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
<세계 끝의 버섯>의 부제,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를 보는 순간 막막하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폐허라는 단어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폐허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보르네오섬에는 거대한 숲속과 그 주변에 공동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벌목 회사가 와서 숲을 베었고 나무들이 모두 사라지자 해체된 기계들을 산처럼 쌓아두고서 회사는 그 곳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공동체 주민들은 더는 숲을 통해서도, 회사를 통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죠. 그 폐허에서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은 기계를 분해해 금속을 조각내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애나 칭은 이 이야기를 통해 구제의 양면의 가치를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숲이 파괴되었음에도 그 사람들이 살아남는 방식을 찾아냈다는 데 마음 가득히 존경심”을 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금속 조각들을 다 팔고 나면 어떻게 할지, 그 폐허에 지속적인 생존을 가능하게 할 다른 것들이 충분히 있을지 걱정”하죠.(241~242쪽) 이와 똑같은 상황은 아닐지라도 이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훼손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것들과 협상하면서 말이죠. 2부에서는 이러한 생존 협상을 구제 축적에서 찾고자 합니다.
구제 축적, 참으로 낯선 단어입니다. 축적은 자본주의를 성장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자본 축적이 되어야 투자하고 투자에서 이윤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고전적 모델에서는 축적을 공장으로 설명합니다. 공장주는 노동자가 매일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보다 적은 돈을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남은 부를 모아 자신의 것으로 하죠. 공장주는 그 여분의 가치로 투자자산을 축적합니다.(119-120쪽) 하지만 애나 칭은 이러한 단일한 형식의 자본주의 축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자본주의적인 것에서도 축적은 발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가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상품을 만드는 능력을 이용해 축적하지만, 노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노동 능력은 자본주의 범위에 벗어나는 비자본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러한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자본주의 부를 모으는 데 이용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써먹는 것이 ‘구제’입니다. 노동 능력은 비자본주의적 가치이지만 자본주의적 가치로 변형되어 부를 축적하는 데 끌려들어 와 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죠. 이러한 과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구제 축적입니다. 구제 축적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낯섭니다. 자본주의 세계 어디에서나 자본주의적인 것과 비자본주의적인 것은 함께 존재하고 있지만, 비자본주의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소외는 삶과 관계의 얽힘이 풀린 형태로 무한한 축적과 확장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은 소유를 권력으로 바꿉니다. 권력을 가진 자본가들은 공동체와 생태계를 전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나 칭은 자본주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제에서 삶의 희망을 찾는 것 같습니다. 구제에는 세상의 얽힘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시장에 금속 조각을 내다 파는 구제 리듬과 송이버섯을 줍는 일에 얽힌 역사의 구제 리듬을 통해 생각하면 우리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삶을 살아가는 총체적 기관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자산으로 바꾸기 위해 생활환경을 번역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무리의 기술자와 경영인이 불쾌한 부분을 제거하고 그들에게서 권력이 나오도록 하죠. 그래서 자본주의를 후원하는 모임은 개방형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본주의 가장자리에 있는 오픈티켓의 버섯 사냥꾼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삶은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살아 남고 미국 시민권과 계속해서 협상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자유에 전념하며 살아갑니다. 생계의 패치들이 배치되는 과정에는 “상의하달식 규율이나 동기화 없이, 그리고 진보에 대한 기대 없이,”(244쪽)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글로벌 경제를 구성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적 형식과 비자본주의적 형식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모양을 빚어주고 서로에게 침투하는 세상의 얽힘을 이야기하는 자연사의 서술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2. 경제기사 톺아보기
비정한 보수, 따뜻한 보수/한성안/경제학자/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금 현실에서 진보에 대한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 기사내용이었습니다. 코로나19때 전국민재난지원금이 지급되는 과정에서 선별복지가 아닌 보편복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보의 비정함을 보았고, 도대체 진보가 뭐기에 대한민국 진보가 이토록 비정한지를 물었습니다. 도덕적 가치 위에 진보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유례없는 실업자와 불안한 비정규직 급증, 부의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으로 도덕적 감수성이 사라지고 있어 도덕적 가치를 말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하는데요, 동의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도덕적 가치를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방식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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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은 3부 “교란에서 시작되다”를 읽습니다. 저자는 층층이 겹치는 ‘송이버섯-소나무- 재선충이야기’로 대충 보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삶의 모습을 자세한 관찰과 현장연구를 통해 ‘화음과 불협화음의 조율과 역사로 이해되는’ 관점의 차이를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일본 사토야마 산림지의 재생과정, 집체화에서 탈집체화에 따른 중국 윈난성숲의 변화, 핀란드 북부의 산림관리 등 숲의 재생과정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의 독특한 역사적 패치성을 갖습니다. 저자는 패치워크처럼 “의도치 않은 디자인”이 된 풍경들이 “교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애나칭이 의미하는 교란은 또 지난 시간의 ‘오염’처럼 우연과 불확정성으로 끌고 가 우리를 혼란하게 할 것이 틀림없겠는데요. 그가 실천의 중심으로 삼는 ‘민족지’와 ‘자연사’가 듬뿍 담겨있는 3부에서는 어떻게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배치를 만들어가면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지 각기 다른 버섯숲의 역사로 깊숙이 들어가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3부 발제는 완수샘(11장~14장)과 미영샘(15장~17장)이, 후기는 완수샘께 부탁드립니다.
간식당번은 장청샘과 미영샘입니다.
경제기사는 장청샘께서 준비해주십니다.
일교차가 심해집니다. 감기조심하시고 다음시간에 뵈어요~
소현샘, 후기 감사합니다~ 바쁜 일정에도 일찍 올려주셨네요^^
자본주의를 알아가다 보니 도리어 모든 것을 경제의 틀로 해석하고, 비판하면서도 뭔가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애나칭의 글을 읽으면서 ‘구체성과 상상력의 부족으로 인한 일반화 과정(요약하기)’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요. 증여론을 통해 ‘상호호혜와 선물의 영’과 같은 원시공동체의 삶도 만나기는 했지만, 우리시대의 모습, 혹은 나의 모습을 섬세하게 다른 눈으로 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저자의 눈은 버섯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 숲과 버섯(비인간)의 일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자본주의시스템과 비자본주의적 관계로서 서로 얽혀있는데, 우리는 ‘자본주의체제에 휩쓸리고 만다. 매몰되고 말았다’며 결국은 식민지형태가 아니냐, 결국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냐고 해석해버리고 만 것이었죠. 그 발생과정을 면밀히 추적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본다면 버섯채집자의 모습은 모두 버섯산업의 첫 번째 생산자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각각 다른 경험의 배치 속에서 숲으로 온 그들이 얻은 ‘자유’에 대해서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선점하고 번역하는 언어가 우리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라는데 초점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계속 저자는 불확정성을 강조하며 기존의 의미에서 달아나는 언어사용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요? 오염에서, 구제로, 자유로..
정말, 무기력과 답답함에서의 해방은 다르게 의미화할 수 있는 ‘알아차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소현샘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