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갈되지 않는 기쁨, 늘 새로워지는 우정
글 : 규창
1.손절 당한 것 같다
몇 남지 않은 고등학교 친구였건만, 그 친구가 나를 더 이상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온다. 이유는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어떤 말 혹은 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마음이 뭔가 답답하고 갑갑했는데, 이런 나의 마음이 겉으로도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돈도 벌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상이나 집회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불인(不仁)한 세상은 친구의 바람과 무관하게 돌아갔다.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노래가 직장에서 나왔고, 자신과 달리 또래들은 [당시만 해도] 정치적 무관심을 표명했다. 게다가 직장 생활은 보람은커녕 악질적인 상사 때문에 힘들기만 했다. 친구의 상황이 안타까웠고, 공부하는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친구의 노고에 대한 위로뿐이었다. 이후에 만났을 때도 친구는 여전히 힘들어했고, 여전히 위로의 말밖에 건넬 수 없었던 나는 위로보다 문제를 돌파하는 데 힘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건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만남을 끝으로 그 친구와 아직까지 만난 적은 없다.
요즘 우리는 지켜야 할 선을 명확히 하면서 관계를 맺고, 선을 넘는 순간 화를 내거나 “손절”한다. 손절이란 “손해(損)를 잘라버리는(切) 매도(賣)”라는 주식 용어 손절매(損切賣)에서 비롯된 줄임말이다. 무엇을 손해라고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과의 관계를 손해라고 생각하려면 관계가 교환적 가치에 입각해야 한다. 그런데 손절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관계에서 파생되는 감정이다. 바삐 살아가는 와중에 우리가 시간을 내서 만나는 이유는 그 만남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 같다. 정서적 친밀함이 느껴지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순간 관계를 끊는다. 관계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감정에만 기반한 관계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감정에 취약한 것 같다. 이는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하다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감정을 실체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이란 내가 관계를 어떻게 겪고 있는지를 표시하는 기호일 뿐인데, 감정을 실체화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고, 거기에 휘둘려 잘못된 인과를 구성한다. 하지만 감정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실일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뀌면 해묵은 감정 또한 무뎌지고 흘러간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원한을 곱씹으며 나를 화나게 만든 상대방만 탓하고, 나에게 우호적인(감정적으로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감정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2.순응(順應)에서 비롯되는 편안함
모든 감정은 ‘나’ 혹은 ‘상대방’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태괘(兌卦)는 ‘연못[澤]’을 추상화한 것인데, 흐르는 물이 끊임없이 구덩이에 빠지고 넘치기를 반복하는 반면, 연못은 다양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모든 존재에게 베풀어지는 증여. 이런 사유는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란 글자에 ‘베풀다’, ‘은혜를 입히다’ 같은 뜻이 함께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표현한다. 태괘는 신체 부위로는 ‘입[口]’에 해당하고, 덕으로는 ‘기쁨[悅]’에 속한다. 말은 나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기쁨은 나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발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수렴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태괘가 중복된 중택태괘(重澤兌卦)는 중풍손괘(中風巽卦) 다음에 온다. 손괘(巽卦)는 ‘바람[風]’을 추상화한 괘로, 수렴하는 운동을 표현한다. 바람은 형체가 따로 없어 스며들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런 바람의 모습에 입각해서 고대 중국인들은 바람의 운동성을 ‘들어감(入)’으로 설명한다. 바람은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킨다. 손괘 다음에 태괘가 오는 것에 대해 64괘의 순서를 해설한 〈서괘전(序卦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巽)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마음에 들면 기뻐하므로, 기쁨을 상징하는 태괘로 받았다. 태(兌)란 기쁨이다.
巽者入也 入而後說之 故受之以兌
‘나’를 기쁘게 하는 ‘대상’보다 먼저 ‘기쁨’이라는 정서를 촉발하는 마주침이 있다. 연못의 물이 흘러넘쳐서 주위 사물의 활력을 촉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무젖어든 상대방의 힘이 흘러넘침이 기쁨으로 표현된다. 가령, 친구와의 인사에 살며시 미소짓게 되는 것부터 연인과의 사소한 스킨쉽에서 짜릿함을 느끼는 것 등 정서를 발생시키는 것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연못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내리는 비든 주변 지하수맥이든 외부를 받아들이는 것이 선행돼야 하는 것처럼, 기쁨은 타자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타자의 자극을 수용할[入] 수 없으면, 기쁨[悅]도 발생하지 않는다. 연못이 고갈되는 것처럼 기쁨도 곧 메말라버린다.
태괘의〈단전(彖傳)〉에서는 하늘에 순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과 기쁘게 살아가는 성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태(兌)는 형통하다. 올바름을 세우는 것이 이롭다.
兌 亨 利貞 - 중택태괘 괘사(重澤兌卦 卦辭)
단전에서 말했다. 태는 기쁨이다. 강한 것이 중(中)에 있고, 유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 기뻐하게 하되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그래서 하늘을 따르고 사람들에게 호응하니, 기뻐하게 해서 백성들을 선도하면 백성들은 수고로움을 잊고, 기뻐하게 해서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백성들은 그 죽음을 잊는다. 기쁘게 하는 것이 이렇게 위대하니, 백성들이 권면되는구나!
彖曰 兌 說也 剛中而柔外 說以利貞 是以順乎天而應乎人 說以先民 民忘其勞 說以犯難 民忘其死 說之大 民勸矣哉 - 중택태괘 단전(重澤兌卦 彖傳)
하늘[天]이란 운명[命]이자 만물을 관통하는 원리[理]이다. 성인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順)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기(應)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이로움을 생산한다[悅]. 정치적으로 성인은 백성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 만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고민하고 기쁨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성인의 모습에 감화되어 수고로움과 죽음을 잊고 따른다. 성인이 하늘을 따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백성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백성의 모든 행동은 성인으로 하여금 삶을 기쁘게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기쁨은 이처럼 감염적이며, 더욱 많은 사람들을 기쁨으로 감염시키려는 성인의 노력은 모든 존재가 각자의 자리에서 기쁨을 만끽하는 공동체 건설로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순응(順應)은 상대방에게 무기력하게 이끌리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다름을 바탕으로 상대방과 공명하는 능동적 행위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위로와 동정이라는 동일화에 기반한다. 내가 겪은 상황에 이입해서 함께 기분 나빠하고 함께 원인 제공자를 원망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약간의 만족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도 나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전염시켜야 한다. 이 전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 그러니까 위로와 동정으로 관계 맺지 않는 사람은 손절의 대상이 된다. 따지고 보면, 손절은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 어떤 기쁨도 조직하지 못하는 극단적 무능력의 증거다. ‘선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은 초등학교 시절 선을 넘으면 지우개를 잘라가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지우개를 자꾸 자르다 보면 어떤 짝궁과도 어울리지 못하게 되듯이, 손절과 넘을 수 없는 선을 세우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습관이 형성될수록 관계 속에서 기쁨을 맛보는 능력도 퇴화한다.
이와 달리 태괘의 기쁨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열린 신체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소한 불협화음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의 영향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관계가 변형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보다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면 불협화음을 겪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을 잘 느끼는 사람은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아주 다양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한 신체성이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민감한 신체는 항상 관계에서 기쁨만을 느끼진 않지만, 이전에는 감각하지 못했던 새로움을 수신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방식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기쁘게 겪을 수 있다. 즉, 점점 더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존재들과 기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신체의 역량을 훈련하는 것이다.
3.화(和), 다양한 기쁨이 공존하는 삶의 모습
태괘의 구체적인 상황을 정리한 효사(爻辭)를 보면, 기쁨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와 어디에서든 순응하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和兌), 외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확고한 중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기쁨(孚兌), 습관적으로 이끌리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기쁨(來兌), 습관적 기쁨을 반복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介疾有喜), 어떤 기쁨도 절대적으로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 타인을 인도하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引兌)이 있다. 각각의 효사에서 말하는 기쁨의 형태들 사이에서 좋고 나쁨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삶의 국면 중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특정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효사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구체적 상황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경계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태괘의 효사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경계해야 할 바가 달라지지만, 공통적으로 어떤 상황, 어떤 사람과도 기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을 강조한다. 초구효에서 그것은 기쁨의 형태, 화(和)라는 글자로 표현된다.
초구는 화(和)하면서 기뻐하는 것이니, 길하다.
상전에서 말했다. 화(和)하면서 기뻐하는 것의 길함은 행함에 있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初九 和兌 吉 象曰 和兌之吉 行未疑也 - 중택태괘 초구효의 효사(重澤兌卦 初九爻), 초구효의 상전(象傳)
‘화’란 매우 절묘한 글자다. 정치적으로 구성원들 사이가 원활할 때를 가리키고, 요리에서는 재료들이 잘 어우러져 간이 딱 맞는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을 잡을 때 ‘화’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화’는 단순히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거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공명이다. 타자와 공명하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에 성인은 소인들처럼 나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되고(和而不同), 중원 밖에서 유목민들과 함께 살든 가난하게 살든 벼슬을 잃어버리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和而不流). 그건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능동적으로 구성해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을 구분한다. 기쁨은 외부 대상과의 합치에서 비롯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대상만을 추구한다. 술과 맛있는 음식, 담배 등 기쁨을 주는 특정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쁨은 외부 원인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즉 수동적 기쁨은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존적이고 무력한 기쁨이기도 하다.
반면에 소수의 현자는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다양한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삶의 규칙을 세운다. 스피노자는 현자의 하루를 소개한 적 있었는데, 현자는 “적당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향수를 뿌리고 보기 좋은 식물을 즐기고 옷치장을 하고 음악 감상과 놀이를 즐기고 연극 관람 및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종류의 일을 즐긴다.”(《에티카》 4부 정리45의 따름정리2의 주석)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쁨을 주는 대상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과 달리, 현자는 다양한 영양분을 공급함으로써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로 다양한 활동으로 신체 역량을 증대한다. 따라서 현자의 기쁨은 철저한 절제 속에서 이뤄진다. 금욕이 욕망의 부정을 의미한다면, 절제는 대상을 다양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신체의 민감함을 고취하는 훈련이다. 현자의 일상이 그 자체로 절제의 형식을 띤다면, 그가 다양한 사물과 다양한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신체성을 훈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자에게 기쁜 삶이란 타자와 공존하면서 배우는 역량 그 자체다. 태괘는 바로 그런 것으로서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4.우정, 불화를 잘 겪는 기예
상전에서 말했다. 연결된 연못이 태괘의 모습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동지들과 강학하고 학습한다.
象曰 麗澤 兌 君子以 朋友講習
벗과의 관계는 교학상장(敎學相長),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활동 속에서 유지된다. “동지들(朋友)과 ‘강학하고(講)’ ‘학습한다(習)’”는 것은, 강학과 학습으로 서로를 긴장시킴으로써 우정의 토대를 쌓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강학과 학습은 매우 긴장되는 활동이다. 강(講)이란 앞에 나와서 내가 배운 것을 발표하는 배움의 형식이고, 습(習)은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몸에 붙이는 것이다. 둘 다 벗들의 시선 속에서 이뤄지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벗들의 시선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긴장시키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점검케 하는 강제성을 띤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왜 고대인들이 우정의 윤리를 강조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함께 생활하기 위한 규칙은 느슨한 일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함께 생활하는 와중에 마주치는 시선은 내 신체에서 타성을 벗겨내고 공동체의 리듬을 덧씌운다. 덕분에 나는 공동체 리듬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나의 일상의 리듬을 계속해서 변형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민감한 신체성을 훈련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순간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누군가는 꼭 이런 불편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와 이런 밀도 있는 관계를 형성할 것이며, 나의 삶을 보다 밀도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면 누가 나의 친구일 수 있을까?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친구만이 나를 긴장시키는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취향, 함께한 시간 등등은 부차적이다. 심지어 나에게 배움을 주는 존재라면, 상대방이 나와 완전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친구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손절이 두려워서 친구 사이에도 일종의 감정적 서비스가 요구된다. 대체로 맞장구치면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얘기를 나눈 뒤에는 좀 더 기분이 좋아지도록 말과 행동을 신경 쓴다. 하지만 선을 조금만 넘어도 기분이 상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손절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런 관계를 과연 우정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기쁨을 구성하는 능력과 말하는 능력은 통용된다. 기쁨이 타자와의 마주침을 수용하는 능력에 비례하듯, 잘 듣는 사람일수록 잘 말한다. 내가 내뱉는 모든 말은 내가 어떻게 듣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타인이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선포하는 것은 타인의 어떤 말도 수용하지 못하는 경직됨을 보여줄 뿐이다. 경직된 신체를 방치하고, 더욱 경직되게 만들수록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기쁨도 점점 더 한정적이게 된다. 내가 기쁨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퇴화시키는 것. 이보다 더 큰 폭력이 있을까?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불화를 겪어야 하지 않을까?
관계는 상대방의 말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손절한 당사자가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관계가 다시 시작되기란 어렵다. 어쩌면 친구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내 말과 태도로 인한 상처를 아직도 곱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우리가 나름대로 맺은 인연의 끈끈함이 이 정도였나 싶어서 친구의 손절이 야속하다. 나의 관계 맺음 방식 또한 매우 감정적이었다는 반증이다. 이런 상태로는 다시 만난다 해도 금방 끊어질 게 분명하다. 그래서 우선은 기다려보기로 한다. 시간이 우리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어느 정도 잊게 해줄 것이고, 우연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다시 관계를 이어가도록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관계들 속에서 다른 식의 관계 맺음의 양식을 발명하기. 내가 친구의 손절로부터 얻은 배움이자 숙제다.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규창샘 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 번 글도 그렇고요... 🙏
관계 맺기 참 어렵습니다...! 화이부동하고 화이불류하는 관계 맺음을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수밖에 없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