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생태철학 : "네 실존을 강렬하게 하라!"
‘에콜로지’라는 메아리
‘생태적 삶’이라는 문제는 내게 아주 중요한 키워드다. 꿈이라고 해야 할지, 가치관 혹은 비전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지금처럼 ‘에코’가 유력한 트렌드인 시대에 생태적 삶이라는 것은 진부하고 추상적으로 들린다.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난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콜로지’라는 말을 처음 접하고 10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나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방향을 부여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양이 똑같진 않았다. ‘생태적’이라는 단어만 같았을 뿐 그 형태와 색깔과 뉘앙스는 계속 바뀌었다. 가지를 뻗어나가는 영역들이 달라졌다. 변화는 꽤 극적이었는데, 한때는 UN 같은 어깨뽕 높은 자리를 향했다가 소박한 환경미화원을 향하기도 했고, 열정적인 환경운동가를 꿈꾸다가 시골 농사꾼을 상상하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고전인문학을 배우는 학인이라는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여기서도 물음표와 방향키는 계속 돌아간다. “무엇이, 어떤 삶이 생태적인가?” 생각해보면 이 물음이 중요한 동력이었다. 대학을 들어가게도 하고 대학을 나오게도 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이런저런 모임들을 기웃거리거나 세미나를 만들게 해온 마음속의 메아리 같은 것 말이다. 커다란 결정들뿐 아니라 먹고 걷고 사고 노는 매일매일의 작고 빈번한 갈림길 중 한 쪽으로 내딛게 만드는 물음의 목소리.
<생-기 세미나>는 그 목소리를 좇는 와중에 만나게 된 갚진 기회였고, 내게 생태라는 문제의 톤을 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성하게 감각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종횡무진 그리고 삐걱삐걱 나아갔다. 전 지구를 감싸고 있는 ‘디지털’의 배치를 공부하면서 그 산업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오염만이 문제가 아님을 배웠다. 컨텐츠의 질과 양상, 말초적 반응 기제의 연구와 우리의 속도 감각, 가속되는 ‘스마트화’ 모두가 생태의 문제였다. 육식과 원자력에 대해서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둘러싼 산업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젠더적, 역사적 담론과 인프라를 탐구하지 않고 온실가스나 삼림파괴에 대해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후쿠시마 사태 또한, 오염수라는 장막 뒤로 150년에 걸친 일본 산업화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강력한 ‘에너지 자립’이라는 뿌리 깊은 환상을 직면하지 않고서는 ‘유일한 피폭국’이자 지구 최대의 지진 발생국이 원자력을 신봉하는 기이한 역설을 이해할 길이 없다. 기술, 감각, 음식, 담론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환상 역시도 생태의 문제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콜로지는 우리의 가장 밑바닥에 그어진 경계들을 되묻고 허무는 일까지 나아간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물질, 주체와 객체, 문명과 자연, 도시와 야생이라는 이원적 구분들의 타당성을 과학적·철학적 사유를 동원해 헤집어 놓는 일까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뒤집기를 시도했다. 대부분의 생태 담론이 전제하는 ‘끔찍한 위기’와 그 귀결인 희망/절망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염, 교란, 폐허를 어떻게 인간적 자연이 아니라 패치워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자연을 조화와 순수라는 생산이 아니라 부패와 해체라는 분해라는 차원으로부터 사유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태 운동의 결론은 애도나 향수만이 아니다. 긍정의 문제,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들의 탐구와 발견 역시 에콜로지의 문제였다.
이 종횡무진의 길들을 따라가다 보니, ‘에콜로지’라는 문제가 닿아 있지 않은 영역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핸드폰을 터치하는 지극히 비근한 습관부터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까지, 먹는 행위를 돌아보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감수성과 가치관을 형성해온 자본주의의 배치를 탐구하는 활동까지 전부! 우리가 우리의 실존을 곰곰 되묻길 멈추지 않는 한, 모든 것은 생태 문제다. 이쯤 되면, 무엇이 생태적 삶이 아닌지를 맞히는 게 빠를 듯하다. 마구 새 상품을 사 대거나 폐기물을 마구 투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면 아직 순진한 셈이다. 그보다 근본적이어야 한다. 내 생각에 진짜 ‘반(反)생태적’인 것은 ‘되는 대로 살기’ 혹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기’가 아닐까 한다. 하던 대로, 알던 대로, 유행 따라, 상식 따라, 기질 따라 살기. 아닌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사태를 눈앞에서 치우면서 신기술을 믿거나 아무것도 공포 속에서 살아가기. 여기에는 자신이 다른 존재들의 실존에 얽혀 있다는 감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거꾸로 생태적 삶의 한 조건을 임시적으로나마 설정해 볼 수 있겠다. 안이한 관성과 수동성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이질적 세계들과의 불가분성을 느낄 수 있게 되기! 펠릭스 가타리의 표현으로 하면 ‘실존적인 긴장’(existential tension)을 갖기!
“이 실존적인 긴장은 인간적인 시간성과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통해 작동할 것이다. 내가 비인간적인 시간성이라고 할 때는 동물되기, 식물되기, 우주되기뿐만 아니라 기술적 정보 혁명의가속화와 상관되어 있는 기계되기의 전개 혹은 더 좋게는 펼침을 의미한다.”(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 동문선, 20쪽)
실존적인 긴장. 꽤나 멋있는 표현이지만, 대체 무슨 뜻일까? 가타리는 그것이 자신 안으로 여러 시간 리듬을 접어 넣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우선 이미 우리의 안팎을 통과하고 있는 동물의 리듬, 식물의 이야기, 숲과 도시의 배치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기계 장치 속에서 고장 나고 덧붙으며 기능하는 기계로, 배치 속에서 배치를 만드는 패치-워크로 느끼게 되는 것. 가타리에 따르면 이는 곧 무의식의 배치가 보다 덜 폐쇄적으로, 보다 덜 단조롭게 바뀌는 일이다. 나는 ‘실존의 긴장’이라는 키워드로부터 가슴팍에 울려 퍼지는 ‘생태적 삶’이라는 정체 모를 메아리를 풀어가 보고자 한다.
‘세 가지’ 생태학?
사실 생태적 삶이 에코백과 종이빨대로 대표되는 친환경 실천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조금은 삐딱하게, 그런 에코-이미지에 의존한 실천들은 오히려 왜소한 흡족감과 자기애를 불러와 숙고의 기회를 막는다고까지 생각했다. 선악이 선명한 곳, 정답과 오답이 매끈한 곳에는 흥분과 쾌적함, 그리고 그 짝인 침울함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거기에 ‘실존적인 긴장’은 없다. 생태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전기차나 친환경 수세미를 구매하며 가시적인/과시적인 액션을 늘릴 게 아니라, 무엇보다 욕망과 감수성을 바꾸어야 한다! 고쳐 쓰고, 오래 쓰고, 덜 소비하는 삶을 좋아하고 원하게 되는 상태. 매 시즌 새 옷을 사 입지 않아도, 매년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해마다 최신폰으로 바꾸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상태. 하지만 그러한 수준에 이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욕망은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단지 환경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해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깊이 실감한다고 해서, 스타벅스에서 벽돌 같이 커다란 낡은 노트북을 꺼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미세해서 우리는 언제든 ‘자연스럽게’ 의식적 입장과 정반대 쪽으로 끌릴 수 있다.
‘바꿔야지!’ 해서 바뀌는 게 욕망이었다면 참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다. 개인이 의지를 발휘하기만 하면 감수성도 욕구도, 그리하여 일상도 쇄신할 수 있을 것처럼. 이게 정신주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내게는 작은 당당함이 있다. 차가 없어도, 새 옷이 아니어도, 에어팟이나 스마트워치를 갖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내가 속한 이 공동체와 여기서의 인간관계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떳떳함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훌륭한 생태학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한들, ‘신품 문화’로부터 거세게 불어오는 유행의 바람을 나 홀로 견딜 수 있었을까? 도덕적 앎과 다르게 뻗치는 욕구를 어쩌지 못해 괴리감에 빠지지 않았을까? 나의 소중한 ‘마이너 감각’조차도 지금 내가 몸담고 있고 시간을 보내는 장소, 만나는 사람들, 밥벌이의 방식 없이는 결코 형성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었다는 얘기다. 요컨대 욕망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욕망조차 사회장, 즉 구체적 시공간 속의 관계와 배치의 산물이다. 때문에 ‘욕망을 바꾸는 것’이라고 거칠게 정리했던 생태적 삶이라는 문제는 곧장 사회라는 관계망을 바꾸는 일과 맞물리게 된다.
펠릭스 가타리는 이 문제를 본격화한다. 그는 기존의 생태학, 즉 환경의 오염과 그 회복만을 문제 삼아온 ‘분과’로서의 생태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생태학은 자연에 국한시켜온 자신의 인간 외적이고 비정치적인 둥지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환경 문제를 다룰 때조차도 생태 ‘철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도 ‘실천’도 모두 우리에게서 분리되어 대상화되고 이미지화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자본이다. 기후위기의 상징이 된 북극곰은 티셔츠에 박제된 체 게바라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생태철학적 질문은 대규모의 모든 정치 참여를 거부하기 위해 이따금 고의적으로 선택하는 의고적이고 민속적인 생태학 운동 흐름의 몇몇에 맡겨지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생태학의 함축적 의미는 자연 애호가나 자격이 있는 전문가의 한 줌의 소수파의 이미지와 연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생태학의 함축적 의미는 자본주의 권력 구성체와 주체성 전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37쪽)
기존의 생태학이 산업 자본주와 맞서게 되는 구도는 조금 진부하다. 특히 툭 하면 자본주의를 비난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있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는 더욱 그렇다. 모두가 패배했는데 생태학 따위가 어쩔 수 있을까? 보다시피 에코-이미지는 자본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잖은가!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해보자. 가타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하나의 경제 체제나 생산 양식이 아니라 욕망의 형성의 복합적 구성체로서, 즉 우리를 어떤 것을 원하거나 원치 않는 주체로 탄생시키는 배치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안쪽으로는 우리의 정신 구조 및 마음의 장, 즉 심성(mentalité)으로까지 내려가며, 바깥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비인간·비유기적 사물들 사이에 형성되는 전체 관계로까지 뻗어간다. 생태학이 자본주의가 남긴 공해 및 산업화에 맞서고자 한다면, 그 안팎으로 얽혀 있는 무의식과 사회체라는 두 세계를 모른 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콜로지는 인간 마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야 하고, 그리고 그 심연이 현실화되고 다시 응축되는 정치사회적 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환경생태학’은 언제나 ‘정신생태학’ 및 ‘사회생태학’이어야 한다. 셋은 하나다.
무의식-욕망과 사회-관계는 언제나 서로를 반영하면서 생산하는 기계 장치다. 들뢰즈와 함께 작업하면서 가타리가 싸우고자 했던 것은 무의식을 개인화하고 정신화하는 분위기였다. 무의식은 결코 개인의 은밀한 내면에도 가족의 보금자리에도 갇힐 수 없다. 개인의 욕망은 언제나 사회의 욕망에 의해 관통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체의 배치를 바꾼다는 것, 그렇기에 무의식의 문제와 사회체의 문제를 같은 문제 지평에서 사유하는 것이 가타리의 주된 목표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또 하나의 영역이 더해졌다.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생태적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정신(심성)’과 ‘사회’라는 두 축 사이에 ‘환경’이라는 축이 가로 놓였던 것. 다만 앞서 두 문제가 분리 불가능한 이중 작업이었던 것처럼, 새로이 추가된 환경 문제 역시 두 축에 의해 끊임없이 횡단되어야 했다. 어느 한쪽에만 국한해 세계를 진단하는 일은 진통제를 남용하면서 상처를 곪게 방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사회체·환경에 대한 행동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매체가 지지하듯이 이 세 가지 영역의 악화를 직시하지 않는 것은 여론을 유치하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파괴적인 무력화에 이르게 하는 기획에 가깝다. 특히 텔레비전이 분비하는 진정시키는 담론의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가 제기하는 세 가지 생태학적 관점이 구성하는 세 가지 상호 교환할 수 있는 렌즈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24쪽)
가타리의 세 가지 렌즈는 지금 우리에게도 너무나 유용하다. 기후정의운동, 마르크스생태주의, 에코페미니즘 등 많은 담론과 실천들이 사회와 환경, 환경과 정신의 영역을 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사회체·환경이 하나의 문제로 다뤄지는 경우는 아직도 드물다. 욕망은 사적이고, 오염은 자연의 위기이며, 일상과 정치를 분리된 영역으로 전제하는 담론들이 지배적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미디어는 그렇게 방송한다. 하지만 늦기 전에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방사능 오염, 해수면 상승, 바이러스 변이 등 ‘환경문제’라고 분류된 사태들은, 테러리즘, 제노사이드, 젠더 혐오, 아동 노동착취와 등 ‘사회문제’라고 불리는 문제들만큼이나 “심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현상”(26쪽)이라는 점을. 그래야만 지금 여기서 행동을 구성할 수 있다. 들이닥치는 사건들 앞에서 무력해지 않을 수 있다. 욕망-관계-자연이 서로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한 우리는 우리 실존의 문제를 정치인들, 기술자들, 전문가들에게 떠맡기기를 멈출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실존적인 긴장’이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에콜로지의 차원을 정신의 지평과 사회의 지평으로까지 넓힌다는 것과 연관된다. 에콜로지(ecology)의 어원인 ‘oikos’라는 그리스어는 가정 관리 및 살림 경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세 가지 생태학을 횡단한다는 것은, 마음자리의 살림과 생태계의 살림과 인간관계의 살림이 서로 얽혀 있음을 보는 일이자, 그 패턴의 굳어진 부분을 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를 궁리하는 일이다. 내 정신의 배치가 이미 생태계의 배치와 사회장의 배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세계 역시 우리에게서 펼쳐지는 생각, 감성, 언어, 행동과 더불어 그 배치를 바꾼다. 이 점을 잊지 않을 때, 우리의 일상에 세계가 침투해 들어온다. 익숙한 자리에서 낯선 문제들이 떠오른다. 질문들은 내가 보고 듣는 풍경을 저 멀리로 데려간다. 의문부호들이 차오른다. 먹고, 쉬고, 클릭하고, 이동하고, 잡생각에 빠져드는 오늘의 일상은 생태계 및 사회적 관계망과 어떻게 맞물려 있을까? 나를 이렇게 생산시키는 장은 어떠하며, 또 나는 무얼 생산하고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마음의 살림과 세계의 살림을 포갤 수 있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길에서 빗겨나게 되며 이전의 자기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이것이 일상과 사유가 강렬해지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생태적-미적 주체화 : 다시 특이하게 되기
“이 에세이는 사소할지라도 이제 주위에 퍼져 있는 단조로움(그리자유)과 수동성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58쪽)
흥미로운 점은, 생태학 이야기를 하면서 가타리가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우리 삶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획일화와 경화(硬化)라는 사실이다. 생태의 위기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생활 전반에서 독특한 톤과 양식이 사라지는 사건이다. 욕망은 강력해지지만 결코 강렬(intense)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맹렬하게 욕구하고 소비하지만, 몇몇 공리계(특정하게 유도되는 품해 및 가치 체계) 안에서 그러할 뿐이다. 가난뱅이도 부자도 건물주를 욕망한다. 어린애도 노인도 빠른 속도를 원한다. 너도 나도 음식을 배달시키고,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쇼츠와 릴스를 넘겨댄다. 모두가 비슷한 패턴을 소모한다. 그리고 모두가 무기력하다. 분명 음식도 컨텐츠도 놀거리도 방대해졌지만 어쩐지 우리의 품행과 생각과 욕구는 단조로워지는 것만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치의 목록이 왜소해지고 획일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가치 증식 양식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면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소외시키 때문이다(53쪽).
“엘리트 쪽은 물질 재화나 문화 수단을 충분히 향유하고 독서와 글쓰기는 최소한에 그치면서 결정에 관련한 권한과 정당성의 감각을 몸에 지닌다. 그것에 더해서 종속적인 계급들 쪽에서는 되는 대로식의 태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희망의 상실 등이 상당히 일반적으로 보인다.”(49쪽)
방종과 체념, 즉 가진 쪽에서의 향락적 삶의 세습과 못 가진 쪽에서의 ‘되는 대로 식의 태도’라는 이중주야말로 에콜로지의 가장 큰 적이다. 왤까? 우리가 우리 품행을 가다듬고 가꾸고 실험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쪽에 있건 자본의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끊임없이 벌고 사고 쓰고 버리기를 (종종 아주 의욕적으로) 계속하는 소비자-좀비로 이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뒤로 어마어마한 전자폐기물과 중금속과 방사능과 온실가스를 배설할 테고, 그렇게 배출된 유독한 분비물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내몰며 다시 사회를 뒤흔들고 괴멸시킨다. 후쿠시마와 팬데믹과 전쟁들을 떠올려보자. 이렇게 비자발적 파괴자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실존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그 흐름을 다채롭게, 기이하게, 유연하게 빚어내야 한다. 생태철학을 실험하는 가타리의 주문은 하나다. 최선을 다해서 무의식을 다극화하라!
바로 이런 점에서 에콜로지의 문제는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미학은 감성 혹은 감수성에 관한 연구이며, 여기서 관건은 느끼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우리의 감각과 무의식은 관습, 책, 경험 등의 매체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매체는 언제나 사회장의 공리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된 기억들은 획일화되면서 상식과 도덕과 정체성으로 굳어진다. 자본은 이 딱딱한 주체성을 타고 흐르면서 속삭인다. 너도 이걸 갖지 않으면 불행할 텐데? 그리로 가면 뒤처지고 외로울 텐데? 따라서 중요한 건 우리의 경화된 무의식에 균열을 내고, 다른 욕망이 흘러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품행을 다르게 조직하고 느끼는 방식을 변형시킨다는 것, 이것만이 미학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는 언제나 윤리적 변환을 수반한다. “그것들 없이도 난 이미 행복한데?”라고 반문할 수 있는 순간 에콜로지적 미시-혁명은 시작된 것이다.
남은 과제는 이렇다. 어떻게 우리 삶의 스타일에 독특함(singularité)과 강렬함(intensité)을 부여할 것인가? 여기서 가타리는 두 가지 포인트를 강조한다. 첫째, 특이화는 반드시 재(re)-특이화라는 것. 생태적 삶은 일회적으로 그칠 수 없다. 우리는 플로깅을 하고 대중교통을 타며 가시적인 ‘작은 실천들’을 할 테지만 결코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런 자신에 도취되거나 도덕 교사가 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다시 미시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정체되고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형성했던 자리를 거듭거듭 되묻고 떠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이한 주체성이란 오로지 주체화의 매 국면마다 다시 특이해질 때만이 가능하다. 끊임없이 '다시'를, 니체적 의미에서 ‘다시 한 번!’을 외칠 때만이 우리는 경화(硬化)를 피할 수 있고, 그만큼 강렬해질 수도 있다. 미시-혁명은 오직 ‘과정’으로서만 실현된다. “강렬도의 논리나 생태의 논리는 변화 과정의 움직임과 강렬도만을 중시한다. 내가 여기에서 체계나 구조에 대립시켜 사용하고 있는 과정은, 동시에 스스로를 구성하고 정의하고 그리고 탈영토화해가는 실존을 말한다.”(27쪽)
둘째, 그것을 위해 주체-집단을 찾을 것. 우리는 독립적 주체가 아니다. 패치이자 패치-워크의 존재인 나는, 나 자신을 다르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다른 존재들을 만나야만 한다. 주체성의 구성은 언제나 타자들로부터 수행된다는 것은 가타리 철학의 핵심이다. 누구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문제화가 일어난다. 내게 있어서는 비제도적이고 이질적인 공부 공동체와의 접속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돌아볼수록, 중심화하는 흐름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가치 집단들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음이 보인다. 변화는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가치, 다른 목소리, 다른 스타일을 실험하는 타자들 마주칠 때, 그들의 문화, 비전, 이야기에 전염되고 오염됨과 동시에 욕망도 샛길로 접어든다. 요컨대 특이한 주체성을 빚어내고자 한다면, 우선 표준적이지 않은 집단을 만나거나 구성해야 한다. 오염되어야 하고 오염시켜야 한다. 그렇기에 낯선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미지의 누군가를 불러들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참 고맙게도 올 한해 나는 주위에서 ‘강렬해지고자 하는’ 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강렬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텍스트를 함께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쓰고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작지만 소중한 배움들을 얻었고, 한 두 걸음 이전 자리에서 떠나왔으니 더할 나위 없이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긴가민가 싶고 어정쩡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고민거리도 새로이 밀려든다. 오늘도 곳곳에서 환경문제들과 사회문제들은 암울함을 드리우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모인 사람들과 꾸물꾸물 뭔가를 읽고 말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아보려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는 ‘생태적 삶’이라는 메아리와 공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하면서 잘 안 되는 실천들, 삶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한 글 잘 읽었습니다.^^ 생기 세미나는 참여 못했지만, <세계 끝의 버섯>, <분해의 철학>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고,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해 힌트를 얻은 기분이 들었어요. 물론 들뢰즈,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실천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욕망의 차원에서 들여다 봐야하고, 이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시공간적 조건, 사회와 관련이 있기에 바꾸는 게 쉽지 않지요. 도반들과 책 읽고, 얘기를 나누면서 다른 길을 생각해보다가도 삶의 장인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보니 어찌나 자본주의가 깊이 파놓은 홈패인 공간에 금방 되돌아가버리네요. 코로나라는 굉장히 큰 사건을 지났는데도 그 이전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 같고요. 그래도 생태적 삶에 대해 고민하는 도반들이 있어서 그 힘으로 다시 한 걸음 나가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것 같네요. 글 감사해요.😉
펠릭스 가타리의 ‘실존적 긴장’이라는 개념이 참 멋지네요! 우리 신체를 가로지르는 동물, 식물, 사물의 리듬과 배치를 이해하는 일! 무의식의 배치를 보다 덜 폐쇄적으로, 보다 덜 단조롭게 바꾸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패치이자 패치-워크의 존재인 1인으로서 함께 ‘다시 한번’ 강렬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나네요~! 감사합니다-!
기존의 생태학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어떻게 '생태적 삶'을 살아야 할지 여러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실존적 긴장'이라는 단어가 가장 인상적인데요.. 인간적인 시간성과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함께 작동시키는 일이 무엇일까? 나에게 동물되기, 식물되기, 우주되기, 지금의 기계되기는 어떻게 시도해 볼 수 있을까? 몸짓하나, 마음가짐하나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해 봅니다. 자본주의의 장에서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함과 납작하고 균일한 사유와 행동이 아니라 '독특함'과 '강렬함'을 가진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봐야겠다는 다짐을 2024년 새해에 하게 되네요.. 누군가를 추동하는 힘을 가진 글을 읽게 되어 기쁩니다. 😉 2024년의 생기 세미나도 민호쌤의 생기 가득한 글도 더욱 기대해 봅니다.
생태의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개별적인 삶과 연결되어야하는지를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네요. 자신의 마음자리까지 내려가 성찰해야한다는 것! (욕망의 형성의 복합적 구성체) 자신을 이루는 욕망의 배치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것! 가타리를 통해 에콜로지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