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정아
(3) 절단선(cut), 금(crack), 주름(crease)
이제 실(thread)과 흔적(trace),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 하지만 표면에 재료를 더하거나 긁어내는 것이 아닌, 표면 자체의 파열에 의해 생겨나는 세 번째 종류의 선에 대해서도 짚어보아야 한다. 바로 절단선, 금, 주름이 그것이다. 1926년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는 ‘점과 선과 면’에 관한 에세이에서 “선의 특별한 능력은 표면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언급한다(Kandinsky 1982: 576, 잉골드 강조). 그는 고고학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삽의 날이 토양의 표면을 절단하고 그 과정에서 수직의 새로운 표면을 형성하는 예를 가져온다. 하지만 물론 쟁기날이 만드는 고랑과 같은 선들도 있다. 쟁기날은 땅을 절단하여 새로운 표면을 만들뿐 아니라 그 표면을 뒤집어놓는다. 또한 땅이 아닌 평평한 재료를 절단하는 것은 표면을 만들지 못하고 재료를 분할한다. 이를테면 재단사는 가위로 재료를 선으로 자르고, 퍼즐 제작자는 실톱으로 재료를 선으로 자른다. 내가 라플란드(유럽 최북부 지역-역자)에서 현장 연구를 하던 시절에 흔히 보았던 절단선의 종류도 있다. 순록의 소유주를 식별하기 위해 순록의 귀에 칼로 새겨넣은 다양한 모양의 표시들이다. 사미(Saami)족은 전통적으로 각 패턴을 단어로, 그리고 표시를 새기는 행위를 쓰는 행위로 묘사했다(그림 2.3).
그림 2.3 1971~72년 저자가 핀란드 라플란드에서 현장 연구를 할 때 수집한 순록 귀표 장부의 한 페이지. 왼쪽과 오른쪽 귀에 새겨진 패턴은 표준화된 템플릿에 그려지고 각 패턴 옆에 주인의 이름을 기록한다.
손가락이 베인 경우처럼 절단선도 우발적으로 생길 수 있지만, 금은 대체로 우발적으로 생겨난다. 금은 약한 표면에 압박이나 충돌이 가해지거나 표면이 마모되어 갈라지면서 생긴다. 이 선들은 가해진 힘을 따라 생기지 않고 가로지르며 생기기 때문에 대부분 곡선이 아닌 지그재그 모양을 띤다(칸딘스키 1982: 602-3). 금은 자연 속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깨진 얼음, 햇볕이 내리쬔 진흙, 압력을 받은 바위, 죽은 숲과 늙은 나무의 껍질에서(그림 2.4). 물론 점토나 나무, 유리,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인공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금은 긁힌 자국이 균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표면에 생긴 흔적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 속의 이동 경로가 고원의 가파른 협곡 때문에 끊기는 경우처럼 흔적을 중단시킨다. 그곳을 건너려면 다리를 지어야 하고, 그러면 흔적은 실이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줄 위를 걷게되기도 한다.
그림 2.4 성숙한 밤나무의 껍질. 이 나무의 특징인 사선의 휘어진 틈이 보인다. 런던, 구너스베리 공원. 사진: 이안 알렉산터.
표면이 나긋나긋하고 잘 휘어지는 경우라면 파열되지 않고 접히면서 금이 아닌 주름이 생길 것이다. 봉투에서 꺼낸 편지를 펼쳤을 때 종이에 남은 선은 주름이다. 커튼, 덮개, 옷 등 직물에 잡히는 선들도 마찬가지다. 얼굴과 손에 피부가 접혀서 생기는 선들도 주름이다. 예로부터 손바닥에 생긴 손금은 인생사를 해석하고 예지하는 데 신통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읽어주었다.(그림 2.5) 엘리자베스 할람(Elizabeth Hallam)에 따르면 손금을 보는 사람들에게 “손은 삶의 지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지도는 서로 맞물리는 길들, 경로들, 여정들로 시간을 표현한다”(Hallam 2002: 181). 이 예는 두 가지 이유에서 특히 흥미롭다. 먼저 신통력을 지닌 이가 이런 선을 ‘읽는다’는 생각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중세의 관념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읽는다는 것이 애초에 말하는 것, 조언하는 것, 모호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두 번째는 주름-선들의 패턴과 손의 습관적인 제스처 사이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주름-선은 쓰기나 그리기 외에 제스처가 흔적을 남기는 또 다른 수단이다. 제스처는 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거나 그 방식을 실행한다. 그러면서 손에 그 방식을 접어 넣는다.
그림 2.5 ‘손의 지도’. 루이스 코튼(Louise Cotton) 『손금보기와 그 활용(Palmistry and its Practical Uses)』(1896)
(4) 희미한 선(Ghostly lines)
지금까지는 환경에, 혹은 그 환경에 거주하는 유기체(우리 인간도 포함하여)의 몸에 실재하는 눈에 보이는 선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이런 선들에 있지만, 좀더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선은, 장 프랑수아 빌레터(Jean-Francois Billeter)의 말을 빌면, “몸체도 색도 질감도 어떤 명확한 성질도 갖고 있지 않다. 이 선은 추상적, 개념적, 이성적인 특성을 지닌다”(Billeter 1990: 47). 투명하고 실체가 없는 평면에 그려진 한없이 가는 선이므로 이는, 제임스 깁슨이 시각적 인식(visual perception)의 생태학에 관한 연구에서 언급했듯이, 일종의 선들의 “환영(ghost)”이다. 이는 깁슨이 ‘갈라진 틈(fissure)’, ‘가느다란 나뭇가지(stick)’, ‘섬유가닥(fibre)’으로 분류한 것들을 포함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실제로 인지하는 것들이다(Gibson 1979: 34-5).
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이 보이지 않는 선들로 연결되어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고 상상한다(그림 2.6).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별자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Berger 1982: 284). 삼각점을 연결하는 측량선과 마찬가지로 위도와 경도, 적도 같은 측지선, 회귀선, 극권은 모두 희미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는 마치 두 지점 사이로 팽팽하게 줄을 드리워놓았거나 육지 위로 호를 그려놓은 것과도 같다. 지구를 측량하기 위해 실제로 이런 시도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선들은 지도나 차트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컴퍼스나 자를 사용하여 펜이나 잉크로 이런 선들을 그려넣는다. 그러나 지도가 담고 있는 실제 세계에는 이에 상응하는 물질적인 선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희미한 선은 사람들의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25년쯤 전에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경계를 따라 순록을 몰고가면서 그런 선을 마주한 적이 있다. 핀란드와 러시아의 경계는 윤곽이 뚜렷한 기다린 숲으로 표시되었는데, 그 숲의 정중앙으로 국경선이 지나갔다. 가끔씩 보이는 말뚝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선을 넘으려는 시도를 했다면 아마 소련 쪽의 관측탑 중 하나에서 총알이 날아왔을 것이다. 이것 못지않게 가상적이면서 중요한 선으로는 영공(領空)과 어장을 분할하고 시간대의 경계를 정하는 선들이 있다.
그림 2.6 북반구 하늘의 별자리
실재하는 선인지, 아니면 유령처럼 존재하는 선인지, 다시 말해서 어떤 선이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인지 환영인지에 대해 늘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구분에는 분명 문제가 많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이를테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우주론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체를 십자모양으로 지나가는 이른바 노랫길(songlines)(Chartwin 1987)이라 불리는 것은 창조적 존재인 조상들이 ‘꿈꾸기(the Dreaming)’라고 알려진 창조의 시대에 언덕, 바위산, 물웅덩이, 협곡 같은 곳에 그들의 표식을 남기면서 따라간 길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흔적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는 지형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서양인 관찰자들에게는 가상적인 구조의 일부로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Wilson 1988:50). 마찬가지로 침술의 원리에 따르면 경락(meridian lines)은 혈관처럼 몸을 따라 흐르면서 활력을 관리하고 몸의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서양의 의사들에게는 전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한의들에게 경락은 실제로 존재하는 선과 같다. 서예가들에 의하면, 이 선을 따라 흐르는 에너지는 넘실거리는 붓의 움직임을 통해 종이로 옮겨져서 활기찬 서체로 드러난다(Yen 2005: 78).
(5) 분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선들
선에 대한 이런 분류법이 만족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야말로 선들로 넘쳐나서 그 선들을 하나의 체계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어떤 분류법이든 도입하려고 하면 항상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바로 선의 특성이기도 하다. 내가 제안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선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날아가는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이나 실험용 안개 상자 안의 소립자가 남긴 증기의 자취는 어디에 넣어야 할까?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번개는? 길게 이어지는 향기의 흔적은? 이런 것들은 분명히 흔적의 일종이지만 단단한 표면에 새겨진 것이 아니어서 실처럼 느껴진다. 민속학자인 데보라 버드 로즈(Deborah Bird Rose)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노던테리토리(Northern Territory)의 야랄린(Yarralin) 원주민들은 번개뿐 아니라 해질 무렵 하늘에 길게 드리우는 무늬를 모두 ‘줄(string)’로 묘사한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사이의 중재자이자 두려운 존재인 ‘카야(kaya)’들이 그 줄을 따라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끌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줄은 땅 위에 남은 ‘꿈꾸기’ 시대의 길들도 포함한다(Rose 2000: 52-6, 92-5). 따라서 야랄린족에게 줄은 실과 흔적 모두에 해당하거나 어느 쪽도 아니다. 인류학자 크리스 로우(Crhis Low)에 따르면,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코이산(Khoisan)족 사냥꾼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동물을 추적하기 위해 그들은 땅에 남은 흔적들뿐만 아니라 바람에 실려오는 한 줄기의 체취도 따라간다. 마치 땅과 허공에 드리워진 줄로 사냥꾼과 사냥감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도 같다(Low 2007). 아파치 정찰병에게 사냥을 배운 미국의 덫 사냥꾼 톰 브라운(Tom Brown)도 코이산족과 같은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첫 번째 발자국은 줄의 끝이다.”(Brown 1978: 1)
이와 비슷하게, 앞에서 본 것처럼 중국 한의학의 에너지 선들은 몸 속에 흐르는 혈관과 같은 실들인 동시에 종이 위에 잉크로 그려지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혈관처럼 어떤 물질들이 흐르는 ‘관(tubes)’―기름, 가스, 물이 흐르는 파이프라인이나 곤충의 주둥이, 혹은 코끼리의 코와 같은―도 선으로 볼 수 있을까? 안정적인 건축물을 세울 수 있게 하는 3차원 공간의 단단한 선들을 가리키는 ‘막대(rods)’라는 범주도 따로 필요하지 않을까? 낚시 같은 분명한 경우뿐 아니라 막대와 선의 결합은 텐트를 치는 경우에도 기본이 된다. 칸딘스키는 에펠탑을 “선(표면을 축출한 선)들로 매우 높은 건물을 만들어내려는 초기의 시도”(1982: 621)로 지목했다.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가 디자인한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 삼각형을 짝지어 돔을 형성하는 기법-역자)은 텐세그리티(tensegrity, 긴장상태의 안정성을 일컫는 건축 용어-역자)라는 기법을 적용한 최근의 작품이다. 건축물의 안정성은 그것의 선을 따라 압박과 긴장의 반력(反力)을 분배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획득된다. 텐세그리티는 인공물과 생명체에 모두 적용되며, 후자의 경우 세포 골격구조에서 전신의 뼈, 근육, 힘줄, 인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발견된다(Ingber 1998). 정말로 선은 없는 곳이 없으며, 여기서 내가 답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물음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