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3-2주차(9/18) 공지
글쓰기와 역사 마지막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줌을 열었는데, 3분할 된 화면이 꽉 찼습니다.새로 합류하신 은이샘, 재영샘과, 시즌2 외유를 마치고 막 귀환한 호진샘까지 든든한 멤버들과 함께 돈키호테를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길동무가 많아 좋습니다. 뿌듯~~ 제주도까지 쭉 함께 하시는 걸로 ㅎ. 이번 주 읽은 책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완독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소설, <돈키호테>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역사를 중세 말이라는 유럽의 흐름 안에서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읽기가 만만하지 않았어요. <돈키호테>의 상식 밖 행동이 납득되지 않기도 하고, 읽다 보면 옳다는 건지 비판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요. 또 봉건시대의 끝자락 르네상스가 저무는 시점의 변화무쌍한 유럽도 한번에 꿰기가 쉽지는 않았죠. 그러나 사이사이에 껴 있는 보석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는 묘미가 있네요. 한 땀 한 땀 돈키호테를 만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상황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페인의 기독교와 자본주의
돈키호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특수성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중세가 무너져 가던 시점, 스페인은 종교 재판소로 대변되는 강경한 기독교(카톨릭) 중심주의와 이로 인한 경제적 낙후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요소는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돈키호테 1권이 씌여진(1605년)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스페인은 서유럽의 자본주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등이 반 카톨릭 무드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강경하게 카톨릭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이냐 프로테스탄티즘이냐는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자본주의’의 태동과 관련해서요. 자본주의를 생산양식과 생산 관계로 파악하는 맑스의 관점이 일반적이지만, 샘께선 막스 베버가 분석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로 자본주의를 설명해 주셨어요. 자본주의는 고유 정신을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를 ‘축적’ 하는데 양심의 가책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프로테스탄티즘은 축적이 죄악시되지 않습니다. 이윤축적이 善이자 곧 신의 소명을 받들어 성실히 일하는 것이 되어 이윤을 축적하는 만큼 신을 따르는 것을 되죠. 이 논리가 자본주의를 단단히 수용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반종교개혁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이윤과 축적 행위는 당연히 정당한 것이 아니었죠. 이 종교적 입장이 스페인을 유럽 안에서도 반 유럽적인 독특한 위상을 가지게 만들었죠. 이러한 종교적 입장의 연원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이베리아 반도에는 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들어왔고 백년 뒤 유대인이 들어와 정착을 합니다. 이후 8세기 북아프리카와 동아시아 이슬람인들과 내통하던 귀족들에 의해 이슬람인들이 대거 이주해 옵니다. 스페인은 세 종교가 섞여 아주 복잡한 상황에 처하고 분쟁이 끊이질 않았죠. 이주해 온 아랍인과 기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대결하면서 종교전쟁의 축소판이 되어버렸고, 이게 약 800년 동안 지속됩니다.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어인’으로 통칭되던 이슬람인들이 스페인에 들어온 시점부터 이슬람을 몰아내고 국토 회복 운동이 끝나는 시점까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무렵 세워진 종교재판소 (1478-1822)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종교 재판에 회부된 사람만 35만명, 그 중 3-4만명이 화형에 처해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엄혹한 세월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토록 엄혹하게 잣대를 대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순수한 피’에 대한 환상이 때문입니다. 이 환상은 반이슬람뿐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돼, 유대인에 대한 편견도 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유대인이란 편견으로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계산을 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지 않으려고 했다는 거죠. 그 결과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은 줄고, 문맹률은 서유럽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순수한 피’를 판단하는 기준이 ‘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전 이 부분이 가장 놀라웠는데요, 문자나 근거에 대한 환상이 저에게도 있는 것 같은데요, 소문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이죠,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덧붙고 왜곡되기도 쉬운 것인데, 이 분위기 안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중심을 잡고 살기가 너무나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썼다는 거죠.
<돈키호테> 사용 설명서
세르반테스
(1546-1616)의 집안도 할아버지가 유대인에서 개종한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의사 변호사 세금 징수원 같은 전문직종에 종사했다고 해요. 그런데 종교 재판기에는 이런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유대인이라는 의심을 받는 일이라, 의심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오히려 종교재판소의 직원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졌다고 하네요. 세르반테스는 세금 징수원이었죠. 예상대로 그는 억울한 옥살이를 여러 번 했습니다. 은행이 망했는데, 그 책임이 세금 징수원이었던 세르반테스에게 물어져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기도 했는데요. 돈키호테는 세비야의 감옥에서 구상된 소설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반테스는 ‘글’을 썼습니다. <돈키호테>는 최대한 검열을 피하는 방식으로 씌여졌고, 정공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글이 조롱과 패러디라고 샘은 강조하셨어요. 해서 그의 글을 감정이입 해서 그대로 읽으면 바로 오독하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비꼬고 있는지 촉을 바짝 세우고 읽으라고 당부하셨구요. 중세 시대가 무너져 가는 르네상스 끝자락에서 앞으로 어떤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는 막연함 속에서 세르반테스는 되도록 자신을 감추고자 합니다.
재판을 피하려다 보니 글의 많은 부분을 독자의 판단에 맡기게 됩니다. 결론을 덜 맺기도 하고, 민감한 부분은 독자의 생각을 묻기도 하면서 저자와 독자의 구분이 불분명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 독자, 번역자, 복수저자까지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니 “글은 누가 쓰는가”라는 질문이 들게 만듭니다. 이 질문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담론화되면서 <돈키호테>는 뜻하지 않게 현대 소설의 기원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현실인 듯 망상인 듯 모든 것을 독자의 해석에 맡기는 읽기의 해체가 <돈키호테>에는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15세기에 이미 끝난 기사소설을 가지고 옴으로써 기사 소설을 패러디 합니다. 동시에 열심히 살지만 시대와 하나도 맞지 않는 모습을 통해 한 시대가 파탄 나는 것을 그리고 있죠. 중세 인간처럼 살고자 그대로 따라 하는데, 모두 허구인 시대, 이야기가 패스츄리 겹처럼 층층히 쌓여 있습니다. 토론에서도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망상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것 같은데요, 계속 미끄러지는 이야기 속에서 실재를 포착해내기가 쉽지 않아서였던 것 같네요. 남은 시간 이 이야기를 한겹한겹 베껴 가 보도록 하죠.
*** 2주차 (9/18)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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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돈키호테1》 : 21~34장 (290p~554p)
《근대 유럽의 형성》 : 4~5장 (115p~188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1주차 후기 : 경희샘
선선해진 날씨에 산책도 하시구요, 현주샘 쾌차해서 월요일에 건강하게 만나요
16세기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유대인 할아버지를 둔 세금징수원의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종교재판과 관직매매, 사적비호가 공공연하던 부정의의 시대에 자신이 유대교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종교재판소에서 일해야하는 잔인하고 비정한 시대에 세르반테스에게 글을 쓰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롱과 패러디'로 자기말을 구사했던 저자를 정옥샘 글을 읽으며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