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놓고 보면 <도덕경>은 난감하기가 그지없다. 통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렵고,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건지 감이 안 잡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책이 어디 한 둘이랴. 그런 난해함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곤란함은, 맘먹고 책을 펴고 앉은 사람 면전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데 있다. ‘배움을 끊어야 근심이 없다(絶學無憂)’든가,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이 최고’라든가, 심지어는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言者不知)’라는 구절들을 마주하면 툭툭 걸린다. 다른 구절들처럼 ‘이건가 저건가 잘 모르겠다~’하고 쉽게 넘어가지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도덕경>을 배우고자 모였고, 매주 그 구절들을 열심히 읽고 쓰고 외우고 말하고 듣는다. 그런데 거기 적힌 건 ‘절학絶學’과 ‘불언不言’이 아닌가!
아마 이 난처함은 상당 부분 나의 자기 규정과 관련될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조심스레 읽고 쓰는 일을 본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워낙 걱정 많고 소심한 성격인지라 그동안은 머뭇거렸었다. 지금도 확신은 못하겠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배우고 익히는 삶을 비전 삼고 싶은 것은 사실이고, 그런 이상 오래도록 언어와 관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이 말랑말랑한 비전에 태클을 걸고 있던 것이다. 배움, 언어, 앎 등 우리의 공부가 전제하는 모든 것을 마구 비틀고 뒤집어대면서.
혼란은 곧 반발심으로, 다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럼 여기에 이렇게 쓰고 있는 당신은 뉘시오? 이 글자들은 당신의 배움, 당신의 앎, 당신의 언어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도덕경>은 ‘노자’라는 한 개인 저자에 귀속된 텍스트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것은 ‘늙은 선생’이라는 이름처럼 일종의 집단성을 가진 오래된 지혜들의 묶음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선생들은 어느 시점엔가 배웠고 익혔을 것이다. 비록 얻었던 앎을 다시금 고쳐 알아야 했고 거기서 근심과 허물을 맛보았다 해도, 그렇게 도달한 지혜를 나눠야겠다고 여겼을 것이다. 가르쳤을 것이고 당연히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젓이 남겨져 있는 오천여 자의 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배움의 산물이지만 배움을 끊을 것을 권하고, 언어로 되어 있지만 언어를 고발하는 기이한 텍스트. 깊은 태클을 맞고 보니 그 상대가 궁금해진다. <도덕경>의 글쓰기가 지닌 전술은 무엇일까? 늙은 선생의 문장들은 어떤 차원을 담아내려 하며, 그와 함께 언어의 어떤 부분과 맞서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때 언어는 어떤 형상을 지니게 될까?
솔직히 나로서는 <도덕경> 문장의 독특함을 잘 알아채기가 힘들다. 비교군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 <도덕경>은 첫째로는 2,500년 전 고대 문헌이고, 둘째로는 함축적인 한문으로 되어있으며, 셋째로는 동양 사유의 여러 갈래 중 노장 철학이라는 삼중의 배치 속에 있다. 그 안에서 <도덕경>을 맥락화할 정보가 내겐 없다. 예를 들어, 유학과의 차이 혹은 고대 한자의 용법 같은 것. 하지만 그래도 몇몇 특징은 눈에 띤다. 거의 모든 문장에 주어가 없다(즉 ‘누구曰’로 시작하지 않는다). 또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상당히 달라진다. 역설과 비유가 많고 그 외에도 기이한 부정어법이 많다(爲無爲 事無事). 표현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표현한다는 뉘앙스가 많다. 이런 아슬아슬한 요소들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실험적으로 보인다. 혹은 유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질문을 일으킨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얼 전하려는 걸까? 자기 해체적 언어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면이 있는 걸까? 이런 글쓰기를 기어이 감행하는 자의 심정은 어떨까?
<도덕경>의 글쓰기를 풀어갈 키워드를 ‘不言’으로 두고 싶다. 不言은 참된 가르침(不言之敎)이자 참된 응답(不言而善應)의 요체다. 不言은 非言도 아니고 無言도 아니다. <도덕경>이 남아 있다는 사실로 보아 不言은 발화의 부정이 아니다. 어쩌면 不言은 언술의 포기보다는 오히려 발명에 가까울 것 같다. 언어의 기존 규칙과 기능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러나 결코 무화 자체는 아닌 기민한 줄타기 문체의 발명. 더 설명되어야 하는 不言 개념을 붙들고 <도덕경>의 언어를 탐사해보자. 그 첫 스텝은 不言이 타파하고 고장 내고자 하는 言의 면모다. 해체는 그것의 안팎을 더 면밀하게 더듬으며 되묻고 재정의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노자가 보는 기존 언어의 체계는 어떠하며 거기에서 어떤 균열들이 발견되는가?
잘라라, 택일하는 그 言을
“道可道 非常道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도가 아니다.”(<도덕경> 1장)
누구나 알지만 누구에게나 심오한 <도덕경>의 첫 구절은 거칠게 해석해서 ‘도는 결코 말에 담길 수 없다(‘道’라는 글자에조차도)’로 요약된다. 이 선언은 이후 전개될 모든 사상에 대한 일종의 포석(혹은 밑밥)으로 작동한다. 마치 이 텍스트에 기술된 도에 대한 모든 묘사조차 결코 常道가 아니니 참고하시라는 듯한 경고문 같다. 그런데 문득 이 위대한 이치에서 강조되는 것은 도의 특질이라기보다는 언어의 특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의 다채로운 면면과 작동들은 뒤에도 쭉쭉 이어진다. 따라서 ‘상도는 결코 말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 대단한 포인트가 아닐 수 있다. 포인트는 그 사실의 이면, 즉 ‘말은 결코 상도를 붙들 수 없다’는 사실에 찍혀 있지 않을까? 도의 유연함이 아니라 말의 딱딱함이, 도의 유동성이 아니라 말의 부동성이 부각되는 것 아닐까? 노자의 의중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도를 말하려고 하자마자 말이 장애가 된다는 사실. 그래서 도의 무궁함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먼저 언어의 한계를 짚어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그 한계란 무엇인가?
“‘말하기’는 택일(擇一)의 논리에 해당한다. 말은 긍정과 부정, 시是와 비非, 약과 독을 동시에 표시하지 못한다. 말은 선택으로 주어진 대상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서 언표할 수밖에 없다. 말의 논리는 (...) 흑백논리에 해당한다.”(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74쪽)
언어는 본질적으로 분별적이다. 언어는 체험을 공간적으로 분별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예’와 ‘아니오’는 동시에 표현될 수 없는데, 이는 왼쪽과 오른쪽 또는 어제와 오늘이 시공간의 한 지점에 놓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다른 것은 말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택일의 논리이고 흑백의 논리이다. 이러한 택일적 본성으로부터 자신이나 대상을 실체화는 경향이나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환원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물론 <도덕경>에서 언어의 이런 특질이 직접적으로 분석되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은 말이 적다(希言自然)”나 “도는 영원히 이름이 없다(道常無名)” 또는 “끝없이 이어져 이름 붙일 수 없다(繩繩不可名)”와 같이 문장들로 유추해 보아, 언어가 끝없이 변전하며 만물을 포용하는 자연 혹은 도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며 세계의 운동을 결코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가 세계보다 먼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 역시 만물 중 하나로 발명된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적 논리를 세계의 모습으로 착각하면 위험하다. 말은 사고와도 직결되며 택일적 분별은 시비와 선악의 대립을 낳고 언제나 분쟁爭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많은 말은 언제나 궁색하다(多言數窮). 따라서 신중한 자는 언제나 유유하게 말을 아끼고 귀히 여긴다(悠兮其貴言). 이를 요약하여 노자는 아래와 같이 표현한 것 아닐까?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이름은 만물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것이니 이름을 이미 얻은 후에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도덕경> 32장)
만물이 먼저고 언어는 나중이다. 이름이 있게 된 후에는 장차 그침止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그친다는 걸까? 만약 그것이 언어 자체라면 문제가 생긴다. 노자는 쓰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언어가 야기하는 위태로움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즉 분쟁과 궁색함에 휩싸인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그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어떤 특성, 즉 분별적 논리다. 일대일대응을 전제한 배타적 지시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택일의 논리는 사실 언어의 본질적인 뿌리요, 언어가 탄생한 이유가 아니던가. 기원을 잘라내도 언어는 여전히 언어일까? 또한 그 작업은, 언어의 중단이 아니라면 어떻게 시행될 수 있을까?
다시 첫 구절로 가보자. ‘말에는 결코 도가 온전히 담길 수 없다’를 말하는 자리로. 노자는 어떤 차원 혹은 원리를 말하고자 하지만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서 일단 ‘道’라고 부른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그러나 그렇게 해둬도 미진하다. 충분치가 않다. 자연, 천지, 유, 무 등 어떤 말이 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선은 말 자체를 문제 삼아야만 한다. 언어가 갖는 한계, 즉 언어에 내재된 대상을 분별해내고 ‘고유한 의미’를 지시하는 경향이 폭로되어야 한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그런 폭로의 작업이다. 이 경고와 더불어 우리는 언어를 불가피하지만 임시적인 수단으로 바라보게 된다. 기표에서 기의로 가지 뻗는 의미작용은 저지되고 유보된다. 글자들은 반투명해지고 그것의 일차적-관습적 의미 뒤로 이색적인 해석들이 층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어는 말랑말랑해진다. 즉 말들이 은유가 된다.
여기서 기묘한 역설 하나가 드러난다.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언어는 동시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도덕경>은 ‘말은 상도를 붙들 수 없다’라고 ‘말한다’. 말의 한계가 ‘말로’ 말해진다. 도 앞에서의 언어 자신의 역부족, 그 택일성과 고정성, 거기서의 위태로움 등에 대한 모든 고발조차 언어로 쓰인다. 언어는 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목을 치지만 그 검 역시 언어다. 그때 무슨 일인가 벌어진다. 언어가 자신의 목을 친 그 자리, 그러나 여전히 언어인 바로 그 자리에 ‘말로 붙들리지 않는 차원들’이 희미하게 깃든다. 말은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슬며시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끌어당긴다. 즉 언어는 자기 한계의 선언과 함께 도의 어떤 부분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선언의 자장 안에서 말은 고정화의 위험 없이 도를 표현한다. 이는 물론 常道는 아니지만 그 복잡한 다양체의 순간적인 한 측면이다. 이제 ‘결코 말에 담길 수 없는 도’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릇을 바꿔가며 올라타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연못淵에서 바큇구멍轂으로, 통나무樸에서 골짜기谷로 옮겨가는데, 이러한 매번의 언어화와 더불어 매번 다르게 제 특색을 펼쳐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해나 오역의 숱한 위험성(옳은 말은 반대로 들린다正言若反)에도 불구하고 왜 노자가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힌트가 있다. 언어가 가진 것은 배타적 택일성의 논리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유동적이고 중의적인 은유적 풍성함을 지녔으며, 여전히 분별적일 때조차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예기치 못한 차원을 열어내는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경>에서 언어는 비판되지만 중단되지 않는다. 그치는 것은 의미의 고정화 혹은 실체화일 뿐, 언어 표현은 오히려 이어진다. 언어는 보다 역동적이고 기이하게 짜이면서 자신의 자명성과 싸우고 상식적 문법을 고장낸다. 그리고 그 낯선 배치의 틈으로 ‘도’에 준하는 무언가가 비집고 나온다. 이제 <도덕경>의 언어 실험을 살펴보자.
不言의 창조 실험 : 남유와 무두질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가히 천하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것,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서 글자로 나타내어 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지어 大라고 한다.”(<도덕경> 25장)
‘道’라는 말이 쓰여지고 ‘大’라는 이름이 부여된 순간, 여기에는 어떤 단절이 있다. 혹은 폭력이 있다. 왜냐하면 저 글자들에 억지로 담겨진 것은 그 글자들에 결코 담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道는 한낱 ‘길’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그런 문자가 어떻게 혼돈되어 이루어져 있는데다가(有物混成),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고(先天地生)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寂兮寥兮)는 이 차원을 담아낼 수 있겠는가? 쥐가 다니는 숲길이든 마차가 다니는 궁전 길이든, 길이 어떻게 저 무궁한 존재의 차원과 동일한 기호로 표시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노자로서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일단 뭐라도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 이후 ‘도는 영원히 이름이 없다(道常無名)’라고 리터치를 하더라도 그 리터치 될 무언가를 말에 욱여넣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만물보다 먼저 있는 것이 천하 안으로,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있는 세계로, 감각되지 않는 것이 감각의 세계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보통의 은유가 아니다. 양을 구름에 빗대는 식의 “의미론적 대체의 틀을 벗어나는 과도한 비유”(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288쪽), 남유다. 데리다는 이 남용적 비유가 철학적 언어의 근원적 특질이라고 본다.
남유는 은유와는 성격이 다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은유는 철학이 전제하는 것처럼 본래의 고유한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이용되는 언어적 수레 혹은 임시거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수레와 거처는 끝없이 마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은유는 언제나 또 다른 은유들로 대체되며, 그 증식 운동은 무한히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해 보이는 은유, 나아가서 소위 비은유적 개념 또한 이미 먼 길을 지나온 그 은유적 전이의 수레를 타고 있으며, 이 수레의 이동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김상환, 279쪽) 요컨대 철학사는 은유를 초감성적인 의미를 풍성하고 선명하게 할 감성적 수단으로 간주해왔지만, 사실 진리를 비롯한 철학적 개념들은 모두 그 기원에서부터 (태양이라는) 은유를 놓고 있다. 이는 전통적 철학사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모든 은유적 반복과 그 역동성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규정되었던 ‘고정된 의미’가 은유의 그 역동성 자체에 의하여 점점 뒤로 밀려나서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철학이 다루고자 하는 ‘고유한 것’ 또는 ‘현전적인 의미’, “언어를 초월하는 (...) 그것은 최초에 어떻게 언어의 세계 안에 편입되었던 것일까?”(김상환, 288쪽) 그 답은 남유의 폭력적 강제력에 있다.
“남용적 비유에서는 기호의 전이와 대체가 순차적이고 형식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이고 강제적으로 일어난다. (...) 남유적 비유에 의해서 기호의 외연이 확장되고 이로써 기호를 결여하고 있던 어떤 무명의 관념이 언어 세계 안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288쪽)
남유가 기호를 강제적으로 확장할 때 어떤 ‘제2의 기원의 고유한 의미’가 출현한다. 이는 노자가 그 어떤 무궁한 차원을 ‘도’라고 적었을 때, 그 글자와 함께 그 무궁한 차원과 길 사이에서 출현하는 독특한 ‘무명의 관념’(道常無名)이 발생되어 나오는 것과 같다. ‘도’에 새로이 드리운 이런 발생적 의미에 힘입어 우리는 그 무궁한 차원의 일면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게 된다. 천하의 모태天下母나 바큇구멍轂, 통나무樸, 골짜기谷로 강제로 비유했을 때도(强爲之容)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말로 할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는 묵시적 관념의 세계로 침임해 들어가는 힘, 그것이 바로 남유의 돌발성이고 탈규칙적인 강제력이다.”(김상환, 289쪽) 이처럼 남유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의 영역으로 끌어낸다. 그와 동시에 기존 언어가 갖던 의미망과 기능을 변형시키고, 전혀 새로운 말놀이의 가능성이 창출된다. “말하자면 남유는 언어의 가능성을 넓히고 언어의 규칙을 개혁하는 전위적 언어이다.” 데리다는 철학이란 본디 이러한 남유를 본성으로 하고 있었음을 유추해낸다. “철학적 언어는 남유의 체계이며 ‘강제적 은유’의 수장으로서, 자연적 언어의 자구적 의미성에 대하여 바로 이러한 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김상환, 289쪽)
<도덕경>의 철학적 언어 역시 남유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연적 언어들의 의미성을 풀어버리고 확장시킨다. 하지만 그 작업은 결코 마구잡이로 이뤄지지 않는데, 여기에는 놀라울 정도의 신중함과 세련됨이 있다. 이는 남유에서 발생되는 그 새로운 의미가 기존 언어의 의미에 묻히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2의 의미가 부드럽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가 충돌하는 지점에 완충재가 놓여야 한다. ‘지고의 선은 물이다(上善水)’가 아니라 ‘지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여야 하고, ‘숨겨져 안 보이지만 존재한다(湛兮存)’가 아니라 ‘숨겨져 안 보이지만 아마 존재하는 것 같다(湛兮似或存)’로 쓰여야 한다. 요컨대 도의 특질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담기는 포대들의 거친 면을 두들기고 주무르고 펴야 한다. 언어의 자명성과 확정성을 약화시키는 이런 무두질은 <도덕경>의 거의 모든 장에서 발견된다. 사似, 혹或, 약若 같이 불확실성이나 가정을 덧대는 표현들, 직접적으로 비유하고譬 견주는比 표현들, 혹은 이중적이고 모호함을 나타내는 습명襲明, 미명微明, 홀황惚慌 같은 표현들.
이렇게 <도덕경>의 가르침은 이 부단한 작업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언어라는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는 곡예와 비슷하다. 택일의 논리로 추락하지 않으면서도 바람처럼 불어오는 도에 응답하며 나아가기. 不言은 이 모든 실험이 동반되는 역동적인 언어 창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함곡관에서의 응답 : 두 개의 용기勇와 자비慈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과감하게 용감하면 죽고, 과감하지 않음에 용감한즉 산다는 것은 만물의 일반적 이치이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 어느 것이 살게 하고 어느 것이 죽게 하는지 쉽게 사량하기가 어렵다. 하늘이 미워하는 바의 까닭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성인도 오히려 그것을 어렵다고 여기는 바이다. ”(<도덕경> 73장(김형효))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도덕경>의 글쓰기에 대해 끄적이고 나도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대체 왜 썼는가. 남유부터 시작해 고도로 세심한 은유와 완곡어법 같은 이 모든 수고로운 언어 실험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구태여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했는가. 무엇이 그를 외줄 위로 내몰았는가. 이득이 되어서? 어느 구석을 봐도 이 글이 밥이나 떡을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밌어서일까? 혹은 세상을 계몽하기 위해서일까? 그러기에 <도덕경>의 목소리는 너무 고독하고 확신이 없다. ‘홀로 남겨진 듯 하고(而我獨若遺)’ ‘사리분별에 어두운데(沌沌兮)’ 어찌 글쓰기를 즐기며 세상을 쇄신하겠는가.
사실 <도덕경>은 어떤 간곡한 요청에서 시작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를 떠나는 길에 노자는 붙들렸다. 국경 부근 함곡관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의 관령 윤희는 말했다. “그대는 장차 숨으려고 하니 억지로라도 나를 위하여 책을 지어주십시오.” ‘억지로라도’ 써달라는 요청. ‘道’라는 글자를 비롯한 남유의 기원에는 이런 간청의 강제성이 있었다. 노자는 좋아서 외줄 위에 좋아서 오른 게 아니다.
하지만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지금껏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가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사실 어떻게 적는다고 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은 분하다. 옳은 말은 반대로 들리기 마련이니까(正言若反). 게다가 그렇게 글자들이 원인이 되어 또 다시 분쟁과 살육을 낳으리라는 것을 노자는 숱하게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마지막까지 부쟁不爭을 말했던 <도덕경>은 병법서로 활용되고, 그 사상은 당파로서 정쟁의 오랜 근거가 되었다.
노자는 그 모든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붓을 들었다. 나는 이 심정이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 사건은 하나의 용기勇였다. 과감하고 굳건한 상황敢을 향한 용기. 그러나 노자는 그런 용기가 죽거나 죽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勇於敢則殺)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그 반대 방향의 용기, 부드럽고 유약한 자세를 향하는 용기가 살거나 살리기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말했다(勇於不敢則活). 어쩌면 <도덕경>에서 내내 권장해온 자세는 후자였는지도 모른다. 삼감과 물러남을 강조하고 인간의 취약함과 부드러운 것의 근본성을 자각해야 한다는 당부가 텍스트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시대에서,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 이빨이 있는 상황에서 과감하지 않음을 향하는 건 어렵고도 드문 용기다. 하지만 그렇게 ‘과감하지 않음을 향한 용기’를 말하는 글자들을 기어코 쓴다는 행위, 그것은 ‘과감함을 향한 용기’였다.
죽음과 죽임을 예감하면서 써 내려간 삶과 살림의 메시지. 이렇듯 <도덕경>이라는 텍스트는 두 방향의 용기가 서로 뒤엉켜서 짜여가는 새끼줄 같다. 사실 그렇게 던져진 두 주사위가 어떤 결과를 낼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 난처함難之 속에서 노자는 써내려갔을 것이다. 敢과 不敢을 오가면서. 그 어느 구석에도 용기만이 있다. 이제, 한참 동안 풀리지 않던 구절 하나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 “자비로워야만 용기 있을 수 있다(慈故能勇)”는 문장 말이다. 여기에 노자의 용감한 언어 실험의 바탕이 있다. 그리고 만약 ‘늙은 선생’ 노자가 어떤 집단성을 말한다면, 언어로 언어를 해체하는 그 지난한 不言의 뿌리에는 온갖 번뇌의 뿌연 먼지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내는 인간 마음의 자애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도덕경>은 작년 일요철학에서 처음 접했는데요. ㅋ 그때 기억으론 노자의 사상이 놀라웠지만 압축된 듯한 한자 언어의 중압감이 있었죠. 그런데 민호샘이 ‘不言’이라는 하나의 언어에서 데리다가 제기하는 언어적 문제들 (은유, 남유 등)을 노자의 도와 연결하여, '언어로 언어를 해체하는 지점 '나아가는 것이, 바로 ‘不言’의 뿌리에 있는 번뇌를 해체하게 지점이라고 하는 민호샘의 사유가 놀라워요!! 언어로 해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민호샘의 생각에 얹어 가게 되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외줄을 준비중
2024-04-21 17:23
도덕경의 난감한 언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펼쳐지고 있는 세계의 장막을 열어 보여주시네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언어의 한계와 저력을 동시에 체감하는 이의 어깨에 놓인 무거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면서
덩달아 나는 언어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좀 쎄게(?) 물어보고 싶어지네요~!
언어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과 언어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동시에 품은 채로 언어와 관계 맺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덕분에 철학적 언어와 마주할 때 우리가 왜 그렇게 혼돈 속에 처하게 되는지가 확! 이해됐습니다. ㅎㅎ 감사히 잘 읽었어요~!
제현
2024-04-22 15:48
"노자는 그 모든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붓을 들었다." 말하는 것이 불언을 해체하는 과정, 불언을 말하는 것이 말을 해체하는 과정이 될 수 있네요. 언어의 한계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도덕경>은 작년 일요철학에서 처음 접했는데요. ㅋ 그때 기억으론 노자의 사상이 놀라웠지만 압축된 듯한 한자 언어의 중압감이 있었죠. 그런데 민호샘이 ‘不言’이라는 하나의 언어에서 데리다가 제기하는 언어적 문제들 (은유, 남유 등)을 노자의 도와 연결하여, '언어로 언어를 해체하는 지점 '나아가는 것이, 바로 ‘不言’의 뿌리에 있는 번뇌를 해체하게 지점이라고 하는 민호샘의 사유가 놀라워요!! 언어로 해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민호샘의 생각에 얹어 가게 되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도덕경의 난감한 언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펼쳐지고 있는 세계의 장막을 열어 보여주시네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언어의 한계와 저력을 동시에 체감하는 이의 어깨에 놓인 무거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면서
덩달아 나는 언어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좀 쎄게(?) 물어보고 싶어지네요~!
언어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과 언어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동시에 품은 채로 언어와 관계 맺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덕분에 철학적 언어와 마주할 때 우리가 왜 그렇게 혼돈 속에 처하게 되는지가 확! 이해됐습니다. ㅎㅎ 감사히 잘 읽었어요~!
"노자는 그 모든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붓을 들었다." 말하는 것이 불언을 해체하는 과정, 불언을 말하는 것이 말을 해체하는 과정이 될 수 있네요. 언어의 한계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