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회향 : 좋은 학인이 되리라는 자기 약속
글 : 민호
발심 : 그래, 불교를 배워야지
종종 사람들은 젊은이가 불교 공부를 한다고 신기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흘려 넘기곤 하는데, 첫째는 왠지 쑥스러워서이고 둘째는 동의가 되지 않아서다. ‘젊음’과 ‘불교’의 조합이 드물다는 건 알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인 명상과 템플스테이 유행에서도 알 수 있는 바, 화산처럼 들끓는 자기 마음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는 말초적이고 즉흥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컨텐츠 및 서비스들에 신물이 났다. 이 짜증, 미움, 우울, 헛헛함은 지금까지의 수동적 소비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어떻게든 마음을 챙겨야 한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남성도 여성도, 부자도 가난한 이도 마찬가지다. 비율의 차이가 있다 해도 가슴속의 먹구름은 모두의 문제다. 다만 그 먹구름을 흩뜨릴 방편들이 적고 자기 기질에 대해서도 미숙한 이들에게는 문제는 좀 더 심각할 터인데, 흔히 ‘젊은이’라 불리는 이들이 많이 해당된다. 들쑥날쑥한 몸과 마음이라는 현실. 이 조건은 마음이나 수련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가르침에 끌리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들뜸이 한 영역에(그것도 자극적이지 않은 영역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상시적인 아픔을 제공하는 한 그런 실존에서 벗어나는 길을 원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로, 젊음과 불교의 조합은 특이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든 자기 인생 중 가장 나이 많은 시기를 살아가고 있기에, 가르침은 시의적절한 것으로 비춰보일 수 있다.
내가 불교를 공부하게 된 동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출리심도 보리심도 아니었다. 다만 아침부터 밤까지 피어오르는 아주 비근하고 옹졸한 마음의 불길들이 주는 불쾌감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원한감정, 열등감, 조바심 등의 정념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다. 잠재우든 해소하든 뭔가 다르게 겪을 길이 필요했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자비심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좀 너그럽고 편안해진, 다정한 사람이고 싶었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법들이 필요했다. 그 당시 내가 배우고 있던 다른 영역들은 다이렉트로 ‘네 마음’의 문제로 향하게 하지는 않았다. 니체, 푸코, 일리치, 고대과학 등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로 초대했지만, 나는 쉽사리 긍정되지 않는 내 자의식과 정서들을 안고 쩔쩔매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는 곧장 마음 이야기를 꺼냈다. 괴로움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미움 한 점 없는 밝은 미소를 도달점으로 삼았다. 이것이 내가 불교라는 영역에 끌렸던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그 이끌림에는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얽혀 있다. 첫째, ‘불교반’이라는 배치. 사실 나에게 불교는 종교나 철학이기 전에 일련의 이미지 혹은 분위기였다. 월요일이면 늘 왁자지껄 펼쳐지곤 했던 규문의 불교 모임. 이는 내가 ‘마음’을 고민하기는커녕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어져 온 세미나다. 분류하자면 재가자들이었고 특별한 제도나 의례도 없었다. 그러나 경전들을 손수 꼼꼼히 읽어 갔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의 파노라마를 쓰고 나누는 수업이었다. 비장하지는 않았지만 끈끈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진중함이 느껴졌다. 그런 모임이 먼저 있었다. 나는 여기서 배웠으면 했다. 늦게 합류하는 것이겠지만 그 틈바구니에 끼고 싶었다. 그리고 불교의 ‘ㅂ’도 모르는 채로 중년 선생님들 사이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 과정이 좋았다.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며, 서로의 글을 코멘트를 해주시는 모습이. 때로는 침 튀기면서 때로는 깔깔 웃으면서 토론하는 시간이. 매주 급하게 얼렁뚱땅 써 갔던 나의 글들도 한줄한줄 밑줄 그어가며 들춰봐 주시던 날들이. 내게 불교를 공부한다는 건 무엇보다 그런 도반-선생님들과 함께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둘은 같은 의미였다.
불교 공부를 추동했던 두 번째 요인은 일종의 주춧돌을 놓기였다. 실용적인 필요성과 귀한 도반-선생님들 외에도, 내겐 비전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규문에 와서 이왕 배우는 삶을 살아보기로 한 이상, 공부의 베이스로서 진득하게 다져나갈 영역을 만들고 싶었다. 그게 불교였다. 그건 이전부터 불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좋은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배워갈수록 여기에는 모든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터운 경전마다 세상 만물에 대한 심오한 존재론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풍부한 길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인간 번뇌의 파노라마를 품은 이야기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도 풍성하고 드넓었지만 현대 과학이나 동서양의 여러 철학과도 독특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듯 보였다. 부처님께서 ‘의심하라’라고 당부하신 것처럼, 그 모든 지혜와 가르침은 모두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 배워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니까 내게 불교는 궁극의 지혜이자 공부길에서의 노다지로 비춰졌던 셈이다.
세 번째 요인은 일상을 바꾼다는 데 있었다. 불교 공부가 다른 분야들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그 배움이 곧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든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마음의 괴로움이라는 현실로 직접 들어가며,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선명한 비전과 그 비전으로 나아가는 길들을 제시한다. 그렇기에 불교는 학문의 형태일 때조차도 결코 종이 위에, 한글 파일 안에 머물 수 없다. 가르침을 배우는 일은 곧 생활양식 혹은 존재양식의 변화를 전제한다. 그렇기에 불교 공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배움-공부와 가장 멀리 있는 영역들에도 닿는다. 먹기, 옷입기, 거주하기, 운동하기, 사랑하기, 놀기(컨텐츠를 소비하기), 말하고 수다 떨기 등의 모든 라이프스타일도 불교의 맥락 위에서 재고될 수 있다. 나아가 돈을 벌고 쓰는 방식, 가족을 대하는 방식, 아침을 시작하는 방식, 하루를 매듭짓는 방식 전체와도 얽힌다. 요컨대, 불교 공부는 미세한 마음장부터 먹고사는 활동 및 세상사에 대한 응답에 이르기까지 삶 전반에서의 부단한 자기 변형의 작업을 전제한다(그렇기에 우리의 세미나는 언제나 할 말이 넘쳤던 거다). 이 모든 것은 ‘수행’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불교는 수행일 수밖에 없고 수행 없는 공부란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할 헛바퀴라는 점. 그것이 불교 공부의 어려움이자 매력이고, 내가 앞으로도 계속 발을 담그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히 ‘수행’으로 향한다. 나는 수행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수행 : 자기배려로서의 한단지보(邯鄲之步)
사실 내가 접한 불교는 ‘불교 공부’다. 그것도 절이나 대학이나 명상센터에서가 아니라 인문학공동체의 세미나에서 펼쳐지는 방식의 ‘공부로서의 불교’. 그렇기에 이는 불교라는 종교-철학의 넓은 스펙트럼 중 특정한 부분과 연결된다(하지만 그 부분은 전체를 결여한 n분의 1이 아니며, 공부공동체라는 배치에서 또 다른 영역의 철학들과 접속되며 뜻밖의 색채를 띤 ‘불교+a’가 된다). 불교에서 배움은 세 가지로 나뉜다. 계율, 선정, 지혜인데 그 중에서 ‘공부’로서 내가 만나온 불교는 주로 ‘지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로서의 불교보다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만나왔다. 하지만 지혜의 배움조차도 앎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을 전제한다. 즉 다른 어떤 철학들보다 적극적인 실천을 동반한다. 지혜는 문(聞), 사(思), 수(修)로 나뉜다. 가르침(법문)을 공을 들여 잘 듣는(읽는) 과정. 그것을 나의 일상 내지 이 시대의 조건들을 겹쳐보면서, 혹은 다른 철학의 언어들로 번역해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과정. 그리고 어떻게든 소화한 바대로 일거수일투족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과정. 이 세 과정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를 추동한다. 씨앗을 심기, 발효시키기, 삶 전반을 바꾸기로 요약되는 지혜의 배움. 이는 신체 전체를 쓰는 일이요,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투여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독특한 것은 ‘수(修)’다. 배우고 익힌 바를 통해 자신의 안팎을 닦아낸다는 과정. 이것이 불교가 내가 아는 다른 철학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물론 이때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다. 논리와 텍스트가 중심이 되어 이뤄지는 지성적 사유들 말이다. 여기에는 ‘몸’과 ‘단련’의 문제가 강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 철학, 특히 헬레니즘 철학에는 언제나 스승에게 배운 바를 신체에 새기는 일, 운동선수와도 같이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앎을 수중에 지니는 일’이 중요했다. 그 모든 것은 갈등, 병, 죽음과 같은 실존의 사건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영혼을 단련하고 돌보는 작업이었다. 미셸 푸코는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라는 고대 철학적 품행을 ‘자기 배려’라고 부른다. 영혼의 무장을 위한 항구적 훈련으로서의 자기 배려. 내게 이것은 ‘수’를 이해할 한 가지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수행을 단련, 무장, 돌봄 등의 용어로 한정하면 어딘가 부족한 것 같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면들, 진전, 싸움, 떠남의 이미지도 수행에 포함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건설이고 훈련이지만 동시에 파괴이고 실험이기도 하다. 수행에는 언제나 맞서는 지점이 생긴다. 이는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각자의 업이 다르고 고유한 기질이 다르기에, 반복해서 걸려 넘어지고 부딪히는 자기 나름의 취약 지대들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그곳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도반들의 눈과 귀가 필요하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미세한 습관을 병으로서 문제화할 수 있고, 그것을 따라 자신의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물론 아프다. 쾌적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수행은 치열한 것이고 가열찬 것이다. 이런 마찰 없이는 사실 어딘가로 나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괴롭기만 한 소모 과정이 아닌 이유는 그 가운데서 모종의 활력이 스며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알아차려질 수도 있지만 기쁨과 같은 종류의 정서다. 나아간다는 느낌. 여전히 헤매더라도 같은 수렁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는다는 발견이 주는 안도감. 이것이 수행을 이어갈 수 있게 돕는다.
그런데 이 느낌은 세월이 지나고 절기가 바뀌어서 자연히 일어난 변화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나이가 적든 많든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철없고 어렸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수행은 요행이 아니며, 방치와 아무 관련이 없다. 똑같은 것의 반복을 그냥 내버려 두는 한 수행은 성립될 수 없다. 관건은 문제화 작업, 진단과 해부의 작업, 알아차림의 연습, 방법의 실험, 다른 습관들을 만들기가 감행되느냐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1도의 각도만을 바꿀 수 있겠지만, 이런 실천들이 동반되지 않았던 세월에 따른 변화는 잠깐의 신기함은 줄 수 있을지언정 별다른 기쁨을 주지 못한다. 일례로 내게 있었던 원한과 자책의 문제를 들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이나 남과 나와 세상을 향해 뻗치는 내면의 비난이 나의 깊은 고민이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세이 세 편, 명상, 불교 공부 등 할 수 있는 온갖 고투를 해왔다. 그리고 이젠 원한감정이라는 증세에서 약간의 거리를 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이건 결코 ‘나’만의 노력 때문만은 아닐 테다. 수많은 조력자들과 계기들이 오고 갔다. 한편으로는 세월의 흐름 혹은 생활 조건의 변화 때문인가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두고 깊이깊이 고민하고 발버둥 쳐 본 기억이 분명해서인지, 이 작은 떠남은(또 다른 지점에서 앓겠지만) 작은 기쁨과 더불어 용기를 준다.
이런 점에서 나는 수행에 ‘싸움’과 ‘떠남’과 ‘치유’ 등의 이미지를 더하고 싶은데, 이것들을 단번에 담아낼 단어가 있다. 바로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사자성어이다. 한단지보는 <장자>의 ‘추수’(秋水) 장에 나오는 말로, 연나라의 한 청년이 한단에 가서 그들의 걸음걸이를 배워왔다는 이야기다. 흔히 제 분수를 잊고 남들 따라하다가 자신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고성 교훈으로 쓰인다. 하지만 채운샘은 강의에서 이를 뒤집어서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 한단지보는 ‘타자의 걸음걸이를 배우기 위해 자기 걸음걸이를 버리고자 한다’는 것이 된다. 자신이 새로 마주한 세계 앞에서, 낯선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자기가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고자 함. 이것은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동반한다. 떠남이지만, 보다 넓은 차원의 연결에 가닿기 위한 떠남이다. 이러한 해석은 ‘신앙’을 정의할 때 쓰이고 한다. 주어진 분수, 즉 이 기질과 환경과 습관대로만 살아가지 않고 빛나는 존재에 가닿기 위한 거듭된 결별의 여정으로서의 신앙. 하지만 알다시피, 각양각색의 신앙은 적지 않은 경우에 무모해지거나 자기 포기에 가까워지곤 한다. 기독교 신앙이 대표적이다. 자기로부터의 결별이 여전히 기쁨의 여정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배려로서의 영혼 돌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수행이 포기를 감행한다면 언제나 배려의 지반 위에서 이뤄지는 일일 것이다. 무장과 해체, 훈련과 실험을 함께 포함하는 항구적인 변형의 작업으로서의 수행.
정리하면 수행이란 배움을 완성시키는 실천으로서, 가르침으로 무장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기 영토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점에서 자기 배려이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과 싸우고 그 흔적들을 버리면서 ‘되어본 적 없는 자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한단지보’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의미에서 수행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많은 문제들이 남는다. 나에게 불교 공부는 수행으로 이어졌을까? 나는 읽고 들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수중에 보관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가? 나는 충분히 떠났는가? 사실 불교 공부를 하기로 했다는 결심이 부끄러울 정도로 올 한해 나의 수행은 빈약했다. 급박하게 텍스트를 읽고 강의시간에는 종종 졸았으니 문과 사가 허술했던 것이 사실인데, 수는 더욱 그랬다. 매주 공지 및 후기를 쓰는 것 외에는(그마저도 내가 메모했던 몇 구절과 장면의 스케치였다) 다시 펼치거나 외우거나 되새기는 경우가 없었다. 이번 한 주 동안 ‘불교철학’ 게시판에 올라온 후기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놀랐다. 우선 내가 적었던 글들조차 낯설게 보일 정도로, 배운 것들이 내게 남아 있지 않음에 놀랐고, 이렇게나 많은 강의(20회)를 듣고 책(10권)을 읽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처럼 느슨하고 변변찮은 수행이어도 괜찮을까? 이런 게 여전히 수행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하지도 않고 있는, 겉만 번지르르한 빈 깡통 같은 수행론을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소용일까?
복잡한 자의식이 올라오는 가운데, 내가 수행의 문제를 적을 때 크게 놓친 것이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수행이 어떤 형태, 어떤 색깔이어야 하는지만을 생각했을 뿐, 그 동력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즉 인간은,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수행의 길로 이끌리는가? 이는 불교에 끌렸던 흐릿한 동기들보다는 더 선명한 발심 혹은 비전이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단련한다면 왜, 자기에게서 떠난다면 왜, 그렇게 하고자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지금도 ‘깨달음’이 진정한 목표는 아닌 것 같다. 출리심도 보리심도 깊이 우러나온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힘으로 수행해갈 건가? 물론 지금까지처럼 복잡다단한 욕망 및 고마운 인연장 안에서 배움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배우는 즐거움으로도 갈 거다. 그러나 문제는 의욕이 떨어질 때다. 기대했던 것들의 연이은 실망으로 인해 혹은 알지 못할 계기들로 인해 기운이 축 처질 때, 바쁘거나 정념에 시달릴 때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출가자도 아니고, 계를 세운 수행자도 아닌데, 어떤 동력으로 나아갈 텐가?
비전 : 하나의 균형점으로서 회향의 약속
한 가지 예시에서 출발해보고 싶다. 북드라망 출판사 블로그 ‘메디씨나 지중해’ 코너에 올라온 김해완 님의 글 <첫 번째 수술실>의 일부다. 여기에는 수술실이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버리한 의과대 학생으로서 수술에 입회한 경험에 관한 소회가 적혀 있다. 저자는 마취된 채 나신으로 죽은 듯 누워 있는 환자가 개복되는 과정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기묘함을 느꼈다. 의학 지식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저자는 의사보다는 환자 쪽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환자가 아닐 수 있는 특권’을 갖는데, 이는 그가 병원 가운을 입고 학생 명찰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표들로 인해 그는 환자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심지어 장기까지도 들여다본다. 물론 환자는 실습 학생들의 입회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는다고 한다.
“왜 이들은 나에게 이토록 은밀하고 소중한 영역을 허락하는 것일까?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당장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는 무능력한 사람인데? (...) 그들의 눈에 우리는 ‘잠재적 의사’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사가 되어보겠노라는, 약간은 식상하고 교과서적인 다짐은 이 희한한 느낌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말이다. 의사가 환자를 만지는 게 정당화되는 이유는 치료를 위해서다. 치료한다는 명분이 없는 우리는, 오늘의 배움을 미래에 만나게 될 환자를 위해 훌륭히 쓰겠다고 약속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의학이라는 지식과 기술은 몸을 제공해준 수많은 생명에게 빚지고 있으니, 이를 배웠으면 빚을 갚는 게 맞다. 너무 비장하게 들리려나? 그런데 내 마음은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평정심을 위해 균형점을 찾고 있을 뿐이다.”(김해완, <첫 번째 수술실>,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티스토리])
나는 여기서 비장하지도 않고 고고하지도 않은 ‘이해하기 쉬운’ 회향의 발심을 본다. 이 마음은 대단한 각성이나 통찰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놓인 상황의 기묘함에 어떻게든 응답해보려는 시도에서 나온다.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 보여준 환자들과 무신경한 집도의의 노련한 메스질. 장기가 튀어나오는 의료사고의 긴박함과 팝송이 흘러나오는 여유로움의 대비. 그 사이에서 수술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햇병아리 같은 ‘나’. 저자는 이 기이한 배치 속에서 일단 평정심을 찾는 방법은 스스로를 향한 약속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몇 안 될 이들에게만 허락된 광경 앞에, 실력은 전혀 없지만 자격만은 갖춰진 채로 덩그러니 초대된 경험. 의학 기술과 지식이라는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진기한 장면에 대한 무상의 관람으로부터 쌓여온 것이라는 자각. 이런 체험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재조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지금이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는 이것들을 나눠야만 한다. 그게 마땅하다. 그래야만 균형이 맞을 테다. 그렇기에 놀람과 의아함과 부끄러움이 겹쳐지는 기묘한 기분이 엄습하는 모든 순간은 약속의 순간이 된다. 좋은 의사가 되겠노라는 회향의 약속. 그 약속은 또한 오늘의 배움을 놓치지 않고 담아 두려는 마음을 일으킨다.
여기서 나는 오래된 철학-의학의 유비를 가져와 보고 싶다. 의학의 유비는 불교에서도 사용되는데, 법화경에는 “부처님은 위대한 의사이시다”라는 구절이 나올 뿐 아니라 사성제의 고집멸도 또한 의학적인 치료의 모델을 따른 것이라고도 한다. 철학과 수행의 길에 있어서 나 역시 의사보다는 환자 쪽에 가깝다. 당장 마음속에서 두려움과 번뇌를 계속 만날 뿐 아니라 누군가를 행복의 길로 이끌 지혜 한 조각도 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위치도 특이하다. 강의를 열고 세미나를 기획하는 노련한 철학자(튜터)도 아니고 법회를 진행할 진중한 수행자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배움이 조직되는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이리저리 오가는 심오한 개념들과 가르침들을 주워 담을 수 있는 자리다. 경전부터 문학까지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정도로 텍스트가 넘치고, 매주 몇 번씩 불교와 동서양 철학이 크로스오버 되면서 펼쳐진다. 그것이 단번에 받아들여지고 소화될 수는 없을 것이고 그걸 바라는 것도 오만일 테지만, 나는 그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하게 얻어진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달라이라마는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에 태어나는 일이 드물고도 귀함을 거듭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미디어가 풍성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불교 공부를 함께 해온 사람들의 모임을 만났다는 사실에도 해당된다. 내가 읽는 경전들과 텍스트들이 내게 오기까지 몸과 마음을 내어준 수많은 존재들이 있었다는 생각은 읽고 쓰는 이런 생활에 다른 뉘앙스를 쥐어준다. 미숙하기 짝이 없고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지만, 세미나의 매니저가 되고, 경험 많으신 샘들과 대등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또 뭔가를 말한다는 상황은 생각해보면 꽤 기묘하기도 하다. 무언가 지금 갚을 수 없는 것을 받고 있다는 기분. 이것은 내게 좋은 의사가 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학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든다. 오늘의 배움을 미래에 만나게 될 누군가를 위해 훌륭히 쓰겠다는 다짐을 말이다.
회향의 약속. 나는 이것이 수행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두려운 나는 지금까지 말로든 마음으로든 ‘깨닫겠다’는 발원을 한 적이 없다(이것이 좀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배운 것을 어떻게든 나누겠다는 맹서는 줄곧 해왔는데, 이것은 내게 더 정성껏 배워야 하는 자명한 이유이자 마음을 다잡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회향할 수는 없다. 회향하기 위해서라도 하루하루 정성 들여 지혜를 배워나가야 하고, 지혜를 단단히 닦기 위해서라도 회향의 약속을 잘 새겨야 한다.
나 자신에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이것이 아직 자비심이 아님을 강조해두자. 세미나 시간이면 반복해서 나왔던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서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볼 시야는 아직 내게 무르익지 않았다. 그렇기에 “삼계가 괴로운데, 그 누가 편안할 수 있겠소.”(<현우경(상)>)라는 말씀으로 정리되는 비(悲)심도, 모든 존재가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발견하길 바라는 자(慈)심도 내게는 아직 멀다. 내가 회향을 약속하는 것은 어쩌면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내가 놓인 자리의 기묘함으로부터 균형점을 찾기 위해. 수행의 이유를 되새기기 위해. 공부를 명랑하게 해나가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잘 살기 위해. 잘 살아간다는 것의 방향을 잡기 위해. 무력감이 고개를 들이밀 때에도, 그저 되는 대로가 아니라 왜 기어이 ‘정성껏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나 자신에게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부지런히 배운 것을 나눠야겠다. 이것이 지금 나의 수행이고, 불교를 공부해갈 비전이라 생각된다.
왜 공부하는지 묻지 않는 한 어떻게 공부하는지 보이지 않는 것이군요. '왜 공부해야 할까?', '왜 이것을 공부해야 할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품을 수밖에 없는 화두인 것 같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것 같고, 모르는 와중에도 조금 알 것 같은 참 간질간질한 화두란 말이죠? 그러나 이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으며 파고 들어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ㅋ 대충 공부하는 게 공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 거라는 판에 박힌 생각들을 자주 되뇐 것 같아요. 아마 이런 생각들이 수행이랍시고 하고 있는 것들이 전혀 수행이 아니게 만드는 거겠죠.
공부가 수행이라면, 수행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 수행은 또 어떻게 해야 하고, 수행의 원동력은 무엇일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이 질문 자체가 문, 사, 수를 종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적어도 이 질문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나'를 있게 한 온갖 인연들을 다시 곱씹고 다르게 전유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하나의 약속으로 발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 사, 수가 거듭돼야 했을가요? 질문에 대한 답이 새싹처럼 싹 트는 글이로군요~
그나저나 오늘도 기독교는 1패했고, 불교는 1승했네요!
발심-수행-비전으로 이어지는 글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신묘한 글이네요! 불교에 대해서 1도 모르는 학인이지만, 덕분에 글을 읽으면서 불교가 어떤 텍스트이고, 어떤 공부인지 상상하고, 그려보게 되네요. 이번 에세이에서 저는 특히 ’수행에서 비전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감이 많이 됐어요. 저 또한 ‘왜 공부하는가?’라는 매번의 질문 앞에서 스스로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없어 많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대개의 경우에는 ’좋으니까 계속한다‘라는 단순한 동기로 공부를 밀고온 것 같습니다. 민호샘과 더불어 발심-수행-비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네요. 그리고 민호샘이 도달한 ’하나의 균형점으로서 회향의 약속‘이라는 비전에 저도 슬며시 올라타고 싶네요! 민호샘의 진솔하고 솔직한 고민을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