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2-12주차 (8/21) 공지
벌써 시즌2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 놓고 있네요. <열하일기>는 뒤쪽으로 올수록 감동적인 글들이 많아서 좀 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아쉽네요. 남은 한 주는 역사 정리과제도 없으니 충분히 시간을 들여 연암의 글에 스며보도록 하죠. 말 나온 김에 공지 먼저 간단히 합니다.
* 《열하일기2》는 남은 부분 끝까지 읽고, 과제하면 되겠습니다. (태학유관록일부, 환연도중록)
* 《18세기 왕의 귀환》 뒷부분은 18세기 세계의 역사적 사건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18세기와 비교하여 읽어보면 다른 공부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정리과제는 없습니다.
* 대신,
에세이 주제를 잡아옵니다. “
글쓰기와 여행”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것과 여행이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봅니다, 글쓰기를 배움의 관점으로 보고 세부 주제를 잡으면 되겠습니다. 토론 빨리 진행하고 에세이 주제 같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후기는 지원샘
감정의 편견을 넘어
여행을 가서 만나는 낯선 풍경과 상황들이 우리에게 무척 감동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그 감동을 적어보려 하면 ‘좋다, 감동적이다’는 느낌 말고 적을 게 없던데요. 이젠 글쓰기팀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밑천’이 없어서 말이죠. 뭘 아는 게 있어야 적을 것도 있지....라는 자조적 탄식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지식의 문제일까? ‘000와 함께 하는 여행’도 많고, 가이드의 세세한 설명이 곁들여지는 여행도 많습니다만 그걸 듣는다도 술술 글로 나오진 않는 것 같은데요. 채운샘께선 감응의 문제를 말씀 하셨죠. 대상과 감응해 뒤섞이고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이게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면서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올 때 글이 된다는 것인데요. 음... ㅎㅎ저도 그래보고 싶네요. 연암처럼 말이죠.
우리가 글을 쓰고 사물을 대하는 것은 거의 습관의 작용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글을 읽을 때마다, 아는 것은 바로바로 대입해 보거든요. 이건 어떤 개념으로 말해볼 수 있겠다, 즉각 계산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에 읽은 게 날아가 버릴 거 같아서요. 근데, 이것은 알고 있는 걸 공고히 하는 지름길입니다. 전 이번에 “감정적 편견”이라는 말에 좀 놀랐는데요, 지성도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받아들이려는 지성적 편견이 있듯, 감정도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는 것이 좋은 것일 테고, 또 저처럼 알만한 것으로 대입 가능한 걸 좋다고 느끼겠지요.
그러지 말고 충분히 자신을 내려놓고 저 기억 밑바닥까지 오르내려야 글이 나온다는 겁니다. 출발은 언제나 “나는 모른다”여야 합니다. 판단하고 비교하기 이전에 모른다는 태도로 자신을 내려놔야 머릿속과 신체를 헤집으며 실마리를 찾아다닐 거고, 그 과정에 자신과 뒤섞이고 감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에세이 준비를 하며 참고하면 좋겠네요. 모르는 내가 탐사하는 마음으로요.
일야구도하기
괴테를 읽을 때, 여행에서 날씨는 신체와 같다고 했었지요, 몸으로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지형도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깜깜한 밤에 수심도 알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라면 엄두도 안 날 일입니다. 연암은 하룻밤에 강 9개를 건넜다고 이야기 합니다. 죽을 고비 9번을 넘나들었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토론에서도 많은 시간을 들여 얘기 나눴는데요, 저희는 주로 物我가 하나 되는 전환의 지점에 좀 더 집중했던 것 같고, 과제에서 나온 冥心(명심)과 ‘사이’ 개념으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눈,귀와 같은 감각을 어둡게 하여(冥), 사물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마음(心)을 가지는 것과, 삶과 죽음이 자기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깨닫은 것이 연암의 사이였을 것이다, 라는 것과, 가장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연암은 ‘앎’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얘기도 나누었지요. 뭘 얘기해도 물을 이불 삼고 물을 옷 삼는 연암의 경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요.
물은, 걷거나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땅과 달리, 이곳과 저곳을 나눕니다. 연암도 열하로 함께 떠나지 못하는 장복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물가는 이별하기 좋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파도와 물결로 일렁이는 물은 정복되지 않고 유동하는 대상입니다. 이곳을, 밤에, 건너면서 연암은 자신의 욕망(耳目)을 내려놓아야, 애착을 버려야만 오히려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에 매몰되어선 사유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은 애착하는 것이 있어 생기게 마련이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가 느낀대로, 생각한 대로가 아니란 것을 다시 생각해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면서 나는 모른다는 마음으로 한 주 보내면서 에세이 주제를 잘 잡아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에도 김홍도, 신윤복과 양반 계급인 관아재 조영석의 작품까지 18세기 풍속화를 소개해주셨는데요. 구글에 이미지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 중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는 김홍도와 단아하고 깔끔한 조영석의 새참 그림을 나란히 보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배우고 읽고 쓰기 출발점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필요한데 늘 탓을 하는 것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