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5주차(10/16) 공지
추석 한 주를 쉬었더니 샘들이 파마도 하고 머리도 자르고 예뻐져서 오셨더군요. 진심(!)이 담긴 호평과 함께, 예외 없이 높은 텐션으로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돈키호테> 2권을 읽기 시작했고 <근대 유럽의 형성> 8-9장을 읽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근대국가가 막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돈키호테 읽기는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어요. 돈키호테(세르반테스)에 대한 애정을 글에다 뿜뿜 피력하고 계시죠. 저희가 만난 작가들이 모두 정들만하면 헤어져서 매번 아쉬운데, 유독 돈키호테는 더 아쉬울 거 같아요. 미처 풀어내지 못한 중첩된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에세이에서 잘 녹여 볼까요?
독자와 저자
2권은 뉘앙스가 많이 달라졌어요. 돈키호테가 제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하고, 산초는 원래도 학습력이 좋았는데, 더 똑똑해졌죠. 둘의 관계도 달라졌고, 무엇보다 2권 첫머리는 1권의 책이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상황을 상정하고 시작하죠. 그래서 독자와 저자의 관계도 매우 모호해져 버립니다. 이 문제는 저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는데, 손대지 못했어요. 잘 정리되지 않아서요. 채운샘께서 강의를 통해 명쾌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작가가 스토리텔링한 허구라는 전제하에 읽게 됩니다. 소설 속 캐릭터를 분석하고, 숨은 메타포를 찾곤 하죠. 그런데 돈키호테는 이 일반적인 문법을 벗어납니다. 독자인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책 속에서도 이미 알고 있음은 물론, 액자식 소설 구성, 연극도 상연되죠. 지난 강의에 비추어 허구와 사실의 혼재 정도로 이해하면서 읽었는데요. 강의에서 ‘독자의 지위라는 허상’을 붕괴시킨다는 설명에 저의 오만을 깨닫게 되었어요.
샘께선 에셔의 작품 “화랑”과 “그리는 손”을 공유하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실재성의 붕괴를 설명해 주셨죠. 화랑은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이 화랑의 그림 속에 다시 편입되는, 포함하고 있는 것이 포함되는 것을 포함하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죠. 우리의 관념은 포함하는 것이 더 큰 품으로 포함되는 것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관계가 혼종됩니다. 마찬가지로 <돈키호테>에는 원작자 세르반테스가 있고, 위작자 아비아네다가 등장하고, 돈키호테와 산초가 <돈키호테> 1권에 대해 또 언급하고, 그걸 읽는 우리 독자가 있는, 책을 둘러싸고 실재와 허구가 맞물립니다. 독자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자신을 독자라고 이름할 땐, 신적 지위에서 소설 지배자로써의 지위를 염두에 둔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마치 자신이 그 책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평하고 감상을 말하기도 하죠. <돈키호테>는 이 독자의 지위를 전복합니다. 내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이 나를 읽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기이함을 제공하면서요. 안전하게 책을 읽고 그 책을 장악할 수 있는 독자라는 게 허구라고 말이죠. 저는 종종 글쓰기를 회피하고 싶을 때, 독자로서도 충분하다라는 말을 했었는데요 이 말이 신적 지위에서 자신의 지반이 붕괴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어디 감히 독자라는 말을 함부로 했던 걸까요? 참!
이 구도에선 허구와 실재의 관계 역시 전복됩니다. 실재 안에서 창조된 것이 허구라는 우리의 생각은, 허구의 세계가 실재 속에 있는 나를 포함하면서 ‘내가 믿고 있는 실재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라는 회의를 불러 일으킵니다. 진실이나 광기 문제도 동일합니다. 맘브리노 투구가 실제는 대야라는 걸 이발소에서 본 산초는 진실을 말하는 정상인이고, 책에서 투구에 대해 읽고 대야를 투구라고 우기는 돈키호테는 거짓이고 광인인가, 질문하게 하죠. 책에서 동물을 보고 동물원에 가서 그 동물을 확인하는 우리는 돈키호테 아닌가? 라는 샘의 비유는 우리가 얼마나 당착(撞着)에 빠져 있는지 알게 했지요. 돈키호테는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댑니다.
또 지난 강의에서 ‘으스스한 느낌’이라는 인간이 느끼는 기묘한 정서에 대해서도 살펴봤는데요, 이것이 기묘한 것은 해방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으스스함은 뭔가 이해되지 않는 것, 개념화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으스스한 것에 대해 이해한다는 건, 상식 밖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 상식의 틀이 깨질 때 통쾌함과 함께 자신은 감히 할 수 없는 두려움이 생겨나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향해 담담히 걸어가는 간디의 걸음에서, 글을 알고 셈을 할 줄 아는 것으로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 있는 시대에 1,700 페이지의 글을 써 댄 세르반테스에게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움이 아닌 방식으로 보여주는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마술성 같은 현실을 마주할 때 갖게 되는 것이 으스스한 느낌입니다. 이것이 <돈키호테>가 말하는 용기 아닐까요? 사실 남아있는 <돈키호테>를 읽기가 두렵고 설레고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매주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중세의 끝자락 낙후된 스페인은 이 으스스한 느낌을 견딜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전쟁은 끊이지 않고, 기존의 가치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고, 내가 사는 세상이 꿈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때, 스페인이 선택한 것은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은 깔끔하게 소탕하는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을 통해서 말이죠. 기독교로 교회가 통치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서의 논리를 위협하는 우주론은 속속들이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동체성은 마녀재판으로 단죄했죠. 유명한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재판이 있었다면, 스페인에선 일개 방앗간 주인 메노키노에 대해서도 재판을 할 정도였어요. 그는 효모가 발효되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에서 서로의 결합을 통해 곰팡이가 생기듯이 그렇게 우주도 탄생한 것이 아닐까 사유를 펼친 것이 죄가 되었죠. 또 남자들이 전쟁으로 착출되어 뒤숭숭한 마을을 자치적으로 회복하고자 하던 여성들에 대해서는 마녀(사바트)라는 낙인을 찍어 버리고요. 그럼으로써 마을 공동체의 구심을 흐리고 교회로의 통합을 시도한 것입니다.
스페인의 기독교는 종교 재판으로 교회가 관용하지 않는 논리를 차단하고 마녀 사냥으로 마을과 여성을 통제하면서, 매주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기층민의 정신과 신체를 관리하고자 했어요. 당시 여성수도회가 생겨나면서, 귀족이나 부르조아 자녀들이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받는 것이 유행하였어요. 수녀회 교육은 기독교 이념과 가부장제 관념이 자리를 잡아가는데 중요한 조직화 수단이 되었다고 하지요. 샘께선 강의 중간중간 영화와 책 등을 소개해주셨는데요, 메노키오의 재판을 처음 알린 진즈브르그가 16세기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에 대해 쓴 책 <치즈와 구더기>, 수녀원의 생활을 그린 실화 영화 <베네데타>입니다. 그리고 우리(?저의)시대 락 밴드인데, She's Gone으로 유명한 ‘블랙 사바스’의 그 ‘사바스’가 ‘사바트’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까지요. ㅎ Heaven and Hell을 소개해 주셨는데, 명곡입니다. 기회되면 들어보시고 영화도 보자고요.
다음 주 읽게 될 <돈키호테>부분은 기승‘절’에 해당하는 부분인 거 같아요. 생각꺼리가 많던데요, 재미있게 읽고 또 즐겁게 얘기 나눠보도록 하죠. 감기 조심하시고 월요일에 뵐께요.
*** 5주차 (10/16)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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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돈키호테2》 : 23~48장 (297~601p)
《근대 유럽의 형성》 : 10~11장 (340p ~ 419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아니면 테스트~~!!
* 4주차 후기 : 호진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