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Q-mun TalkTalk
Q-mun TalkTalk
나는 왜 지금 푸코와 일리치를 읽는가?
글 : 건화
1. 미지근한 인간의 철학하기
고백하건대, 20대 내내 나는 학인으로서 나 자신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이 부정적인 마음은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성실성이나 지적 호기심 같은 학인으로서의 기본적 자질이 내게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대학 밖에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갖춰야 한다고 내가 믿고 있던 치열한 실존적 고민이나 정치적인 문제의식이 내게 부재하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게으르고 미지근한 사람이 감히 철학을? 이러다 보기 흉한 지적 허세나 생기는 거 아닐까? 이런 자의식은 폼 나게 공부하고 멋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조급한 욕심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 여전히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욕심과 자의식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미지근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담아 나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를 ‘미지근함’, ‘안온함’ ‘무기력함’ 같은 말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의 태도가 몇 개의 단어로 정의 내려질 수 있을까? 그것을 객체화하여 그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건 온당한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심판할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우리에게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심판할 권리도 없는 게 아닐까? 나의 기질을 혐오감 없이 보려고 노력하다보니 알게 된 것인데, 사실 미지근함은 내 공부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다. 내게서 미지근함은 때로 하나의 올바름, 하나의 가치, 하나의 관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도록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시크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약간의 무심함은 눈앞의 주어진 현실에 무방비로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내게 준다. 그리고 그 여유는 생각하고 질문할 수 있는 틈을 허용한다. 무심하고 미적지근한 내 성정을 그동안 난 너무 부당하게 대우해온 게 아닐까? 알고 보면 쓸만한 녀석인데.
나는 미지근함에도 불구하고, 내 고유성의 일부인 미지근함을 통해서 공부를 계속해볼 생각이다. 무기력 같은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너무 세다. 내 삶의 동반자인 이 기질을 나는 빠르게 끓어오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미지근함이라 부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철학 공부를 할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접한 철학자들만 봐도 기질과 성격이 각양각색이다. 엄근진한 플라톤, 온화한 스피노자, 불같은 니체, 예민한 푸코. 위대한 철학자들도 자기 기질을 긍정하고 또 그것과 충돌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 것일 테다. 이들과 나를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게으르고 미지근한 사람의 이야기도 조금은 필요하지 않을까? 내 기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로부터 내 나름의 공부 스타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요즘 나의 고민이자 숙제다.
2. 희망의 회의주의
믿거나말거나,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푸코와 일리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미셸 푸코와 이반 일리치. 1926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내가 앞으로 공부의 토대로 삼고 싶은 철학자들이다. 두 사람을 소개하고 내가 왜 지금 이들을 공부하려 하는지 설명하려다보니 내가 누구이고 요즘 내 고민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필만 보면 푸코와 일리치는 완전히 딴판이다.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다. 푸코는 프랑스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결국 최고 명문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경력만 보면 푸코는 영락없는 지식인이다. 한 번도 제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다. 반면 일리치는 처음부터 학교 교육은 띄엄띄엄 받았고 가톨릭 성직자가 된 이후에도 아메리카로의 자발적 망명을 선택했다. 자의든 타의든 제도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두 사람 다 글빨이 대단하지만 문체도 너무나 다르다.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코가 화려하고 장식적인 긴 문장을 구사한다면, 12세기 수사들을 스승으로 삼는 일리치는 단순하지만 힘 있는 문장을 주로 쓴다. 실상은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에 푸코는 마약과 BDSM을 즐기는 세련된 쾌락주의자인 반면 일리치는 민중운동가이자 신앙인답게 언제나 낮은 곳에 머무는 금욕주의자였다.
두 사람은 1970년대 말에 파리에서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둘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푸코가 『성의 역사』 1권을 쓰고 2권으로 나아가기 전 글이 막힌 시기였다고 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그 대화 이후 푸코와 일리치가 각각 출간한 『성의 역사』 2, 3권과 『젠더』에서 서로에게서 받은 영감을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두 철학자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만남을 주선한 건 누구일까? 양쪽 모두와 각각 우정의 관계를 맺었던 필립 아리에스일지도 모른다. 누가 대화를 주도했을까? 글이 막힌 푸코에게 일리치가 조언을 건네는 식이었을까? 아마도 프랑스어로 대화했을 것이다. 일리치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온갖 언어를 구사했으므로. 왜 두 사람의 조우는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났을까? 역시 코드가 맞지 않았던 걸까?
각설하고, 표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푸코와 일리치 두 사람이 철학을 하는 방식에서 깊은 유사성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 끌림을 느껴 두 사람을 함께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더듬거릴 뿐이지만 나는 철학자로서 푸코와 일리치의 태도를 ‘희망의 회의주의’라고 이름 붙여보려 한다. 회의주의는 일리치와 푸코의 공통된 철학적 · 정치적 입장이다. 니체주의자인 푸코는 보편적인 진실을 회의했다. 그에게 모든 진실과 앎은 역사적 구성물이며 특정한 배치의 산물이다. 푸코에게 진실이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힘에 가까운 것으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동시대적인 진실들과 다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방법론이다. 리 호이나키에 따르면 회의주의는 일리치가 새로운 방식으로 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그는 우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는 우리 시대의 상식들, 전제들, 우상들을 회의하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틈을 마련하는 일에 평생 매진했다.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은 일리치에게 우상타파로서의 신학적 실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푸코와 일리치는 불평만 늘어놓는 골방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푸코와 일리치의 삶이 그들의 문장들만큼이나 나를 매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천하는 회의주의라는 하나의 역설. 푸코는 어떠한 대의나 이상에도 헌신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고 예속에 빠트리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웠다. 반(反)정신의학 운동과 연대했고 감옥정보그룹을 창설했으며 인종문제와 난민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정치적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교황청의 권위에 맞선 도발적인 행적 때문에 사제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일리치는 라틴 아메리카를 무대 삼아 산업주의적 개발에 맞선 전방위적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정당이나 분파에 소속되지 않고 투쟁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전선을 아예 새로 그리면서 나아갔으며 그 길에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푸코와 일리치의 정치적 삶을 추동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내게 꼭 풀고 싶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도덕적인 우월감에 취하지 않고, 순교자의 비장함 없이, 얄팍한 이상주의를 배격하면서도 정치성을 간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의심과 비판을 실천적 삶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까? 푸코와 일리치는 전혀 미지근한 인물들이 아니지만, 이들의 삶과 사상은 미지근한 인간인 나에게 용기를 준다. 삶과 사유의 실천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강한 신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주어진 정치적 투쟁의 구도에 스스로를 이입해야만 정치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집요하게 질문한다면 나의 경험으로부터 나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푸코와 일리치는 내게 나의 미지근함이 냉소나 무관심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언뜻 보여준 듯하다. 그것은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다.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일리치와 푸코는 자유, 평등, 인간, 진보 같은 상식적 가치들을 망설임 없이 의문에 붙인다. 그런데 이는 보다 나은 가치나 보다 참된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적 회의도 아니고 무책임한 허무주의도 아니다. 이들의 회의주의에는 어떠한 자유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제도적 관리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주류 담론이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 현실을 문제화하고, 주어지지 않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 물론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권리처럼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을 의심하고 다른 실존의 양식을 실험함으로써 현행적으로 행사될 때에만 존재하는 자유다. 그런 점에서 푸코와 일리치의 회의주의에서는 인간의 역량과 자유에 대한 단단한 긍정이 느껴진다. 이 긍정은 자신의 영토를 보존하고자 하는 자의 긍정이 아니라 어떠한 폐허로부터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자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굳건하다. 이들의 긍정에는 어떤 약속과 보상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리치와 푸코의 확고한 긍정이야말로 희망이라는 말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희망이란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는 아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헐렁한 낙관주의도 아니다. 일리치는 계획한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의미의 기대expectation와 구분되는 희망hope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일리치가 말하는 희망이란 다른 이에게 선물받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다. 미지의 것으로서의 삶에 대한 긍정.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즐겁게 기다리는 마음. 이 기다림은 수동적이지 않다. 자기 안의 확신과 싸우며 주어지지 않은 경로를 탐색하는 사람만이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망을 견지하며 무수한 샛길들을 만들어가는 것, 그 과정에서 낯선 이들과 동행하는 것이 지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형태의 지적 · 정치적 태도다. 일리치와 푸코가 보여준 희망의 회의주의. 이것을 내 공부의 지향점으로 삼고 싶다.
3. 지금 왜 푸코와 일리치를?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모든 거대한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가 아닐까? 거대한 이념도 없고, 통일된 공론의 장도 없고, 맞서 싸울 뚜렷한 적도 없다. 우리 부모 세대의 정치적 이슈가 민주화였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 세대의 정치적 경험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기후위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하게 된 것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경우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경우에 촉발되는 정서적 변용이 완전 딴판이라는 것이다. 전자가 분노와 정의감과 억압당한 이들에 대한 연민 같은 발산하는 정서와 쉽게 결합된다면, 후자는 우울과 냉소, 환멸 같은 안으로 향하는 정서들을 유발하는 것 같다.
반드시 분노해야만 실천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분노가 꼭 능동적인 정서인 것도 아니고. 세네카에 따르면 현자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니체는 분노하는 자의 무책임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분노하는 자는 분노의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비겁하다는 말. 문제는 단지 우리가 도덕적 분노로 시작해서 제도의 개혁으로 끝나는 짧은 스토리 외에 정치적 실천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 쉽게 불붙지 않는 내 몸을 이끌고 현실을 새롭게 문제화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주어지지 않은 삶의 방식과 관계의 양식을 실험해나가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시도해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을 새로 뽑고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 환멸을 느낀다. 스스로를 착취하는 자기 자신에 지쳐있고,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모든 것들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 자신에 질려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고 던질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우울과 무기력, 환멸은 근본적 비판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지, 풍요란 무엇이며 행복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의 상식을 의심하며 처음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전후사정을 고려해봤을 때 지금이야말로 일리치와 푸코를 읽기에 딱 좋은 때라는 생각이다. 일리치와 푸코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질문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적 연장들을 제공한다. 자기 안의 상식과 확실성들을 의심하고 더 멀리까지 나아갈 용기를 준다. 완벽한 이상에 대한 헛된 꿈을 멀리하면서도 스스로를 변환하고 이전과 다른 현실을 구성하며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길을 몸소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명확한 해결의 지점도 보이지 않는 지금 나는 일리치와 푸코를 펼쳐보려고 한다. 일리치와 푸코를 공부하며 제대로 환멸(幻滅)해보고 싶다.
우와~ 같이 하고 싶은 세미나예요~ (일터에 나가야해서 함께 못해 아쉬워요!)
아쉬운대로 규문의 필독서라 추천받은 건화샘의 저서 ‘청년 니체를 만나다’부터 읽어볼께요!❤️
건화샘의 멋진 시도를 지지합니다!
어제 들뢰즈 인터뷰 영상 중에 질병에 관한 대목이 기억에 남아요. 질병은 일종의 숙고라는 말, 저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유기체의 차원에서 신체의 고유성이 외부와의 접점에서 취한 숙고를 우리는 질병으로 부르는 게 아닐까, 샘의 '쉽게 불붙지 않는' 신체는 어떤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린 숙고의 발현일까 ᆢ저에게도 질문해보게 되네요.
적지않게 미지근한 일인으로서, 그간 단단히 세미나를 이끌어온 샘의 신체를 믿고 일년 공부에 도전합니다.
아무튼 이프( 일리치푸코의 초성을 딴 )세미나 에 친구들이 많이 모이면 신나겠어요~~뭐니뭐니 해도 사람만한 텍스트는 없죠.
'게으르고 미지근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란 시도가 매우 흥미롭군요. '게으름'이 고유한 속도가 되고, '미지근함'이 고유한 느낌일 수 있다는 얘기는 장자의 무용지용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꽤 쉽지 않은 작업일 텐데 ㅋㅋ 기대합니다~!
미지근함으로 철학하기! 하나의 가치, 하나의 관점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게 해주는 브레이크 장치로 작용한다는 게 재밌네요!
우리 시대의 상식들, 전제들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비판하는 시크한^^ 건화의 공부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