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황(惚恍)하구나, 꽃이여!
꽃잎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시작된다
하염없이 가늘고 하염없이
단단한 그 강철의 존재가
은하수를
뚫고 들어간다
접촉도 없이 - 거기에서
올라간다 - 매달리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 -
멍 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 <그 장미The Rose>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과 수험생이었다. 흰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시험도구를 만지작거리는 과학자의 이미지가 그 당시의 10대들에게는 꽤 먹히던 시절이었다.(아닌가?...) 폼나게,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 이과생들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네 과목 중 두 과목을 선택해야 했는데, 화학과 생물을 선택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와 몇몇 고집 센 일당은 굳이 물리와 지구과학을 선택했다. 이건 순전히 화학 선생님과 생물 선생님 때문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재미있게 배웠을 수도 있었을 화학 시간을 오차 없이 계획된 아재개그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화학 선생님(담뱃갑에 그날 시전할 농담을 깨알같이 메모한 걸 목격한 이가 여럿이다), 말투도 행동도 얼굴도 심히 느물거리는 와중에 성격은 또 불같아서 '개**'로 불리던 생물 선생님. 우리 일당은 단호히 생물과 화학을 거부하고, 드물고도 어려운 길을 가기로 모의했다. 하지만 내가 물리와 지구과학을 선택한 이유 중 팔할은 지구과학 선생님이었다.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구과학(선생님)'은 까칠한 성격에 조각 같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밑도 끝도 없이 여고생들에게 어필하려던 여러 총각 선생님들과 달리, 우리의 ‘지구과학’은 그 외모를 지니고도(지녀서?) 한없이 도도했다. 때는 바야흐로 엄혹한 5공 말. 이제 막 부임한 우리의 ‘청년 지구과학'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시니컬하게 쏟아내며 아이들 입시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거다.(이게 허세란 걸 그때는 몰랐지;;) 아무튼 부적합하기 짝이 없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뒤얽힌 결과, 지구과학과를 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과학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구가 뭔지는 더더욱 모르면서.
규문에 드나드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올초 개강한 '지구의 역사와 생명의 다양성'이라는 과학강좌가 성황리에(!) 종강했다. 안팎으로 '전형적인 과학도'의 면모를 뿜으시는 고생물학자의 강의를 듣다가 문득, 내가 혹시 그때 지구과학과를 갔더라면 나도 지금 저런 어펙션을 지닌 과학도로 살고 있을까...라는 부질없는 상상을 잠깐. 그랬다면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의 규문에 이르지도 않았을 테고... 규문 공부방에 앉아 이런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까? 아무렴, 사람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그래도 결국 이 비슷한 삶을 살게 되었을 거라고 본다. 아무튼 과학은 내게 '이루지 못한 꿈'이랄까, 변변한 말 한마디 못 나누고 소식이 두절된 짝사랑의 그녀 같달까, 대충 그렇다. 강의를 들으며 간만에 가슴이 꿀렁꿀렁했다는 얘기다.
아득히 먼 그때, ’중생대‘라 불리는 시기의 얘기다. 중생대라 하면 대략 2억 5천만 년 전부터 6천 6백만 년까지의 시기를 이르고,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나뉜다. 이 정도는 모두 아실 만한 내용. 그런데, 이 중생대 말 무렵에 지구상에 처음으로 꽃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약 1억 년 전, 때는 백악기. 이전까지 공룡과 파충류, 침엽수와 양치식물로 뒤덮인 녹색의 지구가 알록달록한 색들로 장엄(莊嚴)되기 시작한 것이다!(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백악기 이전 출현설이 입증되고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현생인류가 출현한 때(30만 년 전 혹은 20만 년 전)보다 까마득히 머~언 옛날이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니, 상상 자체를 불허하는 장관이었으리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형상도 없고 명명할 수도 없는 도(道)의 작용을 두고 노자는 '홀황(황홀恍惚)하다'고 표현했는데, 지구가 알록달록한 꽃들로 뒤덮이기 시작한 이 순간이야말로 '황홀한' 도(道)의 현현(顯現)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대체 무슨 일이?
백악기 말, 비교적 큰 규모의 소행성이 지구를 강타했다. 이 충격으로 지구의 저 깊은 곳에서 용암이 분출하고 기후가 급변했다. 2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육상동물의 역사에서 주인공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는 공룡이 멸종할 정도로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는데(공룡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조류가 포유류보다 두 배 정도 많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공룡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음... 역시 공룡은 대단해.), 천명이라 해야 할지, 이 와중에도 포유류의 일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숲속의 부드러운 나뭇잎을 뜯어 먹으며 연명하던 이들 포유류에게 풍부한 영양공급원이 되어 준 것은 바로 현화식물(顯花植物)이었다.
자연학적 차원에서, 꽃이란 무엇인가. 속씨식물(종자식물)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은 한마디로 생식기관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씨방, 말 그대로 씨앗이 되기를 기다리는 밑씨가 들어 있는 주머니다. 수술이 만든 꽃가루가 밑씨에 도달해서 수정이 이루어지면 꽃은 시들고 씨방은 자라 열매가 된다. 속씨식물의 씨와 열매, 이게 포유류의 주 식량원이 되었고, 이처럼 자신을 이동하는 포유류의 먹이로 내어줌으로써 속씨식물은 발 없이도 천리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포유류와 꽃은 공생을 통해 지구의 '포스트 공룡시대'를 열어나갔다. 이 상황을 포유류가 의도했겠는가, 속씨식물이 계획했겠는가. 지속하는 시간이 다를 뿐,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또 다른 무언가가 생겨난다. 그렇게 모든 것은 생겨나고, 지속하다가, 마침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게 전부다. 유한한 지상에서 펼쳐지는 무한의 풍경. 하루, 한 달이 아니라 만 년, 억 년 단위를 사고하는 지질학자나 진화학자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여 다윈도 이렇게 말했던 것.
"두께가 수천, 수백 미터에 이르도록 퇴적된 진흙, 모래, 자갈층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의 강이나 해변이 그러한 엄청난 물질을 깎아내거나 만들어냈을 리 없다고 외치고픈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급류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음을 들으면서 이 땅을 누볐을 온갖 동물들을 떠올리면, 그리고 그 모든 세월 동안 이 돌멩이들을 밤낮으로 덜걱거리면서 제 갈 길로 흘러갔을 것을 생각하면, 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어떤 산이, 어떤 대륙이 이러한 마모를 견뎌낼 수 있을까?"(<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과학 강의 말미에 선생님께 질문을 드렸다. 삼엽충 같은 화석을 늘 보고 있으면 인간에 대해 다르게 보일 것 같은데 어떠시냐고. 얼마간은 예상했던, 또 얼마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과연 과학자답다. 모름지기 과학자라면 일개 종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는 법이지, 암만. 니체도 숲의 개미에 비유하여 단언하지 않았던가. 개미의 소멸이 숲의 소멸이 아니듯 인류의 몰락이 지구의 몰락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말해선 안 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개발한 원자탄이 대량 살상 무기로 쓰이는 것을 목도한 오펜하이머가 "트루먼 대통령이 나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말 자신이 무구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이내 후회했고, "물리학자들이 지어온 죄"를 참회하면서 상황을 돌이키고자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과학기술의 ‘양면성’ 운운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 종’을 초월하는 모든 것도, 그것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인간의(나아가 모든 생명의) 가치들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녹색평론>55호에 실린 빌 조이,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를 일독하시길 권한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라.) 결국 문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다.
공룡의 멸종... 포유류의 번성... 꽃의 출현으로 생각이 이어지다가, 문득 예전에 읽은 김종철 선생님의 글 한 편이 떠올랐다. 이시무레 미치코에 관한 평론인데, 여기에 꽃과 포유류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강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이 그냥 단순히 때가 되어 산란하는 게 아니라고 해요. 어떤 물고기들은 꼭 진달래가 피는 것을 보고 산란을 한답니다. 물론 생리적으로 그 시기 봄철에 산란하도록 돼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실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물고기도 진달래가 피기를 기다리고, 진달래로 온 산천이 붉게 물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게 틀림없어요. 적어도 시인, 작가, 예술가라면 세상만물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껴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번역한 글이 하나 있는데, 루이스 멈포드라는 문명비평가의 글이에요. 거기에 보면, 지구상의 장구한 생물진화과정에서 파충류 다음에 포유동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포유동물이 나타날 때에 동시에 지구상에 꽃이 폭발적으로 출현했다는 설명이 있어요. 저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봐요. 우리가 꽃을 보면 자연히 기쁨을 느끼고, 뭔가 생명이 고양되는 느낌을 갖는 게 일반적인데, 그것은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기본적으로 포유동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얘기죠. 이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꽃을 없애고, 식물을 훼손하고, 나아가서 모든 생물의 기초적인 서식지인 습지와 강을 파괴한다는 것은 진화생물로서의 우리들 자신의 존속을 심히 위태롭게 하는 굉장히 어리석은 행위라는 거죠.
근대의 논리를 넘어가는 진정으로 새로운 문학을 꿈꾸는 시인, 작가라면 결국 이러한 진화생물로서의 인간의 위상, 즉 만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이 살아있어야 하겠죠. 그렇게 되면 4대강의 파괴는 바로 인간다운 삶, 인간 영혼의 붕괴라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김종철,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
뭉클하지 아니한가.(베란다 화분마다 꽃이 한가득인데 그걸 굳이 사진에 담아 보고 또 보는 우리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상의 존재들은 그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것이 저것과, 하나가 또 다른 하나와 조응하고 공명한다. 지금 내가 있는 것은 중생대에 출현한 꽃 덕분이다, 지구에 충돌한 소행성 덕분이다, 그 난국에서 살아남은 쥐들(당시 포유류는 거의 쥐 같은 설치류였다고;;) 덕분이다.... 그 모든 것들 덕분이다! 무수한 돌출적 사건들과 그 과정에서 생멸하는 만물(萬物) 없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주와 감응하는 법을 터득한 만물의 기억 없이는, 인간도 없다. 이 사실을 곰곰 생각하노라면 허무해지기는커녕 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 마구마구 샘솟는 걸 느끼게 된다. 아,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이, 백 년에 한 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바다거북이의 목이 망망대해에서 부유하는 나무조각의 구멍에 딱 들어맞는 일보다도 더 어렵다 하신 것이 아닐지.
과학은 우리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여러 가지 기호와 실증적 사실들로 알려준다. 과학 덕분에 인간은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진다. 조금은 덜 경거망동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자유와 공존를 향한 시도들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또한 "인간에게는 인간이 신"(스피노자)일 수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인간이 자연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천지의 이치에 감응하고 부합하려 노력하는 한 천지와 짝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에 대한 이 두 시선을 동시에 지닌 혜안(慧眼)의 존재를 '붓다'라 이름할 수 있을 터. 모든 것이 공(空)임을 깨달은 붓다는 평생토록 병든 중생을 위해 법을 설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까봐 두렵다"던 토마스 머튼은 그 사실을 잊지 않은 채 폭력과 전쟁에 맞섰고, 차별받는 흑인 및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연대했다. 아마, 혜안의 예술 또한 가능할 것이다. "좋은 문학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마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더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인간정신이 있고, 아무리 할퀴고 짓밟아도 끝끝내 소멸될 수 없는 근원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문학과 예술의 몫입니다."(김종철, 위의 글)
지난 12월, 내셔널지오그래피 채널의 고래와 코끼리 다큐에 푹 빠져서, 내생(來生)에는 그들로 태어나도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경탄케 할 뿐 상처를 주지는 못한다. 고민을 나눌 수도, 생각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 코끼리는 그저 그곳에 있다. 부디 오래오래 그래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다만 아무래도 나는, 다음 세상에도 인간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거듭하여 인간세상을 윤회하면서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상처주고 상처받으면서, 즐거워하고 슬퍼하면서. 여전히 편협할 테고, 여전히 세상에 대해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고 있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거듭하면서 즐겁게 배우고, 잘못을 고치려 노력하고, 좌절하고, 그러다 또 힘을 내서 배우고 싶다. 그런데... 인간 종이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으려나?(음.. 이것이 문제로군)
* 잡문 연재를 시작하며.
이번 달부터 규문톡톡에 잡문을 연재하기로 했다. 루쉰의 잡문에 대한 오마쥬...이고 싶지만, 언감생심. 흉내만이라도 낼 수 있을까 싶다. 나의 오십은 지천명이 아니라 미궁이다. 새롭게 모르기 시작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몰.라.지.고. 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역시, 자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최대한 진솔해지는 수밖에 없겠지, 루쉰을 등불 삼아. 앞으로 연재될 잡문은 미처 말하지 못한 내 생각의 편린들 혹은 잔재들이 될 듯하다. 고작 그딴 걸 막 실어도 되나 싶지만, 뭐, 양해해주시리라 믿고. 여러분도 쓰십시오, 이딴 글이라도.^^
** 코너명 '숏 컷Short cuts'에 대해.
1995년에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 컷>을 먼저 보았고(영화가 발표된 것은 1993년), 영화를 본 후에야 원작자가 레이먼드 카버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보다 조금 늦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카버)의 광팬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어쨌든, 패치워크처럼 조각난 이야기들이 하나의 초상화를 그려가는 알트만의 <숏 컷>을 보고 나서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내 그 제목을 꼭 써먹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2022년, 규문톡톡일 줄이야.
제목을 도용한 마당에, 약간의 양심으로 카버의 말을 덧붙여둔다. 레이먼드 카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업비밀'을 알려주겠다며 했다는 말.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낸 다음, 매일 열심히 써라." 그래, 일단은 살아남아야지! 조용한 곳? 시끄러워도 괜찮다. 문제는, 매일 열심히 쓸 수 있느냐 하는 건데... 그 비스무리하게라도 해볼까 한다. 연재는 한 달에 한 번이 될 수도 있고 두 번이 될 수도 있다. 주제? 없다. 교훈? 설마. 재미?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 그렇다면 정보라도? 요거는 좀 쓸 만한 것이 있을지도.
아하 재밌다. 고작 이딴걸 읽고 재밌다니. 게다가 뭔가 뭉클하기도 하다니. 참 어이가 없네요. 샘도 저도 글구 공부하는 우리들 모두 좀 더 자유로워지길.
저딴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왠지 글이 쓰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주제도 교훈도 없는 글이라도 읽고 나서 쓰고 싶어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글을 쓰고 난 뒤 채운 샘의 표정이 궁금합니다. 한달에 한 번 두 번? 언제든 써서 올려 만 주십시오!
그러게요. 모든 것들 덕에 근근이 살아가는, 태어난 지 고작 20-30만년 밖에 안된 애송이 인간이 그야말로 고인물 of 고인물들로 가득 찬 우주의 이 모든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야말로 무식함일 수밖에 없겠네요. 꽃의 아름다움은 인간만이 느낄거라 생각한 저의 오만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물고기들도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니 정말 마음이 꿀렁꿀렁!하는데요. (분명 질색팔색 하시겠지만) 스승님 올봄에는 꽃놀이 함 갑시다!
p.s. 재미지다, 재미지다! 이런 잡스러움을 가장한 유익함과 재미, 괌동, (게다가 필자님의 소소한tmi)까지 선사하는 요런 글 완전 웰컴입니다. 앞으로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이번 과학 특강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나기까지 약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 더 길게는 빅뱅 이후 대략 140억 년의 시간을 되돌아본 시간이었어요. 불현듯 부모님에 대한 감사^^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 우주 만물까지 모든 것에 감사가 넘치기도 했죠. 만물이 존재하고 이생에서 마주하기까지 정말 희귀하고 경이로운 일이었구나. 태초 돌의 원소로부터 태어나 다시 돌아갈 죽기 마련인 이 운명에 대해서도 뭔지 모를 기쁨과 감사를 느꼈어요. 우주 만물이 상관관계 속에서 생과 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겸허함과 책임감도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감사하며 이 삶을 충실히 살자는 상투적이지만 매일 까먹는 말을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주어진 일, 모든 관계, 읽고 쓰기 모든 배움도 감사히! 열심히!! ㅎㅎ)
오우 재밌어요. 연재 소개글에 '이딴 글이라도' 라는 부분에서 샘의 자의식이 살짝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아요.
정말 글이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입니다. 같은 강의를 듣고 이런 생각을..., 앞으로 종종 생각을 나눠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대지의 상상력을 읽으면서 위의 인용 글이 좋았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 과학과 우리의 삶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것,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어 살고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네요. 넘 재밌게 읽고 갑니다^^
(순간 황홀로 읽었는데... 홀황(惚滉)이네요. )
'이딴 글이라도'라고 하시니 글을 발로 쓰던 것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에겐 어쩌시라는 건지! 참 할 말을 잃게 만드십니다. 어찌 됐든 글은 재미 있으면서 읽기 쉽게, 문학적이고 정보도 얻을 수 있게 이렇게 써야 하는 구나~ 라고 (우상화 한다는 말을 들을까 싶어 감탄이란 말을 자제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몇 번을 윤회하더라도 인간 종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이 경이로웠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무엇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샘 글을 읽고나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또 다시 인간으로 환생해 그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해 치열하게 함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ㅎㅎㅎ
아 왜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 지하철 한 복판에서..감동… 저도 비록 다시 요 모양 요 꼴일지라도 인간으로 태어나 다시 한번 상처주고 상처 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채운 샘께서 이번 글을 통해 한 획을 그어주시는 듯하네요. 편안하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 하면서... 아~~~주 좋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