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임을 믿지 못한다면, ‘보라!’
글 : 이호정(절차탁마Q)
1. 단테가 만난 두려움과 고통에 대한 의문
단테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자신이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에 처했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단테 알리기에리의 Comedia』를 시작하게 한 첫 노랫말이다. 올바른 길을 잃음으로부터 이 글이 시작될 필요가 생겨난다. 대체 그건 단테에게 어떤 일이었을까? 이 글이 추방이라는 현실적 좌절을 겪는 와중에도 10여 년 동안이나 쓰여질 수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 글을 시작하게 한 저 ‘길 잃음’은 그에게 무척 강력한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에게 있어 올바른 길이란 신의 길, 하느님의 의지 안에 거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단테만 잃은 게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2-13세기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을 보호하고, 위로하고, 인간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던 신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종교를 빌미로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십자군 전쟁이 이어지고, 나약한 인간에겐 너무나 가혹한 흑사병이 곳곳에 들이닥쳤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신을 향한 믿음은 과연 무엇을 보장해줄 수 있었을까? 신과의 연결끈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단테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피렌체 정치에 성심을 다했지만 그 노력이 인간의 교활함과 탐욕 등에 의해 물거품이 되는 걸 보았을 때, 그때에도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신의 길을 걷는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 의심하게 될 수록 단테를 포함한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이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신이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겐 아주 익숙한 그 막막함과 불안 말이다.
단테는 자신이 올바른 길을 잃었음을 감지했다. 그런 단테 앞엔 어두운 숲이 펼쳐졌다. 믿음이 흔들리는 자리에 들어선 건 더욱 가혹하고 완강한 거친 숲이었다. 누구 하나 기댈 데가 없고, 소리쳐 도움을 구할 곳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모르는 채 두려움만 피어나는 곳. 그곳에서 헤매던 단테 앞에 아주 가볍고 날랜 표범 한 마리가 화려한 점박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타나 그의 길을 가로막고 선다. 다른 쪽에서는 머리를 바짝 쳐들고 허기져 광폭해진 입을 벌린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 그를 덮치기 직전이다. 거기에 말라빠진 몰골을 하고 역시 허기를 채우려는 갈망을 그득 품은 암늑대 한 마리가 가세한다. 어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극한의 난관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여기서 단테의 글을 읽는 나는 주춤하게 된다. 단테가 형상화한 이 세 마리의 무시무시한 짐승은 나에게 결코 낯선 것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어지는 지옥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게 될 인간의 욕망이다. 먼저, 가볍고 날래며 화려한 무늬를 가진 표범은 성적으로 음란한 욕망이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그것은 인간을 들뜨게 하면서 음란과 방탕을 부추긴다. 머리를 바짝 쳐든 사자는 교만의 형상화다. 자기를 뽐내고 싶어하고 우월함을 증명하려 하는 힘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말라빠진 몰골에 허기를 채우려는 갈망의 눈이 번뜩이는 암늑대는 탐욕이다. 탐욕은 나머지 두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에 해당하는 성질을 나타내는데, 먹어도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갈망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인간인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매일 느끼며 살아가는 내 안의 힘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두려워하나? 만약 나의 관점에서 이 장면을 연출한다면, 나는 저들을 말티즈, 비숑, 퍼그 같은 친구들로 캐스팅할 것 같다. 나는 음란, 교만,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진해서 다가가 손을 내밀 정도다. 탐욕을 예로 들면, 나는 공부하다 지루해지면 인터넷으로 재밌는 것들을 보곤 하는데 그것들은 참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다보니 바로 어제 5분만 보려고 했다가 1시간 넘게 보고서 후회했으면서도 거리두기 없이 또 거기에 손을 뻗는다.(조금 망설이긴 하지만 그 시간이 1분도 안 된다는 점에서 그걸 두려워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처럼 나는 그 욕망들에 큰 경계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테가 이들을 무시무시하고 포악한 짐승으로 그려낸 점과 이들을 보며 그토록 두려움에 떠는 점이 나에게는 특이하게 다가왔다. 음란, 교만, 탐욕이 그렇게나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단테는 이것들이 두렵기 때문에 이 숲을 벗어나고자 간청하지만, 나는 그리 두렵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이 숲에 계속 머물고자 할 것이다. 단테는 그 짐승들이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가로막아 죽이기까지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그 짐승들에 그렇게 큰 경계심이 없다. 단테는 그들의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걸까? 무엇이 그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까? 단테에 따르면 나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점에서 올바른 길을 잃은 자다. 길 잃은 자가 만나게 되는 저 짐승들이 나에게 왜 고통을 준다는 걸까? 혹시 나도 저들에게 갈갈이 물어뜯기고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그 고통은 대체 어떤 걸까?
2. 나태 :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은 자들의 고통
어두운 숲에는 그 세 마리의 짐승뿐 아니라 탐욕을 상징하는 암늑대와 비슷한 짐승이 넘쳐난다고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단테가 두려워 한 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본성이 사악하고 황폐하여 탐욕을 채워본 적이 없으며, 먹으면 먹을수록 더 허기를” 느끼게 하는 여러 욕망들이며(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민음사, 1곡 97-99), 그것들은 곧 지옥의 수인들이 보여주는 식탐, 나태, 분노 등과 같이 나의 삶에 자주 출현하고, 어느 정도 한에서 내가 쉽게 허용하는(그러나 상황에 따라 그 정도를 넘어도 허용해버리는) 것들이다. 나에게 익숙한 욕망들이 지옥의 소재로 쓰여지고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단테에 의하면 그 익숙한 것들에 노출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지옥으로 물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대체 그게 왜, 어떤 지옥일까.
나도 그걸 알고 싶어서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문을 들어서는 단테의 뒤꽁무니에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랬더니 지옥의 입구에, 아직 지옥 땅을 밟기도 전에, 지옥으로부터도 거부당한 자들, 그 비참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이 지옥 거주권조차 가질 수 없는 이유는 혹여나 그들을 본 지옥의 자들이 자기보다 못한 놈이 있다며 우쭐해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나 참, 지옥에 있는 자들만도 못한 이들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악하고 모자란 품성을 지닌 이들인가 하고 봤더니,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악의 끝판왕이라거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자들이 아니라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들은 단지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았을 뿐이고,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은 채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자들이었다.(같은 책, 3곡 34-39) 오, 이 별 죄 없는 멀쩡한 사람들이 왜 여기 있지?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한 단테의 뜻에 의심이 솟아나 다른 구절로 옮겨갈까 하던 찰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문답을 주고받는다.
“선생님! 얼마나 고통을 받기에 / 이토록 처절하게 울부짖는지요?" / 그가 대답했다. “간단히 말해주지. // 이들에겐 죽음의 희망조차 없다. / 앞을 볼 수 없는 생활이 너무나 절망스러워 / 언제나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민음사, 3곡 43-48)
세상에 큰 뜻을 펼친다든가, 세상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든가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삶에만 충실한 게 뭐가 그리 큰 죄라고 죽어서도 죽음의 희망조차 없이 울부짖게 된다는 거지? 억울함과 반발심이 올라왔다. 거기에 더해 의심 또한 더욱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구절에 머무르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이 평범해보이는 무리에 내 모습이 포개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 그런 상태다. 딱히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좋음(善)을 실현하겠다는 포부 또한 없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없다기보다는 좀 희미하고 나도 내가 뭘 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는 상태랄까.(없는 게 맞는 거 같다.) 한때 읽고 쓰기를 통해 삶을 바꾸는 수행을 하고자 했었다. 그걸 통해 과연 정말 선을 실현하고자 했는지는 점검해보아야겠지만, 바뀌지 않는 자신을 책망하고 책망받는 게 어느 순간부터 너무 괴로워져서 그만두었다. 그 이후로도 읽고 쓰는 게 다른 어떤 일보다 제일 좋긴 하지만, 이걸로 뭘 할 수 있고 뭘 하고 싶은지는 아직 내게 없다.
단테가 말하는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은’ 자들이란, 지옥에 있는 자들처럼 우리를 사로잡는 욕망과 결탁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요, 연옥이나 천국에 있는 자들처럼 선이라고 이해되는 바를 어떻게든 추구해보려고 애쓰는 것도 아닌 자들이다. 그럼 이들은 아무런 욕망도 없는 무욕의 상태인 걸까? 그럴리가. 욕망은 인간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이 자들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악을 행하지도 선을 행하지도 않는 것을 원하는 나태함에 빠져 있는 것이며, 단지 그날그날의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다. 나는 여기에 세속적 욕망을 추구할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뚜렷한 인생의 비전을 지닌 것도 아닌 상태의 나 자신을 포갠다. 그렇게 포개진 ‘우리’에게 베르길리우스는 말한다. “(저들은) 앞을 볼 수 없는 생활이 너무나 절망스러워 언제나 다른 운명만을 부러워하지.” 우리에겐 가고자 하는 곳이 없기에 눈앞이 캄캄하다. 눈앞이 캄캄해서 답답하니 옆으로 잠깐 눈을 돌려보면 다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길이든 저마다 색이 다른 길들을 열심히 일구어 가는 게 보인다. 그래서 내 앞에도 있을까 하고 다시 보면 여전히 캄캄하다.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상황이다.
나는 이렇게 나태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그렇게 큰 고통으로 인식해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불편하고, 한번씩 불안한 정도라 느꼈다. 뭔가를 찾아가는 중이니까 이런 때가 금방 지나가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이 짧은 인생에 꼭 그리 대단한 뜻이 있어야 하나 라며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이 캄캄한 절망이 만약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더 나이가 들어서도, 몇 십 년을 더 살면서도, 죽기 직전에도 ‘나는 뭘 원하나.. 내 삶은 뭔가..’라고만 되뇌고 있다면 어떨까. 『신곡』은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도 똑바로 보여준다.
정녕 살아 있지도 않았던 그들은 / 벌거벗은 채 거대한 파리와 / 벌 떼에게 무참히도 찔리고 있었다. // 찔린 얼굴에서는 피가 눈물과 / 뒤섞여 흘러내렸고, 다리에서는 / 구더기들이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
(같은 책, 3곡 64-69)
단테는 이 자들이 살면서도 살아 있지 않았던 자들이라 말한다. 인생살이에 있어 방향 없이 사는 건 죽은 것과 다름 없다고 말이다. 왜?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존귀하지 않은가? 방향 없이 사는 게, 좀 캄캄하게 사는 게 왜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인가? 단테는 그들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눈앞이 캄캄한 자들의 ‘고통’에 주목한다.
나태한 자들이 살면서 누렸던 것은 단지 자신이 무얼 먹을지, 어디에서 살지, 무엇을 가질지, 어떻게 먹고살지와 같이 자신의 육신을 보전하는 일뿐이었다. 영혼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은 지옥에 있는 자들처럼 배가 갈라진다든가 머리를 물어뜯긴다든가 하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 건 아니지만, 거대한 파리와 벌 떼에 의해 한 시도 쉴 틈 없이 소음 공격과 침 세례를 받는다. 귀가 계속 앵앵거려서 다른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얼굴이 따끔따끔 한 데다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외에는 도무지 뭘 인식할 수가 없다. 상체가 그런가 하면 하체에서는 구더기들이 하염없이 피를 빨아 먹고 있어서 온 신경이 상체로 쏠렸다 하체로 쏠렸다 난리부르스다. 그러니 이들에겐 자기 육신을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고통 외에 다른 정보나 다른 세계는 없다. 이들은 온 신경이 시달리고 방해받느라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그것이 이 나태한 자들이 받는 고통이다. 전전긍긍하고 안달복달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출구는 없는 고통.
3.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고통을 ‘보기(見)’
『신곡 지옥편』은 이처럼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서 만난 무시무시한 짐승에게 물어뜯긴 자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가 허기진 욕망에 사로잡힐 때 어떤 괴로움이 우리에게 몰아닥치는지를 선연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본격적인 지옥에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지옥에 있는 자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라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말고 물으라 말한다. 이렇게 단테가 고통을 보는 여행을 하게 된 것은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인데, 그게 바로 단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선 그의 뮤즈, 베아트리체다. 단테가 흠모했던 그 여인은 길 잃은 단테를 발견하고는 그를 구하기 위해 천국에서 베르길리우스에게로 내려가 눈물로 호소한다. 단테와 함께 지옥으로 가서 그에게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주라고 말이다.
나는 기도했어요. 꿈을 통해, 또 다른 수단으로, / 그에게 영감이 가도록. 하지만 그를 불러 보려는 / 노력이 허망하게도 그는 정말 무심하기만 했어요. // 그는 심연으로 빠져 들었고 마침내는 그에게 /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밖에는 / 그의 영혼을 구할 다른 길이 없었지요.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연옥편』, 민음사, 30곡 133-138)
베아트리체는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는 단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직접 가거나, 그를 천국으로 바로 이끌지 않는다. 그녀에겐 단테가 꼭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오르는 필연성이 필요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는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만이 그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가 내린 이 처방은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처방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 순례자 단테를 따라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부터 만나게 되지 않는가. 시인은 왜 이 방법만이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보았을까?
지옥의 죄인들을 보는 과정은 단순히 감각적 행위라고만 할 수 없다. 순례자는 길을 걸어가며 감각하게 되는 것들에 끊임없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의심은 천국에 가서까지도 이어질 정도로 순례의 중요한 동반자다. 『신곡』을 읽는 우리에게도 그런 의심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위에서 내가 의아해했던 것처럼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산 자들이 왜 지옥에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건지와 같은 궁금증 말이다. 의심이 일어나면 순례자는 베르길리우스 또는 저승에 있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순례자가 용기가 없어 질문을 꺼내지 못할 때에는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나 베아트리체가 알아차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준다. 그렇게 해서 순례자가 묻는 것은 대부분 두 가지다. 저승(지옥/연옥/천국)에 있는 당신은 누구이며, 당신은 어떤 연유로 여기에 있고 이 벌을 받고 있는지가 그것이다.
단테의 저승에 초대된 자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거나 전설 속 인물로, 뚜렷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 구체적 인물이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욕망으로,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 ‘여기’에서 이 ‘벌’을 받고 있는지는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이며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한 물음이다. 지옥의 세번째 고리에서 탐식한 자들은 더럽고 눅눅한 구정물 비를 맞으며 케르베로스에게 할큄을 당하고 조각조각 찢어발김 당한다. 이는 우리가 음식을 계속 탐하는 것이 이처럼 몸에 구정물과 같은 똥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일이며, 자신이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이 음식에 먹히고 있는 중임을 드러낸다. 또한 탐식한 자인 치아코라는 인물이 지옥에 있다는 건 그의 행적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것을 알린다. 똑같이 탐식에 빠졌던 포레세 도나티는 그의 행적에 뉘우침 또는 대도와 같이 고통에서 벗어날 여지가 있었기에 연옥에서 정화의 벌을 받고 있다.
이처럼 의심을 통해 길 잃은 자들의 고통을 알아가는 여정은 감각적 행위인 동시에 지적 행위다. 죽은 자들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이해해가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어떤 괴로움에 빠트리게 하는지 알아가고, 납득하거나, 질문을 가지게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단테는 자신을 포함하여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없는 독자들이 이 막막하고 불안한 삶을 걸어나갈 방법으로 ‘보기(見)’라는 지적 행위를 하길 바랐다. 그 방법만이 탐욕을 채우려는 성직자 같은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맹목적인 신앙에 빠졌다가 신에게 실망하고 신을 저주하게 되는 우매함에서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고, 또한 신이 없는 세계에서도 결국엔 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경우는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신곡』을 보며 방향 없이 사는 게 어떤 고통인지를 알게 될수록 그 고통을 벗어나 환희의 산에 오른다는 게 어떤 건지가 궁금해진다.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방향은 여전히 끌리지 않고, 그보다는 우리가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하다. 어쩌면 ‘보기’의 행위를 지속해나가는 것이 그 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만, 음란, 탐욕이 세 가지 동물(표범, 늑대, 사자)로 등장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아차! 하면 허용하기 쉬운 이 욕망들이 우리를 물어뜯고 있다는 게 공감이 됩니다.
그리고 ‘나태 지옥‘도 흥미롭습니다. 지옥으로부터도 거부당한 자들이라니…!
나는 누구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떤 고통을 불러오는지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집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나태함’을 경계해야겠네요!
호정샘~~ 이 글을 읽으면서 샘이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배움의 기쁨으로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망받는 게 어느 순간부터 너무 괴로워져서 그만두었던' 읽고 쓰는 일을 다시 시작한 것도 박수 쳐주고 싶고, 예전보다 글이 훨씬 가볍고 풍부해졌네요.😊👍
교만, 음란, 탐욕은 어느 정도 경계를 하게 되는데(물론 그렇더라도 금방 물들지요.),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은 나태는 세속적인 욕망도 없어서 뭔가 깨닫거나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더 넘어가기 어려운 지점일 것 같아요. 이 나태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고통일텐데, 이걸 잘 봐야겠습니다. 글 재미있게 잘 읽었고 다음에 쓰게 될 글도 기대됩니다.😉
호정샘의 섬세한 질문과 그 질문을 따라가며 답을 내는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었어요. 아, 글은 이렇게 쓰면 되는구나, 한 수 배웠습니다. 샘들과 신곡 순례를 한 시간이 벌써 그리워지네요. 같이 또 무슨 공부로 만나겠지요. 이 길은 귀한 길이라 친구도 귀하답니다.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방향은 여전히 끌리지 않고, 그보다는 우리가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하다."
이 궁금증을 의지처로 삼을 수만 있다면 무시무시한 저승 여행을 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보기'를 위한 여행 혹은 지옥을 여행하게 만드는 보기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읽으니까 또 다른 느낌인데요. 좋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