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역사 시즌3-3주차(9/25) 공지
<돈키호테> 읽기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역사서와 소설까지 일단 읽어야 할 절대량이 너무 많아 기가 눌리지만, 이에 굴할 글역팀이 아니기에 매우 즐겁게 읽고‘는’ 있습니다. ㅎ <돈키호테>는 하나의 스토리에도 관점에 따라 다층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은 시간을 두고 이리저리 굴려 가며 읽어야 훨씬 맛이 살 거 같긴 합니다...만, 또 토론을 하다보면 서로의 생각들이 오가고 섞이니까요. 오늘 시작 전 토크에서는 서로 밤샜다. 몇 시간 잤다는 이야기가 화제였던 걸로 보면 샘들도 힘내고 계신 듯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이어서 그런지 토론 주제도 다양하게 나오고 돈키호테에 푹 빠져 과제 분량 조절에 실패한 현주샘도 상큼하게 귀환해 활발발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토론이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재미있었던 얘깃거리들이 있어 나눠볼까 합니다.
법과 형벌 : 22장에는 죄수들이 노 젓는 형벌에 처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지만 고문에 의한 자백, 소문에 의해 억울하게 오인된 자, 뇌물로 매수할 돈이 없어 죄가 부과된 자 등 억울한 옥살이가 많았다는 점이죠. 문제는 형벌과 형량이 과도하게 부과되었다는 거예요. 태형에 처해져 매를 맞고 노 젓는 죄수형이 부가 됩니다. 토론 포인트는 죄수를 급속히 늘리는 시대적 배경이었어요. 15~16세기의 대항해 시대는 끝났지만, 스페인의 무역과 경제 활동에 중요한 것이 배였죠. 그래서 죄인은 많이, 형량은 과도하게 부과함으로써 고급을 채운 것이죠. 이는 절대적으로 ‘인과’가 뒤바뀐 것입니다. 죄가 있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죄수를 공급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까요. 미국의 면화 산업이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하게 했던 비슷한 역사들도 상기해 보았습니다.
모방 : 세르반테스는 “화가는 자기 예술로 유명해지고 싶으면 자기가 아는 가장 뛰어난 화가들의 원화를 모방”(p353)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 모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아이는 엄마를 모방하고 자라면서 또 누군가를 모방하죠.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해서 그 자신이 조금씩 변화되었다면, 그건 모방인가? 나인가? 이 질문은 동일하게 ‘가상과 현실’이라는 돈키호테의 중요한 테마와도 연결됩니다. 우리가 가상의 세계를 현실로 수용하면 그걸 망상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도 늘 꿈꾸고 살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도 가상 아닌가? 특히 돈키호테는 책에서 본 그대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가상인데 돈키호테에게는 현실인 세계이죠. 이건 가상인가? 실재인가? 계속 질문에 질문이 더해지고 있는데요, 가상과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구성되는 것이 있다는 정도의 토론이 되었는데, 이 질문은 좀 더 쥐고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랑 : <돈키호테>에는 의외로 사랑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지난 주 평등한 사랑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마르셀라가 있었죠. 이번 주 29장에는 카르데니아와 루스신다, 도로테아와 돈 페르난도라는 현대 로맨스물의 주인공 같은 4명이 등장합니다. 돈 페르난도가 루스신다를 좋아하여 몰래 결혼까지 성사시키면서 나머지 두 사람이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루스신다는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혼에 소극적이나마 반대 의사를 표합니다. 토론은 여성에게 강조되는 정조 관념과 순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누었는데요, 당시 여자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죽은 내용의 <라 셀레스티나>라는 사랑 소설이 매우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적 윤리가 강요되던 시대에 이 소설은 여성 혐오를 가중시켰다고 해요.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소설과 다르게 마르셀라를 통해 남녀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랑이 중요함을 말하게 하고, 남성의 사랑이 싫으면 거절할 수 있는 여성상을 루스신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지요. 그런데 검열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야기를 겹겹이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정조나 순수주의로 보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연옥과 종교개혁
지금까지 교회는 하나님이 독특한 방식으로 이 땅에 존재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독특한 모양으로 교회를 짓고 세상의 절대 중심이 교회임을 알리고, 그 권위로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위상으로 천년을 지나왔죠. 그러던 교회의 위상에 균열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면죄부를 남발해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면죄부 판매 거부 설교를 한 후스를 화형에 처한다는 결의를 ‘곤스탄츠 공의회’에서 하게 되면서 민심이 흔들렸죠. 거기다 전염병까지 덮치며 사회는 흉훙해지고 부패는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영주의 권위도 교회의 권위도 옛날의 그것이 아니죠.
이 때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교회의 부패에 대해 비판하는 <59개조 논제>를 대자보로 써 붙입니다.(1517년) 그는 단지 비판하고자 했던 글이었지요.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샘은 이것이 루터 개인의 성과라거나 종교의 각성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류라고 하셨죠. 루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큼 부패에 대한 인식이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이죠. 종교의 문제가 삶의 전반의 문제와 함께 가는 시기였기에 사람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의 주장은 인쇄되어 도시로 퍼져 나갔죠. 이를 접한 도시 엘리트 층의 적극적 호응이 함께 있었고, 더군다나 하위 성직자나 주임 사제들까지 상당수 동참하면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이죠.
연옥 개념은 기독교 내부에서는 7,8세기정도부터 제안되던 개념이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교리로 제정되지 못하다가, 중세 면죄부 판매가 심화될 즈음 교리로 제정되었죠. 연옥은 면죄부 판매를 위한 도구로, 적절히 이용되었죠, 최후의 심판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대사(大赦)의 의미로 즉 조건부로 뭔가를 바쳐야 하였던 것이죠. 연옥이 탄생하면서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거액의 헌금을 거둘 수 있었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구원’을 결정해 주는 결정권자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도 교회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인 고통의 세계인 연옥에서, 신도가 헌금을 통에 넣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거짓 교리로 속일 수 있었던 것이죠.
종교개혁은 ‘구원’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해 “진리가 구원케 하리라” 라고 설파하며 진리와 마음의 문제로 가져오지요. 구원은 각자의 믿음에 있는 것이기에 작은 예배당을 지어 자기 믿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신앙의 형태도 변모하였습니다. 성경의 번역 작업과 보급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죠.
약 20년 뒤(1536년) 프랑스의 칼뱅이 <기독교 강요>로 인간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신학을 집대성하게 됩니다. 그는 심한 종교적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은 엄격한 청교도 정신으로 계승되어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전쟁을 일으켜 앙시앙레짐에 반대하고, 17세기에는 아메리카에 정착하게 됩니다. 격동의 유럽사를 지나고 있는데요, 늘 듣는 얘기지만 혼란의 시대에는 예술과 사상이 꽃핀다고 하죠. 생각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으면서 생겨나는 광기와 분열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죠. 헌데, 우리의 고뇌와 분열은 왜 예술이나 그 비스무레한 어떤 것에도 닿지 않는 걸까요? 고뇌와 분열을 우리 삶의 자양분으로 만드는 길을 생각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보도록 하죠.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구요, 이번 후기를 에이스 현주샘이 쓸거라서 말이죠. ㅎ
*** 3주차 (9/26) 공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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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돈키호테1》 : 35장~1권 끝 (555p~끝)
《근대 유럽의 형성》 : 6장~7장 (189p~260p)
* 과제
- 문학 : 나누고 싶은 문장을 뽑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숙제방에 올립니다.
- 역사 : 연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립니다.
* 2주차 후기 : 현주샘
매일매일 조금씩 읽고 월요일에 푹 자고 만나요, 건강하게~~!!