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적BOOK적은 규문각에서 격월로 주제를 달리해 책을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책을 읽고, 리뷰를 함께 나눠 주신 분들 중 심사를 통해 상품을 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자세한 공지는 이쪽에서!)
BOOK적BOOK적 추천도서 2 <굶주림>
“굶주림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
크누트 함순, <굶주림>, 창
일자리를 찾아낸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아무도 모르리라! 수차례의 퇴짜, 막연한 약속, 냉정하기 짝이 없는 ‘딱지’, 부풀어 올랐다가 실망으로 바뀌는 희망, 매번 허사로 돌아가는 새로운 시도 등에 나는 기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현금 출납계원 자리를 지원했지만, 지원이 늦어버렸다. (p.17)
절망에 찰 때면 흔히 시사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주제들을 짜내곤 했는데, 그것들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했으면서도 한 번도 신문사에 채택된 적이 없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것을 공략하였다. 편집부장들의 퇴짜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은 적은 드물었다. 마침내 언젠가는 성공을 거두게 되리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때때로 운이 좋아서 기사가 제법 잘 되어갈 때면 한나절 오후 동안 일한 대가로 5크로네를 벌기도 했다. (p18)
<굶주림>이라고 하니까.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실제 저자 자신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더군요. 그래서 크누트 함순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니 만큼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글 속의 주인공은 신문에서 채택될 만한 글을 써서 받은 원고료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해나갑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매번 퇴짜를 맞죠. 그러니 글로 벌어먹기는 글렀고 당장의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돈벌이를 찾아보지만 그마저도 그는 매번 퇴짜를 맞거나 예기치 못한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일자리를 놓치고 맙니다. 읽는 내내 저 또한 연구실에서 매번 쓴 글을 퇴짜 맞았던 저의 처지가 떠올라서 남일 같지가 않더라구요. ^^
내 얼굴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정말로 죽기 시작한 것인가? 손으로 두 빰을 만져보았다. 말랐다. 물론 나는 말라 있었다. 내 두 뺨은 두 개의 거지 쪽박처럼 안이 움푹 패어 있었다. 맘소사! 자시 살살 걷기 시작했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 상상도 못하게 말라 있는 모양이다. 두 눈이 머리통 속으로 틀어박히고 있었다. 내 몰골은 어떨까? 그저 굶주림 때문에 산 채로 이렇게 모양이 일그러지도록 자신을 버려두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못할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분노에, 마지막 격노에, 마지막 경련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p.137)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은 처음에서 끝까지 오직 한 인간의 굶주림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합니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죠. 글 속에는 그의 학력이라든가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나름 지식인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배운 사람으로서 나름 도덕을 지키는 품격 있는 사람임을 자처합니다, 그러나 극한의 굶주림 앞에서 그 품격을 지켜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굶주림으로 인해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느끼죠. 그 무너짐, 정신 착란, 정서불안이 글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다시금 정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기분인가. 내 빈 주머니는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보니 즐거웠다. 잘 생각해 보면, 그 돈은 사실 내게 남모르는 많은 근심을 안겨주었다. 나는 냉혹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내 정직한 천성이 완벽하게 비천한 짓에 저항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이 훌륭했다고 생각되었다." (p.187)
가장 재미있는 것은 최악의 굶주림 속에서도 자신의 품격이나 자신의 도덕성을 잃지 않기 안간힘을 쓴다는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남이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신의 윤리 때문에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도 스스로 괴로워하는 지점이 이 글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가령 글 속의 주인공은 잡화상 점원이 실수로 내어 준 적지 않은 금액인 잔돈을 받고는 잠시간 기뻐하며 굶주린 속을 채우나 급기야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됩니다. 점원이 모르고 준 돈을 돌려주지 않고 나와 버린 자신이 도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는 그 돈을 몽땅 길가의 자판상을 하는 노인에게 줘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자책의 짐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다시 정직한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환호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이야기 속에 매번 등장합니다. 지속된 굶주림으로 인해 이성적 상태와 정신적 착란 상태를 오가는 것이죠. 그런 육체적 극한의 상태 이른 인간의 심리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사실 그다지 굶주리는 일은 없죠. 하지만 내가 만약 굶주린다면, 저 주인공처럼 그런 상태에 처한다면 하고 감정이입을 하고 읽다보면, 저런 상태에 이를 수도 있겠구나하고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예전에 제가 사정이 생겨 부득이하게 지인에게 목돈을 빌려야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자존심을 내려놔야했죠.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의 생각과 감정들이란, 이 책의 주인공 또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아는 지인을 찾아가 퇴짜 맞고 모르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등의 일을 겪으면서 오만가지의 감정들이 그의 몸과 정신을 관통합니다. 저는 그런 심리 상태들의 묘사가 마음에 와 닿아 좋더라구요. 그리고 주인공이 겪는 심리상태가 꼭 저희 현대인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굶주림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사람의 품격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술술 읽히는 책이니만큼 샘들도 한 번 읽어보시면 저처럼 어떤 인간적인 부분에서 공감하고 감응하시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