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을 통해 ‘고양이의 눈동자, 오미자, 코끼리’에서 배우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열두 시각의 변화를 가지니, 한번 변하는 순간에 땅덩어리는 벌써 7천여 리나 달리는 꼴입니다. (열하일기 하. 325쪽)
1780년 열하를 여행하던 연암이 청에서 만난 지식인 왕민호와 나눈 이야기를 담은 「곡정필담鵠汀筆談」 중 한 대목이다. ‘기하학, 숟가락, 땅이 빛나는 까닭, 달나라, 지전설地轉說과 지원설地原說, 아소(예수)교, 일월日月의 숨은 뜻, 말과 글’이라는 소제목의 글들이 묶여있다. 그당시 온갖 문물과 문명이 오갔던 청의 지식인 그리고 그와 필담을 나누는 연암의 식견과 통찰에 놀라고 그들이 나누는 교우와 유머에 웃으면서 글을 읽게 된다.
위의 문장은 지원설과 관련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연암의 말이다. 이 부분은 지난 세미나에서 한 학인이 제 과제에 인용한 부분인데 그중 한 문장이다. 내가 이 대목을 책에서 볼 때는 고양이 눈동자를 끌고 들어와 지원설을 이야기하는 연암이 좀 뜬금없으면서도 재미있다고 느끼며 지나갔다. 오히려 12라는 숫자에서 지금의 두 시간을 한 단위로 삼은 시간 계산법에 따라 ‘열두 시각의 변화’라는 말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고양이의 눈동자와 시간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써온 학인의 글로 연암이 써놓은 이 한 문장이 더 빛을 발한다. 재미있게 들은 학인의 글을 옮겨본다.
(...) 햇빛에 많이 들어올 때는 눈동자를 수축하여 빛을 조금 받아들이고, 햇빛이 적을 때는 반대로 눈동자를 확장해 빛이 많이 들어오게 한다. 즉 고양이의 눈동자가 하루에 12번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지구 자전으로 인해 햇빛의 양이 달라져서이다. 따라서 눈동자가 한번 변할 때 지구는 7천 여리 (약 2749km)를 회전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빛에 민감해 눈동자가 최소 크기의 135배까지 유연하게 변한다고 한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고양이 눈동자를 관찰해 지구 자전의 증거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제 고양이를 보면 지구 자전을 떠올리게 될 거 같다. 그동안 고양이를 피해 다니기만 하였는데 마주치게 되면 고양이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낮에 눈동자가 수축해 숫자 1처럼 변하는지 직접 보고 싶다. (8월 21일자 글쓰기와 역사 세미나 - 『열하일기』를 읽고- 과제 중, 재순)
빛에 민감해서 수축과 확장으로 모양의 변화가 뚜렷한 고양이 눈에서 지구의 움직임을 논하는 경지는 나에겐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길냥이 눈을 보고자 했지만 오午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자느라 한없이 늘어진 고양이를 깨울 수 없어서 눈동자 모양이 어떤지 볼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를 나누며 ‘격물치지’가 이것이 아니겠냐며 서로 감탄을 했는데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하다. ‘달나라’에서는 달에도 또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관점과 앎으로만 이 세계를 환원하지 않던 두 지식인의 필담이 꿈결 같았다. 그들의 감각과 사유로 기호화된 언어들이 지금 과학지식으로 무장된 달이라는 말의 경계를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신화와 상상, 성현의 말씀과 세상의 이치 속에서 논해지던 달의 표면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연암이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가져온 ‘고양이의 눈’도 ‘달나라의 달’과 비슷하게 시적인 느낌을 준다. 재깍재깍 공간을 균등하게 분할하며 표현되는 ‘시간’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고양이의 눈동자가 본다는 기능적인 면을 넘어 세상이라는 큰 이치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언어마저 말랑말랑하고 촉촉하게 느껴진다.
옳은 것이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고, 옳은 것이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받지 않았다.(...) 오미자 몇 알은 정말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인데,(...) 싸움이 일어나서 주먹다짐에까지 이르렀고, 바야흐로 그들이 싸우게 되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피차 간에 생사를 걸었던 것이다. (열하일기 369쪽)
조선으로 돌아오는 중에 절 마당에 말리고 있던 오미자 몇 알을 주워 먹은 연암은 중에게 봉변을 당한다. 그것을 본 하인이 연암 편을 들어 중에게 역정을 내고 그렇게 싸움에 이른다. 오미자 몇 알에 화를 내는 중이 일견 못마땅한 것은 아니지만 연암은 자신의 소소한 행동이 생사를 건 싸움에 이르자 ‘성글고 얕은 자신의 공부’를 본다.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청심환을 얻어볼 요량으로 연암의 오미자 값을 계산하려 했던 그 중의 심보를 탓하며 그 자리를 떠도 될련만 연암은 자신의 행동을 인과와 허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중에게 청심환 한 알을 건넨다. 청심환을 받은 그 중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배움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 싸움을 중의 못된 심보와 계략으로 탓하며 그 자리를 떴다면 연암과 하인, 그 중의 맘에 분노와 원망의 씨앗을 품고 돌아왔을 것이다. 또 그 당사자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조차 누군지도 모를 그 싸움의 대상을 적대시하는 감정을 키웠을 것이다. 그런데 연암은 이 사건을 배움의 거리로 만들어 수백 년이 지나 글을 읽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원망이 아니라 배움과 성찰의 마음을 끌어낸다.
이 외에도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 상기象氣」에서는 ‘이치’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배운 것으로는 생각이 소, 말, 닭, 개 정도에 미칠 뿐, 용, 봉, 거북, 기린 같은 짐승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 죽이니 그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서운 존재라 말한다면 조금 전에 말한 바 이치가 아니다. 대저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다. (332쪽)
코끼리의 생김새 뿐 아니라 코나 상아의 쓰임새 혹은 코끼리가 다른 동물들과 맺는 관계를 보면 그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의 귀는 구름 같고, 코는 작은 자벌레처럼 굽혔다 폈다 하고 굼벵이처럼 굽어진다. 게다가 코끝은 흡사 누에의 끝부분과 비슷한데 그 쓰임은 족집게와 같다. 물건을 그곳에 끼워서 둘둘 말아 입에 집어넣는다. 코끼의 몸중 코 하나만 보아도 여러 동물의 생김새와 쓰임이 혼용되어 있으며 결국 그 용도라는 것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그 외에도 불필요해 보이는 상아가 떡 하니 그의 얼굴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데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무용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코끼리의 상아를 두고 이치를 논한다. 하지만 그 논리는 다른 견지의 말 한마디로 격파된다. 인간이 세상의 이치라 여기는 것이 이와 같다. 한없이 부족한 것이다. 또다시 「상기象氣」를 통해 인간의 앎과 관계하는 이치의 오묘함을 보여준다. 앎을 통해 이치의 한 면을 볼 수 있지만 이치를 앎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6주간 연암의 열하일기를 만났다. 헤어지기가 아쉽다. 연암의 따뜻한 깨달음 속에서 더 거닐고 싶다. 귀한 시간이었다.
재순샘의 고양이 과제 때문에 차 밑에 숨어있는 고양이 눈을 유심히 보게 되네요. 코기리를 빌어 모든 존재가 관계에 따라 재규정 될 수 있음을 설명해주는 것도 , 그저 탄복하게 만들죠.
저희의 공통과제와 토론을 차분하게 정리해주셔서 연암의 사유가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연암을 보내기 아쉬운 건 저도 마찬가지..... 후기 감사히 보았어요^^
연암 덕분에 고양이 눈 속에서 하늘의 이치를 관찰하게 되네요. ^^. 고양이 눈동자는 빛의 양 뿐만 아니라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도 변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