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집, 길 위의 인생
글 / 난희
- 우물 밖 꼬꼬즈의 용기
얼마 전 딸은 ‘우물 밖 꼬꼬즈’(닭띠 부부의 세계여행기)라는 인스타그램의 계정을 열고 거기다 이렇게 썼다. “일상의 균열이 생기는 순간 나는 도리어 용기가 생겼다.” 일상의 균열이란 지난 9월 사위가 급성 담낭염으로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했고 일주일간 입원하고 딸이 그 간호를 했던 일을 말한다. 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내 집 마련을 위해 돈을 모으고 주말엔 외식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은 언제까지나 견고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주일간 전혀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 “넓고 넓은 세상을 두 발로 걸어 만나는 것은 아이를 낳은 뒤에, 키운 후에, 하는 일이 안정된 후에는 늦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모험에 설레고 눈을 반짝일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여행을 떠나자!”
멋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젊은 커플의 행보를 응원하면서도 한 켠, 양가(兩家)가 입이라도 맞춰 수락한 듯한 그 ‘흔쾌함’이 내내 걸렸다. 그 흔쾌한 수락에는 혹시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젊어 해보고 싶은 거 해라.’는 다소 체념적인 정조가 깔려 있지 않은가. 그러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같은 냄새 풍기는 항간의 염세적 쾌락주의와 뭣이 다른가. 아니면 재빨리 주판알을 튕겨 이 나라에서 더이상 클래식한 방법으로는 중산층 돌입이 불가능하다, 세계여행의 경험도 나중의 ‘성공’을 위한 모종의 자본 축적의 스펙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사돈과 우리 부부는 모두 ‘열린’ 교육을 부르짖었던 386세대, 그 부모의 ‘열린’ 생각의 근저에 도사린 욕망이 의심스럽다. 오르락내리락 널 뛰듯 하는 집값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고, 어차피 올려다보지도 못할 집이라는 파운데이션 대신 세계여행이라는 스펙을 파운데이션으로 삼는 게 ‘앞으로’ 더 가치 있을 거라는, 아니, 딱 깨놓고 ‘돈이 될 거’라는 이해타산이 숨어 있지나 않은가.
이 젊은이들의 결단은 고리타분하지 않다. 그 용기, ‘두 발로 세계를 걷고 싶다’는 이 말을 진부한 관광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응원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한다. 그것은 ‘잘해라, 무사히 돌아오기를 빈다’ 같은 텅 빈 말잔치가 아니다. 무엇보다 응원이란 그 결단의 의미를 판에 박힌 질서 속에 회귀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딸이 말한 ‘회색빛 일상’이란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주어진 것들에 맥없이 복종하는 지친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회색빛 일상’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단연코 아니다. 어차피 그런 거야, 뭐 별 거 있겠어, 속살거리는 타성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않고 딸이 매번 한 발 더 나아갔을 사유의 경계를 헤아려 본다. 낡은 벽을 뚫고 낯선 것을 맞으러 가겠다는 그 설렘과 용기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굳건한 자유의지만으로 결행되는 것도 아니다. 딸은 그 순간의 설렘과 결단을 기록해두는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무거운 배낭에 지치고 생각지도 못할 상황에 나가떨어질 때도 있겠지. 여행이 일상이 되어 다시 회색빛으로 되어 갈 수도 있을 거다. 그럴 때 펼쳐볼 수 있도록 이 설렘을 남겨 둔다. 내 삶이 회색이 될 때마다 용감하게 다음 결심을 할 수 있도록.”
이 젊은이들의 결단에 대해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님이라면 첫 마디에 “아서라!”, 살아 계신 우리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말씀하셨다. “말려라!” 어머님 세대의 인생관을 대체로 요약하자면 ‘평범함’이다. 모난 돌이 정맞고 튀면 죽는다. “평범함의 특성을 가장 가치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하시는 어르신들의 무기는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경험적 지혜였다. 니체는 말한다. 그 ‘평범함’의 내용이란 “겸손, 대오 맞추기, 도구-본성”이라고.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나대지 않고) 남자는 근면 성실해야 하고(돈 잘 벌어야 하고) 무리의 질서에 폐를 끼치는 것은 죄악이니(말 잘 들어),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라(놀 생각 말아라)! 오! 어머니, 당신들의 ‘평범함’의 진리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립니다.’ 그것은 평범함에 대한 비범함이 다시 진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평범함’의 추구가 먹혔던 제반 조건들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혼하면 집장만하고 애부터 낳아야지, 어딜 간다고? 돌아오면 뭐 먹고 살려고?” 강경하게 혹은 완곡하고 끈질기게 뜯어 말리는 어르신들의 근심걱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다수의 삶의 방식이 안전해 보인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다수의 삶의 방식에 반하는 삶의 방식이 ‘튀어보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없다는 것인가? ‘변함없는 영원한’ 진리는 발명되었고 부단히 발명 중에 있다. 외관상의 다수와 소수의 분리에 따른 유별남이 아니라, 전혀 ‘겸손’할 생각도 없고, 대오를 맞출 의지도 없으며, ‘쓸모’에 복무하지 않는 당당한 힘에 따른 결과로서의 독특한 삶, 유일무이한 너의 삶을 발명하라! 꼬꼬즈의 용기를 나는 이렇게 번역한다.
2. 입주자의 번뇌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밀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그때 내 기분이 딱 이랬다. 큰아이가 세 살 되던 해 우리는 처음 남편 명의로 된 아파트에 입주했다. 부산의 한 외곽 지역의 신축 아파트였다. 건설 업체에 다녔던 남편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분양권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우리는 엄청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는 각오로 일상을 집 장만 모드로 변환시켰다. 외벌이 남편의 월급 중 한 달 생활비 8만 원, 나머지는 주택부금에 몰빵했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아연하지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비참한 색조로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비록 ‘허리 띠 졸라’ 맸다고는 하지만 한 푼에도 바들바들 떠는 극도의 내핍으로 마음마저 피폐해지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지금과는 물가도 달랐고 무엇보다 우리는 공동체의 ‘원조경제’라는 젖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옆집이, 전화를 하면 뭘 들고 오는 친구, 친척들이 있었고 손 벌리면 얼마간의 지원을 해 줄 부모가 있었다. 3년간의 집 장만 프로젝트는 그런 뒷배를 당연시했다. 결국 우리 세대의 집 장만은 개인의 능력 플러스 원조경제의 공동 작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장만한 집에서 치러졌던 그 모든 의례들, 이를테면 집들이,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잔치들은 집 장만에 음으로 양으로 힘을 보탠 이들이 누리는 당연한 권리였다.
입주 다음의 수순은 할당된 공간에 저마다의 삶을 불어넣기. 구체적으로 소파나 침대 같은 가구, 가전제품 바꾸기, 저만의 센스가 묻어나는 인테리어 소품 배치하기.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그것들이 하는 일은 이 집이라는 공간이 무엇에 쓰일지를 지시하는 기능을 했다. 앙증맞은 봉제 인형들은 포근함과 다정함의 기호였고 LOVE, HAPPYNESS 같은 글자가 적힌 목공 소품들은 이 공간이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부적이었다. 입주자의 살림살이는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한편 자유롭지 않았다. 미리 구획된 공간이 ‘말’한다. 여기는 무엇이 놓여야 한다! 그 명령에 따라 입주자의 매일매일은 뭔가를 채우는 일로 바지런했지만 가끔 딱히 잡히지 않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을 일색으로 환기하지 않게 하는 기억이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른다. 광도 낮은 백열등을 켜놓은 것 같은 달빛이 거실을 깊숙이 비추었던 어느 날 밤, 텅 빈 듯한 그 공간에 이방인처럼 앉아 있던 나, 그 내가 마주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게 다인가? 겨우 이거였나? 그리고는 이 다음에 올 모든 순간들이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사람이 본다는 주마등처럼 주르륵 펼쳐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의 느낌은, 도달했고 달성했다고 자타공인한 그 순간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 느낌은 곧 파묻혔다. 내일을 위해 우선 자야 했고, 아침에는 아침에 할 일이, 저녁에는 저녁에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386세대, ‘나때’의 통과 의례가 대체로 이러했다. 학교 졸업하면 직장 다니고 혼기 차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 낳는 수순을 밟는 것. 결혼 후 주어지는 1순위 목표는 집 장만, 베이스캠프를 꾸리는 암묵적인 합의에 나는 왜 아무런 저항감을 못 느꼈을까. 아니 저항감을 못느꼈다가보다는 별 뼈족한 수가 없었다는(뽀족한 수를 발명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어른들은 “집 장만 해야 되는 시기는 댓돌 위에 신발 두 켤레 있을 때”라며 “애 생기고 나면 늦다” “젊을 때 허리띠 졸라매라”고 했다. 늙어 고생하지 않으려면 젊을 때 아껴 집칸이나 장만해놔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에게 나이깨나 먹고 ‘집 한 칸’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은 낙오를 의미했고, 그 시선 속에는 ‘어디서 뭘 하다 집도 한 칸 없냐’는 힐난과 함께 자신은 정주의 자격을 갖췄다는 데 대한 모종의 우월감이 스며있었다.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는 곳, 이곳이 있고서야 안심하고 다음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베이스캠프, 인생의 파운데이션, 집! 이 독사(doxa)의 입김은 여전히 세다.
인생의 종잣돈 ‘똘똘한’ 아파트 한 채는 ‘안개 정국’ ‘거품 경제’로부터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지상명령처럼 우리에게 하달되는 집 장만이라는 과제, 그것부터 마련하고 소유의 울타리를 넓혀가는 가는 것이야말로 견실한 인생이라는 믿음이 지금도 불문율처럼 뼛속에 새겨지는 중이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의 시대’ 운운하는 와중에도 집이 우리를 지켜 줄 거라는 신화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빠져나갔다가도 다시 부활한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공포의 메시지로 번안하여 부동산만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피상적인 답으로 연결시킨다. 이 시대의 진정한 철밥통은 이제 정규직도 아니고 따박따박 월세 들어오는 목 좋은 곳의 건물이다. 얘들아! 꿈이 뭐니, 어떻게 살고 싶어? 건물주요, 월세받아 여행이나 다니며 사는 거요. 비단 아이들만의 꿈이겠는가.
나에게도 집의 이미지는 ‘최후의 보루’였다. IMF를 맞기 전 우리 집을 샀을 때인데 그 즈음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베스트셀러였다. 어떤 책이 읽히거나 묻히는 것은 하나의 징후요 해석이다. ‘무소유’의 열풍은 소유의 열풍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사람들은 ‘무소유’를 자칫 소유하지 않는 것, 무일푼으로 길거리를 떠도는 노숙인의 이미지로 환치시키는 것은 그 의미를 오해한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즉 유기체로서의 생명이 한순간이라도 무엇을 취하지 않고서 삶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가, 때문에 무소유란 소유의 대척점에 선 ‘소유하지 않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소유물들과 관계 맺는 지혜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 집은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중 가장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실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소유’를 ‘소유물과 관계 맺는 지혜’로 완곡하게 해석하는 것은 내게는 어쩐지 고무줄 같은 타협 의지로 읽힌다. 이를테면 베이스캠프로서의 집은 일단 인정, 그 속의 소유물과의 관계는 ‘무소유’를 지향. 그런 ‘무소유관’의 현대적 버전이 미니멀리즘 아닐까. 어쩐지 타워펠리스 사는 어떤 사람이 ‘월든’을 예찬하는 것 같은 냄새가 풍긴다. 오해 없기 바란다. 잘못 읽으면 1채 가진 사람이 100채 가진 사람을, 혹은 무주택자가 주택자를 심판하는 구도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 심중의 의문은 집이 과연 삶의 베이스캠프인가, 집을 삶의 베이스캠프라고 했을 때 그 ‘베이스’에 착종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3. (건물)주님의 신화 부수기
내 돈 주고 내가 산 내 집은 내 것이라는 이 확고부동한 믿음은 그 자체로 자연적일까? 다시 말해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내재한 욕망인가? 일리치는 인간의 집은 ‘동물들의 서식처’도 아니고 ‘상인들의 창고’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번식을 위해 확보한 은신처가 아닌 문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박완서의 단편 ‘그 여자네 집’에서는 딱 자기 취향이던 연애 상대와 헤어지고 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 딱히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가 그 아래 도사린 욕망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의식적인 욕망은 이 남자라면 태어날 새끼를 위해 둥지를 마련하고 지킬 수 있겠다는 판단과 연관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안전과 보존의 욕망은 그 자체로 죄가 없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가장 익숙하고 가장 흔하게 쓰는 말이 가장 범범한 자루이듯이 그 말은 누가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생산한다. 누구의 안전이고 무엇을 위한 보존인가, 집이 안전과 보존을 위한 1차 목표물이라면 어째서 이 사회는 재생산의 둥지를 모두에게 허락하지 않는가? 원초적인 의문은, 저렇게나 많은 아파트들이 날마다 지어지고 보수 진보를 막론한 정치권의 공약과 전문가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정책을 떠들어대는데도 왜 아직도 우리가 집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내가 부동산에 대해 뭘 알아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드는 의심인데, 집에 대한 이 사회의 거대한 담론들은 삶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공포심 유발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닐까? 거미도 집을 짓고 토끼도 굴을 파는데 인간-동물이 집을 짓지 못할 이유란 없다. 자기가 사는 장소와의 관계, 함께 사는 무리들과의 능동적인 조율 속에서 인간은 고유의 거주지를 조형할 힘이 있다. 일리치는 그것을 “토박이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거주지”라고 명명한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전통적으로 ‘살아가는 것’(living) 과 ‘거주하는 것’(dwelling)은 동일한 의미였다. 즉 ‘어디에 사시나요?’를 묻는 것은 ‘어디에 거주하시나요?’를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결국 거주지- 함께 사는 무리 –활동을 분리시켜놓고는 거주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거주지에는 그만의 결이 있다. 거주지의 결, 문화란 공동체 고유의 거주지를 형성하는 그만의 고유한 활동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문화란 거주 활동이지 단순히 미술관을 순례하고 비싼 뮤지컬 따위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건 그저 문화에 관한 정보를 쌓아 올리는 행위일 뿐,” 문화란 우리가 보는 실제 사물들, 자연, 회화, 우리가 듣는 음악, 우리가 읽는 책, 우리가 보는 영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우리의 실제 삶, 우리의 정서적 삶과 연관시키느냐의 문제다.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던 거주 활동이 사람들을 위한 주택공급으로 전환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주거가 하나의 활동에서 상품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로 인해 거주 활동이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해지면, 이제 사람들은 임대하거나 구매한 피난처 안에서 유순하게 길들여진 주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반 일리치, <H2O와 망각의 강 >, 사월의 책, 97쪽)
부동산 정책 전문가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이들의 말에는 ‘입주’만 있지 ‘거주’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마치 집을 주어진 공간을 세련되게 디자인해서 최적화된 삶을 담는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 관점은 기시감이 든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공간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그 손으로 창조한 세계, 질서로 충만한 세계라는 관점 말이다. 앞선 삶의 흔적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말끔한 장은 신이 첫 삽을 떴다는 그 기원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세워진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엔 삶의 흔적, 역사가 없다. 시멘트로 뒤덮여버린 대지에 조성되는 레고블럭 같은 집들은 거주공간이라기보다는 면적 단위로 사람들을 채우도록 할당된 공간이다. 가끔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책하다 옛날에도 상가들이 일상의 거주 공간에 이처럼 가까이 들어차 있었을까를 생각한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상가가 들어서고 입점하는 품목과 레벨은 입주자들의 벌이와 연관된다.
그런 점에서 보수와 진보의 쟁점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한 채를 가지든 백 채를 가지든 집을 ‘공급’할 수 있는 상품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부동산 정책을 나발 부는 효과는 공포심 부추기기에 있다. 그것은 집을 빨리 사야 한다, 지금 팔아야 한다, 더 키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내몰고 한사코 욕망을 집에 붙들어 맨다. 소박한 ‘마이홈’의 꿈과 ‘현명한 재테크 수단’으로서의 상품성 높은 집을 고르는 안목은 솔직히 나로서는 구분하기 어렵다. 내 안에서도 그것은 계속 엉킨 채 어느 때는 거주하는데 만족하자 싶다가도 어느 때는 이 집의 가치가 얼마인가가 궁금해진다. 우리 시대의 집에 대한 ‘무소유’를 묻는다는 것은 집을 한 채 가질지 백 채 가질지를 묻는 차원이라기보다 집을 계속 실체화하게 하는 안팎의 조건을 문제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문제화의 지점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공간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나름의 독특한 거주 활동에 따라 달라지는 질료”로서 공간이 아니라, 상품 공급에 따라 할당된 공간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느낀다.
철저히 개인공간화 된 아파트 혹은 주택, 모델 하우스 1, 2, 3호의 상품에 붙박히는 것과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은 “도시 공간에 자신의 삶을 새겨넣을 능력”이다. 우리 ‘입주자’들이 ‘집’에 대해 하는 일이란 사용하거나 소비하는 것 뿐이다. 이는 매순간 형성되고 있는 공동체 고유의 공간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나는 우리 세대가 공동체 고유의 공간에서의 삶의 방식을 그나마 마지막으로 경험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거주가 불가능한 집은 더이상 집이 아니다. 집이 사람을 누르고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는 수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영혼까지 끌어다가’ 비싼 집을 사고도 사람들은 거기서 삶의 의례를 치르지 않고 밖으로 돈다. 아이는 산부인과에서, 조리는 산후조리원에서, 손남맞이는 까페와 식당에서, 공부는 독서실에서, 병은 병원에서, 늙음은 요양원에서, 죽음은 장례식장에서 해결한다. 거주의 분열은 입주자의 분열의 이면이다. 공동체의 거주 활동을 각종 대행업체가 대신하는 시대, 나는 껍데기만 남은 공가(空家)의 이미지를 본다. 공가(空家)의 일상은 반복되는 회로를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이다. 입주자들을 위한 그 모든 필요 조건들은 그 회로에 자발적으로 진입함으로써 창출되는 일상의 시간들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자본에 포획된 것이다. 내가 사고 싶은 것과 누군가가 사야 한다고 명령한 것이 한덩어리 거대한 구름이 되어 신체를 휩싼다. 중독된 삶은 경계를 넘나들며 소비의 영역을 훑고 다니며 뭔가를 픽할 때 잠시 숨을 쉬다가 이내 꺼져버린다. 나는 우리 시대 특유의 병증인 허무감과 무기력 그리고 우울과 조증은 할당된 공간에 수동적으로 붙박힌 우리의 신체가 내지르는 비명같이 들린다.
4. 방랑자와 해석자의 집
다시 전통 마을을 복원해야한다는 의미일까. 일리치가 거주자와 입주자를 구분하는 것을 거주자라는 실체, 입주자라는 실체를 분리하고 입주자가 되지 말고 거주자가 되자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그 진의는 모든 가치가 화폐라는 추상으로 환원된 시대에 우리가 과연 입주하지 않고 일상을 꾸려갈 장을 상상하는 게 가능한가,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임대를 했든 매수를 해든 입주했다고 해서 우리가 꿈꾸는 LOVE와 HAPPYNESS가 절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몸소 체험 중이다. 이유는 이미 그 공간 자체가 그런 추상적 가치를 연기하도록 내몰린 공간이라는 데 있다. 가능한 이질적인 것들의 침투를 막고 클린하고 쾌적함을 극대화한 공간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차라리 중환자실에 가깝다. 거주의 감각이 희미해진 우리 신체가 다시 거해야 집은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가? 오랜 정주의 지혜는 이제 낡았다. 어쩌면 지혜는 길 위에 흩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익숙한 사고 구도는 배움이 과거에서 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간다고 여긴다. 축적되어있는 오래된 삶의 지혜를 조아리고 배워 익혀 현재에 적용하고 그것을 미래에 전수한다는 구도 말이다. 나는 그 구도를 비튼다. 삶의 지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 속을 정적으로 흘러 내게 스며든다기보다는 열망하는 자의 눈에 띄는 것이 아닐까. “뭔가를 열망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 나 자신을 내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도처에서 흘러다니며 그것과 만나는 이에게 의미를 발생시킬 것을 촉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딸의 결단과 설렘이야말로 나를 가르친다. 방랑자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 ‘잠깐의 집’에서 기록할 다음 전언을 나는 기다린다. 그 사이 나도 어디론가 걷고 있을 것이다. 정처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일이 있다. 중력을 거스르고자 하는 몸짓들에 언어를 입히는 일! 딸이 돌아올 집은 대한민국 어디 주소지로서의 집이 아니라 낯선 힘들이 넘나드는 품 넓은 해석자의 집일 것이다.
어항이든 동물원이든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사육하는 곳에는 생명체의 특성이나 사육자의 취향에 따라 인공적 구조물 같은 것을 이용하여 생존 환경을 만들어 준다. 생명체는 사육자가 조정하는 서식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과 번식을 이어가는데...
간신히 버티고 있던 숲이거나 벌판이
었던 빈 땅이 순식간에 상전벽해가 되어 줄줄이 고층아파트라는 인공 구조물이 들어서면 처음에는 조금 낯설어하던 사람들도 구조물의 배치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을 보면,
사육장 안의 생명체와 사람들의 생존 패러다임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안에서 바라다보는 바깥 아파트의 풍경은 그런 의미에서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나는 현실적 도구로서의 집에 대해 무기력하며, 다만 외력을 피해 적당히 은신하고 있는 듯하다.(때때로 가장 위험 한 은신처가 되기도...)
참으로 어려운 주제에 대해 사유의 물꼬를 터주는 글이었습니다.
샘 글을 읽으니 가슴 어딘가가 시원~해집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해지고 짓눌리는 듯한 ‘집 문제’에 대해 감히(!) 다른 의미를 발생시킬 용기가 솟게 한달까요..!
그러려면 샘 말씀처럼 우리가 공간을 감각하는 방식이 어떠한지, 그게 지고한 것인지, 그것이 정말 우리를 근본적으로 이롭게 하는지를 잘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ㅡ내 돈 주고 내가 사는 것ㅡ나(가족)만의 사유지 또는 재산’ 이 틀은 우리에게 너무 견고해서 빈집을 무단으로 점거해서 사는 스쾃(squatting)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불법행위로 여겨지곤 하는데요, 샘 글을 보니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거주활동 하나 없는 그 빈집을 정녕 ‘집’이라 할 수 있는건지 오히려 묻고 싶어지네요. 그 상품을 위해 사람을 추위로 내모는 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인지..?
월 8만원(@0@!)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며 열심히 모아 집을 사셨음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실 수 있다는 게 멋집니다. 따님 내외 분들께 배우고 ‘응원’하시는 모습도요. ㅎㅎ
“우물 밖 꼬꼬즈”의 용기, 저도 ‘응원’해요~~!*^^*
'일상으로의 탈출'이 아닌 우리가 정한 삶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을 옆에서 단단하게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에게는 무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을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님들과 가족들이 있기에 동아랑 제가 흔들리지 않고 삶의 큰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 말대로 예상치 못한 일에 나가떨어질때도 있을 수 있고, 여행이 일상이 되어 회색빛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둘이서 다시 굳건히 걸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집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야
족쇄에서 풀려나서 자유롭게 살아볼게
설레는 마음으로😊
'집' 하나를 두고 이토록 많은 문제들이 딸려 나오는 걸 보고 진심으로 감동받았습니다...
그 문제 다발들을 386 세대이자 내집마련을 직접 하셨고, 내집을 마다하고 떠나는 따님을 두신 샘의 목소리로 들으니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 시대 모든 이의 욕망이 빨려들고 있는 이 이상한 입주지-상품 무더기에 우리의 예속도 혁명도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듯 합니다!
모름지기 이 시대의 저항이란 주님의 신화를 부수기 위한 저항에서 시작되어야함이 분명하군요.
못 하나 박을 수 없고, 출산도 운동도 장례도 치료도 배움도 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스위트홈'을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진풍경...
'21세기의 집' 세미나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네요!!
이런 문장들은 몇 번을 읽어도 값진 것 같습니다.
"부동산 정책을 나발 부는 효과는 공포심 부추기기에 있다. 그것은 집을 빨리 사야 한다, 지금 팔아야 한다, 더 키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내몰고 한사코 욕망을 집에 붙들어 맨다. 소박한 ‘마이홈’의 꿈과 ‘현명한 재테크 수단’으로서의 상품성 높은 집을 고르는 안목은 솔직히 나로서는 구분하기 어렵다. 내 안에서도 그것은 계속 엉킨 채 어느 때는 거주하는데 만족하자 싶다가도 어느 때는 이 집의 가치가 얼마인가가 궁금해진다."
" 가능한 이질적인 것들의 침투를 막고 클린하고 쾌적함을 극대화한 공간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차라리 중환자실에 가깝다. 거주의 감각이 희미해진 우리 신체가 다시 거해야 집은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가? 오랜 정주의 지혜는 이제 낡았다. 어쩌면 지혜는 길 위에 흩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콩고물을 얻을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난희님의 깊은 내면의 성찰과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바로 보게 하는 통찰력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납니다.
집으로 기뻤고 집으로 탄식했던 순간들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우물 밖 꼬꼬즈에게 마음 포개는 격려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