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산다는 것
글 : 규창
1.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대체로 우리에게 현실은 불만족스럽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준수하지 않은 외모 때문일 수도, 그다지 두툼하지 않은 지갑 사정 때문일 수도, 내가 하는 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없는 재능 부족 때문일 수도, 주위에 호감을 사지 못하는 유머의 결여 때문일 수도 있다. 불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없는 것을 채우고, 있는 것을 삭제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현실이 불만족스러운 건 삶이 ‘불만족스러울 만한 문제’들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들을 해결하더라도 현실이 이전에 비해 질적으로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또 다시 충족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조건들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공기를 다르게 맡으려면 현실에 대한 나의 인식부터가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내가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고, 계속해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다.
나는 역사 공부가 삶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데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방대한 시간을 다룬다. 역사를 공부하려면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선형적 인과관계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지만, 역사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발생하는 방식은 그런 식의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다. 역사란 좋고 나쁨, 정답과 오답이 끊임없이 뒤바뀌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무대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삶이 내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힘들 속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일이다. 나는 역사 공부를 통해 선형적이기만 했던 나의 세계에 여러 굵기의 선들을 그려 넣고 있다.
2.과거와 더불어 풍성해지는 현재
"요컨대 오류는 명백하다. 또한 그 오류를 확실히 없애려면 그것을 공식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인간 진화의 흐름은 짧고 격렬한 움직임의 연속으로, 각각은 얼마 안 되는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정반대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이 무한한 연속 가운데 커다란 진동은 가장 멀리 떨어진 분자부터 가장 가까운 분자에까지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거리 계산에 만족한 나머지 지구에 미치는 달의 영향력이 태양의 영향력보다 크다고 결론 짓는 지구물리학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시간에서나 우주 공간에서나 힘의 효력을 거리만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사, 73~74쪽)
블로크에게 역사는 지금과 무관한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를 관통하는 힘이 얼마나 다채롭고 광범위한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현재적 작업이다. 거리상 달은 태양보다 지구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이 태양보다 지구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다. 어부들에게 달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해 못지않게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고대 중국의 이야기는 먼지로 뒤덮인 퀴퀴한 냄새를 풍기겠지만, 그 시대의 텍스트를 공부하는 나에게는 요즘에 일어나는 사건만큼이나 흥미롭다. 우리는 가까움과 멂으로 측정될 수 없는 힘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간다. 방금 전 내 옆에서 일어난 사건보다 몇억 광년 전 관측할 수 없는 우주 어디선가의 진동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역사가 구성되는 방식은 이와 같다. 역사는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사건들의 총합이 아니라 누가 역사를 요청하느냐, 무엇을 중심으로 사건의 인과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역사도 역동적으로 재구성된다. 만약 역사를 더없이 지루한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건 현재와 과거의 관계를 매우 협소하게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역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 내가 어떤 진화의 흐름 속에 있었는지를 밝힐 수 있을 테고, 민족적이거나 근대적으로 어떤 집단의 후예인지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나’란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나’는 한편으로는 무한한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서 그 흐름을 분절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체물리학자라면 ‘나’를 설명할 때 천체의 폭발이 일어난 몇십 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테고, 생물학자라면 먼 옛날 바다에 번개가 내리쳐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합성된 사건에 주목할 것이다. 똑같이 무한한 흐름을 공유하더라도 현재 우리 자신이 욕망하는 바에 따라 시공을 뛰어넘어 다른 시대와의 친연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청년세대는 바로 이전 기성세대의 자식이지만, 기성세대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념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가깝다’ 혹은 ‘멀다’라고 느끼는 건 언제나 수학적 거리를 뛰어넘는다.
‘나’는 혼란을 겪는 아프리카인들과 친연성을 느낀다. 이때 ‘아프리카인’이란 흑인이 아니다. ‘아프리카’는 흑인들의 고향이 아니다. 그런 규정은 더 이상 현재의 아프리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윌레 소잉카는 아프리카를 ‘대서양과 인도양, 지중해 세 개의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으로 규정한다. 아프리카에는 “스스로를 아랍인이라 생각하고 역사적ㆍ문화적ㆍ정치적ㆍ종교적으로 아랍 세계라고 알려진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를 아프리카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을 다른 인종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있다. 인종, 계급, 종교, 이념 등 전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 아프리카 안에서 부딪치고 있으며, 아프리카인이란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겪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기존에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폐허를 자기 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내가 공부를 통해 사유하는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가 폐허를 경험한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에 비하면 내가 있는 곳은 너무나도 안전하고 질서 정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들로부터 친연성을 느낀 건, 우리가 고민을 시작하는 조건이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세계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글로벌 주민이다. 나는 글로벌한 세계를 여행 혹은 온라인으로 체험하고,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경험한다. 민족과 이데올로기만으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아프리카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동시대’라는 조건은 단순히 19세기, 20세기 같은 식의 숫자나 지리적 특성으로만 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혹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를 느꼈고,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남을 알아본(知人)’ 수많은 인물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세사를 흥미진진하게 공부하는 블로크에게는 어딘가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20세기의 한 인간보다 흔적과 사료로만 남아있는 중세 인물들이 보다 친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가지고, 어떤 힘의 소용돌이를 느끼느냐에 따라 직접 말을 나누지 않은 사람들과 시대를 공유할 수도 있다.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산 블로크가 남긴 글을 통해, 그에게 또 나에게 역사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나는 그와 같은 공기를 나누며 역사를 공부하는 한 명의 역사가가 되고 싶다.
3.관람자에서 동시대인으로
어쩌면 우리는 지금 지나온 것을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보니, 마치 우리 자신은 역사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본 인물들이 자신이 놓인 조건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 유한한 존재인 것처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겪는 역경이 반드시 그 사람의 부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역경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게 그 사람의 무능함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 끝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한함은 우리 삶의 조건이다.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힘들이 우리 존재를 관통하고 있고, 우리는 그러한 힘의 소용돌이에서 잠깐 휘청거리다 중심을 잡기도 하고, 때때로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부정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소용돌이는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삶의 국면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누군가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발버둥 치지만, 누군가는 저항할 수 없는 힘들 속에서 어떻게 매번 새로이 중심 잡을지 고민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또한 유한한 인간들이 어떻게 무한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지를 볼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시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영향을 미친다.
작년에는 아프리카를, 올해는 몽골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역사는 그동안 ‘세계사’에서 ‘세계’의 형성과 발전을 위해 ‘주변’으로 밀려나고 소비되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비교적 최근에야 이 둘의 역사가 조명되고 있긴 하지만, ‘사료 부족’이라는 점 때문에 여전히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되고 있진 않다. 하지만 실제로 공부해보니, 그런 것들은 역사 공부에 있어서 부차적인 요소다. 분명 우리는 과거의 증언 없이 과거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우리에게 알려주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과거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증인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박제한 기록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역사에 뛰어들 때, 우리는 내가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지 않았던 시대를 경험할 수 있다.
《주역(周易)》을 읽다 보면, 결국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상황과 질문의 종류는 한정돼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은 64개의 괘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는 결정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과도 공유 가능한 지반이 삶에 잠재돼 있다는 의미다. 누구나 자기 사유가 작동하지 않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가 있고(山水蒙卦),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잘 풀리지 않음을 겪을 때가 있다(水雷屯卦). 이런 식의 사건들은 다양한 조건 속에서 변주된다. 역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사실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조율하는 작업이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주어진 시대를 벗어나 언제든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과 동시대성을 형성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식의 경험이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많이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가 내 삶으로 들어오고, 내 삶에서 역사를 살아내는 것. 이것을 위해 나는 앞으로도 역사를 공부하려고 한다.
과거와 더불어 풍성해지는 현재! 가까운 과거일수록 현재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머나먼 과거의 커다란 진동은 가까운 어떠한 과거보다도 크게 우리 삶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말이 공감됩니다!! 달과 태양의 비유도 찰지네요! 부정적인 사건과 휘청거리는 사건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삶. 역사 공부를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움을 받아봅시다!!
자신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거울로 역사를 공부하는 규창샘^^ 새로운 관점의 역사가가 탄생하기를 격하게 응원합니다. 유럽사나 중국사가 아니라 아프리카와 몽골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니 더 매력이 있습니다. "나는 기존에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폐허를 자기 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내가 공부를 통해 사유하는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또 우리가 관심갖지 않은 지역과 感하여 공부하는 규창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글이 잘 읽혀요^^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 그야말로 관람자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루하게 외우던 연표와 사건들을 나와 상관없는 무덤 속에 있는 사물처럼 대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사건들과 인물이 내 옆에서 숨쉬고 있는 친구와 주변에서 내게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다르게 다가오겠지요. 그리고 실제 나도 모르게 과거라고 불리는 수 많은 기억들(심지어 지구가 탄생했을 때의 기억들까지 포함)이 이미 내 몸을 관통하고 있고 영향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내 눈에 가시적인 것, 공간적인 변화만을 통해 보고 있으니 이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규창샘이 말한 동시대인이 흥미롭고 이런 눈으로 보는 역사는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겠죠? 두 청년의 역사 연재글 너무나 재밌고, 다음화도 기대됩니다.👍
"기존에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폐허를 자기 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 사유하는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에 공감됩니다. 산산이 부서진 폐허를 자기 자리로 삼아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저도 그런 순간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같은 재앙으로 우리의 터전도 폐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할지....
오호... 역사 이야기 굉장히 흥미롭네요. 이 글은 단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만이 아니라 고전을 공부하고 다른 시공간에 속한 저자의 글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주는 것 같네요. 그래서 글을 읽는 동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공부를 돌이켜 볼 수 있었습니다(후고는 책의 페이지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 글을 읽고 좀더 이해하게 된 것 같음). 그나저나 블로크 인용문 되게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