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세계 끝의 버섯 3부를 읽었습니다. 3부의 제목은 ‘교란에서 시작되다’이고 부제는 ‘의도치 않은 디자인’입니다.
교란은 그리 어려운 단어는 아닙니다. 환경조건의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동일한 사건도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방글라데쉬에서 홍수라고 판단되는 수위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인간의 손을 간지럽히는 빗방울이 벅스 라이프 세계에서는 위험한 장매물이 됩니다. 책에서 보여주는 교란에 대한 설명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동식물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산불이지만 어떤 소나무에겐 산불이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미국 오리건주의 폰데로사소나무는 대부분 산불에도 타지 않고 견디며 산불이 경쟁하는 나무를 없애주는 이로운 작용을 합니다. 또 로지폴소나무는 산불에 아주 잘 타나 탄 땅에서 어떤 나무보다도 먼저 싹을 티웁니다. 같은 산불을 어떤 나무는 성장으로 또 어떤 나무는 번식의 기회로 사용합니다. 포자 이야기는 또 얼마나 흥미로웠던지요. 버섯 포자가 바람에 날려가 성층권이 포자로 가득차 있어 세계 곳곳에서 버섯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다른 과학자가 말하며, 유럽, 아시아, 미국에 존재하는 송이버섯이 동일 종인지에 대해 여러 학설을 열거합니다. 모두가 일리가 있는 학설들인데 계속되는 학설로 이제 혼란스러워집니다. 백만년이나 천만년에 한번은 적도를 가로지르는 대형 쓰나미가 발생하고 그 파도 끝에 약간의 흙과 나무에 동물이 매달려 와서 종의 전파가 될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면 같은 종이란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문제가 나오고 교배해서 생긴 자식이 다시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면 같은 종이다라는 상식적인 정의로 시작해 DNA를 사용하는 최근의 분류방법까지 소개되지만 이 균류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임이 드러납니다. 같은 버섯에서 생겨났더라고 서로 다른 포자는 서로 다른 게놈을 가질 수 있다고까지 하니 대체 뭘 기준으로 분류를 해야할지를 모르겠는 겁니다. 과학이 일반적인 법칙을 통해 특수한 상황까지 모두를 그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지만 생명세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먼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책에서는 똑같은 갈퀴질이 일본에서는 송이버섯 생육에 이로운 것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숲에 대한 사람의 교란도 일본에서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버섯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에 따라 다른 시점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보통 어려운 책은 계속 어려운데 이 책은 일부의 어려운 이야기와 다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아는 부분도 상당량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려운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 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두고 읽을 책입니다.
저는 14장의 미국 오리건주 클래머스 인디언 부족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만 사천년동안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어 살던 그들의 숲을 미국 정부가 명목상의 보상만 한 채 빼앗아가고 나무를 다 배어난 후에 되돌려 주었을 때 인디언들은 산림관리 전문인을 고용합니다. 조상 대대로 해왔던 숲 관리 기법도 정부가 화전을 금지하고 세월이 꽤 흐르자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화전은 단순히 작물을 기르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지만 불을 다루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부엌 가스불을 인덕션으로 바꾼 후에 불을 보는 것은 일년에 가족 생일 케이크에 불 붙일 때가 다인 것 같습니다.
인터루드 제목 춤추기는 숲의 리듬과 딱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춤이 연상되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일본인 히로는 버섯딸 때 해마다 땃던 수많은 곳을 목록으로 만들어 기록해둘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그 장소에 도착하면 버섯을 발견할 당시의 세부적인 것들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또렷해지면서 몰려온다. 나무가 기울어진 각도, 송진이 있는 덤불의 냄새, 빛이 비추는 모양, 흙의 질감까지 기억난다. 나는 종종 그렇게 기억이 몰려오는 것을 경험했다.(435) 장자 양생주편 포정해우에 나타나는 신(神)을 통해 소를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대목에 포정이 소를 잡는데 상림(桑林)의 춤과 부합한다고 구절 역시 춤(리듬)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경제기사로는 프레시안에 성공회 대학교 황준서 강사가 기고한 ‘지구가 권리를 가지는 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었습니다. 부제가 ‘확장되는 자연의 권리…인간중심 딜레마 넘어서기’인 것처럼 자연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결국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권리를 말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의 권리가 이미 심각하게 손상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생태계와 동식물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인간만의 기준과 방식을 창조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는 오로지 인간만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고 봅니다. 자연에게 권리를 준 예의 하나로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이 있는데 뉴질랜드 정부와 마오리족이 구성하는 신탁관리위원회에서는 황가누의 강의 통일성을 해치는 국가개발사업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의 권리와 인권이 충돌하는 지점이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소유권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소유권과 자연의 권리가 충돌할 경우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자연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 및 누가 어떻게 자연을 대표할 것인가 등의 난제가 존재합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문제인데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의무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사를 읽고 나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가 밤에 낙동강을 맨몸으로 건너느니라 힘들었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는 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크게 소리쳐 건너편 나룻배를 불러야 했던 시절 이야기 등 예전에는 강을 건너는 것이 맨몸이거나 노를 젓는 신체를 통해 이루어진 일들이었는데 이제는 다리와 보트가 대신합니다. 그리고 낙옆이 수북히 쌓인 숲에서 느타리 버섯을 똑하고 따던 추억을 기억하시는 샘, 나무에 정령이 있다는 것이 어렸을 적에는 억지스럽게 여겨졌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오히려 없다는 것이 억지스럽게 여겨지신다는 이야기도 전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자리였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맺기가 없이 자연을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세계 끝의 버섯은 이제 마지막 4부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숲과 송이버섯과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합니다. 발제와 후기는 경혜샘에게 부탁드립니다. 간식당번은 저와 소현샘입니다. 경제기사 돞아보기는 한주 쉽니다.
다음주(11월 10일)는 채운샘의 강의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교란’이라는 말은 우리를 혼돈에 빠뜨렸어요. 황소개구리, 붉은귀거북, 외래종나무들 같은 교란종이 고유의 생태에 위기를 초래한다고 떠들썩하게 알고 있었지요. 애나칭은 이질성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부숩니다. ‘무엇인가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 ‘인간중심에서 비인간과 관계’를 새롭게 생각하게 합니다. 주체, 관계, 환경.. 의도치 않은 우연에 눈감으며 단일한 배치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 모두가 배제되고 소외됩니다. 각각의 다양한 삶이 얽혀있는 스토리를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교란과 조율이라는 개별성의 역사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이지, 여기에 보편적 관점은 무의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자본주의 폐허에서 길어올려야 하는 귀한 일이라는 것.
완수샘, 생명선을 연결하는 춤추기에서 ‘포정해우’를 떠올리시다니요!^^ 신묘한 양생의 도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감각, 움직임, 방향설정을 통해 생명선을 추구한다'. 우월한 인간이 짊어지는 무거움이 아닌, 인간과 비인간, 사물의 순환으로 이해되고 리듬으로 감응된다면 이것이 정말 춤추기군요. 숲을 알아차리는 그들만의 방식.
완수샘~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