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7주차 (11/6) 공지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 돈키호테 읽기가 끝났습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종래 깊은 사유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갔습니다. 매주 책 한 권의 분량과 역사 정리까지 벅찬 일정이었지만 만찬을 차려놓고 먹는 느낌이 들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우리 사이를 오고 갔던 것 같아요. 이번 주 읽은 마지막 부분에서 돈키호테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상한 귀결이지만 그 죽음은 담담한 서술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었지요. 나눈 이야기와 샘의 강의를 간단히 정리해 볼까 합니다.
매너리즘의 시대
유럽사에서 스페인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유럽 안의 비유럽 같은 상황이었다고 했지요. 유럽이 세계 안에서 도약하고 있던 때, 아직 중세적 기독교 중심주의에 머물러 하나의 기독교를 더 강화하던 것이 스페인이었으니까요. 아니면 그런 방식으로 변화하던 시대의 리듬을 탄 것으로 볼 수도 있구요. 그런데 소설 <돈키호테>는 예술적 부분에서 중세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혼란의 흐름을 정확히 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샘께선 그 시대가 예술적으로 보면 매너리즘 양식이 유행하던 때라고 하셨죠. 매너리즘은 보통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지속하는 것으로 새로움을 잃어버린 지루함이라는 말로 통용되죠. ‘타성’에 젖었어, 라는 말이 더 와닿네요. 그러나 예술사에서는 비합리적인 구성과 구도, 표현을 의미합니다. 샘께서 소개해주신 매너리즘 회화들은 아름다움보단 기형적인 불쾌감을 먼저 주었어요. 색상부터, 늘어진 형태, 구불거리고, 과장되고 기괴한 모양 등 균형과 조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듬뿍 담아냅니다. 많이 본 그림들인데 작가는 엘그레코, 파르미자니노 밖에 모르겠네요. 같이 보여주신 라파엘로의 반듯한 성모상 그림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는데요, 완벽한 아름다움, 비례와 구도, 중심점 등이 중요시되던 시대에 변화가 생긴 것이죠. 기존에 믿고 있던 정상과 표준에 균열이 일어나고, 이상은 상실되어가는 시대 그것이 예술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뭔가 아주 비슷하게 그리려고 했는데, 그만 B급이 되어버린 그림이, 시대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 <돈키호테>를 예술사가인 아르놀트 하우저는 매너리즘적 작품으로 분류한다고 하는데요, 중심의 해체, 비합리적 이야기, 정상성을 벗어난 사유 등이 매너리즘과 유사해서인가 봅니다. 극렬한 기독교 결벽주의가 오히려 기형적 사회를 만들어버린 스페인의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요. 모험이라는 설정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모험은 어떤 미지의 조건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기에, 이상적인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들어맞을 리가 없기 때문이죠. 얼마나 변수에 단련되어 있는가가 기술이지, 준비할 무엇도, 예상할 어떤 것도 없는 것이 모험입니다. 당대의 예술적 사조와 돈키호테를 묶어보는 것도, <돈키호테>라는 소설에만 갇혀 있던 시각을 열어주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돈키호테와 다른가?
돈키호테의 죽음은 너무 담담하게 그려져, 우리에게 오히려 생각의 여지를 열어줬습니다. 돈키호테는 <하얀달의 기사>와 결투를 벌이다 처참하게 패배하죠. 상상과 착각 속에서 벌어진 결투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이 결투에서 돈키호테의 호기는 전혀 먹히질 않았거든요. 늙고 힘없는 돈키호테와 로시난테는 <하얀달 기사>의 한 방 공격에 그냥 나가떨어져 버리죠. 당당히 ‘나의 목숨을 가져가라’는 돈키호테에게 기사는 집으로 돌아가 일 년간 자숙할 것을 명합니다. 그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와 자신은 ‘알론소 키하노’라고 선언하고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토론에서는 돈키호테가 키하노가 되는 것의 의미가 모험을 잃어버린 것인지, 그 둘이 다른 존재인지, 돈키호테의 죽음이 키하노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의 죽음과 키하노라는 선언에 대해 여러 질문들이 오고 갔습니다. 전반적으로 돈키호테와 키하노라는 인물 사이 존재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기조로 토론이 진행되었고, 그럼에도 키하노가 모험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목동으로써 다른 모험을 준비하는 자로 이야기 되었죠. 돈키호테라는 한 시대가 가고 다른 시대가 온 것을 의미하기에 조카딸을 비롯해 주변에 자신의 유산을 주고 떠났다는 해석도 있었구요. 그의 변화와 담담한 죽음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과 자기 삶에 대한 통찰적 부정이라는 의견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역으로 허구 아니냐 등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요.
샘은 강의에서 돈키호테와 키하노가 존재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걸 강조하셨어요. 우리 안에 돈키호테와 키하노가 혼재해 있지 않냐고 말이죠. 사실 다음날 이불킥한 사건들 대라면 즐비하죠. 자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의 행동들 많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돈키호테가 아닌가?’계속 질문하라고 하셨죠. 이상을 쫒아가는 자를 돈키호테라고 한다면, 이상이란 지금 없는 것을 성급하게 갈망하는 것이고 그거라면 우리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지점이죠.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우리도 아마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죽음을 비애로 받아들이고 아쉬워하는 것에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죠. 책에서도 삼손 카라스코가 돈 키호테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뒤 그를 ‘치료’하려 한다는 목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자 듣던 사람이 놀라서 미친 돈 키호테가 세상에 주는 즐거움이 제정신인 돈 키호테가 주는 이로움보다 크다며 말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 카라스코는 <하얀달의 기사>로 분해 돈키호테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친구들이 파견한 학사였거든요.
샘께선 또 돈키호테도 처음부터 자신의 망상을 알았을거라는 해석을 하셨는데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하다가 마지막에 그런 자신을 내려놓은 것 아닐까, 질문하셨죠. 전 속으로 안돼~~를 외쳤습니다. 제가 얼마나 돈키호테 때문에 마음을 졸였는데, 그런 해석 안돼요... 내적 아우성이 일었지만, 한 방이 더 있습니다. 죽음 역시 당연한 귀결이라는 거죠. 토론에서도 이런 말이 나왔는데, 제가 듣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요. 돈키호테의 모험이 이미 실패를 예정한 것이기에 그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고, 한 인간으로 그냥 살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죠. 돈키호테 같은 우리도 이렇게 살다 죽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런 마음으로 돈키호테를 해석하고 싶진 않답니다. 좀 더 의미부여....를...흑!
이상이 몰락하고 한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믿었던 이상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상의 허구성을 돈키호테는 존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었던 것이 현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죠. 이상의 무력은 존재와 세계 사이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근대의 시작은 이렇게 존재와 세계를 합치시키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근대의 산물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결여를 생산하는데, 그 바탕엔 행복할 수 있고, 부자될 수 있고, 젊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계속해서 조제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거죠. 환상과 결여는 환상의 짝입니다. 이번 주 우리 선생님들의 글에 공통적으로 보인 말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어요. 돈키호테가 확실히 우리에게 균열을 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이 공부하면서 함께 모색해 보기로 해요. 돈키호테 읽기의 아쉬움을 달랠 기회를 마련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이쯤하고요.
다음 주부터는 삶의 강단과 경계를 허무는 글쓰기로 알려져 있는 이탁오를 만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뼈 때리는 언어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도 되지만 또 하나 삶의 테크닉을 훔쳐보는 기회로 삼아 잘 거두어보도록 하죠. 한 주 잘 쉬시고 11월에 만나요. 전체 일정은 톡방에 공유하고, 다음 주 일정만 공지하겠습니다.
*** 7주차 (11/6) 공지입니다 ***
*
읽을 책
《분서1》 : 권1 서답(書答)
《하버드 중국사 원,명》 : 1~2장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6주차 후기 : 은이샘
이렇게 살다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런 맘으로 돈키호테를 해석하고 싶지 않은 이 맘은 뭘까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