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적BOOK적은 규문각에서 격월로 주제를 달리해 책을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책을 읽고, 리뷰를 함께 나눠 주신 분들 중 심사를 통해 상품을 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자세한 공지는 이쪽에서!)
BOOK적BOOK적 추천도서 2 <시간의 서>
“시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24절기”
위스춘, <시간의 서>, 양철북
중국 문명의 지혜라 할 만한 절기는 중국인이 오랜 세월 밝혀온 ‘존재와 시간’이다.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내려온 보편화된 시대에 절기 혹은 시간 자체로 돌아가는 것은 자신의 기개와 절도 그리고 정신을 반추하는 데에, 자아 성장에, 시간의 긴 강이나 시간의 암흑에서 더 많은 것을 낚아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지식이 대규모로 일반화되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지식의 스트레스와 유혹에 직면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길을 잃었지만, 시간이나 절기로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지식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와중에 믿을 만한 좌표를 만날 수 있으리라. 과거의 농민처럼 시간과 생명의 순환을 느껴보라. 시인처럼 ‘시간의 장미를 감상해보면서 시간이라는 식량을 수확해보라. (p.18)
<시간의 서>는 2월 4일 입춘에서 시작해서 1월 22일 대한까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과는 총 24절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평소의 저는 어른들이 “입춘이다”, “하지 감자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야지“라고 하면 그러려니 했지. 그 입춘, 하지, 동지가 언제인지 또 그 절기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몰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고 작물이 나는 것을 보는 농부의 입장이라면 모르겠지만 도심에 살며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지내는 저로선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의 서>를 읽으며 이런 계절의 감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을 떠올려보면 계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쩜 도심이라는 공간에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절기에 대한 감각이 아닐까요. 지식의 바다를 표류하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좌표가 되어줄 거라는 글쓴이의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갈피를 못 잡았던 저로선 조금 힌트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24절기와 같은, 자신의 사는 시공에 대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매일을 똑같이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도 재작년 어떤 절기의 변화 속에서 살아갔는지, 그리고 어떤 시공에서 살고 있는지 느끼며 살아가겠죠.
청명 절기의 세 후는 이렇다. 오동에 꽃이 피고 들쥐가 메추라기로 변하며 무지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청명 절기가 관할하는 보름 동안 첫 번째 닷새에는 오동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두 번째 닷새에는 전형적 물상인 들쥐가 점차 뜨거워지는 태양의 기를 피해 동굴로 숨어드는 반면 양기를 좋아하는 메추라기가 모습을 드러내 활동하기 시작한다. 들쥐가 메추라기로 변한다는 건 음기가 자취를 감추고 양기가 왕성해졌음을 말한다. 세 번째 닷새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물상은 무지개의 출현이다. 무지개는 음양이 만나는 기로 그 안에는 순전한 음도, 순전한 양도 존재하지 않는다. 엷게 깔린 구름 사이로 해가 드러나거나 해 가운데로 비 그림자가 지나가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 (p.96)
옛사람은 보름간의 소서 절기를 관찰하면서 역시나 세 가지 물후를 발견했다. 일후에는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이후에는 귀뚜라미가 처마로 깃들며, 삼후에는 매가 난폭해지기 시작한다. 소서 시기에 대지에는 시원한 바람 한 점 없고 바람에는 죄다 열기가 스며 있다. <시경>에는 귀뚜라미를 이렇게 묘사한다. “7월에는 들판에 8월에는 처마에 9월에는 문에 있다가 10월에는 내 침상 밑으로 파고드네” (p.197)
<시간의 서>는 각 절기 마다 기후, 풍습, 철학, 양생, 정치, 문학 등이 어떠했는지를 다룹니다. 읽다보면 옛 사람들의 삶에서 절기란 매우 중요해서 그 절기를 통해 미리 기후를 예측해서 어떻게 농사를 준비해야하며 향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특히 물후라는 것이 나옵니다. 물후란 “철이나 기후에 따라 변화하는 만물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그 절기가 되면 나타나는 자연의 특색인데요. 가령 청명에는 오동 꽃이 피고, 들쥐가 메추라기로 변하며, 무지개가 보입니다. 소서에는 더운 바람이 불고, 귀뚜라미가 처마에 깃들며, 매가 난폭해지기 시작하죠. 엣 사람들은 매 절기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만물의 특색을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한 절기에서 다음 절기로 넘어가는 것이 보름입니다. 그러니까 보름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만물의 움직임을 몸으로 감각하며 살았던 것이죠. 이렇게 만물의 변화를 몸으로 감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의 서>에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죠.
오늘은 대서절, 나는 집으로 돌아가련다.
오늘은 일력, 그 역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이 고향의 대서절은
산비둘기가 비를 부르는 시절이라고 한다.
재서가 되면 호수에 자색 가시연꽃이 흐드러지게 떠다닌다.
대서는 바로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련다. 오늘은 대서다.
우리 집 정원의 수세미가 나무를 타고 오르고
은발의 작은 조롱박 서너 개
넝쿨 수염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처음 결실한 오이 녀석 올리브처럼 작다.
아! 올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오늘은 대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련다!
제비가 철다리 꼭대기에서 제잘댄다.
기울어진 머리, 맨발의 시골집 여자가
문 앞에서 연방(蓮房)을 사라고 외친다. (p.217)
<시간의 서>을 읽으며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 절기에 쓰여 졌거나 그 절기를 묘사한 시를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위 시는 <대서>라는 시인데, 원이둬라는 시인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고향이 그리워하며 쓴 시입니다. 대서는 몸으로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절기 가운데 하나인 만큼 이때에는 신체 언어가 풍부해진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시인은 대서라는 절기 중에 이국땅에서 고향의 대서를 떠올린 듯합니다. 미국의 대서랑 고향 땅의 대서는 다르겠죠. 그는 그 차이를 몸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절기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면 시인은 미국이었든 그의 고향 땅이든 그러려니 하고 그 절기를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시인이 되고 싶었답니다. 점점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숫자로 된 시간에만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서>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야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숫자로 된 시간에만 얽매이지 말고 정말 그 시간이 가져다주는 의미, 그 시간에 벌어지는 풍경에 눈과 귀를 열어 몸으로 감각하며 살면 어떨까요. 그러면 좀 더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능동적으로 변하게 되지 않을까요. 가령 ‘아. 오늘 며칠이니까. 이제 경칩이 지나고 춘분이 시작되겠구나. 춘분이야말로 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했으니 날이 따뜻해지고, 봄꽃이 피고, 세상이 파릇파릇 물들겠구나’ 생각하겠죠. 몸으로 그 시간들, 절기들의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시간의 서>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했죠. “오늘 소서에 초복이에요. 아버지랑 삼계탕 드세요!” 전 같으면 어떤 날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 갔을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의 서>를 읽는 덕이었죠. 여러분도 <시간의 서>을 읽으시고 그 덕을 보심이 어떠신지요.^^
우아아~~
아이들이 그때그때의 공기의 감촉과 나무의 소리와 흙의 질감, 비의 향기가 다름을 느꼈으면 해서, 절기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저도 아는 바가 별로 없어, 할 말이라고는 창문 열고 바람을 좀 느껴봐 밖에는 없었는데…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지금의 저에게 꼭 필요한 책이예요~ 감사해요!❤️
우리 훈샘 고등학교 때 꿈이 시인이었는지 몰랐네요.. 낭필에서 미현샘과 함께 시를 인용하신 부분에서 감응되어 미약하게나마 시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ㅋㅋ 그리고 나서 책에 나오는 시 부분을 읽을 때 전과는 다르더라구요. 뭔가 진심을 담아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 ㅋㅋ 이제 시와 친해져야 하는 것인가?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