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8주차(11/13) 공지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렇게 더운 이상한 11월에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오늘은 수업 내내 비바람과 쨍한 햇볕이 오가는 변덕을 부리고 있네요. 지금은 대낮인데 저녁 같아요. 몸도 마음도 잘 돌보아야 할 때인 거 같습니다.
이번 시간엔 이탁오 <분서> 권1 서답(書答)편과 <하버드 중국사 원, 명>을 읽었습니다. 이탁오의 <분서>는 심상치 않은 책입니다. 초장부터 서문을 통해 자신의 책을 태워야 할 책<분서>와 숨겨야 할 책<장서>로 칭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예고합니다. 그의 성정을 이해하는 절친 초약후가 쓴 서문에는 성정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묻어나지요. 이탁오의 글도 쉽지 않습니다. 전체 맥락 안에서 의미를 파악해내기가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늘 우리가 증명했듯 마지막엔 더 읽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정리하게 되겠지요. 이탁오는 또 어떤 글쓰기법을 전해줄지 기대하면서 출발해봅니다.
아무일도 없었던 시기 : 명나라 가정제 ~ 만력제
이탁오(1527-1602)는 명나라 사람입니다. 티모시브룩은 <하버드 중국사>에서 원과 명의 역사를 묶어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원나라(
1271년~ 1368년)는 약 100년의 치세에도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왕조였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세계사는 원나라밖에 없다라고 하셨는데, 알렉산드로스도 지금의 터키 정도를 정복했던 것이기에 유럽사에 불과하다고 하셨죠.
원나라의 가장 큰 제도적 특징은 ‘역참제도’입니다. 그 13세기에 말을 달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에 당도할 구조를 만들었다는 거죠. 약 40키로마다(서울에서 용인정도) 역참을 두어 한 시간에 주파하게 하고, 거기서 다른 주자가 문서를 받아 달리면 하루에 부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유목민의 후예답습니다. 군대와 우편, 관리와 특사 등의 이동 속도가 엄청났고, 그러니 정보와 명령 전달이 바로바로 이루어져 그 넓은 대륙을 지배하는 게 가능했던 것입니다. 유럽이 하나의 공국(프로방스)을 통치 최대단위로 유지했던 것이 명령전달과 관리등 통치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했는데, 보통의 프로방스 면적이 우리나라 都 정도인 걸 생각하면 원이 새삼 엄청나 보이지요. 마이너 세계사팀이 몽골 역사를 공부하면서 세계역사가 다 ‘고조선의 서진운동’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는데, 몽골 역시 우리 민족이다라고 한동안 우기고 다녔죠. 급 인정하고 싶어집니다. ㅎㅎ
명나라는 이런 원의 통신체제 대부분을 계승했죠. 거기다 통치시스템, 행정제도, 행정망도 대부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몽골 지배는 중단되었지만 명을 통해 몽골의 유산이 확고히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티모시브룩의 평가가 적확해보입니다. 명나라(
1368년~ 1644년)는 통치기간이 약 250년 정도됩니다. 홍타이지가 1636년에 청으로 명명하며 청나라를 건국했지만 이미 1616년에 누르하치에 의해 금나라의 후신이 세워진 다음이라 명나라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황이고, 1644년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도이니 200년 좀 넘는 시기를 통치한 것이겠죠. 명나라는 초기 주원장(홍무제)에서 영락제 정도까지 약 5,60년의 치세가 있었고, 나머지는 너무 유명무실한 왕조였던 것 같아요. 이탁오(1527년-1602년)가 살았던 시기의 왕이 가정제 ~ 만력제인데 찾아보니 이 시기가 100년이나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티모시브룩은 이 시기를 ‘아무 일도 없었던 시기’라고 기술하고 있어 읽으면서 빵 터졌었는데요, 이런 시기를 이탁오가 살고 있었다는 걸 샘도 짚어주셨죠. 이런 명에 목매는 조선의 선비들이 얼마나 속이 터졌을지 새삼 연암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청나라의 문물과 정신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감탄하던 것도 심정적으로 우선 이해하게 되네요. 명나라가 이렇게까지 허접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원, 명을 함께 묶은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이 때가 우리나라는 선조 임금시기이고 유럽은 세르반테스와 거의 동시대인 매너리즘시대이자 대항해시대이기도 하죠. 그래서 중국도 양자강 이남의 강남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지금도 중국 관광 거의 1순위로 꼽히는 천주 항주 소주 등이 당시에도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발달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엔 아랍 상인들이 대거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의 이탁오 선생의 6대조가 색목인이었다고 <분서>의 옮긴이는 설명하고 있네요. 이 혈통을 물려받은 이탁오는 천주 출생으로 그 삶의 지난함과는 덜 어울리지만, 강남보이였네요
지금 해야 하는 걸 가장 절박하게 한 사람, 이탁오 (1527-1602)
채운샘께서 이탁오를 정의하신 한마디가 좋아서 그대로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그 유명한 ‘나는 한 마리 개였다’는 깨달음 이후 그의 삶이 보여준 거침없는 행보는 경외감과 더불어 감히 그 행보에 발맞출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으로 오기도 했는데요. 글 사이사이 날리는 촌철살인의 언사들과 명확한 관점이 빼곡이 밑줄을 긋게 만들었지요.
이탁오의 삶은 토론에서도 중요한 주제였어요. 그의 일생이 놀랍다는 반응이 먼저였죠. 4남3녀를 얻어 딸 하나를 남기기까지 그가 맞이한 죽음들, 부모가 돌아가시고, 아내마저 먼저 보낸 후 그는 고향을 떠나 스스로 유랑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지요. 치열했던 공부의 과정과 탄핵 투옥 옥중 자결로 이어지는 삶의 긴장과 무게는 갑남을녀가 받아안기 버거웠던 걸까요. 이탁오 는 ‘살고 죽는 한 가지’ 때문에 마음속으로 늘 번민이 있었고, 이것을 명료하게 밝히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토론에서는 이탁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는 의견부터 죽음에 대해 잉여 없는 선택, 단호함, 죽음이 곧 저항이었다는 의견이 오고 갔어요. 그는 30년 하급 관리로 일했다 하지요. 다른 마을로 부임되는 것을 주민들이 막을 만큼 청렴하고 칭송받는 관리로서 가족 부양에 힘썼고, 그 역할이 끝나자 단호히 자신을 위한 삶으로 돌아서 그 자신 궁극의 삶의 질문을 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였죠. 이 삶에 대해 샘께선 ‘지금 해야 하는 걸 가장 절박하게 한 사람’이라고 이탁오를 정의하셨던 겁니다. 한 푼의 관념 없이 내리는 실존적 결단이 잉여로 부유하는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런 그가 대면한 명나라 사회는 한족이 지배하지만 더 이상 지식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이탁오는 송대 학자로부터 계승되어오던 유약하고 관념적인 주자학을 넘어, 양지(良知)를 바탕으로 한 주관적 실천철학에 매료되었죠. 특히 공안파(원종도,굉도,중도,3형제 주창)인 왕명 좌파로 분류되는데,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는 짧은 글을 선호했고, 이탁오의 <분서>에도 잡술편에 엮여있지요. 공안파는 조선 후기 허균을 비롯해 연암, 이덕무, 이용휴, 이옥 등 조선의 소품체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양명 좌파의 특징은 양명의 心學에 불교적 해석을 접목시켜 자기 스스로 마음의 해방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는 걸 중요한 과제로 봅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고 개인이 가진 본성을 발휘하며 살도록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죠. 성리학은 인간의 욕망만 제어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매우 상반된 입장입니다.
이런 이탁오이기에 인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없었고,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역사적 평가가 완료된 인물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고, 여성을 제자로 받았다는 이유로 스캔들에 휘말리며 탄핵을 받게 됩니다.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은 놔두고 이단의 길을 자처한 자신을 향한 비난에 참 답답함을 토로합니다만, 우리가 이번에 읽은 서신에서 보면, 절친 초약후와 나눈 편지보다 논적인 경정향과 나눈 서신에서 이탁오의 사유가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걸 보면, 답답함과 겸허함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도 이 아이러니를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다리는 늘 이 모양이라니. 그래도 열심히 읽어봅시다.
많이 추워요. 몸 관리 잘 하셔서 담주에도 건강하게 만나요. 경희샘 자요~~
*** 8주차 (11/13)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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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분서1》 : 권2 서답(書答)편 / 권3 「탁오론 대략」과 권4 「한평생을 회고하며」
《하버드 중국사 원,명》 : 3~4장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7주차 후기 : 지원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