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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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이 뒤섞인 이야기와 인물성
벌써 <천일야화>도 4권 째입니다. 정말 빠르군요. 에세이가 다가오는 속도가... 4권쯤 되어 페이지가 1000페이지를 넘어가니 정옥샘 말씀처럼 그 이야기에서 쫌 바꾼 그 이야기,에서 또 쫌 바꾼 그 이야기...들을 읽고 있는 느낌이 납니다. 비슷한 소재가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되고 있죠. 그런 변주는 이야기 전체만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 안에서도 일어나는데요. 예를 들어 누레딘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아버지의 일을 망쳤다가, 대책 없이 흥청망청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는 욜로족이었다가, 생선요리 한번 대접해준 어부에게 그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를 줘버렸다가, 아버지의 연적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가, 칼리프의 도움을 받고 살아나 사우이를 직접 죽일 수 있었으나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같은 누레딘의 서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떠어떠한 인물이다,라고 하나로 규정할 수가 있을까요? 천일야화는 사건 혹은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과할 의도가 딱히 없어 보입니다. 이야기든 캐릭터든 하나로 모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드라마를 보다 캐붕(캐릭터 붕괴)이 오면 이게 뭐냐고 반발심이 드는 저의 관점에서는 누레딘 속의 그 모든 혼재돼있는 것들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수긍이 됩니다. 저 역시 인생을 하나의 일관된 캐릭터로 살아가지 않으며, 때로는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니까요. 보면 볼수록 개연성을 입힌 근현대소설보다 천일야화가 더 삶에 밀착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베풂 혹은 낭비를 할 수 있지?
천일야화의 인물 중에는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쓰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이번 4권에서는 누레딘과 아부 하산이 그랬는데요. 이들은 친구들을 열댓 명 불러다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종일 먹고 마시고 놀기를 1년 넘게 하더니 결국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렇게 대책이 없어도 되는지? 일부는 불리는 데에 좀 썼어야 하지 않을지? 왜 자기 재산을 남에게 다 퍼주기만 하고 자신은 일 푼도 받지 않았는지? 등등. 우리 시대에도 낭비, 사치는 있지만 이들의 낭비는 어딘가 다르고 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불편하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손해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한하게 베푸는 식의 낭비입니다. 우리에겐 헤프게 느껴지는 이런 베풂은 이야기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신드바드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힌드바드와 친구들에게 펑펑 베풀었죠. 이들을 보며 ‘어떻게 이런 베풂-낭비를 할 수 있지?’ 라는 질문이 드는 건 우리에겐 다른 식의 경제적 관념이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채운샘은 이 지점에서 우리의 돈 관념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런 베풂을 할 수 없다, 하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 속에 들어있는 나의 사적 재산을 움켜잡는 힘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낭비는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늘리는 일입니다. 그와 달리 우리 상상 밖의 영역인 신드바드, 누레딘의 낭비는 재물을 써서 나 너 우리가 한바탕 즐기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거나 그저 주는 것 자체이기도 하지요. 이들은 내 수중의 돈이어도 그것을 내 것이라기보다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우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무슬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 위탁물로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들의 감각으로 우리의 돈을 본다면 어떤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슬람 철학을 논하는 배경
2교시는 왜 중동권의 철학을 ‘이슬람 철학’으로 논하는지에 대한 배경을 채운샘이 설명해주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흥미로웠고, 우리가 주류 아닌 것의 영역을 얼마나 편견에 휩싸인 채 보는지에 대해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는데요. 먼저 ‘철학’이란 개념, 서양권의 philosophy가 비유럽권에도 있는지?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동양철학, 현대철학 등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그 질문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존재론-인식론-윤리론을 논하는 고대 그리스적 의미의 ‘철학’은 지극히 유럽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비유럽권에는 그 형식에 꼭 맞는 의미의 철학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사상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선 무수히 논하지만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라 할 만한 것은 딱히 없다지요.
또한 인류문화사에 있어 중요한 철학적 사고의 탄생 시기라 불리는 축의 시대는 크게 네 개의 지역에서 나타납니다. 고대 그리스, 인도, 중국, 중동이죠. 그러면 아메리카에서는 철학적 사고가 탄생하지 않은 걸까요? 아메리카인들에겐 철학이나 사상이라고 불릴 만한 게 없었던 걸까요? 철학적인 걸 기술하는 문화가 아니면 열등한 것일까요? 그건 철학이란 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닐까요?
우리가 읽고 있는 <천일야화>가 수집된 지역의 철학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또 어떤 철학을 봐야 할까요. 중동 철학, 아랍 철학이라 하기엔 그 광범한 지역은 오랫동안 유목민 중심의 세계로서 ‘역사’가 기술되지 않았으며, 그 지역 고유의 철학이라 할 만한 것 또한 없었습니다. <논어>나 소크라테스처럼 아랍어로 된 아랍적 철학 텍스트 혹은 말씀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철학이 전혀 없었다 할 수는 없는 게, 천일야화를 보면 그 무대에 퍼져있던 특유한 사상적 흐름은 있었지요. 그것은 이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좀 더 넓은 차원에 속하며 종교적인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있는 ‘이슬람 철학’이었습니다.
이슬람 철학이라는 개념은 종교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이 섞여 있어 다소 이질적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철학과는 같은 분류로 묶기가 어렵지요. 또한 이슬람 철학과 같은 분류로 다른 철학, 예를 들어 기독교 철학, 불교 철학 등을 범주화하자면 그것들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로써 논의해야 마땅하게 느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보편사적 기술이란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라고 할 만한 것, ‘철학’이라는 것,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어느 곳에나 똑같은 형식과 의미의 것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개념은 특정한 틀을 가진 그릇이라서 그걸 가지고 ‘일반적인’ 서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지요.
이슬람 철학이 철학으로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이슬람 문화가 가진 독특함 때문입니다. 이슬람에선 서양 중심의 근대화를 겪은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철학-종교, 법-종교, 윤리-종교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슬람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 삶 자체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슬람 철학은 일종의 철학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일야화 속에서 그러한 이슬람적 사상을 마주치곤 하지요. 물론 시기와 지역이 워낙 혼재돼있어 이슬람적인 것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처럼 이슬람 철학을 논하는 배경과 그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둥둥 떠 있는 여러 질문들을 살펴보니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심의 위치를 차지해 온 서구적인 것들에 거리를 두는 일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거리를 두지 못하면 우리의 것과 다른 문화를 만날 때 내가 알고 있는 것 안에서 너무나 쉽게 재단해버릴 위험이 클 것 같아요.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구리다’거나 ‘미개하다’고 느껴지는 지점들이 그런 거리두기가 필요한 스팟의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철학, 종교, 예술, 문학 등을 분절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이지요. 우리는 거기에 너무 익숙하구요. 그래서 종교=법=철학=윤리 가 동일한 지평에 있다는 무슬림의 삶이 잘 이해되지 않죠. 그들은 그냥 사는 것인데, 세미나하면서 우리는 계속 그 분절과 접합 지점을 찾는 질문을 쏟아놓는 것 같아요. 천일야화에서도, 이슬람 문화에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그 지점을 물고 늘어져 보죠. 꼼꼼한 후기 잘 읽었어요~~
삶의 전반과 분리되지 않는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거 같아요. 종교와 법과 윤리가 하나인 문화... 그렇기에 이슬람 철학도 종교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어떤 철학일지 궁금해지네요~
천일야화 4권을 참 재밌게 읽었는데요. 호호미샘이 말했던 것처럼 돈과 관계 맺는 방식이 우리의 상식을 건드리고, 죽음이나 삶 또는 현실이나 사실과 같은 우리의 감각을 흔드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천일야화는 놀람과 신기의 정서를 만들어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