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 ; 『돈키호테』,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6주에 걸쳐 읽게 됐다. 이 돈키호테를 드디어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을 피력하는 학인이 많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창을 겨누다가 내동댕이쳐진 돈키호테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다. 책의 명성때문인지 이미 알고있다는 감각과 기대와 설렘이 뒤섞인 읽기였다. 돈키호테가 쓰인 시대를 이해하고자 까치에서 출판한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 (이영림, 주경철, 최갑수 著)를 함께 읽고 있다. 이 책에 ‘이러한 설명은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킬 우려가 있다.(103쪽) 그렇다고 해서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변화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112쪽)’와 같은 문장이 있는데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 내용을 환원하거나 드디어 읽게되었다는 기쁨에 경도되어 자신의 느낌을 과장하여 해석하지 않는 것.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 이 책을 읽는 것도 즐거웠다.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허술한데 심지어 단정적이었다는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자들이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최대의 가문 메디치가의 역할을 ‘후원’이 아닌 ‘주문자’로 규정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메디치가를 비롯해 권력과 부를 모두 거머쥔 자들은 과시욕과 경쟁, 자신의 가진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편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그래서 선호된 것들이 화려한 궁정과 초상화들이었으며, 자신이의 목적을 이루고자 세세하게 요구하며 작가들의 활동에 돈을 댄 것이다. 은옥샘은 인간의 선한 의지와 순수한 예술의 애호로만 해석했던 메디치가의 예술 후원의 이면 혹은 실상을 본 것 같아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고 꼽아주었다. 나도 메디치가의 태도를 ‘후원’이 아닌 ‘주문’으로 변화시키는 저자들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돈키호테 첫 시간,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뭐랄까?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각자가 가져온 이야기거리도, 한 주제에 대해 나눈 생각이나 느낌도 중구난방 내달렸달까. 이런 우리의 모습은 다양한 부분과 층위로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는 돈키호테라는 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군자(君子)를 비롯해 자유, 현실과 망상, 두려움, 이상(理想)과 고난과 고행, 실천과 행위, 책에 대한 저자의 태도, 검열과 분서 등 다양한 낱말들이 쏟아졌다.
이 책 『돈키호테 1』의 서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도 독특하다. ‘규정 가격, 정정에 대한 증명, 특허장, 베하르 공작에게, 서문, 돈키호테 데 라만차에 부치는 시’ 등으로 구성된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그 당시에 책을 낸다는 것이 국가의 검열에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얼마나 권위에 복속되어 있는지 짐작케 한다. ‘베하르 공작에게’는 그 당시 비호를 위해 누군가에게 헌사의 뜻을 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부분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작 공작 자신은 헌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책 앞에 붙이는 서문이니 소네트니 경구니 찬사 같은 목록이나 수두룩한 장식’성의 글을 덧붙였다. 세르반테스는 서문에서 이런 세태를 은근히 꼬집고 있다. 그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에 부치는 시’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헌사를 본인이 직접 써 넣은 글들이다. 이 부분에서 세르반테스 본인이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에 대해 갖는 애정때문에 책을 더 재밌게 읽었다는 학인도 있었다. 학인들은 저자인 세르반테스에게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세르반테스와 묘사된 돈키호테의 모습이 닮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이야기 중에 저자를 수시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그 저자라는 것이 어느 때는 책을 저술한 이, 혹은 번역자 때론 계부 등 다양한 위치에 놓인다. 여러 가상의 저자를 등장해서 특이했는데, 이것은 검열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읽기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돈키호테를 읽기 위해서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해하려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 책들은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에서도 언급된다. 중세와 근대를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지평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니체가 언급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야곱 부르크하르트, 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부터 다른 규문 수업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보카치오 『데카메론』, 그 외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마키아벨리 『군주론』,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마르크 블로크 『봉건 사회』까지. 이 중 한 권이라도 이번 돈키호테 읽기가 다 마쳐지기 전에 읽어봐야지 다짐을 한다.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우리가 나눈 이야기로 돌아오자. 돈키호테라는 인물과 기사소설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입장이 무엇인지 모호한 점이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검열과 분서와 관련한 장. 돈키호테의 망상의 원인을 기사소설에 두고 그 책을 검열하고 어떤 것을 불태울지 결정하는 신부와 이발사가 등장한다. 검열을 하는 신부는 그 책들의 내용을 속속들이 꿰고 있으며 심지어 이발사도 어떤 소설들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들 중 분서를 결정하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신부는 그 책들에 이미 탐닉한 듯 하다. 그 대목을 읽는 독자에겐 신부와 이발사의 대화를 통해 여러 기사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읽어보라고 저자가 권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은이샘은 세르반테스는 “이 세상과 속인들 사이에서 차고 넘치며 권위를 갖는 기사 소설을 무너뜨리고자”(35쪽) 돈키호테를 탄생시킨 것은 아닌지 추측하기도 했다.
재영샘과 은옥샘은 자신을 사랑하다 죽은 청년의 장례식에 참여한 여목동 마르셀라의 모습에서 현대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청년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죽었다는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 그의 죽음은 자신의 거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사랑고백을 한 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로 귀결되지 않음을 밝힌다. 또한 그녀는 상속받을 수 있는 부,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그리고 사랑을 움켜쥐는 대신 우정과 고독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그녀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일단 그녀의 당당한 의견피력을 우리 시대의 여성의 모습으로 보았는데 사랑이나 아름다움, 소유와 관계하는 방식도 그런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탁오와 함께 읽는 논어공부에 푹 빠져있는 호진샘은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돈키호테의 모습에서 논어 학이편 14장, 먹음에 배부름을,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군자를 대비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행을 일삼는 기사도 수칙을 가뿐히 뛰어넘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오히려 너무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했다고. (기사도 수칙 자체가 자의적이고 얼토당토하지 않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스스로 철칙처럼 여기고 있으니.) 돈키호테를 위해 말린 과일을, 산초 자신을 위해 새고기 같은 것을 여행용 자루에 넣어두겠다고 하자 돈키호테는 ‘그렇다고 산초……그러한 과일 이외에 다른 것을 먹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네’ 하고 말한다. 호진샘 말대로 쉽게 무너지는 이런 모습이 돈키호테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이 외에도 우리 삶은 본래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알 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 꿈이나 환상, 이상에서 헤맨다는 감각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행위 혹은 실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등 이야기가 이어졌다. 채운샘은 돈키호테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을 삼가라고 하셨다. 이 책은 ‘조롱과 패러디’라는 어긋남의 언어이기에. 감정이입이나 동일시를 하지 않는 읽기라는 새롭게 알아가야 할 것이 생겨났다. 익혀가야 할 것이 많다!
경희샘이 다짐한 책을 읽은 후 내용을 공유해 주시면 좋겠네요. . ㅋㅋ 이렇게 압박을 하는 것이 함께하는 학인의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후기를 쓰시고 과제까지 하시고 있을 경희샘을 생각하니 슬픈 몰골의 경희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ㅋㅋ. 6주 후 제가 혹시 읽은 책 내용을 공유해 달라고 조른다면 "그렇다고 호진샘... 꼭 다짐을 다 지켜야 하는건 아니네" 라는 인간적인 말을 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