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현정샘께서 후기를 너무나 자세하고 꼼꼼하게 잘 써주셨기 때문에 샘들께서 읽어보시면 복습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딴소리 공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공할지 여부를 물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만 물을 권리가 있다. 우리가 이 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지구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웬들 베리
1. 성장주의의 어리석음과 광기에서 벗어나자
우리의 취약성은 모두가 ‘성장주의’라는 일방통행길에서 달려간다는데 있습니다. 저자 제이슨 히켈은 GDP, GNP등 성장의 가치계량을 비판합니다. 이 지표는 국가전체의 상품생산의 총합과 개인의 총생산을 평가계산 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이 숫자들의 비교에 동요하지요. 이것들과 사회적 결과들 사이에 직접적, 인과적 관계는 전혀 없는데 말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생산하는지?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지?’라 질문할 수 있는 시선입니다. 마천루? 병원? 최루탄? 교육? 대중교통? 노인복지? 등 모든 생산역량이 무엇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를요. 사람들의 핵심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쓰이는지, 자본축적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 근본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산력은 커지는데 왜 인구의 15%는 빈곤한가? 해결되지 못하는 빈곤이 성장의 딜레마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성장의 근본원인이자 재료라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장의 군불을 때기 위해서는 빈곤이라는 장작이 필요했습니다. 옆에서 희소성이라는 가짜 풍력기가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하고요.
저자는 “인간의 삶, 지구의 삶, 비인간 이웃의 삶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단절”시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좋은 삶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데 말이죠. “양질의 공공서비스, 저렴하지만 괜찮은 주택공급, 적절한 수준의 임금..” 사실 최소한의 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지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9-6시)에 1년 12개월 내내 일을 하는데 도대체 그 많은 노동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불필요한 소비생산규모 축소, 소득불평등의 축소,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보장을 빼면 모두 축소하는 방향이 됩니다. 지구 전체를 지배해온 정언명령은 지난 200년간 ‘성장’이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유기체에서 성장이 지속되면 “바이러스”나 “암”이 됩니다. 유기체의 건강한 생존을 위한 평형상태인 탄생-성장-사멸에서 코딩오류가 일어나는 것처럼요. 그러니 ‘지속적인 성장’은 우리에게 명령으로 각인된 것이지 삶에서는 돌연변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간본성의 이기심이 당연한 것처럼 출현한 것이 아니라, 지속성장- 팽창주의는 이윤을 향한 독점자본의 특이점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잊혀진 혁명으로 15세기내내 봉건제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서 반가웠습니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했을 때 귀해진 노동력때문에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던 농노와 노동자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었답니다. 공유지에 비극을 가져온 야만적 인클로저로 농촌공동체가 붕괴되자 봉건제 저항은 잊혀졌고, 인클로저에 저항하는 또 다른 운동이 300년이나 지속되어왔던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빈민, 부랑자가 ‘가난’이라는 단어의 일반화와 연결되었다는 것도요. 필수적인 토지에 접근할 수조차 없이 쫓겨난 농민이 프로레타리아(가진 것은 생식력뿐)되어 자유노동자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죽음보다 나을 뿐인 노동을 시작했던 시기입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역사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조직화된 폭력, 대규모 빈곤, 자급자족 경제의 파괴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산업혁명시기 16~19세기 300년간은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시기로 기록됩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노동자의 기대수명이 100년 간격으로 43세-35세-25세로 처참한 모습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인간을 갈아 파괴하는 ‘악마의 맷돌’이라 하며 자본의 폭력을 비판했습니다.
2.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이다.
인클로저의 형태가 국내 농민과 노동자를 식민화했다면 인신을 무기로 제압하여 영토와 신체를 약탈하는 국외식민화는 자본과 영토국가가 합작한 동일한 지배전략입니다. 여기에 정치경제학자와 공리주의자가 마치 합리적논리처럼 식민지화 정당성을 이론화합니다. “더 큰 이익이 인류의 향상에 기여한다.”, “인간의 이기심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 라고요. 자본가의 전략은 노동자에게 희소성과 굶주림의 위험을 조장합니다. 실제 자원은 부족하지 않으나 자원에 대한 접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생산수단은 이제 자본가의 사적소유가 되었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니까요.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오만하다’, ‘하층민은 빈곤해야 일한다’라는 인식은 복지제도인 구빈법까지도 철폐하게 했지요. 특히 데이비드 흄의 “희소성”이론은 자본주의 팽창을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조장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희소성원리는 일리치가 <그림자노동>에서 사람들에게 희소가치에 대한 소유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 성장과 발전이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왜 물질생산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빈곤이나 결핍과 같은 희소성을 조장하는 것일까요? 자본의 잉여가치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생산, 끊임없는 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875년 인도에 3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실제로 생산량은 3배가 증가했고 순잉여분이 증가했었다는 사실은 자본은 인간의 가슴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식민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찾아갑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을 다르게 개념화하는 방식이 근대에 일어났다는 것이죠. 소유, 추출, 상업화 등 끊임없이 증대하는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관계가 요구되니, 우리가 <석기시대 경제학>이나 <증여론>에서 이해했던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사물의 영적인 상호의존과 상호호혜의 관계성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정신과 물질의 이원화, 즉 이분법적 논리는 계몽주의시대 인간주체를 자연에서 분리하고 자연을 지배하고 변형할 수 있는 관계로 인식하게 되었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주의’인 것인데요, 자본주의경제의 본질인 생산성의 덫에 걸려 정부와 기업, 개인 모두가 성장없이 존속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져있지만 인류존속이 걸려있는 지금 어떻게든 무한정한 자본의 이윤축적과 성장논리에 한계지점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성장의 임계점을 말한 일리치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인간의 구체적 필요, 사회적 목적의 충족, 인간의 행복”이라는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2부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읽습니다. 전적으로 다른 방향, 다른 방식의 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성장이 필요없는 대안 경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4장 좋은 삶의 비밀, 5장 포스트 자본주의로 가는 길, 6장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2부 발제는 경혜샘과 완수샘께서 나눠 맡아주셨습니다. 간식당번은 장청샘과 완수샘이시고요, 후기는 경혜샘이 자청하셨네요. 경제기사는 소현샘이 찾아와주시기로 하셨고요. 일당백의 샘들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시간에 뵈어요~
1960년대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시절 박정희가 부르짖으며 이뤘던 성장은 지금까지도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성장은 자연과 빈곤을 먹이 삼아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이상한 것이 되어버렸네요.
그래서 웬들 베리의 질문이 더 콕 박히네요. "우리가 이 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지구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