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 4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애나 로웬하웁트 청
진보 이야기를 빼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 된다. 폐허는 버려졌다는 공포를 담아 우리를 노려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다행히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일행이 함께 있다. 파괴된 우리 풍경들의 제멋대로 자란 변두리를-자본주의적 규율, 확장성, 그리고 자원을 생상하는 방치된 플렌테이션 대농장의 가장자리를-여전히 탐험할 수 있다. 우리는 잠복해 있는 공유지의 냄새를 –그리고 찾기 힘든 가을 향기를-여전히 붙잡을 수 있다. (497쪽)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다행이다’라는 기분을 가지게 되는 경험이 얼마나 될까요? 자본주의를 공부하는 내내 가졌던 무거움과 답답함, 막연함은 어디서 오는 건지,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제도 밖은 상상할 수 없는 건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기력한 자기를 보게 되는 식이었구요. 그렇지만 알아채지 못했을 뿐 다종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자본주의 바깥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이야기를 애나 청이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세미나를 한 시간 하고 난 뒤에 채운 샘 강의를 들으며 송이버섯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애나 청은 근대적인 인간과 남성 중심 서술을 모두 넘어서서 이야기를 다양한 층위에서 들려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학자들이 연구 대상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방식, 학자들끼리 연대하는 연구와 글쓰기 방식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연구 방식과 틀을 한정 지어 놓고 그에 부합하는 결과들을 일관되게 엮어내는 근대적 방식, 인간이 문제이니 인간만 없으면 된다거나 인간이 원인을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인간 중심 방식은 자본주의와 생태주의에 부딛히고 마는데 이는 결국 순수를 추구하는 관념주의나 부식되지 않는 무균질 세계를 상정하게 만듭니다. 지금 보이는 악은 지금 당장은 덜 나빠 보이는 악으로 막고, 자본이 가져온 문제는 또 다른 자본으로 막고 보자는 식의 해결책을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송이버섯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와 그 이후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까요? 원자폭탄이 떨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폐허에서 뾰족이 다시 솟아난 송이버섯은 그 어떤 폐허라도 전무인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폐허에 남은 조각들인 패치들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낙담이나 기대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들이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겠죠.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다종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호기심을 키우는 일입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때로 자연을 다시 돌려놓으려는 진보적 열망이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사는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펼치는 다양한 관계망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리듬을 찾아야 합니다. 채운 샘께서 기쁨을 직조하는 일이라 표현하셨는데 그대로 와 닿았습니다.
애나 청은 기존에 있던 단어를 다르게 써서 기존 의미를 탈각시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교란과 오염이라는 말이 예입니다. 종과 종을 어지럽히고 나쁘게 만든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두 단어는 애나 청에게 와서 서로 다른 종들을 살게 만드는 생이기도 하고 사이기도 한 얽힘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 존재 기반이 불안정정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어지는 성장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정성, 뒤섞임(오염), 평형 깨짐(교란)이 우리 존재의 기반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번역이라는 말도 저한테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자본주의인 것은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이라기보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번역되고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번역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너무 익숙한 번역을 다시 새롭게 바꾸려면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또다시 숙제로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지는 않아 다행이라 할 수 있겠죠.
세미나에서도 정확하게 풀리지 않았던 ‘잠복된 공유지’는 강의를 듣고 명확하게 의미 지을 수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만드는 외부, 공간에 대한 다른 용법! 예를 들자면 광화문은 평소에 차들이 다니는 도로지만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하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활동을 함으로써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공간들이기에 이런 장소는 잠복되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런 공유지를 드러나게 하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게 우리 몫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시스템 내부에서 시스템 바같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의식을 놓지 않고 나누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계량화하고 –이를테면 가격표-그렇게 과정이 생략된 채 마지막에만 만나게 되는 것이 애나 청이 말하는 소외입니다. 서로 만나게 되는 과정과 그 안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얽힘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정형화하기 힘든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고유하고 자유로운 리듬이 만나는 수많은 교차점을 잘 알아차리기 위해, 만들기 위해 세미나는 계~속 되어야겠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