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장에 한계를!
“규칙에 맞춰 행동해서는 세계를 구할 수 없어요. 규칙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레타 툰베리
생태붕괴가 일어나는 현실을 목격하고 경악하면서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 상상력 속에 성장주의가 있음을 저자 제이슨 히켈은 지적합니다. 우리 의식에는 삶을 향상하는 것과 진보는 분리할 수 없는 고정체입니다. 기술의 진보로 의식주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편리와 의학의 혁신으로 높아진 기대수명도 삶의 향상이라 생각하지요. 정책결정자들과 경제이론가들은 이에 관한 논리로 ‘성장에 따른 평균소득의 상승이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신자유주의논리에 따른 경제구조의 변화는 남반구와 북반구를 명확히 가르는 성장과 진보의 허구성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클로저, 새로운 식민지형이 남반구에 실행된 것입니다. 토지, 산림, 목초지 등 커먼즈에 의존하며 살아오던 평범한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몰아넣어진 채 자립경제는 산산조각나고 생계와 복지는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98년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던 우리 경제체계의 변화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또 다른 성장주의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한층 더 분리하고 자본화했던 것이죠.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식민화와 같은 불공평한 방식으로 남반구를 세계경제에 재편했던 것입니다. ‘비효율적인 산업퇴출, 국영사업 민영화, 복지정책 감축, 부실은행 구제, 노동유연화’라는 국제기구의 편향적인 구조조정은 대외의존도에 취약한 사회로 바꿔나갔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세계화,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세계화’는 그렇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장과 발전의 논리로는 더 이상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자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연못에 수련이 자라고 있다. 수련이 하루에 갑절로 늘어나는데 29일째 되는 날 연못의 반이 수련으로 덮혔다. 아직 반이 남았다고 태연할 것인가? 연못이 완전히 수련에게 점령되는 날은 바로 다음 날이다.”라며 1972년 로마클럽의 경제학자와 기업인들은 다가올 인류의 위기를 예측하고 경고했습니다. ‘천연자원고갈,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등 이들의 문제제기였던 <성장의 한계>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인식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허구적 희소가치에 지속적인 성장이나 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질적인 부분을 생각한다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질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녹색성장’이라 위장되어도 생각해보면 에너지사용, 교통통신의 집약된 소비 등의 성장 결과물은 소수편향적이며 생태파괴적입니다. 성장할수록 빈곤율은 높아지고, 실질임금은 낮아집니다. 1980년대 이래 새로운 소득 46%가 부유한 5%에 집중되고, 세계 GDP의 1/4가 부유한 1%의 분량이라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지점을 지나면 성장은 ‘비경제적’이 되면서 복지보다 해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됩니다. 수많은 측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요. “고소득 국가에서 성장추구가 지속되면서 불평등과 정치적 불안정이 격화되고, 과로와 수면부족에 따른 스트레스와 우울증, 오염으로 인한 건강악화, 당뇨병과 심장병 등의 문제들을 키우고 있다. ”(239쪽, 『적을수록 풍요롭다』)
성장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필리핀이나 코스타리가의 예처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기본필요를 충족하고 생태를 중심으로 인간중심의 경제-정의롭고 자급자족의 원칙이 지켜지는 좋은 삶으로- 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960년대 이미 프란츠 파농은 성장을 “속도의 광기”라 표현하며 “산출, 극대화, 노동의 리듬 등과 같은 언어사용으로부터 멈추자”(252)고 경제발전에 대한 탈식민화를 말한 바 있습니다만, 우리의 인식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허상과 같은 성장, 발전에 대한 개념화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자동차, 아파트, 가전제품 등 더 좋은 상품을 쓰면 마치 삶이 바뀌는 것처럼 미디어의 심리조작 광고멘트에 즉각적이고 쉼없이 교란당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우리가 실제 사용가치와 얼마나 다른 욕망수요를 충족하고 있는지 바로 알게 되고 후회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사실 묻고 따질 것 없이 “군수산업, 축산산업, 패스트패션,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산업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저자의 말은 근본적으로 옳습니다. “물질적 재화의 유량(flows)을 줄이고 저량(stocks)을 줄일 수 있다”(292) 불필요한 것에 수요와 유통을 줄이면 공장, 기계, 운송 등 기반시설도 줄어든다는 거죠. 반면 이번에 읽은 경제기사문은 ‘365일 물류전쟁이 시작된다’는 내용으로 우리가 가야할 방향과 현실이 거꾸로 가는 듯해 그 간극이 참 답답하기도 했는데요. ‘최저임금법, 아동노동법, 휴일근로’ 등 자본이 인간을 함부로 착취할 수 없도록 300년의 노동운동의 역사가 있었음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저자가 말한 여러 정책적 변화는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겠지요, 성장의 한계설정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깨어있는 변화와 강력하고 포기없는 압박이 필요합니다.
2. 좋은 삶은 어떤 것일까?
‘좋은 삶은 어떤 것인가?’ 묻지 않으면 그냥 잊게 됩니다. 편리하고 안락하고 안정적인 것에 익숙하니까요. 기대수명이 매우 높은 코스타리카의 수준 높은 의료복지, 누구나 부러워하는 교육복지의 핀란드, 첨단산업이 없어도 행복한, GDP와 무관한 국가의 행복지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공공재에 투자하고 소득과 기회를 공정하게 배분하기만 하면, 현재 가진 것보다 적은 GDP로도 세계 모든 이들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뢰와 연대로 함께 나누는 공공성을 향해갈 때 국민 대부분은 안정감을 느끼겠지요. 열악한 의료환경에서의 건강문제, 빈부격차에 따른 범죄율의 증가. 더 낮은 사회적 이동성 등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개인의 좌절감과 무력감은 사회에 불만으로 표출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GDP가 높은들 누구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보편적 의료보장, 실업보험, 연금, 유급휴가, 저렴한 임대주택, 보육서비스, 강력한 최저임금’ 등으로 공정하고 보살핌이 충분한 사회, 모든 이들이 사회적 재화에 공평한 접근권을 갖는 곳이라면 일상의 기본적 필요를 어떻게 해결할지 염려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242)
보다 관대하고 보편적인 복지체제일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집니다. 먹고사는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실업과 빈곤에 대한 공포는 희소성이라는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치 인간의 본성이 끊임없이 ‘부’에 대한 허구적 욕망을 갖는 것처럼 말이죠. ‘보건의료, 주거, 교육, 양육, 일자리’이라는 경쟁 아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한 피로와 걱정의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얼마나 많은 의미있는 일들에 매진할 수 있을까요? 365일이 아니라 하루 4시간을 서로 나눠서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케인즈는 기술혁신과 노동생산성향상으로 2030년에 주15시간 노동이 가능하다고 예측했답니다) 첨단기술이 발전했다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경쟁과 업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신이 탈진할 정도로 노동력을 소모하면 보상심리로 하는 과잉소비를 ‘금융치료’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고 하는데 씁쓸하기도 하고 가슴아프기도 하고.. 생각해볼 점이 많습니다. 미국보다도 낮은 GDP에도 많은 나라들이 높은 행복수준을 보여주는 지점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어떻게 느끼는가’라 합니다. 저자가 사례로 든 코스타리카 니코야 반도는 가장 빈곤한 지역임에도 기대수명이 85세입니다. 최상의 공중보건체제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연구자들이 발견한 놀라운 지점은 견고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그들의 공동체문화였습니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며 그런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가치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 합니다. 우리사회의 문제는 물질적 재화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쉽게 가까이 있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과, 마음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는 점점 분해되고 멀어지기 때문은 아닌지, ‘토지, 숲, 인간의 탈식민지뿐 아니라 마음의 탈식민지화가 필요하다’를 곰곰이 새겨보아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애나 로웬차웁트 칭의 <세계끝의 버섯> 1부를 읽습니다. 부제로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라고 쓰여있습니다.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폐허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상력을 동원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네요. 1부 발제는 장청샘과 미영이고요, 간식당번은 경혜샘과 소현샘입니다. 경제기사는 완수샘께서, 후기는 장청샘이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가을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처럼 추웠다가 따뜻했다 하는데요. 건강하게 다음 시간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