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4주차(10/9) 공지
추석 명절은 편안하셨나요? 비 온 뒤라 더 청명한 하늘과 달을 볼 수 있었는데, 하얗고 둥근달은 보셨겠죠? 명절 핑계 대고 팽팽 놀다 마음의 짐처럼 안고 있던 공지를 이제 씁니다. 써 놓고 맘 편히 놀아야지, 라는 계획은 왜 번번이 깨지는 것인지...그래도 마음만은 그랬다는ㅎㅎ
지난 시간에 <돈키호테> 1권을 다 읽었고요. 역사는 다음 시간에 시험을 보기로 했지요. 왜냐하면.... 제가(+예쁜 누구도) 주역 에세이가 겹쳐 역사 과제를 안 올려서 말이죠. 연좌제에 걸려 모든 샘들이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외울 것 무지 많던데, 벼락치기 돌입해야 할 판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마음으로....ㅠㅠ
그래도 이번 시간에 저희는 오디오가 겹치도록 열띤 토론을 벌였었죠, 다양한 주제들이 오고 갔습니다. 광기에 대별되는 보편성이라는 문제, 역시나 실제와 허구의 문제, 이야기/ 서사의 문제 등등. 저희가 가져온 주제들을 포함해 샘께서 <돈키호테>1권에 대해 정리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잎으로 2권을 읽는데 참조하면 좋을 거 같아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다성성(多聲性), 근대 소설의 탄생
돈키호테를 읽다 보면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 포로들의 목소리, 양치기의 목소리, 산초의 목소리, 돈키호테의 목소리 등 다종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사랑 이야기 하나에도 각자의 입장에서 모든 이야기를 쏟아 놓게 하지요. 이에 대해 샘께선 바흐찐의 논지를 빌어 여러 질감의 다양한 목소리인 ‘다성성’으로 설명을 해주셨어요.
다성성은 등장인물들을 작가가 하나의 관점에 귀속시키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자유롭게 내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한순간에 다양한 소리가 압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과 상황이 공존하고 있지요. 그래서 목소리는 중첩되고 뒤섞여 있습니다. 주연과 조연의 목소리,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목소리, 산초와 돈키호테의 목소리, 이야기 속의 이야기, 1,2권의 뒤섞임, 원작과 위작의 뒤섞임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등장 인물도 작가가 운명을 결정짓지 않고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하지도 않습니다. 요약이 어렵지요, 그래서인지 저희 토론에서도 읽는 관점에 따라 상반된 입장이 자주 드러났는데요, 제대로 토론을 하고 있는 거였네요.
통상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기원으로 본다고 하는데요, 근대 소설은 19세기를 전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의 소설들이 전승되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기록하는 것에 그쳤다면, 돈키호테의 특징은, 근대 이전의 기사 소설과 삶의 방식 등을 말하더라도 ‘일관성’을 가지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중첩되어 있지만 무엇을 중심으로 읽는가에 따라일관성이 있으며, 관점에 따라 다양한 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저희 토론에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말을 나누었는데요, 이것이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고, 다양한 사유를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구조나 내용적 측면에서도 실제 역사적 사실이나 작가 자신의 경험, 이야기 당시 유행하던 소설에 대한 비평 등이 혼재되어 장르 역시 규정할 수 없게 합니다. 해서 텍스트는 유한하지만 해석의 다양함으로 무한성을 가지게 되는 특징 역시 짚어주셨죠. 이런 특징들 때문에 토론에서도 ‘실제와 허구’ 같은 주제들이 계속 나오게 되었고, 이번엔 특히 ‘이야기’에 대한 토픽들이 꽤 있었습니다. 두 질문에 대해서도 한 번 짚어주셨습니다.
환타지와 리얼/ 픽션과 논픽션/ 광기와 정상성
* 꿈은 환타지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희는 그저 웃었지요. 환타지와 실재를 가르는 기준이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도요. 이 질문은 소설을 읽을 때도 장자를 읽을 때도 늘 던지게 되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꿈과 같은 것, 만화나 동화 속에 살아있는 인물과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는 효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렸을 땐 훨씬 더 그 경계에 있었던 것 같고요, 어렸을 땐 빨간 모자의 호기심에 안타까워하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는 히스클리프의 복수에 분통을 터뜨렸죠. 분명 환타지가 제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거죠. 이야기는 환타지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 ‘작동’하게 합니다. 샘은 ‘철학적’으로 보면 실재와 대립되는 것은 없다고 하셨죠. 어떤 존재든 인식하는 방식과 관계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실제 아닌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꿈도, 무의식도 작동한다는 측면에서 모두 실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환타지가 허구는 아니고 실재가 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타지와 리얼이 인식의 측면이라면, 허구와 사실은 소설의 관점에서 다시 얘기할 수 있습니다.
* 허구와 사실, 즉 픽션과 논픽션은 이야기의 영역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예를 들어 이해해 보면, 좀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표로 역사 공부를 하고 암기도 하지만 그 팩트만으로는 전반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파편들을 엮어 인과를 만들어야 알 수가 있죠. 전쟁이 났다면 그 인과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자의 시선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요. 이렇게 보면, 허구와 사실도 경계를 짓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인과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실적인 것을 환기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고. 이야기에 기대지 않은 사실이란 것도 없습니다. 이야기와 역사처럼 소설과 역사도 나누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누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돈키호테> 안에도 레판토 해전에 참여한 포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해전은 세르반테스도 참전한 전투이고 그는 여기서 포로로 잡혀 3년간이나 노 젓는 노예 생활을 했지요. 돈키호테 읽기는 그래서 더욱 모호하고 어렵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그간 계속 질문해 온 ‘광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스스로를 미쳤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미친 걸 아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광기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근대는 광기를 병으로 판단하죠. 우리 시대에 정신이 돌았다고 하는 건 병이자 비정상적인 격리의 대상이 됩니다. 푸코는 의학 권력이 이를 규정한다고 비판하죠.
18세기 이전에는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위를 광기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성이라는 범위가 매우 넓지만, 광기는 상식 밖의 것이자 더 나아가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들’을 의미했다고 하죠. 미쳤다는 게 정상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신이 몰라도 되기 때문에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를 알고 있는 것은 신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가 됩니다. 신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 이외의 다른 생각을 ‘어리석음’,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신의 명령을 넘보는 자. 연금술 같은 비의적 지식을 탐하는 것, 이것을 광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광기와 마녀가 거의 동의어로 쓰였고, 이번에 읽은 역사 편에도 나오지만 중세 말에는 이단에 대한 단죄와 마녀 사냥이 동시에 일어났죠.
우리도 <돈키호테>를 읽으며 거의 매주 ‘광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요. 샘께선 광기가 무엇인지를 논하기 보단 돈키호테의 광기를 마주하면서 우리가 광기를 가르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죠. 돈키호테를 이해하는데 이 질문도 좋았는데요, 인간형을 말할 때 많은 소설 속 주인공이 있지만 유독 돈키호테형/ 햄릿형 이라고 유형을 나누는데 왜 이런 인간형을 나누는지 질문해 보라는 거였어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정상성의 범주에 가둘 수 없으며, 우리는 그 정상성을 벗어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를 가리켜 돈키호테형이라고 말을 합니다. 샘께선 공자도 돈키호테형 아닌가? 하셨어요. 써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주나라의 찬란한 문화 유산을 그리워하며 주유를 나섰던 공자, 이제 더 이상 기사소설 같은 건 없는 시기, 편력기사를 자처하며 모험을 떠난 돈키호테, 이렇게 비교하니 광기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비의에 접근한 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화의 의미
이쯤에서 이번 주 토론의 가장 핫한 주제였던 ‘이야기’하기에 대해 정리를 해야할 것 같네요. 이야기가 인간 삶에 왜 필요할까요?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려면 사회적인 코드가 필요하고, 이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죠. 우리에겐 사회적 페르소나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구성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에겐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페르소나의 뒤엔 인류 전체의 무의식과 무생명의 무의식까지를 포함하는 존재로서의 내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살기에 다른 무의식을 모를 뿐입니다. 무의식의 영역은 인간의 보편적 삶에 금지하고 있는 것들로 차 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뭐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내 안의 그림자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죠. 그러나 그것을 왜 인정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사회적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균형을 잃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선 배제와 혐오를 작동시키게 됩니다. 인간 사회란 언제나 어떤 일도 일어난 수 있는 사회란 걸 이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사회적 자아에 질식해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신의 반대가 아닙니다. 이런 악마의 역할을 돈키호테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를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지 새삼 더 어려워지는데요, 샘께서 제시하신 돈키호테 읽기를 참조해서 읽어보도록 하죠. 돈키호테의 모든 경험을 모험이라고 할 때 이 악마의 역할과 모험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좋겠네요. 또 하나 2권은 산초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돈키호테 옆에서 그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 산초가 있지요. 둘의 관계를 관찰하며 읽어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자기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죠. 돈키호테를 읽으며 우리는 어떤 모험을 떠날 것인지, 자신의 악마성으로 무엇에 대항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 4주차 (10/9)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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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돈키호테2》 : 2권 1장~22장 (2권 처음~296p)
《근대 유럽의 형성》 : 8~9장 (261p ~ 339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꼭 모두!! (+) 역사 시험 있어요. 4장~9장, 15문제
* 3주차 후기 : 재순샘
월요일에 건강하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