있다.(
러시아 록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시라. www.weiv.co.kr) 빅토르 초이와 그룹 <키노>의 형성이 서사의 중심에 있지만, 빅토르 초이의 전기 영화라기보다는 그 시기 소련의 청춘들(‘여름’)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가(戀歌)에 가깝다. 빅토르 초이가 결성한 ‘펑크 삼총사’ 밴드 <가린과 쌍곡선>(톨스토이의 소설 제목 <엔지니어 가린의 쌍곡선>에서 따온 이름)은 참신한 가사와 멜로디로 당시 레닌그라드 록씬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새롭게 진용을 갖춘 그룹 <키노>의 첫 번째 앨범이 발표된다.(영화가 다루는 시기는 여기까지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 하염없이 내리네. / 주머니는 텅 비었는데 지금은 6시, 담배도 떨어지고 성냥도 없는데 / 이웃집 창문마저 불이 꺼져 있네. /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구나. / 그리고 아무데도 놀러갈 곳이 없구나.”(<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구나>)
“추끄치 현자 세 사람은 / 내게 이렇게 계속 중얼거리지 / ‘쇳덩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법. / 애를 써봐야 더 얻는 게 없다오. / 결과는 모두 헛수고일 뿐이라네.’ / 하지만 물이 스며들이 않는 들판에/ 난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잖아. / 물이 스며들지 않는 들판에 / 난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어.”(<알루미늄 오이>)
“난 혼자 싸돌아다녀, 싸돌아다녀. /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는 나도 모르겠어. / 집도 없고 집에 사람도 없어. / 마치 고철처럼 쓸모없는 인생이야. 우우 / 나는 백수건달. 오, 어머니 어머니 / 나는 백수건달. 우우”(<백수건달>)
키노 1집 <45>(
1982. 녹음시간이 총 45분이라 붙여진 제목)에 실린 노래들이다. 이들이 왜 기성세대들에게 ‘청춘을 허비하는 기생충’들로 여겨졌는지 짐작이 되실 듯. 주제도 없고, 이념도 없고, 희망도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것도 없다.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일군의 청년 뮤지션들이 해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돌아오는 기차 안. 사회주의 꼰대 아저씨의 느닷없는 훈계가 시작된다.
“미국놈들을 떠받들다니, 조국이 너희들 교육도 시켜줬잖아. 뭐하라고 가르쳤을까? 집을 짓고 가정도 꾸리고 나무도 심으라고. 그런데 짐승처럼 소리나 지르고, 몹쓸 놈들! 적국의 노래나 부르고 말이야. 쓰레기 같은 놈들!” 섹스피스톨스는 적이 아니라 가수라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건 섹스피스톨스고 우리는 스타일이 다르다고,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울부짖는 펑크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기차는 순식간에 꼰대들과 청년들이 뒤얽힌 아수라장이 되고, 청년들은 경찰들에게 연행되고, 이 전체가 자연스레 토킹 헤즈의 <사이코 킬러>를 공연하는 뮤직비디오처럼 연출된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서 이런 식의 난동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 영화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뮤직비디오처럼 보여준 다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 전달하는 소격효과를 통해 질식할 듯한 당시의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그리고 필사의 몸부림. 안간힘에서 분출되는 소음. 80년대 중반까지 소비에트의 인민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비에트가 영원할 것임을,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음을. 그러나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청년들의 몸부림으로부터, 울부짖음으로부터.
‘선진 사회주의’(브레즈네프의 모토)를 외쳤으나 부정부패가 만연한 ‘후진 사회주의’ 시대를 살던 청년들에게는 출구가 없었다. 거기에 이제 막 시작된 對아프가니스탄 전쟁(1979)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침묵과 죽음을 강요한다고 맥없이 끌려갈 수야 없지 않은가. 빅토르 초이와 펑크 무리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게으름뱅이라고, 방수포 들판 위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다고, 그래도 내 친구들은 씩씩하게 몰려다닌다고 읊조리면서. 한때는 ‘비트니끼’였으나 이제는 텔레비전과 신문에 빠진 부모세대를 대차게 조롱하고, 노동을 신성시하는 사회에서 여봐란듯이 빈둥거리고, 이념을 훈장처럼 매단 관료 앞에서 몰이념적 가사를 읊조리고, 애국을 강요하는 국가를 비웃듯 최선을 다해 징집명령으로부터 도망친다. 빅토르 초이와 그의 친구들은 함께 모여 음악을 연주하면서 그 잔혹하고도 무력한 시간을 버틴다. 어쩌면 사소한 저항. 아마도 사소한 구원.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사소함’이 전부일 수도 있는 것. 레베카 솔닛의 표현대로 희망은 “응급상황에서 문을 부서뜨리는 데 쓰는 도끼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음악이야말로 절절한 희망이었다.
한편, 빅토르 초이가 시베리아 유형지와 다름없는, 스산하고 쇠락한 소련에서 있는 힘을 다해 노래하던 그때, 아프가니스탄의 어린 소년 아민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아하의 ‘테이크 온 미’를 들으며 동네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3.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여름.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그들의 표현으로는 ‘20년만의 탈환’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전인 2001년 9.11 직후 미국의 더티한 복수혈전이 시작된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이 ‘테러와의 전쟁’은 2021년 5월에 미군이 철수하기까지 무려 20년간 지속됐다. 탈레반에서 미군으로, 미군에서 다시 탈레반으로, ‘점령군’이 달라졌을 뿐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폭력과 화염이 난무하는 땅이다. 여기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1978년, 소련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 정당이 토착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이슬람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로 조직된 무자헤딘(مجاهدين,
mujāhidīn, 이슬람을 위협하는 이들과 싸우는 성전(지하드)에 임하는 전사를 의미)의 반격이 시작되어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로 접어든다.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은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소련 역시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미소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나의 집은 어디인가Flee>(2021)의 주인공 아민(가명)은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태어났다. 다큐멘터리를 애니메이션(과 푸티지 필름)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건 (물론 주인공의 신원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 오랜 기간 아프가니스탄의 민중이 겪어야 했고 지금도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실사로 재현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는 1980년대 초, 소년 아민의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물’로 찍혀 체포된 후 행방을 알 길 없고, 큰형은 내전 상황에서 강제징병을 피해 스웨덴으로 도주한 상태다.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소련군이 퇴각했으나(1989), 여전히 소련의 지원하에 있던 나지불라 집권세력과 무자헤딘의 내전은 계속되었고, 여기에 각 세력 내 분파들 간의 권력투쟁이 더해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이런 혼란을 틈타, 파키스탄과 아프간에 걸쳐 있는 파슈툰 지역을 거점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조직 탈레반(‘학생’을 뜻하는 파슈토어)이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에 침투하여 1996년에 수도 카불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아는 바와 같이, 미국은 탈레반이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을 은닉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것.
자본과 종교와 이념이 뒤범벅된 이 무자비한 권력투쟁을 ‘정리’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싶지만, 이렇게 거친 요약이라도 필요했던 건 오로지 아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 비극에 대해서는 무력한 동정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붕괴된 소련으로 탈출한 아민의 가족들이 맡은 사회주의 권력의 악취를, 밀입국을 위해 갇혀 있던 컨테이너 안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노르웨이의 크루즈 여행객들이 난파 직전의 배 위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난민들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순간 아민이 느낀 수치심을, 가족들을 서유럽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형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짓누르고 기억을 봉합해야 했던 아민의 외로움을(이 모든 것들이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논평이나 일삼는 구경꾼에 머무르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 ‘옆에서’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영화가 시작되면 흑백의 거친 필선으로 묘사된 도망자들의 절박한 움직임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민의 친구이기도 한 감독이 아민에게 묻는다.
“너한테 집은 어떤 의미야?” 아민의 답.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그러니까 뭐랄까, 어디로 이동하지 않고 머물러도 된다는 느낌. 임시적이지 않은 곳.” 너무 당연해서 목구멍에 걸리는 대답. 전쟁, 기후, 빈곤 때문에, 혹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삶의 터전에서 뿌리뽑힌 채 떠도는 난민의 수는 2020년 현재 8240만 명. 이 추세라면 2050년 경에는 1억 5천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게 된다고 한다. 미물일지라도 모든 생명체에게는 머물 곳이 필요한 법이다. 유목이 떠밀림이 아니라 능동적 이동을 의미하는 한에서, 유목적 삶을 위해서조차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는 필수다. 쉴 수 있는 곳, 머무를 수 있는 곳, 집은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아민은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다. 가족들은 유럽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만날 수 없고,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가족들을 죽었다고 말해야 하며, 혹 고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없다. 지독한 고립감. 몸도 마음도 누일 곳 없음. 난민들이 매순간 마주하는, 밤보다 캄캄한 어둠.
더군다나 아민은 게이다. ‘동성애’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청년이 난민이 되어 떠돌면서, 가족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의무감 때문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치료받아야 할 ‘병’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고백. <Flee>의 감독은 어둠속에 봉인된 아민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의 말을 가만히 경청한다. 그리고 우리를 그 경청의 자리로 이끈다. 당신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추상적 분노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사실- 우리가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죽음의 고비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영화 포스터 속 장 클로드 반담의 포즈에 미소짓고,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갇혀 이제나저제나 탈출만을 기다리면서도 TV에 나오는 운동선수를 보며 심쿵하고, 절체절명의 밀입국 상황에서도 같은 처지의 청년에게 마음이 끌리던, 미미하지만 반짝이던 설렘과 기쁨의 순간들. 삶이 무너져내린 가운데 속절없이 허우적거리던 늪에서 자신을 건져준 구원의 손길은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였다고, 피츠제럴드는 썼다.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느낀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직 살아 있음, 살고 싶음, 누군가 곁에 있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뭉클한 장면 하나. 어렵게 탈출에 성공한 형, 누나들과 마침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아민이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하고 말았을 때, 말없이 아민을 게이클럽으로 데려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재미있게 놀다 오라며 돈을 쥐어 주고 등을 떠미는 형. 감독에게 그날 일을 얘기하고 나서 “그날 나 외박했잖아”라며 키득거리는 아민. 다시 형제들과 헤어져 마치 ‘날 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아민은 살기 위해 사랑하고, 살기 위해 공부한다. 아니, 사랑과 공부를 놓지 않음으로써 아슬아슬한 삶을 버틴다. 이 드넓은 지구에 머물 곳 하나 없는 아민은 그렇게 사랑과 공부에 깃.든.다.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필사의 몸부림. 필사의 도주.
4.
<Flee>의 아민과 <레토>의 빅토르 초이. 빅토르 초이는 62년생이고, 아민은 (추측컨대) 80년(~82년)생이다. 빅토르 초이의 20대는 80년대였고, 아민의 20대는 2000년대다. 그리고 70년생인 나의 20대는 90년대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우리는 서로 다른 80년대를 공유했고, 다른 질감의 어둠을 살았고, 다른 방식으로 90년대를 맞이했다. 죽음으로, 비장함으로, 공포로.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자장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빅토르 초이의 부고와 함께 그의 노래가 내 앞에 도착했고, 빅토르 초이가 막 세상을 떠난 그때 아민은 소련에 도착했다. 빅토르 초이와 그 친구들의 노래는 소련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후였고, 뒤늦게 내게 도착한 그의 노래는, 어쩌면 내가 움켜쥔 이념이란 게 한낱 지푸라기 같은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이념 따위는 알지도 못했던 소년 아민은 소련에 도착해서 무엇을 목격했던가. 이념의 폐허를, 쓰레기처럼 버려진 인민들을, 자신들이 욕하던 악덕 자본가보다 더한 악덕을 지닌 당 관료들을... 빅토르 초이가 노래했던 바로 그 풍경. 그리고 2022년, 아민의 가족들이 뿌리뽑힌 채 떠돌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군번과 혈액형이 새겨진”(<혈액형>) 군복을 입고 전쟁터로 내몰리는 청년들, 공포에 떨며 국경을 넘고 있을 수많은 아민들, 지구 곳곳에서 “엄마, 난 알아요, 우린 모두 미쳤다는 걸”(<엄마, 우린 모두 미쳤어요>)이라며 울부짖고 있을 빅토르 초이들. 역사는 반복되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세상에는 또 다른 20대들이 계속 생겨나고... 그렇다면, 그러다 보면, 자꾸자꾸 새로운 질문도 생겨나고 새로운 노래도 만들어지겠지.
규문에는 아민보다 10여년 늦게 태어난 90년대생 청년들과, 이들보다도 10여년 뒤에 태어난 2000년대생 이우가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다가 조금은 알 것도 같고. 가끔씩 ‘쟤들은 왜 저럴까’ 싶은 생각이 들 때(+울화가 치밀 때)면,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십대를 (잘 안 떠오르지만;;) 떠올려본다. 나도 그들과 별다르지 않은 이십대였다. 별 이유 없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고, 되는 일은 하나 없고, 잘하고 싶지만 모든 것이 미숙한 나이. 사실 20대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 어디 있겠는가. 굳이 말하자면, 어리다기엔 많이 늙었고 늙었다기엔 너무 어린, 한없이 어정쩡한 나이.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채로, 다시 말해 어느쪽도 가능한 잠재력을 지닌 채로, 모든 시대의 20대는 그들 나름의 짐과 꿈과 다짐을 지녔으리라.
다만, 생각해 본다. 무엇이 스무살의 빅토르 초이를, 아민을, 나를 살게 했을까. 한때는 나의 이십대를 지탱한 건 이념, 정의, 대의라고 생각했었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닐 거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날 버티게 한 건 자존감이었다. 빅토르 초이와 아민이 포기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거라 확신한다. 우리 자신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도록 강요하는 가치와 힘들에 굴복하면, 거기가 세상의 끝이다. 사는 게 아무리 고약해도 절대로 자신을 구렁텅이에 처박지는 않겠다는 결심, 그게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없는 삶이란 “따뜻한 우유도, 신경안정제도 구할 수 없는 밤, 뜬눈으로 누워 잠든 손을 이불에 올리고 저지른 죄와 빠뜨린 죄, 배반한 신뢰, 교묘하게 깨뜨린 약속, 나태나 비겁이나 부주의로 낭비해버린 축복들을 헤아리는 일”이라 했던가.(
조앤 디디온,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돌베개) 놓친 것과 지나간 것밖에 곱씹을 줄 모르는 조로한 청년처럼 끔찍한 게 있을까. 조앤 디디온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자존감이란 “일정한 터프함”과 “윤리적 배짱”을 잃지 않는 것이고, 무엇보다 분별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다. 일주일도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린애가 내일 내 나무를 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나무를 심는 것.(빅토르 초이, <나무> 가사) <Flee>의 마지막처럼, 언제 여기서 쫓겨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지라도, 매번 국경을 넘나드는 나를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사람과 함께 산딸기를 따먹고 공부
하고 사랑
하면서 지금을 성실하게 사는 것.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고립시키고 겁주고 교묘하게 두려움을 주입하더라도, 기쁨을 느끼고 웃음을 나누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자존감을 지킨다는 건 그런 거다.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The Crack-Up>(1936)에서, (박해일 톤으로) “서른아홉에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고백한 피츠제럴드의 조언 -
“모름지기 최고의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품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볼 수 있으면서도 또한 그것을 돌려놓기 위해 단호하게 덤빌 수 있어야 해요.”(
스콧 피츠제럴드, <무너져 내리다>, 이소노미아) 각 세대에게는 그 세대만이 마주하는 벽이, 그 세대만의 어둠이 있을 것이다. 고로 그 세대만의 출구와 그 세대만의 저항도 있을 터.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시대를 몸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게 마련인 것. 피츠제럴드의 조언대로, 어쨌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공감과 지성의 힘을 버리지만 않으면(=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때로는 좀 무기력해도 괜찮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본성과 역량이 우리를 또 다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노래하게 하고 사랑하게 할 것이다. 주변 청년들의 무기력과 정처없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들에겐 그들의 길이 있겠지. 그러니 오늘의 결론 : 나나 잘하자!^^
사족. 피츠제럴드의 말대로, 사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다. 나야말로 요즘 그 말을 제대로 실감 중이다. 앗, 이러다 여차하면 무너져 내릴 수도 있겠는 걸! 문득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사는 게 아득해진다.(혹시 그 악명 높은, 폐경 후 갱년기 증상?^^) 이제와 갑자기, 이렇게 살아도 되려나 싶고. 아무튼 위기다 위기! 아무래도 금방 지나갈 것 같지 않은 태세인지라, 마음을 고쳐 조금 긴 터널 하나를 지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여러 가지로 자중하고 있으니 전화위복.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매일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공부가 산더미라는 것. 여러분... 예상하시는 엔딩입니다. 공부는 나의 힘! 우리 모두, 나나 잘합시다~^^
우아~~ㅎ
공부로 영혼은 잘 붙들고 계시니, 몸 건강을 좀 챙기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려요 ❤️
서태지의 <환상속의 그대>를 샘의 글을 통해 보니 새롭게 다가오네요. ㅋㅋ
아 20대의 제 모습을 생각해보니 세속에서 주어진 가치와 싸우기는 커녕(지금 생각해보니 부끄럽네요. 그땐 운동권의 힘이 약화되던 시절이란 핑계를 대봅니다만), 그 가치를 얻기 위해 질주했던, 그렇지만 기대만큼 되지 않아서 슬펐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저희보다 공부도 많이 하시고, 지혜도 많이 나눠주시는 샘도 위기를 겪고 계시다니 가깝게 느껴지네요.^^
앞으로의 공부의 길 계속 함께 가요~~~
'너나 잘하세요!' 그렇죠... 너나, 나나 어찌 되었든 잘하자... 그런데 어떻게... 서로의 이해와 연대가 중요할까요...
더 궁금한 것은 지금의 20대가 초이, 아민, 채운샘의 20대 이야기를 읽고 어떤 느낌과 질문을 가질지...
20대에 저 자신이 20대인지 잘 몰랐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 20대들은 지금 자기 시간을 살고 있겠죠.
그 시간이 우리가 함께 사는 시대의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면, 각자 잘 한다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네요. 부분과 전체는 같다는 말...
무기력한 청년에 대한 근심+자기 분노 내려놓기+(사족) 선생님, 마이 아프다... 아, 티베트 우는 토끼 모드로 마무리라니^^
그럼 저는 티베트 여우 모드로 함께 근심하고, 전지해져 보려고요~~헤헤
독자인 저도 '나나 잘하자'를 외치며,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20대가 부끄럽지 않게 지금을 잘살아 봅시다. 그게 이 땅 위에서 서로를 잘 살게 하는 길이기를!
모두 함께 파이팅!!!
'염증'이 아무리 고약해도 절대로 자신을 구렁텅이에 처박지는 않고,
'고통'이 아무리 우리를 고립시키고 겁주고 교묘하게 두려움을 주입하더라도 기쁨을 느끼고 웃음을 나누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존의 갱년세대가 되기 위해...
네, 나나 잘 (공부)하겠습니다~!^^;
어느날 새벽, 잠이 깨 읽게 된 샘글에 맘이 찡...했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