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 일요반 2학기 출발했습니다~!
모처럼 비가 내려 공기는 서늘하고 차분한데 대학 암송을 앞둔 우리는 뭔가 분주했죠. 아침 강독부터 틈틈이 입을 맞추다가 드디어 대학 전문을 암송하는 테스트는 시작되었습니다. 돌림노래 부르듯 앉은 순서대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채운샘이 지정하는 데까지 외웠는데요, 옆 사람에 이어서 하는 게 분량이 짧은데도 어렵더라고요. 혼자 리듬을 타면서 외우는 것과 달리 옆 사람의 리듬을 이어받아서인지 머뭇거리기도 했고, 내게 취약했던 부분이 차례가 될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죠. 암튼 여러 번 순서가 돌면서 익숙해져서 외울 수 있었고, 저녁 8시까지 남아서 불같은 암송을 또한 진행했음을 알립니다. 애쓰셨어요~~
이미 알고 계시듯 다음 주까지 중용 강의가 진행됩니다. 저는 중용을 처음 읽기도 했고, 또 대학 암송과 동시에 진행되어서인지 좀 급하게 읽은 느낌인데요, 중용 암송을 이번 주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찬찬히 각자의 질문 속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음양오행 시간은 배샘의 강의록과 교재를 중심으로 기본적인 사항들을 암기해 가며 이해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2학기 수업이 시작된 5월 5일이 입하(立夏)였다고 해요. 입하는 본격적인 짝짓기와 생산의 계절이라 하니 우리도 사서과 음양에 본격적인 감응을 해보아요~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저희 조는 토론에서 중의 개념과 치곡과 형(形)의 관계, 중과 성(誠)의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 각자의 질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마침 샘의 강의도 중(中)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중용의 중(中)은 막상 설명하려면 막막하기만 한데요. 1장에서 말하듯 중은 우주적 법칙이면서 만물의 법칙입니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우주의 작용 자체인 중(中)은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인데(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우주와 만물이 모두 존재론적으로 중이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다릅니다. 음양오행의 기운이 조합된 몸을 가진 인간은 매번의 상황에서 우주의 기(氣)와 더불어 작용하고 반작용합니다. 그 가운데 몸은 치우치게 되고 감정을 발(發)하게 되죠. 현실에서 감정이 발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그래서 우리의 숙제로 남습니다. 우주적 중(中)을 근본으로 그때의 상황에 맞게 행위를 구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합니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이때의 화(和)를 천하에 두루 통(達)하는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그렇게 중과 화를 생각하면 중이 된 이후에 화의 상태가 오는 게 아니라 화의 상태를 구현하는 것과 중의 실현은 같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과 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용 첫 시간에 읽었던 순임금의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의 마음은 미세하기만 한 것이니, 정밀하게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을 잡게 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귀신과 제사 _ 연결성에 대한 감각
16장에서는 귀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정이천은 귀신을 보이지 않는 천지의 작용, 즉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고 비가 오고 땅에서 무엇인가 자라나는 작용이라고 합니다. 이를 귀신의 ‘덕됨’鬼神之爲德 이라고 표현해 귀신과 덕을 동격으로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이 덕이자 음양의 에너지, 힘이란 얘기죠. 이 귀신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사물의 근간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에는 은미한 것이 드러나니 성을 가릴 수 없다(微之顯 誠之不可揜)고 합니다. 감각할 수 없는 은미함이 감각할 수 있게 드러나는 것이 우주의 끊임없는 운동성으로 읽어온 성(誠)개념과 연결되었는데 저희 조의 질문이었던 중과 성의 연결과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지현을 알아차리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듯하고요.
이런 귀신에 대한 개념이 제사의 예를 가능케 했습니다. 제사란 망자의 추모이자 제사의 형식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연속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그 느낌은 연결 속에 있음을 확인하는 거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에게 경외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또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공부가 단지 나만의 만족 혹은 반성으로만 머물게 아니라 누구와 나누는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 보라는 채운샘의 코멘트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공지드렸던 타임라인에 약간의 변동이 있습니다. 사서를 강독하면서 낭송을 같이하려니 시간이 좀 빠듯해서 30분 늘리고, 음양오행 세미나 시간을 1시간으로 조정하였습니다. 2주차에 예정되었던 단장취 글쓰기 과제도 없습니다!! (채운샘의 자비심~~♡) 그러니 이번주엔 중용 마지막 강독과 새로운 암송에 박차를 가해 보아요~
<수업 시간 조정>
9:30~11:00 사서 강독
11:00~12:30 사서 토론
12:30~13:30 점심 및 산책
13:30~14:30 <음양오행, 볕과 그림자> 토론 및 테스트
14:30~16:30 강의
*** 2주차 공지 (5/12) ***
* 암송 : <중용> 1~11장, <오행 배속표>를 외워옵니다.
* 읽을 책 : <중용> 33장까지 , <음양오행, 볕과 그림자> p87 ~ p135,
<배샘 3,4주차 강의안: 1-3 오행의 의미와 속성, 1-4 오행의 왕쇠강약과 생극관계>
* 간식 : 규창샘, 현정샘
* 후기 : 현미샘
저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喜怒哀樂之未發)가 천지불인(天地不仁)과 같은 것 아니겠냐고 하신 채운샘 말씀이 많이 남던데요. 희노애락을 아주 개인적으로 한정하며 감응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던 것이 확 펼쳐지는 느낌이었어요. 편애하지 않음을 좀 더 실재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서요. 귀신이나 그들과 감응하고자 하는 제사가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려는 행위라는 것도 생각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었구요. 사서의 단어 하나하나에 수북이 꽃이 매달린 느낌입니다. ~~
한편으로는 잠재성의 지평을 아우르는 법칙처럼 작동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근거(?) 같은 것으로서도 작동하는 中은 참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개념인 것 같아요. 개념 자체는 처음에만 거론되지만, 어떻게 보면 '중'에 대한 사유가 끝까지 관통하는 것 같단 말이죠. 그리고 제사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에 맞게 바꿔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강의에서는 그걸 프리모 레비의 증언,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복원'과 같은 문제로 말씀해주셨죠. 흐음... 참 생각할 게 많은 텍스트인 것 같습니다. 다 읽어가지만,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