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아이들이 읽는 환상 동화는 항상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야기는 계속 된다고 말하지만 우린 책을 덮고 더 이상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죽음으로 끝을 맺는 위대한 고전들의 결말 앞에서 우린 쉽사리 책을 덮지 못합니다. 『돈키호테』를 읽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쉽사리 책이 덮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돈키호테가 죽은 것인지 키하노가 죽은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돈키호테이든 키하노이든 죽음이 귀결이 아니라는 합의를 이끌어낼 만큼요. 채운 샘은 강의 말미에 저희들의 이런 읽기 방식 저변에 있는 욕망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받아서 1월에 돈키호테 세미나를 다시 하자는 제안도 하셨는데요. 꽤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돈키호테의 죽음은 왜 그토록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었던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채운 샘 말씀대로 우리가 그의 죽음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사 돈키호테이고자 했던 '키하노'는 오십이 넘은(지금의 나이로 따져보면 여든쯤 되는) 늙은이였습니다. 그가 떠난 모험은 그의 상상 속에서 펼쳐졌던 것만큼 위험 요소들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늙은 몸을 이끌고 산과 들판을 다니면서 먹거나 자는 것이 순탄치 않았던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의 죽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돈키호테가 멈추지 않고 편력과 모험을 계속 이어가기를, 하다못해 마지막에 계획했던 목동의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이라도 보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를 응원했던 것일까요? 근현대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과 맞서는 거침없는 모험을 그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거듭 실패하면서도 기사도라는 이상을 구현해 보겠다는 그의 열정과 열망이 부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구요. 어쨌든 우리는 그의 종자인 산초처럼 돈키호테의 '미침'을 의심스러워하기도 하고, 동조하기도 하고, 끝내는 응원하기에도 이르면서 읽기를 마감하였습니다.
아놀드 하우저라는 예술사가는 『돈키호테』를 전형적인 매너리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건과 사물에 대한 르네상스적인 절대적 믿음이 사라진 후 존재와 외형, 경험과 상상, 객관적인 판단과 주관적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의 문화적인 특징으로 매너리즘을 이해"(안영옥, 『돈키호테를 읽다』, 224쪽)했습니다.
채운 샘께서 이런 매너리즘의 특징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 주셨는데요. 이전의 르네상스는 여전히 종교적 영향이 남아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살아있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생'하려고 했지요. 신의 세계 안에서 신을 중심에 두면서도 그 자리에 인간을 포개보고자 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초원의 마돈나, 1505년)은 그런 르네상스 시대를 잘 보여줍니다. 안정된 구도, 특정한 방향이 없이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온누리에 비치는 빛, 자연스러우면서도 순결함과 겸손함을 간직한 듯한 성스러운 마리아의 모습 등은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까지 이상화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성모자상이지만 파르미자니노의 작품(목이 긴 마돈나, 1535년)에서는 정상 혹은 표준이라고 알고 있는 것의 왜곡이 이루어지는 매너리즘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아기 예수의 몸은 8등신에 가까울 만큼 기이할 정도로 길쭉하고, 그 몸이 끝나는 부분에서 천사의 다리가 길게 뻗어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그림의 뒷면에 생뚱맞게 놓여있는 기둥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길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묘하게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상화가 깨지고 더 이상 이전처럼 세계를 바라볼 수 없는 사태, 매너리즘은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을 말합니다.
『돈키호테』가 쓰여진 때(1권 1605년, 2권 1615년)는 신 아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는 이런 매너리즘의 시기였습니다. 형상과 세계를 이상이라는 렌즈로 바라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돈키호테의 문제는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이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을 갖는다는 것이 단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수많은 겹으로 연결되고 얽힌 관계들 속에서 역동적으로 매번 구성되는 현실에서 이상이 그대로 작동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상주의는 우리를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로 이끕니다. 우리는 그 진자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는 우리의 그런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죽기 전 얼마간, 그런 이상주의의 삶의 방식을 시도하다가 몰락하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게 된 것 뿐입니다.
한편, 문학사가들은 『돈키호테』 를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근대는 인간이 세계와 합치되는 걸 어떤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내가 뭘 해도 온전하거나 충분하지 않다는 결여감을 계속 심어주려고 하지요. 그래서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만 충만해지고 행복해질 것 같은 환상을 제조하면서도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분열적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게 합니다. 『돈키호테』는 하나의 시대가 몰락하고 인간이 소외를 영원히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이후의 19세기의 근대소설은 개인의 좌절을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모험하지 않고 세계를 상대해서 무언가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으며, 상대할 수 있는 세계를 포착할 수 조차 없습니다. 돈키호테처럼 망상을 통해서라도 세계와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의 소설은 개인이 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심리 묘사와 내적 갈등의 표현이 주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 돈키호테는 근대의 인간이 갖는 비대한 내면이나 마음의 잉여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더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런 그를 응원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밖에도 과연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 역사와 이야기는 다른 것인지, 그리고 에셔의 그림처럼 손이 손을 그리거나 내가 보는 그림이 나를 보는, 포함되는 것이 포함하는 것을 포함하는 어지러운 이야기의 구조에 관한 더 깊은 파고들기와 또 다른 독해작업은 앞으로도 차차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망가하고 있던 돈키호테 죽음이 생각나네요. 아직도 우리는 돈키호테의 죽음을저항하고 있는 것 같네요.
모험도 매너리즘도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보이는데요, <돈키호테>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쏟아 놓으셨군요. 샘께서 차차 해보겠다는 '독해작업 ' 도 기대가 됩니다. 1월에 달려보기로 하고요. 한땀 힌땀 공들인 후기 잘 읽었습니다~~^^
샘의 후기를 보니 6주간 근대 인간이 갖는 비대한 내면이나 마음의 잉여 없이 나아갔던 돈키호테와 산초를 응원한 우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야기 구조에 관한 깊이 파고들기(너무 파진 마시길요... 못 나올 수도 ㅋㅋ) 또 다른 독법에 대한 시도!! 응원합니다. 샘~^^! 그림까지 첨부된, 그래서 마지막 강의를 잠시나마 상기할 수 있었던 정성 가득한 후기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