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류학 세미나, 4학기 3주차 후기/ 『세계 끝의 버섯』 2023.10.25./ 장청
술술 읽히는 것 같지만 결코 만만치 않아 중간중간 읽기를 멈추게 만드는 책 『세계 끝의 버섯』. 저자 애나 칭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을 송이버섯의 생태와 비교해 분석하는데 자본주의 구조를 송이버섯의 생태환경을 통해 포착한 예리한 감각이 색다르고 신선하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 든다. 생계를 위협하는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 기후 변화의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급속한 빙하의 해빙 현상. 기후 환경은 생태적 붕괴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문제는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렇듯 불안정성이 지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 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에게 이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라는 게 이 책의 주요 질문인 것 같다. 그 해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송이버섯 사례를 보면서 든 생각은 우리에게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직 경제라는 하나의 가치 추구를 벗어나 방향성을 틀기만 한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절망하기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존 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유동적”이기에.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른 방식의 사회 분석이 가능하다. 불안정한 세계는 목적론이 없는 세계다. 시간 본연의 무계획성을 뜻하는 불확정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불안정성을 놓고 생각해 보면 불확정성도 삶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52)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혁명적 사고의 전환은 아닐까. 불확정성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수많은 다양한 삶의 패턴을 찾는 기회가 되기도 할 터.
“배치는 열린 모임이다” 삶의 구성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세계와 조우할 수도 있다. 토론에서 이는 질 들릐즈의 개념인 조각보의 패치워크를 연상케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하나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종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서로를 방해하고 (혹은 먹고) 어떤 것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56) 이러한 배치의 의도치 않은 조율 패턴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빚어내는 시간적 리듬 및 규모의 상호작용을 지켜”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서로 얽혀있으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떠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존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애나 칭은 “알아차림의 기술”을 얘기한다. 이를테면 모든 생물종에 순수한 것은 없다, 마주침을 통한 오염이 우리의 생존 조건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주침을 통한 오염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으로써 마주침을 통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듯 모든 존재는 오염을 통해 얽혀있고 낯선 것들과의 마주침은 불안정성을 유념해야 하는 만남이다. 이러한 불안정적이고 불확정적인 낯선 것들과의 마주침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생물종의 생존의 조건이며 이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라면 어쩌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진보관이 말하는 생존은 항상 다른 존재와의 경쟁 관계에서 싸워 이겨 살아남으라는 “정복과 팽창의 동의어”였다. 그러한 관점에 따라 근대 경제학과 이를 개조한 신고전파, 이 두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개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자립적 개별 행위자가 존재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이러한 관념과 맞닿아 있는데 리처드 도킨스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좇는 유전자의 능력이 진화를 부추겨온 요인이다, 따라서 경제적 인간인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자기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생물종이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협력이다. “협력이란 차이를 수용하며 일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오염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상호보완적 의존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협력은 자립과 배치된다. 우리는 어려서 자립적인 인간이 되어라, 인간은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기에 자립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자립은 인간에게 유용한 덕목인가. 애나 칭에 따르면 자본주의식 사리 추구에 기반한 자립의 개념은 오염, 즉 마주침을 통한 변형을 무시한다. 이러한 자립적 개별자는 마주침을 통해 변형할 수 없다. 자본경제 사회의 개별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마주침을 이용하는데 이러한 마주침으로 존재는 변형되지 않는다.
불확정성 속의 마주침을 통한 오염의 사례로서 오리건주 숲의 송이버섯의 생태환경을 보자. 목재 부호들을 위해 관리하던 이 숲에 엄청난 규모로 심어졌던 폰데로사 소나무. 1980년대 광대한 폰데로사 지대가 벌목으로 사라졌는데 이 나무는 산불없이 번식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산불 금지를 한 산림청의 관리가 오히려 폰데로사의 번식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반면 전나무와 로지폴 소나무는 산불을 금지하자 번창했다. 송이버섯은 로지폴 소나무에서 특히 잘 돋아난다. 폰데로사가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고 폐허가 된 숲에서 값비싼 폰데로사 목재에 못지않게 상업적 가치를 창발한 것이 바로 이 송이버섯이었던 것. 즉 송이버섯 풍년은 오염된 다양성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채집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을 피해 난민이 된 동남아인들로 구성된 이들 미엔인은 국가 경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돈도 없고 서구식 교육을 배운 적도 없는 이들 소수 민족 공동체는 어디든 특별히 소속감을 갖지 않는다.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정글에서 배운 능력을 활용해 공공망에서 벗어난 송이버섯 채집과 같은 일이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염된 다양성은 특수하고 역사적이며 항상 변화할 뿐 아니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여기에 자립적 구성단위는 없다. 오염된 다양성의 구성단위는 마주침에 기반한 협력”(76)이라는 것.
그렇다면 애나칭은 우리에게 마주침의 불확정성의 열린 상태가 어떤 것인지 왜 송이버섯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가. 균류학자 앨런 레이너는 “곰팡이의 성장에서 나타나는 불확정성이 곰팡이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라고 하는데 곰팡이는 마주침과 환경에 따라 일생 동안 계속 자라고 형태를 바꾸기 때문이라는 것. 하여 레이너는 우리에게 버섯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우리의 삶은 곰팡이가 지닌 불확정성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 단단히 포획되어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확정한 표준화하고 획일화한 방식의 삶의 형태와 나이듦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다른 형태의 삶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상상한다 해도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진보사관이 갖는 또 하나의 속성은 “확장성”이다. 이 확장성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어떤 사업적 프로젝트나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틀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다만 규모를 바꾸는 능력은 탁월하다. 규모의 외연 확장에는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조직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자기 변형이 없는 자본경제의 악덕은 무엇인가. 무차별한 확장성을 통해 존재 고유의 다양성을 말살하거나 몰아내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확장성의 좋은 사례로 16-17세기 유럽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실행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들 수 있다. 플랜테이션 농법은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농작물과 아프리카 출신의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조직되었다. 작물과 노예들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자립적이고 호환 가능한 단위가 되었고 노예들은 사탕수수와 마찬가지로 고립되어 추상적 노동으로 규격화되어갔다. 이 지구상에 있는 아니 지구상 너머의 모든 것이 확장성을 갖고 있으며 시장가치로 교환할 수 있다고 상정한 자본투자자들은 온갖 새로운 상품을 고안해내는데 골몰했다.
이러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사탕수수 클론과 달리 송이버섯은 다른 생물종과 변형적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땅속 곰팡이의 자실체인 송이버섯은 특정 나무, 즉 숙주나무와 상리공생 관계를 맺음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데 이 버섯의 곰팡이는 나무에게 양분을 찾아주고 자신은 나무로부터 탄수화물을 얻는다. 송이버섯 덕택에 숙주나무는 부엽토가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상리공생의 이러한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인간의 송이버섯 재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값비싼 송이버섯은 인간이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플랜테이션 농장과 같은 조건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 송이버섯에게 필요한 생장 조건은 “숲의 역동적인 다종적 다양성,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를 오염시키는 관계”이다. 동남아 난민 출신인 송이버섯 채집인들 역시 사탕수수 농장의 규율에 단련된 기계적이고 대체 가능한 노동자와 매우 다르다. 그들에겐 노동 규율에 따른 소외가 없다. 빈곤하고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떠돌며 살아가지만 자기 길을 찾아가는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오리건주 숲의 사례를 보면 결과적으로 비효율성을 극복하고자 과학적· 산업적 관리를 통해 나무를 재성장 시키는 방식은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 그곳에 투여된 자본과 노동력, 시간을 따져볼 때 오히려 비효율적임을 볼 수 있다. 폐허가 된 자리에 돋아난 송이버섯이 지역 경제에 목재만큼이나 가치있는 상업적 기여를 했다. 이처럼 마주침은 규정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조합이지만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냄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무지 맡고 싶지 않는 냄새가 되기도 하는 송이버섯. 사실 송이버섯 냄새에 대한 각 문화의 반응은 다를 수 있다. 버섯 냄새 하나에도 서로 다른 자연- 문화적 감성과 속성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버섯 안에서도 우리는 각기 다른 자연- 문화의 매듭, 즉 고유의 서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서사들은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오면서 하나의 문화적 속성이 아닌 오염을 통해 뒤얽힌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합되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버섯 안에 깃들어 있는 각자 다른 문화사와 자연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송이버섯과의 마주침을 통해 각자 맡은 냄새가 “같은 냄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다양한 문화의 고유성들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성으로 표준화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경제적 가치라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 완수 샘이 뽑아오신 경제 기사는 임수강의 “많이 빌린 탓? 빌려준 탓, 가계 부채 증가로 이익 얻는 자 누구인가”라는 기사입니다.
우리나라에 가계 부채가 경고음을 울린 지 오래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 비중이 OECD에서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라는데 이러다 우리나라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는 건 아닐까,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면 가계 부채를 걱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계 부채의 수준, 증가율, 소득에 대한 비율이 심각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을 보면 2011년 76.5% 수준이던 것이 2021년 103.6%로 10여 년 사이에 무려 30%가 증가했다.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 소폭 감소한 데 비해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는 심각하게 증가했다는 것.
그렇다면 가계 부채 증가 원인이 많이 빌려주기 때문인가, 많이 빌리기 때문인가. 가계 부채의 증가 원인이 한나라에 국한된 현상으로 볼 것인가, 세계적인 현상의 일부로 볼 것인가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일국적인 시각의 특징은 한나라의 소득 분배율의 변화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즉 노동 소득에 대한 분배율이 하락하면 소비 수요가 줄어들고 이러한 수요 부족은 빚을 내서 메울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가계 부채가 증가한다.
진보 진영이 주장하는 이러한 소득 불평등이 가계 부채의 증가를 가져왔다고 하는 시각,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주주가치 중심의 경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경영 기법은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축소되어 돌아가고 주주들에게는 더 많은 이윤의 증가를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최상위 계층은 더 많은 자산 투기를 통해 자본이 증대되지만 하위 계층은 부채로 부족한 소비 부분을 충당해야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부채주도 성장 전략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가계 부채의 증가 원인을 임금 분배율의 하락에서 찾는 시각이 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시각이 들어맞으려면 가계 부채를 짊어진 사람들이 주로 소득이 낮은 계층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관련 자료를 보면 가계 부채의 주된 계층은 저소득층이 아니라 고소득층이 독점하고 있다고 한다. 하긴 담보 물건이나 부채 상환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은 가계 대출 대상에서 제외된다. 가계 부채 증가를 세계 시장의 일부로 보는 시각은 달러 체제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이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임금 분배 몫의 상승에 있다고 하는데 사실 가계 부채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금융기관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금융기관의 역할에 대한 현대 금융 이론은 은행이 기업의 재무 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기업의 금융 기관의 대출은 여러 재원 조달 수단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대출을 받든 주식을 받든 기업으로서는 무차별하다는 것. 이에 따라 은행은 단순히 자금의 중개역할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은행들이 단순히 자금 중개만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은행들은 영업 이익을 위해 자금을 은행에 쌓아두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출처를 찾아 공격적인 영업에 나선다. 그리고 대출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금융기법을 발명한다. 새로운 차입자를 끊임없이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은행의 숙명이자 역할이 되었다. 이러한 은행의 영업 방식은 나중에 은행을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계 부채 증가의 원인은 금융기관의 영업 형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상업은행 대부분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시작된 변화이다. 이 은행들은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상업성과 수익성만을 쫓는 영업행태를 보였다. 기업 대출보다 개인 대출에, 개인 대출 가운데에서도 신용대출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담보대출에 주력했다. 이른바 부자 마케팅인 프라이빗 뱅킹 기법을 도입, 부유층 고객 중심의 영업 전략을 펴나갔다. 규제 당국은 금융기관 편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감으로써 은행들의 투기적 영업 확대 전략을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계 부채의 본질을 알려면 “누가 이익을 얻는가”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가계 부채를 늘리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줄어든 임금을 빚으로 보충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빚으로 자산을 늘리려는 목적이다. 이처럼 자산 구입 목적의 대출 시장과 생계비 목적의 대출 시장은 구분되어 있으며 자산 시장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는 점이다. 우리는 채무자 계층이 빈곤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채무자는 흔히 주식 소유자이고 채권 소유자”라는 어빙 피셔의 말은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사실로 고소득층이 돈을 빌려주고 저소득층이 돈을 빌리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은 금융기관과 부유층이 가계 대출로 이익을 얻기 위해 그들의 대변자들, 요컨대 언론이나 부동산 관련업자 등을 통해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고 유포한다는 점이다. 자산 가격이 오를수록 경제 전체가 이득을 얻는다는 자산 투기를 부추기는 방식의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데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정부의 지원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동원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례를 ‘하우스 푸어’라든지 ‘영끌론’을 통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많은 부분은 부유층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목적은 자산 구입을 늘리는 데 있다. 따라서 하우스 푸어나 영끌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 규제기관, 금융기관 등은 소수의 사례가 전체를 대표하는 듯 여론을 호도하여 정부 지원을 늘리는 근거로 삼는다. 마치 서민 대출자들을 위해 금리 부담을 덜어주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더 이상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방지해 주자는 것인데 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특례보금자리론, 안심 전환 대출 확대와 같은 시장 안정 대책들은 모두 그러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영끌이나 하우스 푸어를 근거로 담보대출 금리를 낮춰주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한다면 거기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일까? 최대의 혜택은 다주택을 보유한 부유층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계 부채 증가는 빌린 자의 탓인가, 빌려준 자의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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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시간에는 2부 ‘진보 이후, 구제 축적’을 읽습니다. 새로 등장하는 낯선 말인 ‘구제’(salvage)는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되는 가치를 써먹는 것을 의미"라고 합니다. 자본가는 식량조달 체계에서 생태를 개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환될 수 없었던 자연물, 노동, 그 역량 자체를 이윤창출의 목적을 위해 착취하는 구조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상품과 서비스가 글로벌 공급사슬을 통해 자본축적으로 향해가는 역사적 사례와 현실의 적나라한 현장에서, 송이버섯을 중심으로 한 각각의 다른 아메리컨 드림을 에나칭의 패치성은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지 궁금해지네요.
2부 발제는 현정샘께서 4, 5, 6장을, 7,8,9,10장은 소현샘이 맡으셨습니다.
후기담당은 소현샘이고요. 간식당번은 현정샘과 후남샘입니다.
경제기사는 경혜샘이 찾아주시기로 했습니다.
쌀쌀해진 날씨 감기조심하시고요, 다음시간에 뵈어요~
청샘, 꼼꼼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협력으로서의 오염이라는 언어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낱말, 문장들도 낯설기도 했지만요.
그래서 샘들과 함께 고른 낱말은 ‘물들다. 침윤. 배어들다. 스며들다. 뒤섞이다’ 등이었지요. 낱말의 규정성에 붙잡히는 습관적 사고작용 때문일까요. ‘더럽다, 지저분하다, 이물질..’ 등 오염에 대한 기존 관념이 저자의 해석을 쉽게 긍정하지 못하게 했어요. 저자는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라며, 새롭게 해석하는데 마주침을 통해 상호적이고 새로운 방향으로 변형되는 순간을 ‘오염’이라 합니다.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혼합된 채 살아가기에 더 이상 이 세계에서 순수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오염을 이야기하자’라니! 이 언어파괴가 우리의 상투적 의식을 강렬하게 깨우기 위한 것은 아닌가싶기도 했어요^^ 우리자신이 배치의 존재라 했을 때 먼저 그 불확정성에 대한 생각을 깊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나고 부딪치는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쉬운 일이 아니니 샘들께서 '기술'이라고 한 것 같다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우왕~ 바로 옆반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는 학인으로서, 복잡한 개념들을 공들여서 세세하게 풀어주신 후기에 감탄하고 갑니다~!
배치, 오염, 확장성, 불확실성 등의 개념들이 오리건주 숲과 송이버섯과 동남아시아 난민들과 뒤섞이는 여정은 생태 측면으로도 경제 측면으로도 생각거리가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길임이 점점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들의 문제로 가져오면 그렇지요. 댓글에 미영샘이 써주신대로, '오염'이라는 자연이 원리 자체에도 그 낱말에 대한 우리의 규정성들이 마구 덤벼들어 거부감이 들거나 역으로 낭만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정말로 우리가 불안정성 앞에서 겁먹고 도망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집요하게 깨물고 늘어지는 일뿐일텐데요. 어쨌든 함께 읽으니 덩달아 신이나네요!
우왕~~~ 저도 청샘의 글을 읽으며, 옆방의 열기를 느끼고 갑니다. '스미다. 얽히다, 섞이다, 침윤' 같은 일상어들이 훌륭한 철학 개념으로 거듭나는 것이 신기하고 신이 나네요. 자, 이 근사한 도구들을 가지고 일상을 어떻게 요리해볼까, 상상력이 마구 작동하는 것 같아요. 비-움 샘들을 뵌적이 언제였더라? 하지만 늘 공부를 같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당장 만나도 금방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