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 10주차 후기
지기에 대하여
이번 시간에 풀어보고자 하여 씨앗 문장으로 선택한 것은 『열하일기下』의 106~107페이지 ‘지기’(지인)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임을, 누구인지를 알아봐 주는 것 자체가 지인이고 그처럼 내가 상대를 알아보는 것 또한 지인인. 즉 중의적 의미로 쓰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암은 ‘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석가의 곁에 아난이 있었고, 공자의 곁에 안회가 있었듯 연암 자신에게도 어떤 깊은 이치와 사유를 알아주고 함께 나눌 사람이 간절했던 것이다. 10주 차 글을 쓰면서는 그냥 연암이 많이 외로웠었나?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마무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연암이 말하는 이 ‘지기’(지인)라는 것은 일생에 한 번 만나기도 너무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줌에서 샘들과 지기를 타인이나 바깥에서 찾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내면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하는 얘기를 나눈 뒤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나를 알아봐 주는 지기를 찾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를 알아봐 주는 지기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지기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은 아닐까? 지기를 다시 한번 요약해 보자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고 (그 반대도 성립) 사유와 이치를 나누는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확신을 갖고, 나의 이치와 사유를 인정해 주는 건 안되는 걸까? 그러나 동시에, 내가 나를 인정해 주고 확신을 갖는 스스로의 지기가 된다고 해도 외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정 즐거운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과 이치를 아무도 모르나 나만이 확신하고, 마음에 품겠다는 것은 얼핏 세상에 통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체념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에서는 지기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모든 조건을 내부로 돌려 고립하는 느낌이랄까?
해소되지 않은 부분은 채운 샘의 말과 연암의 글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관계를 원하는 마음과, 홀로 있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아닌 남의 처지에서는 나를 살피는 통찰이 중요하다. 이는 나와 만물을 동일선상에 두게 만든다. 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봐주지 않지?라는 마음에는 인정욕망이 기반하며, 소중한 나를 왜 몰라주지? 하는 견고한 자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자의식은 답이 없는 외로움을 동반한다. 바로 이때, 내가 아닌 타인의 처지로 나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인파 속에서는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고,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만물의 차원에서도 동일하다. 사실 나는 바램처럼 특별하지 않고, 우주의 티끌보다, 먼지보다 작은 유기체 덩어리일 뿐이다. 연암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아야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고, 홀로 서도 두려움이 없는 성인의 지경에 오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암은 그런 성인의 지경에 이른 사람일지라도 곁에 한 사람 정도는, 한 명의 지기 정도는 바라지 않았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아무리 세상에 통달하고 자유를 영위하는 이일지라도 즐거움과 뜻을 함께 누릴 친구 한 명쯤은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성인의 지경에 오른 이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로 떠나려는 찰나 그를 알아봐 주는 이 (지기)가 등장한다. 즉 이 글에서 연암은 자신의 존재의 허울과, 티끌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성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를 알아주고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이와 함께 웃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어쩌면 나는 소중하다, 특별하다 라고 생각 하는 자의식은 외로움을 낳는 동시에 살아갈 동기를 마련해 줄지도 모르겠다(약간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성인들처럼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번민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는 그 과정은, 자칫 허무주의와 이어지거나 살아갈 의미를 상실하기 쉬울 듯하다. (무엇보다도 그 지경에 오르는 게 가능할까 싶다..)
호질에 대하여
호질과 관련된 부분을 가져오신 샘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호질을 환경과 연결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생태 영화제 보고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사람들은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으면 미워하지 않다가도 소나 말은 인간에게 매우 쓸모 있는 가축이기에 잡아먹으면 원수로 여긴다. 하지만 말과 소가 기꺼이 수고를 다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히 여기어 그들을 도살하고 노루와 사슴까지도 먹어버려 범이 먹을 게 없다.’(내용을 대충 정리했다)
환경 이야기를 할 때 대두되는 문제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라는 인간 중심의 생각이다. 범은 호질에서, 인간이 먹고살기 위한다고 하는 행위는 인仁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육식이나 잡식의 습성을 타고난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서만 사냥하고 그 먹이를 다 함께 나눈다. (부드러운 고기는 범이 먹고, 뼈에 붙은 살은 솔개가 먹고, 썩어가는 건 벌레들이 먹는 것.)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범의 입장에서 인간은 온갖 얄팍하고 잔인한 술수로 차고 넘치게 자신의 배를 불리고, 털이나 가죽을 뽑아 온갖 물건을 만든다.
또한 환경과 연결해 생각할 때, 기술과 신체가 인간에게 안겨주는 딜레마의 문제가 대두됐다. 생태와 환경을 위해 기술적 개발을 멈추고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당장 에어컨만 없어도 여름 나는 것이 힘든 신체의 한계 위에서 인간은 또다시 소비한다. 이 이상한 환경-기술-생존이란 원형의 굴레는 자꾸만 행동을 망설이게 만드는 듯하다.
채운 샘은 호질을 설명하시며 이 당시 가장 중요했던 철학이 ‘인성과 물성은 하나다’. 즉, 인간의 본성과 그 외의 것들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입장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인성과 물성의 본성은 ‘똑같이 고귀하다는 인물성동론’과, 인간이 더 고귀하며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이들이 있다. 나는 이 말이 가슴으로는 뭔가가 와닿았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이 말 뜻이 대체 무슨 말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바로 ‘본성’인 듯하다. 재미있는 건 이런 본성의 영역을 가장 활발히 연구하던 이들이 성리학자들이다. 성리학의 대전제에서는 모든 것은 본성이 있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그중 가장 빼어나고 맑은 본성을 가진 건 인간이고, 그 밖의 것들은(동물, 사물 등) 조금 탁한 기운을 가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두 가지의 입장으로 갈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대전제로 보면 모든 것은 본성을 지녔기에 같은 존재처럼 보이나 소전제로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인간과 동물을 같은 존재로 여길 때 인간도 동물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동물은 자신의 본능과 욕망 위에서 활동하는데, 그렇다면 인간도 자신의 본능과 욕망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전제가 남는다. 성리학자들의 공부 목적은 인간이 자신이 지닌 동물성과 욕망을 이겨내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앞선 대전제에 따라 인물성동론을 따르게 된다면, 성리학의 공부 목적과 이념이 상이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욕망’으로 넘어간다. 성리학자들의 목적은 ‘존천리거인욕’(천리를 보존하고 욕망을 버리는)에 있다. 욕망을 다스리고, 넘어서지 못하면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인욕에 잡아먹힌 괴물이 된다. 그러나 인물성동론의 인간이나 동물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이론은, 인욕을 제거하겠다는 공부의 명분과 목적을 상실시킨다.
채운 샘은 더 나아가 이탁오 (좀 생소한 인물이었으나 마지막 시즌에 『분서』를 읽기 때문에 반가웠고, 뭔가 알아낼 게 있을까 하여 집중해서 들었던 것 같다.)의 이론은 ‘모든 것이 욕망이다’라고 하셨다. 즉 공부를 한다는 것도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고, 되고자 하는 것도 욕망이고, 모든 것은 욕망 위에서 행위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성인이나 욕망 위에서 움직이는 차이가 없는 존재들이다.
내가 처음에 이 ‘인간과 물성은 하나다, 즉 동일하다’라는 말을 마음으로는 이해했다고 변명하나 이해가 안 되었다고 언급한 것의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이 문제 역시 인간만의 관점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인간과 물성이 동일하지? 인간은 사유할 줄 알고, 이성적이며, 행위에 책임질 줄 아는데.... 등등등. 왜인지 욕망이란 흔히 본능과 본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배출되는 태초의 마음 같은 느낌으로, 날 것 그대로라는 부정적인 상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이면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게 짐승이랑 뭐가 다르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은 물성과 다르지 않다. 욕망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그런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성리학자들이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하겠다는 그 마음과 행위조차도 욕망인 것이다.
후기를 쓰면서는 사유한다는 것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았다. 책을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던 지점들은 유독 후기를 쓰며 풀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 더 깊이 읽기 위해 노력하고, 쓸 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 머리를 굴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쓴 지기에 관한 부분보다 호질과 관련해 ‘인성과 물성은 하나다’라는 부분을 풀어보고 싶었다. 계속 언급했듯, 느낌적으로는 알 것도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후기를 쓰며 정리하다가도 풀리질 않아 채운 샘의 강의를 정리했던 부분을 계속 찾아보았다. 그리고 결국은 나름 그 주제가 내게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들을 찾아냈다. 힌트는 여기저기에 있었다. 호질 자체가 인간이 아닌 범과, 범의 말이 주인공인 글이 특히 그러했다. 나는 호질을 계속해서 인간의 관점으로만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범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당쏭한 지점이 있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사고의 폭을 넓히는 연습이 아닐까. 관념적으로 고착화된 기존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낯섦, 타자와의 접촉이다. 그 무수한 만남에 대응하는 방식에 내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그 접촉은 실패한 것이다. 이번 후기는 내가 얼마나 내 사고와 틀에 갇혀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된 계기였다. 연암의 유연함과는 대비되는 자세다. 앞으로 마무리까지 2번 정도가 남았는데, 그때까지 유연함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방법을 살펴야겠다.
일취월장하는 현주샘 글이 점점 기대되고 있어요.. 아름다운 유리창에서 익명성을 즐기며 일개 인간임을 자각한 연암이 그 순간 느꼈을 자유를 알 것도 같아요. 이 자유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겠죠. 나를 알아봐 주는 知人을요. 知는 나와 욕망이 같은 사람이 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꼼꼼한 후기 잘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