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혼자 집에 있어”, “혼자 주말을 보내고 있어”라며 ‘혼자’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혼자’라고 말할 때는 다른 존재들과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를 전제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혼자’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정말 ‘혼자’일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공기와 접촉하고 있으며, 낮에는 태양빛을, 밤에는 달빛을 받고, 계절의 기운에 영향을 받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과 벽과 벽 사이를 기는 징그러운 벌레들, 방 한 켠 쌓여있는 책들, 심지어 그 위를 덮고 있는 먼지들과도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지어 죽어서 몸이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다른 존재와 더불어 있다. 사실상 생(生)에서 ‘혼자’ 존재하는 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혼자’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느끼는 걸까? ‘혼자’라는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우리는 주로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공간에 따로 있을 때 ‘혼자’라고 인식한다. 공간의 분리는 나와 연결된 존재들을 내 눈 앞에서 ‘사라지도록’ 만들어준다. 이 때문에 공간의 ‘장벽’은 우리에게 연결성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혜화 거리에서, 출퇴근 시간에 터질 것 같은 지하철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혼자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내 삶이 이들과 무관하다는 느낌 속에서, 아니면 스스로 허무하거나 슬프거나 화나는 감정 속에 빠져있을 때 그렇다. 생각과 감정은 다른 사람과 연결을 끊고, 우리가 여러 존재들 속에 있어도 ‘혼자’라고 인지하게 한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분리가 됐든, 정서적으로 분리가 됐든 연결성을 감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혼자’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착각이다. 실제로 우리는 기억을 통해 여러 시공간의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고, 당장 오늘 하루만 해도 사람들과 주고받은 언어,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로 사람들과 얽혀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모두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과제를 하는 것도 공부하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홀로 있을 때 삼간다’라는 구절의 ‘홀로’를 나는 이런 의미로 파악한다. ‘홀로 있음(獨)’은 언제나 관계 속에 있지만 연결성을 망각하고 있는 상태이다.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결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도 홀로 있음(獨)의 상태일 것이고, 지구 곳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채 무관심하게 있는 것도 홀로 있음(獨)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이 세계의 연결성을 망각하거나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무감각한 상태가 바로 홀로 있음(獨)인 것이다.
그러면 신(愼)은 무엇일까? 신(愼)에는 삼가다는 뜻 외에도 근심하다, 두려워하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왜 ‘홀로 있음(獨)’의 상태를 근심하고, 두려워해야 하는가? 만약 나의 먹기가 비인간 존재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는다면, 무절제하게 탐식하면서 비인간 존재들의 아픔에 기여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된다. 또 나의 소비가 멀리 떨어진 나라의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모른다면, 연결에 대한 이 무지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보기, 말하기, 생각하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보고, 말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 고립의 상태를 근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愼)을 ‘홀로 있음’에 대한 경계, 즉 연결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홀로 있음(獨)의 상태는 개인의 의지로, 비장한 각오로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자체가 비인간 존재들의 죽음과 전쟁의 참상을 은폐하고, 불편한 타자들의 삶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치워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복잡한 연결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자극이 도처에 있다. 풍요로운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내게는, 이 자극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수행, 나와 세계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배우고 익히려는 작업이 ‘신독’(愼獨)이다.
신독(愼獨)이란 말은 멋있으면서도 실천이 쉽지 않아서 참~ 멀게 느껴지곤 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홀로 있음(獨)’을 너무 단편적이게 봤기 때문에 신독을 하기 어려운 일로 쉽게 치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나 자신의 공부 혹은 수행을 위해 혼자 있을 때 몸/마음가짐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읽었었는데,
‘홀로 있음’을 “언제나 관계 속에 있지만 연결성을 망각하고 있는 상태”로 읽는다면 신독이란 단순히 나라는 주체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세계의 일이 될 수 있는 것이겠군요.
수많은 연결성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독 하는 자세가 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난희
2024-03-13 01:31
'홀로서기' ,옛날 아주 옛날에 이런 제목의 시가 유행했고 제 주변에 그 시를 좋아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홀로서기라니, 돌아보니 참 철없던 시절의 설익은 낭만기가 줄줄 흐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따로 또 같이' 이 말도 홀로서기의 변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작아도 아무튼 따로 떨어질 수 있는 그 무엇이 홀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 생각을 넘어서기가 참 어렵죠. 사유의 출발점에 주체를 두지 않기가 말이죠. 저는 ‘신독’(愼獨)의 신(愼)을 이런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샘의 말을 얼추 이해했는지, 물어볼게요.
박규창
2024-03-13 19:42
'홀로 있음'이란 감각에 대한 경계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플랫폼 노동을 비롯해서 자본주의는 점점 더 우리를 '개인화'할 것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흐름에 곧이곧대로 휩쓸릴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홀로 있음'을 적극적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연결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으로서의 '홀로 있음'이기도 하면서, 자기 중심과 연관된 의미로서의 '홀로 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면..? 뭔가 연결될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
미영
2024-03-21 12:20
나자신의 절제된 마음가짐이라 생각했는데^^; 이인샘의 글로 신독(愼獨)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네요.
"나와 이 세계의 연결성을 망각하거나 무감각한 상태"는 사실상 무지의 상태인데.. 마음을 잠시라도 놓치면 일상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愼獨, 세계와의 연결된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패치워크?) 나자신을 이해하고 돌이켜보려는 적극적인 마음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과정 속에서 불안정한 존재자체를 긍정하는 힘도 생길 것 같고요. 잘 읽었습니다~!
신독(愼獨)이란 말은 멋있으면서도 실천이 쉽지 않아서 참~ 멀게 느껴지곤 했는데요.
이 글을 읽으면서 ‘홀로 있음(獨)’을 너무 단편적이게 봤기 때문에 신독을 하기 어려운 일로 쉽게 치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나 자신의 공부 혹은 수행을 위해 혼자 있을 때 몸/마음가짐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읽었었는데,
‘홀로 있음’을 “언제나 관계 속에 있지만 연결성을 망각하고 있는 상태”로 읽는다면 신독이란 단순히 나라는 주체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세계의 일이 될 수 있는 것이겠군요.
수많은 연결성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독 하는 자세가 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홀로서기' ,옛날 아주 옛날에 이런 제목의 시가 유행했고 제 주변에 그 시를 좋아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홀로서기라니, 돌아보니 참 철없던 시절의 설익은 낭만기가 줄줄 흐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따로 또 같이' 이 말도 홀로서기의 변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작아도 아무튼 따로 떨어질 수 있는 그 무엇이 홀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 생각을 넘어서기가 참 어렵죠. 사유의 출발점에 주체를 두지 않기가 말이죠. 저는 ‘신독’(愼獨)의 신(愼)을 이런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샘의 말을 얼추 이해했는지, 물어볼게요.
'홀로 있음'이란 감각에 대한 경계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플랫폼 노동을 비롯해서 자본주의는 점점 더 우리를 '개인화'할 것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흐름에 곧이곧대로 휩쓸릴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홀로 있음'을 적극적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연결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으로서의 '홀로 있음'이기도 하면서, 자기 중심과 연관된 의미로서의 '홀로 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면..? 뭔가 연결될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
나자신의 절제된 마음가짐이라 생각했는데^^; 이인샘의 글로 신독(愼獨)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네요.
"나와 이 세계의 연결성을 망각하거나 무감각한 상태"는 사실상 무지의 상태인데.. 마음을 잠시라도 놓치면 일상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愼獨, 세계와의 연결된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패치워크?) 나자신을 이해하고 돌이켜보려는 적극적인 마음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과정 속에서 불안정한 존재자체를 긍정하는 힘도 생길 것 같고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